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21:43:08

페렌츠 푸스카스

푸슈카시 페렌츠에서 넘어옴
페렌츠 푸스카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7대
파일: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53대
클럽
}}} ||
페렌츠 푸스카스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라리가 심볼(2016~2023).svg
1959-60 · 1960-61 · 1962-63 · 1963-64
베스트팀
파일:World Soccer.png
1960 · 1961 · 1962 · 1963

1960 Ballond'or
수상
루이스 수아레스
2위
페렌츠 푸스카스
3위
우베 젤러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000,#e5e5e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000000,#e5e5e5
바실리스
하치파나기스

파일:그리스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요한
크루이프

파일: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루네
브라체트

파일:노르웨이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미카엘
라우드루프

파일: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프리츠
발터

파일: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알렉산드르스
스타르코우스

파일:1200px-Latvian_Football_Federation_logo.svg.png
레프
야신

파일:러시아 축구 연합 로고.svg
게오르게
하지

파일:Federatia_Romana_de_Fotbal_logo.png
루이
필로

파일:Luxembourg FLF.png
아르미나스
나르베코바스

파일:리투아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라이너
하슬러

파일:리히텐슈타인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다르코
판체프

파일:북마케도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A]
파벨
체바누

파일:몰도바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svg
카르멜
부수틸

파일:몰타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파울
판힘스트

파일: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세르게이
알레이니코프

파일:벨라루스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사페트
수시치

파일: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조지
베스트

파일: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파일: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마시모
보니니

파일:San Marino FSGC 2021.png
드라간
자이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1px-SiCGFSLogo.png
[A]
스테판
샤퓌자

파일: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헨리크
라르손

파일: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데니스

파일: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파일: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svg

포플루하르

파일:슬로바키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브란코
오블라크

파일:슬로베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호렌
오가네샨

파일:아르메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아스게이르
시구르빈손

파일:Iceland KSÍ.png
조니
자일스

파일: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구형).svg
아나톨리
바니솁스키

파일:아제르바이잔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콜도
알바레즈

파일:안도라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파나요트
파노

파일:알바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마트

파일:에스토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헤르베르트
프로하스카

파일: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올레흐
블로힌

파일: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찰스

파일: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모르데하이
슈피글레르

파일:이스라엘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디노
조프

파일: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바비
무어

파일: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무르타즈
후르칠라바

파일:조지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요제프
마소푸스트

파일:체코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svg
세르게이
크보치킨

파일:카자흐스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다보르
슈케르

파일: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소티리스
카이아파스

파일:Cyprus CFA.png
하칸
쉬퀴르

파일: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아브라함
뢰킨

파일:페로 제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에우제비우
파일: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브워지미에시
루반스키

파일:폴란드 국장.svg
쥐스트
퐁텐

파일: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원정).svg
야리
리트마넨

파일:핀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푸슈카시
페렌츠

파일: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A] 2003년 수상 당시 국명 [A]

}}}}}}}}}}}}}}} ||

}}} ||
페렌츠 푸스카스의 기타 정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부다페스트 혼베드 FC 영구결번
No. 10
}}} ||
헝가리의 前 축구인
파일:푸스카스.jpg
이름 푸슈카시 페렌츠
Puskás Ferenc[1]
출생명 푸르첼드 페렌츠
Purczeld Ferenc
출생 1927년 4월 1일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 시
사망 2006년 11월 17일 (향년 79세)
헝가리 부다페스트 시
최종 국적
[[헝가리|]][[틀:국기|]][[틀:국기|]]

[[스페인|]][[틀:국기|]][[틀:국기|]]
신체 172cm / 체중 75kg
주발 왼발
직업 축구 선수 (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키슈페슈트 FC (1940~1943 / 유스)
부더페슈티 혼베드 SE[2] (1943~1956)
레알 마드리드 CF (1958~1966)
감독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게일스 (1967)
밴쿠버 화이트캡스 FC (1968)
데포르티보 알라베스 (1968~1969)
파나티나이코스 FC (1970~1974)
레알 무르시아 CF (1975)
사우디 대표팀 (1975~1976)
콜로-콜로 (1977)
AEK 아테네 FC (1978~1979)
알 마스리 SC (1979~1982)
클루브 솔 데 아메리카 (1985~1986)
클루브 세로 포르테뇨 (1986~1989)
사우스 멜버른 FC (1989~1992)
헝가리 대표팀 (1993)
국가대표 85경기 84골[3] ( 헝가리 / 1945~1956)
4경기 ( 스페인 / 1961~1962)
통산 득점 746골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선수 경력
2.2.1. 클럽 경력2.2.2. 국가대표 경력2.2.3. 플레이 스타일
2.3. 지도자 경력2.4. 사망
3. 기록
3.1. 선수
3.1.1. 대회 기록3.1.2. 개인 수상
3.2. 감독
3.2.1. 대회 기록
4. 평가5. FIFA 푸스카스상6. 푸스카스에 대한 어록7. 여담

[clearfix]

1. 개요

헝가리의 전 축구인.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였으며, 1993년에는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까지 맡았다.

1950년대 초중반 전 세계에 위세를 떨쳤던 전설의 팀 매직 마자르를 이끌었던 주장이며 헝가리 대표팀에서 85경기를 뛰며 기록한 84골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대표팀의 최다 득점이다. 2003년 UEFA 주빌리 어워드에서는 헝가리 역대 최고의 선수로 뽑힌만큼 명실상부 헝가리를 넘어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전드 중 한명으로 불린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혼베드에서 자신의 최전성기를 보냈으며, 레알 마드리드에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전무후무한 유러피언컵 5연패를 이끈 선수이자 축구 역사상 최다 득점 6위 기록 보유자이다.[4] 그리고 축구 역사상 최다 어시스트 2위 기록 보유자이다.[5][6]

2. 생애

2.1. 유년기

페렌츠 푸스카스의 출생명은 '푸르첼드 페렌츠(Purczeld Ferenc)'로 1927년 4월 1일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의 교외인 키슈페스트의 독일계 헝가리인(도나우 슈바벤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비로 머르기트(Bíró Margit)는 재봉사였으며, 동명이인인 아버지 푸르첼드 페렌츠는 키슈페슈티 AC 코치였다. 페렌츠 푸스카스는 아버지가 코치로 있던 키슈페슈티 AC의 유소년 팀으로 들어가 축구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아버지를 따라서 1937년 자신의 성씨를 푸스카스로 알려진 푸슈카시(Puskás)로 바꾸었으며 12살이 되던 때 공식적으로 팀과 프로 계약을 하기 전 코바치 미클로시(Kovács Miklós)라는 가명을 사용해 최소 연령 규칙을 우회하게 된다.

푸스카스는 1943년 11월 너지바러디 AC와의 경기에서 키슈페스트 소속으로 자신의 첫 프로 경기를 치루었는데 이 경기에서 그는 외치(Öcsi, '남동생')와 슈바브(Sváb, ' 슈바벤')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2.2. 선수 경력

2.2.1. 클럽 경력

2.2.1.1. 부더페슈티 혼베드 SE
키슈페슈티 AC는 1949년에 헝가리 국방부에게 인수되어 헝가리 육군 산하팀이 되었으며 팀 이름은 부더페슈티 혼베드 SE로 변경된다. 따라서 부더페슈티 혼베드 SE 소속 선수들은 군대 계급이 주어졌고, 푸스카스는 계급이 소령이었다. 이로인해 푸스카스는 '질주하는 소령'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다.

부더페슈티 혼베드는 군대 클럽으로서 징집을 통해 졸탄 치보르, 산도르 코츠시스와 같은 헝가리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하였는데, 푸스카스를 비롯한 졸탄 치보르, 산도르 코츠시스 등 당시 무적을 자랑하던 매직 마자르라 불린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의 핵심선수들을 보유한 부다페스트 혼베드는 헝가리 리그에서 5번이나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푸스카스는 헝가리 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으며, 1947-48시즌 50골, 1949-50시즌 31골, 1950년 25골 및 1953년 27골을 기록하면서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게 된다. 1948년에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한 선수이기 까지하다.

부다페스트 혼베드는 1956년 유로피언 컵[7]에 진출하게 되는데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1라운드 경기. 원정에서 치룬 1차전은 2:3으로 패배하였으며, 2차전 홈경기가 진행되기 전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 소련군에 의해 헝가리 시민들이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선수들은 공산주의에 물 든 헝가리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하고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헤이젤 경기장에서 아틀레틱과의 경기를 치루게 된다. 2차전은 3:3 무승부를 기록하며 이 과정 속에서 푸스카스는 득점을 기록하였지만 1, 2차전 합계 스코어 6:5로 부다페스트 혼베드는 탈락하게 되었고 선수들은 당시 헝가리 상황에 혼란스러워했다.

선수들은 부다페스트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불러모았고, FIFA와 헝가리 축구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브라질을 순회하는 모금 투어를 조직한다. 투어를 마치고 유럽에 돌아온 선수들은 뿔뿔히 헤어지게 되었는데, 요제프 보지크을 포함한 일부 선수들은 헝가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푸스카스, 치보르, 코츠시스를 포함한 일부는 서유럽에서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한다. 그리고 푸스카스는 1981년까지 헝가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혼베드에서 13시즌 동안 349경기(역대 최다 출전 2위) 358골(역대 최다 득점 1위)을 기록했고 득점왕 4회(1947-48, 1949-50, 1950, 1953)를 기록하며 당시 유럽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던 헝가리에서도 최강의 구단이었던 혼베드의 에이스임을 보여줬다. 그리고 2000년 7월에 혼베드에서 푸스카스가 쓰던 등번호 10번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2.2.1.2. 레알 마드리드 CF
당시 AC 밀란 유벤투스 모두 푸스카스 영입을 원하였지만, 푸스카스는 원소속팀인 부다페스트 콘베드 복귀 거부로 인해 UEFA로부터 2년 출전 정지를 받게 되어 2년간 유럽에서 뛰지 못하였다.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후 이탈리아로 이주한 푸스카스는 출전 정지가 만료된 이후, 이탈리아에서 뛰고자 했지만 당시 이탈리아 감독들은 그의 나이와 체중에 대해 우려를 보였으며 결국 자신을 영입할 세리에 A 팀을 찾지 못하게 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58년 뮌헨 비행기 참사로 붕괴된 선수단을 보강하기 위해 푸스카스 영입을 고려하였지만, 외국인에 대한 FA 규정 그리고 당시 푸스카스는 영어를 못하였기에 푸스카스 영입을 원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임시 감독 지미 머피 코치는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였다.
파일:푸스카스 스페인 이주한 이후 라이센스 .jpg
스페인 명명 관습에 따라 두 번째 성으로 어머니의 결혼 전 이름 Biró가 표시된 푸스카스의 선수 라이센스
그러나 몇 달 후, 레알 마드리드는 푸스카스에게 러브콜을 보내왔으며 푸스카스는 스페인으로 이주하여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게 된다.
파일:푸스카스 레알 마드리드.jpg
그렇게 31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자신의 두 번째 축구 인생을 시작하였다.
파일: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jpg
첫 번째 라리가 시즌, 푸스카스는 자신의 레알 마드리드 소속 두 번째 경기인 1958년 9월 21일 스포르팅 히혼과의 경기에서 기록한 첫 번째 해트트릭을 포함하여 총 네 번의 해트트릭을 선보였다. 무려 1959년 1월 4일 UD 라스 팔마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는 푸스카스와 디 스테파노 두 선수 모두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10:1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시즌은 레알 마드리드가 유러피언컵 우승을 한 시즌이기도 하다. 푸스카스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준결승전 득점을 기록하면서 결승전 진출에 공언하였지만 아쉽게도 부상으로 인해 결승전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푸스카스의 첫 번째 유러피언컵 우승 트로피.
파일:프랑크푸르트와의 결승전 PK를 성공시키는 푸스카스.jpg
다음 시즌에도 유러피언컵에서 푸스카스의 활약상은 엄청났다. 죄네스 에슈 그리고 FC 바르셀로나와의 준결승전 경기 모두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결승으로 이끌었으며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결승전은 푸스카스가 4골, 디 스테파노가 3골을 기록하면서 7:3 대승을 거두게 된다. 푸스카스는 바로 유로피언컵 2연패를 달성한 것이다.

1960-61시즌 푸스카스는 엘체 CF와의 경기에서 4골을 넣었고 그다음 시즌에는 엘체를 상대로 5골을 기록한다. 푸스카스는 1963년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2번의 해트트릭을 선보였는데 하나는 베르나베우 경기장에서 그리고 또 하나는 캄 노우에서 기록하였다.
파일:벤피카와의 결승전 선제골을 터트린 푸스카스.jpg
1961-62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도 거머쥐는데, 푸스카스는 결승전 세비야 FC을 2:1로 승리한 경기에서 멀티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SL 벤피카와의 유로피안 컵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이번에도 우승을 거머쥐나 했지만 벤피카는 저력을 보이며 결국 3:3 동점을 만들었으며 이 시즌 새롭게 등장한 신성 에우제비우가 2분만에 2골을 기록하면서 승부의 균형이 급격하게 무너졌고, 레알 마드리드는 5:3으로 패배. 아쉽게 준우승을 하였다.

1965-66시즌 푸스카스는 페예노르트와의 2경기에서 5골을 기록하면서 유로피언컵 결승전에 다시 한번 더 오르게 된다. 하지만 팀은 파르티잔 베오그라드와의 결승전을 승리하였지만 아쉽게도 푸스카스는 이 경기를 뛰지 않았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보낸 8시즌 동안 푸스카스는 라리가 180 경기에서 출전해 156골을 득점했다. 라리가에서의 첫 6시즌 동안에는 모두 20골 이상 득점에 성공[8]하며 피치치[9]를 4번이나 수상하였고 61년부터 65년까지 레알 마드리드가 5년 연속 라리가 우승하는 것에 크게 공언하였다. 또한 유러피언컵에서는 39경기 출전 35골을 기록하였다.
파일:레알 마드리드 푸스카스.jpg
푸스카스는 30이 넘은 늦은 나이에 레알 마드리드에 와 전설을 써내려갔다. 그는 8시즌동안 3번의 유로피언컵 우승, 5번의 리그 우승, 1번의 코파 델레이 우승, 1번의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을 거머쥐었으며 4번의 라리가 득점왕 2번의 유러피언컵 득점왕 등을 거머쥐었다.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262경기 242골.[10]

2.2.2. 국가대표 경력

1945년 A매치에 데뷔한 푸스카스는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6골을 기록하고 룩셈부르크, 알바니아 등 여러 팀들을 상대로 수많은 골을 득점하며 매직 마자르[11]의 에이스를 차지한다. 1952 헬싱키 올림픽 본선에서는 푸스카스가 4골을 득점하여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잉글랜드와의 경기 中
1953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히데그쿠티 난도르, 요세프 보직, 그리고 푸스카스가 득점을 올리며 6:3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푸스카스는 환상적인 프리킥으로 득점을 올렸으며, 당시 신기술이었던 드래그 백으로 당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이자 잉글랜드의 주장이었던 빌리 라이트를 농락하면서 축구 종주국이자 세계 최강이라고 자만하던 잉글랜드를 격파했다.

1953년 중부 유럽컵에서도 우승했다.

이후 1954년 스위스 월드컵[12] 본선에 출전한 푸스카스는 조별리그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멀티골을 넣으며 9:0 대승을 이끌었고, 서독 전에서도 1골을 넣으며 8:3 대승을 이끌었지만,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8강전과 4강전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헝가리는 여전히 강했고, 브라질 우루과이를 잇달아 꺾고 결승에 진출한다.
서독과의 결승전 中
대망의 결승전에서 서독과 다시 만난 헝가리는 푸스카스가 6분 만에 선제골을 넣었고, 전반 8분 졸탄 치보르가 골을 넣으며 2:0으로 앞선다. 이후 전반 10분 막스 모어로크에게 실점을 허용하고, 전반 18분 헬무트 란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면서 2:2 동점으로 전반이 종료된다. 후반전 헝가리는 다시 리드를 잡기 위해 파상공세를 퍼부었으나 서독의 수비에 막히며 번번히 무산되었고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했던 투렉은 속죄라도 하듯이 환상적인 선방을 연달아 보여주며 헝가리의 추가 득점을 막아냈다. 그리고 경기 종료 6분 전 헬무트 란이 기가 막힌 중거리 슛으로 득점에 성공했다. 헝가리는 동점을 만들기 위해 파상공세를 일으켰고, 경기 종료 2분을 남겨놓고 경기를 다시 동점으로 만드는 듯 보였으나 오프사이드가 선언됐다. 그렇게 경기는 서독의 우승으로 끝나며 헝가리의 무패 기록을 종식시켰고 베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축구 역사상 최대의 이변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여담으로 베른의 기적의 실상은 사실 서독 선수들이 약물을 이용하여 매직 마자르의 무패행진을 종료시킨 것이었고, 헝가리 선수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서독 선수들의 눈이 풀려 있었다고 했는데 하프타임에 서독 대표팀이 암페타민을 먹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13][14]

이후 헝가리는 4년 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을 준비했으나,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고 소련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결국 푸스카스는 스페인으로 망명하였고, 이후 매직 마자르는 붕괴되었다. 이후 푸스카스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뛰면서 1962년 칠레 월드컵 본선에 출전했다. 스페인은 그러나 디스테파노가 부상당해 출전을 못하면서 대회 시작 전부터 뭔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1승 1패 상황에서 마지막 경기는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이었다.

전반전 아델라르도의 선제골을 푸스카스가 어시스트하며 스페인이 1-0으로 앞서가기 시작했고 스페인의 파상공세에 브라질은 정신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후반전 헨토의 노골 오심이 난 이후 풀이 죽은 듯 스페인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아마리우두에게 2골을 내주며 2대 1 역전패. 스페인은 1승 2패로 1라운드에서 광탈하였고[15] 푸스카스는 스페인 국가대표팀으로 단 4경기만 뛰고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2.2.3. 플레이 스타일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강력한 왼발 슛이다. 슛도 패스도 심지어 개인기까지 지독하게 왼발만을 고집했기에 별명이 악마의 왼발. 더욱 무서운 것은 85경기 84골을 29세 이전에 이룬 것이라는 것.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맞붙었던 홍덕영 골키퍼에 의하면 그의 슈팅은 너무 강력해서 선방하면 갈비뼈가 부러질 것같은 고통을 주었고 골대에 공이 맞으면 한참동안이나 흔들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문제점 역시 지독한 왼발 고집이다. 오른발로 밀어넣어도 될 상황에서 각도까지 바꿔가며 굳이 왼발로 차려는 움직임을 보여줬다. 영상은 찾을 수 없지만 그것 때문에 많은 골을 놓쳤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래도 푸스카스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다.[16]

이런 기록만 보면 최전방 스트라이커일 것같지만 드리블도 수준급이었고 플레이메이킹을 통한 기회 창출 능력 역시 뛰어났다. 매직 마자르의 'MM 포메이션'에서 그는 포메이션 상 코치슈와 스트라이커 위치에 있지만 실제로는 제로톱에 위치한 폴스 나인 역할의 중앙 공격수였던 히데그쿠티 난도르만큼 내려오며 공격을 전개하기도 했었다. 또한 레알에서도 그렇고 팀원들과의 유기적인 공격 연계에도 아주 뛰어났다.

​마치 요한 크루이프 토탈 풋볼을 잘 이행해낸것처럼 그 역시도 '소셜리스트 풋볼' 정립에 있어서 크나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정말 아쉬운것은 헝가리 혁명이다. 축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헝가리 혁명이 없었다면 축구강국은 브라질이 아닌 헝가리였을 수도 있다. 월드컵 결승에는 정말 많은 비극과 기적이 있었지만 푸스카스에게 있어서 최악의 비극은 당연 ' 베른의 비극', 또 스페인으로 귀화했을때는 운없게도 4경기밖에 못뛰고 다시한번 국대 은퇴를 선언했어야 했으니... 2009년에는 올해의 골 상의 이름을 푸스카스상으로 변경해서 발롱도르와 함께 수상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면 축구사의 푸스카스가 남긴 발자취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푸스카스의 드래그 백
또한 푸스카스는 드래그 백의 창시자인데 위 동영상에서 골을 넣기 전의 플레이가 바로 드래그 백이다. 경기 이후 그는 연습한 적이 없고 그냥 자연스럽게 나온 기술이라고 인터뷰했지만 거짓말이고 실제로는 심혈을 기울여서 연습했다고 한다. 동료들은 실전에서 쓰지도 못할 걸 뭐하러 연습하냐고 비웃었다고 한다.

참고로, 저 기술이 나온 경기는 그 유명한 잉글랜드가 헝가리에게 6-3으로 패배를 당한 웸블리 참사이다. 드래그 백에 속아서 굴욕적으로 넘어진 수비수도 잉글랜드 축구의 레전드로 명성이 있던 빌리 라이트였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저 쉬운 드래그 백 기술을 저 때까지 안 썼단 말야?" 하고 놀랄 수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발전된 과학기술로 개발된 축구화는 푸스카스의 전성기 시절 나온 물건이고 그 전에 축구할 때 쓰던 신발은 묵직했기 때문에 저런 기술을 잘못 사용했다간 볼 컨트롤도 제대로 못하고 빼앗기게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고 한다.

2.3. 지도자 경력

1966년에 은퇴한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북미 축구 리그의 산 프란시스코의 감독으로 지도자 활동을 시작했으며 2년후 스페인으로 다시 복귀해 데포르티보 알라베스의 지휘봉을 1년간 잡기도했다. 그후, 1970년 수페르리가 엘라다의 강호 파나티나이코스 FC로 감독직을 옮겼는데 첫 시즌만에 팀을 유러피언컵 결승까지 올려 놓는 대활약을 했다.[17]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면 그리스 클럽 역사상 첫 유럽대항전 결승 진출이며 지금까지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파나티나이코스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현재 수페르리가 엘라다 바이에른 뮌헨으로 평가받는 올림피아코스 FC가 단 한 번도 8강을 가보지 못한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대단한 업적. 그 후 파나티나이코스에 있는동안 두번의 리그 우승도 달성하였으나, 나머지 2년을 무관으로 보내자 결국 경질되며 다시 스페인으로 복귀하였고 그후 칠레의 콜로-콜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대표팀이나 클럽팀을 맡기도 하였다. 호주의 사우스 멜버른 감독 지휘봉도 잡는등[18] 유럽, 남아메리카, 중동, 호주 등등 다양한 국가에서 감독 생활을 이어갔지만 별다른 족적은 남기지 못했다. 이후 헝가리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귀국해서 1993년에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1년간 잡은 후 축구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2.4. 사망

2000년부터 알츠하이머를 앓았고 2006년 11월 17일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국장에서 그의 관은 군례를 위해 푸슈카시 페렌츠 슈터디온에서 회쇠크 광장로 옳겼다. 그리고 2006년 12월 9일에 센트이슈트반 대성당에 묻혔다.

3. 기록

3.1. 선수

3.1.1. 대회 기록

3.1.2. 개인 수상

3.2. 감독

3.2.1. 대회 기록

4. 평가

파일:푸스카스 시가.jpg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함께 역대 최초의 월드 스타라고 할 만한 선수로, 유럽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선수이자[20],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코어러 중 한 명이다.

그는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중반까지 세계를 제패했던 헝가리 부다페스트 혼베드의 수장격으로 활약하였으며, 헝가리 혁명으로 국가대표팀이 공중분해되자 스페인으로 이주, 이에 따라 망명으로 인한 출장 정지 2년을 받고 31세가 된 1958년에야 레알 마드리드 CF 소속으로 뛰는데, 이때부터 디 스테파노와 함께 유러피언컵 5연패를 했다. 요컨대 무려 20년 가까이 세계 축구계의 정점에 있던 선수로, 요즘으로 치면 1999-00~2001-02 시즌 즈음에 데뷔해서 지금까지도 메날두와 동급의 활약을 보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 통한의 준우승에 그친 월드컵에서도 서독의 약물에 억울하게 우승을 빼았겼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 월드컵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선수도 푸스카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까지도 세워진지 200년도 지나지 않은 헝가리라는 나라에서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써, 축구라는 종목을 배제하고 보아도 헝가리를 대표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5. FIFA 푸스카스상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FIFA 푸스카스상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 푸스카스에 대한 어록

파일:PuSkAs.jpg
RIP, 페렌츠 푸스카스. 당신은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기념비에 적힌 글
의심의 여지 없이 특별한 선수였다. 헝가리가 어떻게 1954년 월드컵에서 우승을 놓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알렉스 퍼거슨
왼발 슈팅이 골대에 맞으면 딩~ 하는 소리가 한참동안 들렸다. 내가 저 슛에 맞는다면 갈비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홍덕영
푸스카스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을 헝가리인은 없을 것이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헝가리인으로 남아있다. 그는 항상 전설로 기억될 것이다.
페렝 지울라차니 (2006년 당시 헝가리 총리)
우리 중 푸스카스가 최고였다. 축구에 관한 육감이 있는 것 같았다. 한 가지 상황에 대해 천 가지 해결책이 있다면, 푸스카스는 천한번째 해결책을 찾아냈다.
히데그쿠티 난도르 (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동료)
그는 모든 사람과 함께했고, 침착했고, 매우 유쾌했다. 그는 훌륭한 슈팅을 지녔고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리는 엄청난 폭발력을 지녔었다.
루이스 수아레스 미라몬테스
푸스카스가 자서전에서 컨디션이 좋았다면 우리를 상대로 12골도 넣었을 거라고 했더라. 완패하기는 했지만 그런 헝가리를 상대한 것 자체가 특권이었다.
길 메릭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골키퍼)
푸스카스는 헝가리에서 완벽한 선수 생활을 보내고 레알 마드리드로 가서 이를 한번 더 재현했다. 세계 최고 수준이 아니라 꿈같은 수준이다.
졸라 그로시치 (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동료)
푸스카스는 실로 훌륭한 선수였다. 살이 쪘는데도 왼발 슈팅만큼은 완벽했다. 어느 시대에 뛰었어도 최고로 활약했을 것이다. 축구를 진정으로 즐긴 선수이자 인간이었다.
톰 피니
푸스카스는 30~35미터 거리에서도 상대 골키퍼를 겁에 질리게 했다. 슛이 강력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기까지 했다. 그는 진정한 천재였다.
레몽 코파
푸스카스의 재능은 특별했다. 그는 좋은 친구이자 선수였다. 이 말이 푸스카스를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를 향한 추도사
바비 찰튼, 데니스 로, 푸스카스와 함께 호주에 유소년 교육을 하러갔다. 아이들은 푸스카스가 뚱뚱하고 나이가 들어 그를 우러러보지 않고 놀려댔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코치 중 하나와 크로스바 맞히기 내기를 하자고 했고, 아이들은 당연히 푸스카스를 골랐다. 데니스가 아이들에게 10번 중 몇 번이나 성공할 것 같냐고 묻자 대부분이 5번 이하로 답했다. 그러자 푸스카스는 9번 연속으로 성공한 뒤, 마지막에는 공을 띄워서 어깨와 머리로 트래핑하고 발꿈치로 띄우더니 발리 슈팅으로 강하게 차서 크로스바를 강타했다. 다들 놀라서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 중 한 아이가 그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너에게는 푸스카스 코치님이시다."
조지 베스트

7. 여담

파일:골닷컴 선정 시대별 공격수 5인.jpg

[1] 헝가리에서는 성씨가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온다. 또한 헝가리어 표기법에 따르면 '푸슈카시 페렌츠([ˈpuʃkaːʃ ˈfɛrɛnt͡s\])'가 맞는 표기인데 헝가리어에서는 's'가 영어의 'sh' 발음이고 'sz'가 영어의 's' 발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페렌츠 푸스카스'라는 이름으로 훨씬 많이 알려져있다. [2] 푸스카스가 있는 동안 팀명은 3번 바뀌었다. 1943~1944: 키슈페슈트 FC, 1944~1949.12.31: 키슈페슈티 AC, 1950.01.01~1956: 부더페슈티 혼베드 SE. [3]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 [4]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리오넬 메시, 호마리우, 요제프 비찬, 펠레에 이어 6위에 올라 있다. [5] 1위는 리오넬 메시. [6] 비공식 기록까지 포함할시 404 도움으로 어시스트 1위이다. [7] 유럽 챔피언스 리그 전신인 대회. [8] 60년 25골, 61년 28골, 63년 26골, 64년 21골 [9] 라리가 득점왕 [10] 레알 마드리드 역대 최다 득점자 6위. [11] 마자르는 헝가리 민족을 가리키는 용어. [12] 1978월드컵까지는 16개국 본선 진출 월드컵이었다. [13] 금지약물 제도는 9년 후인 1963년에 생겼고 당시 규정에는 없었으니 법적으로 책임질 문제는 아니겠으나, 도덕적으로는 분명한 문제가 있었다. 나중에 문제가 불거지자 독일 선수들은 비타민인 줄 알고 먹었다고 했는데, 거짓말이고 대부분은 알고 먹었다라는 것이 중론. 암페타민을 먹었다고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고 굳이 비타민을 먹었다고 한 것부터가 찔려서 그런 것이다. [14] 이러한 이유로 지금에 와서는 전대의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후대의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함께 스포츠의 순수한 가치를 퇴색시킨 결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15] 스페인 1962월드컵 12위로 마감 [16] 헝가리 역대 A매치 골 1위(89경기 84골)와 전 세계 역대 A매치 골 5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위는 122골을 기록한 포르투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이다. [17] 다만 결승 상대가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AFC 아약스라서 0-2로 완패당하고 준우승에 그쳤다. [18] 이때 현재 토트넘 홋스퍼감독인 포스테코글루를 처음 만났고 푸스카스의 공격적이고 다득점 위주의 플레이에 큰 감명을 받아 지금의 포스테코글루의 전술이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19] UEFA 창설 50주년 기념으로 유럽 각국마다 1954년~2003년 동안 활약한 최고의 선수들을 뽑은 상. [20]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루이프, 지네딘 지단,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과 함께 거론된다. 다만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으로 귀화한데다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로 코파 아메리카 우승까지 해본 터라 국적에 대한 논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