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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8 10:22:51

탁신 친나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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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왕국 제23대 총리
GCON GCPS
ทักษิณ ชินวัตร
Thaksin Shinawatra
파일:탁신 친나왓.jpg
본명 탁신 친나왓 (ทักษิณ ชินวัตร, Thaksin Shinawatra)
중국명 치우다신([ruby(丘達新, ruby=Qiū dá xīn)], 구달신)
국적 파일:태국 국기.svg 태국 (1949년 7월 26일-현재)
파일:몬테네그로 국기.svg 몬테네그로[1] (2010년-현재)
출생 1949년 7월 26일 ([age(1949-07-26)]세)
파일:태국 국기.svg 태국 치앙마이주 산깜팽
재임기간 제23대 총리
2001년 2월 9일 ~ 2006년 9월 19일
학력 몽포트 가톨릭 스쿨 (편입)
태국 국군준비학교 (졸업)
태국왕립경찰학교 (학사)
이스턴 켄터키 대학교 (범죄학 / 석사 )
샘 휴스턴 주립대학교 (범죄학 / Ph.D.)
가족 아내: Potjaman Na Pombejra(1976-2008)
자녀: Panthongtae Shinawatra
Pintongtha Shinawatra
패통탄 친나왓
동생: 잉락 친나왓
정당 ''' [[타이락타이|
타이락타이
]]'''(1998년 - 2006년)
서명 파일:탁신 친나왓 서명.png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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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태국 외교부 문장.png 태국 외교부장관(1994년 10월 25일 - 1995년 2월 10일)
파일:태국 총리 휘장.png 태국 부총리(1995년 7월 13일 - 1997년 11월 8일)
파일:타이락타이 로고.jpg 타이락타이당 대표(1998년 7월 14일 - 2006년 10월 2일)
파일:태국 총리 휘장.png 제23대 태국 총리(2001년 2월 9일 - 2006년 9월 19일)
파일:태국 교육부 문장.jpg 태국 교육부장관(2001년 6월 14일 - 2001년 10월 9일)
파일:캄보디아 국기.svg 캄보디아 특별 경제고문(2009년 11월 4일 - 2010년 8월 23일)
1. 개요2. 생애3. 축구단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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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국(타이)의 정치인. 제23대 총리를 지냈다. 치앙마이에서 출생했으며 학가 화교이다. 화교식 이름은 휴탓신(丘達新, hiu´ tad xin´)이다. 2000년대에는 한국 언론 등지에서 '탁신 시나왓'이라고도 했다.

2. 생애

탁신은 총리 취임 이후 보여준 대중주의적 행보와는 대조적으로 상류층 집안 출신이었다.[2] 탁신의 증조부 때 이미 비단사업이 크게 성공하면서 부유층에 끼어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아버지인 롯도 치앙마이 일대에서 사업하던 지역유지이면서도 국회의원직을 지내는 등 정계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갖 비리 부정부패 혐의로 구속되었고 논란이 많았다.

평범하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난 뒤에 경찰관이 되었고 30대 초반까지는 경찰관으로 일하다가 1980년대 초반부터 부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어 차례 정도의 쓴맛을 보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연줄을 잘 이용하여 사업권을 따내고 나서는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이동통신산업 사업권을 속속 따내었고 (물론 정황상으로 봐서는 깨끗하게 따낸건 아니지만) 이때가 태국 경제가 매년 8-9%대의 고도성장을 기록할 정도로 엄청난 호황을 누렸고 당연히 인프라 구축사업도 호황기를 틈타서 대규모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불과 몇년 만에 초대형 재벌이 되었다.

얼핏보면 평범하게 경찰관으로 일하다가 사업을 시작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기에 자수성가한 것 같지만, 탁신 자체가 금수저였던 인물이었고 사업확장의 상당부분도 연줄을 통해 이루어냈기 때문에 개천에서 용이 난 사례는 아니다. 물론, 그와 별개로 사업가로서의 능력은 제법 뛰어난 축이라는 건 부정 못한다. 아무리 가족들이나 주요 고위직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사업 10년 만에 초대형 재벌이 되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여하간 이때의 인연으로 고위급 정치인들과 친분관계가 깊어져서 1994년에 외무장관직에 발탁된 것을 시작으로 정계에 진입했고 이후로 잠롱의 뒤를 이어 팔람탕당의 당수로 재직하다가 1997년에 부총리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탁신은 태국 정계를 바꿔놓은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고, 그저 깨끗하게 성공한 사업가 이미지가 전부였다고 할 정도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계거물이 아니었던지라 딱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다가 IMF 외환위기로 경쟁사들이 크게 손실을 본 반면에 탁신은 큰 손실을 보지 않았으며 이를 계기로 인지도가 급상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98년에 타이락타이당을 창당하면서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보이기 위해서 각계 각층으로부터 수많은 인재들을 영입하였다. 단순 사업가들뿐만 아니라 전직 운동권 인사들, 학자들까지 대거 영입하였다. 사실 탁신도 정계 입문 초기때 기업가답게 친기업적인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고, 후의 대중주의적 행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탁신의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기득권층의 일원이라 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던 영향이 크다. 탁신이 대중주의적으로 변한 것은 어디까지나 기득권층과 관계가 멀어지고 북부지역 빈민층을 지지기반으로 삼은 결과물이고, 탁신 자신도 자기를 대중주의적인 정치인으로 딱히 인식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렇게 타이락타이당 창당과정에서 영입한 학자들과 전직 운동권 인사들을 나름대로 잘 써먹어서 2001년 총선을 앞두고 그동안 기존 태국정당들이 무시했던 농촌지역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며 2001년 총선에서 248석을 차지하여 집권정당이 되었다.

총리로 재임하였을 때에는 사업가로서의 경험을 제대로 활용하면서 여러 정책을 펼쳐 큰 인기를 끈다.
그렇지만 남부지역의 반군을 말 그대로 무자비하게 때려잡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 살상이 빈번하게 벌어졌기 때문에 논란이 일었으며, 그로 인하여 말레이시아와의 관계도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리고 그나마 역대 태국 총리 가운데서 빈민층에 신경을 많이 써왔다고 하지만 동시에 시민단체 활동을 등록하도록 의무화하면서 통제하는 법을 만들었고 돈을 이용해서 언론을 통제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부터 그 이전까지 같은 편이었던 재벌과 관료들과의 관계가 멀어져가기 시작했는데 태국 경제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탁신이 떡고물의 대다수를 기득권층에게 골고루 분배하지 않고 자신이 대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 시점을 기점으로 언론들과의 관계도 나빠지며 기득권층으로부터 지지세가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악운이 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탁신은 농어촌 개발정책의 수혜지였던 북부와 중부지역을 잘 공략해나갔고 결국 2005년 총선에서 개헌선을 넘는 역대급 압승을 기록하면서 재집권에 성공했다.
'2006년 쿠데타'의 수장 손티 분야랏끌린(สนธิ บุญยรัตกลิน)에게 탁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푸미폰 야둔야뎃.

탁신은 재선에 성공한 뒤로부터 태국 남부 5주 지역의 개발예산을 삭감하겠다고 했다가 추밀원(태국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곳, 이곳 재산만 조단위)으로부터 태클을 받은걸 시작으로 해서 점차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했고, 2006년 9월 뉴욕에서 개최된 UN 총회 참석차 방미했다가 태국 내 군부세력의 쿠데타로 정권을 상실했다. 그의 지지세력인 붉은 셔츠단과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지역과 중부지역 방콕을 중심으로 한 왕당파 세력과의 갈등이 주 원인이다. 실제로 군부 출신의 추밀원장 쁘렘 띤나술라논이 쿠데타를 조장했으며, 왕당파를 중심으로 탁신이 태국의 입헌군주정을 없애고 공화정을 만들어 집권한다더라 하는 소문도 대대적으로 유포되었다.

과도정부가 발표한 그의 비리도 탁신 정권의 정당성에 타격을 가했다. 그의 기업 친 코퍼레이션의 사업을 싱가포르 국영기업 테마섹에 매각할 때 탈세를 했다는 것과 돈므앙 국제공항에서 수완나품 국제공항으로 국제공항을 바꿀 때 도입한 공항 검색장비에 대한 비리혐의가 적용되고 그는 입국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의 경험 때문에 북부지역에서 여전히 구세주 취급을 받았으며, 2007년 총선에서도 친탁산계 정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군부와 법원에 의해 강제적으로 의석수가 줄어나갔고, 옐로셔츠의 저항이 벌어지면서 점차 궁지에 몰리게 된 데다가 일부 친탁신 세력이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민주당이 집권했다. 그리고 몇년간 민주당이 집권하는 듯했지만 북부지역에서 별로 민심을 얻지 못했고, 2011년 총선에서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이 탁신의 여동생임을 내세워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며 총리직에 재직하다가 결국 2014년에 부패혐의로 탄핵되어 쿠데타로 총리직에서 강제로 물러나야 했다.



여하튼 이 과정에서 탁신은 자신을 민주투사로 포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2014년 군부 쿠데타 이후 군부의 행태로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탁신도 따지고 보면 총리 재임시에는 비민주적인 행태도 꽤나 보여왔고 탈세도 했을 정도로 깨끗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옐로셔츠가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세력이 대부분으로 특히 태국 민주당이 탁신 정부 이후로부터는 친군부성향이 되었다. 게다가 탁신에 대항한다며 펼치는 주장이 말 그대로 민주주의의 기본인 1인 1표를 부정하는 식이며 아예 2014년 총선을 보이콧할 지경이다. 오죽하면 탱크리버럴이라는 용어도 나올 지경이다. 그렇게 군부 자체가 선거결과를 여러 번 뒤엎고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행동을 앞장서서 자행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포장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탁신은 사업가로서의 감각은 나름대로 뛰어난 편이고, 사업가였을 때의 경험을 정치에 활용하는 능력도 상당하여 지지층 확보에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정치게인 수완은 다소 미숙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언론계와 노조와의 관계가 나쁜 건 뭐 그렇다 칠 수는 있다지만, 굳이 사이가 나빠질 이유가 없던 재벌들과 관료 등 기득권층을 적으로 돌린 것에 대해서는 탁신이 과도하게 욕심을 부렸고 이것이 미숙한 정치력과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또한 밝혀진 수많은 부정부패에 태국 국민들이 등을 돌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탁신을 좋아하는 태국인들도 많은데 어차피 기득권층들도 그리 깨끗하지 않은 데다가 탁신 때 수혜를 본 계층이 서민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잉락 친나왓이 집권할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태국에 갔을 때 탁신에 대해 함부로 옹호나 비판을 하게 되면 싸움이 나거나 분위기가 싸해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된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프어타이당이 제2당을 차지하자, 탁신은 8월 10일자로 귀국 의사를 밝히는 한편, 홍콩에 머물며 본격적으로 차기 정부 수립과 관련해 막후에서 내정에 개입했다. 제1당 까오끌라이당과의 연정 여부를 두고 신미래당 타나톤 쯩룽르앙낏 전 대표를 만나 까오끌라이당을 새 정부에서 제외할 가능성을 두고 정치적 합의를 도출하거나, 훈센 총리의 생일파티에 잉락 친나왓과 함께 참석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2023년 8월 22일 오전, 15년 망명 끝에 태국으로 귀국했다. 탁신은 이날 오전 싱가포르 셀레타 공항에서 방콕 돈므앙 국제공항으로 입국한 뒤 경찰에 체포돼 구치소로 이송됐다. 공항에는 지지자들인 ‘레드 셔츠’가 그를 환영했다. 탁신계 프어타이당과 군부 정당들이 연정을 합의하였기 때문에, 이날 오후 총리 선출 이후 사면 요청을 위한 정치적 퍼포먼스라는 것이 중론이다. # 당초 경찰은 귀국과 동시에 그를 공항에서 즉각 체포할 예정이라고 했지만, 탁신은 수갑을 차지 않고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방콕 짜뚜짝 지구의 끌롱 쁘렘 중앙 교도소로 이송될 것으로 알려졌다. #

이날 오후 프어타이당의 세타 타위신이 총리로 선출됨과 더불어 법원은 탁신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타나폰 스리얀쿨 태국 정치정책연구소 소장은 방콕포스트에 프아타이당이 군부 정당과의 연합을 보장하기 위해 탁신이 일종의 "정치적 인질"로 복역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으며, 태국 우본랏차타니 대학교 티티폴 팍디와니치 정치학부 학장은 "이번 총선은 처음부터 탁신 전 총리에 관한 선거였다"며 "그의 복귀는 총선에서 약화됐던 보수 진영을 강화할 것이며 태국의 민주화 과정을 지연시킬 것이다"고 지적했다. 태국 현대사학자 솜삭 찌얌티라사꾼은 태국 군주제의 위선에 인내하지 못하는 세대 까오끌라이당[3]을 지지하면서, "탁신은 이 그와 손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와 손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지적했다. # # #

수감 첫날 새벽에 고혈압을 이유로 경찰병원에 이송됐다. 그는 현재 อาคาร ภปร 빌딩 14층 로얄 스위트룸에 입원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 논란이 커지자 특혜 여부 조사를 가진다. #

왕실 사면으로 형량이 1년으로 줄었다. # 2023년 9월 21일, 유엔총회 참석차 방미한 세타 타위신 총리는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탁신이 석방되면 정부에서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는 입장을 공인했다. 그는 "그가 태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며 "탁신은 태국 정치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총리였으며, 지금도 그럴 것"이라고 덧붙였다. # 24일 AFP통신에 따르면 품탐 웻차야차이 부총리는 구체적으로 탁신을 정부 고문으로 임명하는 방안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

6개월 만에 가석방되었다. #

3. 축구단 운영

그는 평소 축구팬으로서 프로축구팀 인수에도 적극적이었는데, 2003년 프리미어리그 구단 풀럼을 비롯해 2004년 리버풀도 인수하려다가 둘 다 실패했고, 2007년 맨체스터 시티를 인수하여 비로소 구단주가 됐다. 하지만 맨시티 서포터들은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전술한 2004년 당시 리버풀을 인수하려 하면서 리버풀 팬이라고 잉글랜드에서 언론 플레이를 하다가 팬들의 반발로 실패했기 때문. 축구계에서도 그를 달가워하지 않아서인지 탁신이 챔피언스리그 진출 운운거리는 인터뷰를 축구잡지 포포투에서는 올해 가장 웃기는 축구 구단주 헛소리라고 신나게 비웃었을 정도였다.

그래도 초반에는 선수 영입도 투자도 하고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 영입으로 1시즌에 맨유와의 리그 경기를 2번 모두 이겼으며 선두권에 들어서는 선전을 벌였으나 차츰 밀려나 리그 9위로 마무리하자 에릭손 감독을 경질하며 점차 구단 운영도 엉망인 모습을 보이다가 태국에서 자금을 막아버리면서 1년 만에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에게 2배 정도 이득을 보고 구단을 판매한다.


[1] # [2] 피타 림짜른랏 등 태국의 진보정당 지도자들도 대체적으로 최상층 계층 출신인 만큼 예외적 사례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태국의 빈부격차가 그만큼 심화되어있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을 것. [3] 지금까지 탁신계가 왕당파와 대립하면서도 경제에 대한 포퓰리즘 정책을 통해 지지 세력을 결집하였다면, 2020년 민주화 운동에서 시위 주동자들은 왕실모독죄 개혁과 추밀원 폐지 등을 요구하는 ‘봉건주의 타도’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까오끌라이당은 형법 112조, 소위 왕실모독죄의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