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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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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사망자별 해상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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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순위 이름 날짜 사망자 수 사고 원인 발생 위치 비고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1 도냐 파즈호 침몰 사고 1987년 12월 20일 4364명도냐 파즈
11명벡터
선박간 충돌 타블라스 해협, 필리핀해 비전시 해상사고 사망자 수 1위
20세기 해양사고 중 최다 사망자
2 르 줄라호 침몰사고 2002년 9월 26일 1863명 과적
정비 불량
감비아 연안 21세기 해양사고 중 최다 사망자
3 스파이스 아일랜더호 침몰 사고 2011년 9월 10일 1573명 과적 잔지바르 해협, 탄자니아 연안
4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1912년 4월 15일 1514명 빙산 충돌 북대서양
5 태홍호 침몰 사고 1822년 2월 5일 1500명추정치 암초 충돌 벨비더 여울, 남중국해 19세기 해상사고 중 최다 사망자
6 술타나호 침몰 사고 1865년 4월 27일 1168명 보일러 폭발 미시시피강
7 토야마루호 침몰 사고 1954년 9월 26일 1159명 악천후 쓰가루 해협
8 제너럴 슬로컴호 화재 1904년 7월 15일 1021명 화재 이스트 강
9 엠프레스 오브 아일랜드호 침몰 사고 1914년 5월 29일 1012명엠프레스 오브 아일랜드
2명스토스타드
선박간 충돌 세인트 로랜스 강
10 알 살람 보카치오 98호 침몰 사고 2006년 2월 1012명 화재 두바 연안, 홍해
}}}}}}}}} ||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Sinking of the RMS Titanic
파일:last_photo_of_titanic.jpg
일시 1912년 4월 14일 오후 11시 40분 ~
4월 15일 오전 2시 20분
([dday(1912-04-15)]일, [age(1912-04-14)]주년)
위치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남동쪽 600km
선종 여객선
사고 유형 운항 중 침몰
<colcolor=#000> 탑승 인원 2,224명
사망 1,514명
생존 710명
파일:23titanic.png

타이타닉호가 빙산 충돌 후 4시간 만에 침몰
카르파티아호가 866명 구조, 1250명 사망 추정
이스메이 씨 생존, 애스터 부인 생존 추정, 이하 실종자 명단[1]
침몰을 알리는 1912년 4월 16일자 《 뉴욕 타임즈》의 기사.

1. 개요2. 배경 (4월 10일~14일)3. 사고 당일 (4월 14일)
3.1. 빙산과의 충돌
3.1.1. 충돌 당시 가설 및 반론
3.1.1.1. 충돌 당시 항해술 관련3.1.1.2. 선체 재질 특성 관련3.1.1.3. 충돌 당시 천문기상학 관련
3.2. 충돌 직후
4. 침몰 당일 (4월 15일)
4.1. 비상 탈출 준비
4.1.1. 구조 요청
4.1.1.1. 무선 통신4.1.1.2. 신호탄과 항해등
4.2. 구명정 진수4.3. 혼란 가중4.4. 최후의 순간4.5. 해저로의 낙하4.6. 침몰 직후4.7. RMS 카르파티아의 구조
5. 시신 수습과 장례6. 생존자 및 피해자들
6.1. 승객6.2. 선원
7. 종합8. 사고의 영향9. 영웅들과 저명인사들10. 기타11.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재현 영상[2]
RMS 타이타닉 1912년 북대서양에서 침몰한 사고.

2. 배경 (4월 10일~14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RMS 타이타닉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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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RMS 타이타닉은 1912년 4월 10일 영국 사우샘프턴 44부두에서 출항해 프랑스의 셰르부르와 아일랜드의 퀸즈타운[3]에 기항한 후 4월 17일 아침 미국 뉴욕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3. 사고 당일 (4월 14일)

출항 당시 쌍안경 보관함의 열쇠가 인계되지 않아서 배 안에 있는 쌍안경을 꺼낼 수 없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에 의하면 2등 항해사 데이비드 블레어(David Blair)가 출항 직전에 선사의 인사 지시로 교체되어 본의 아니게 열쇠를 미처 반납하지 못하고 하선한 것으로 밝혀졌다. 블레어는 1955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열쇠는 딸에게 유품으로 상속됐다.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수석항해사 헨리 와일드의 막판 재배치 때문이었다. 원래 그는 올림픽호에서 수석항해사로 있었고 그 밑에서 윌리엄 머독이 1등 항해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머독은 이후 타이타닉호의 수석항해사로 승진해 나갔고 와일드는 곧 선장으로 승진해 (올림픽급보다 더 작은) 화이트 스타 해운의 배를 담당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출항 얼마 전에 와일드가 갑자기 올림픽호에서 타이타닉호로 이동하면서 가장 선임인 와일드가 타이타닉의 수석항해사를 맡았으며 이로 인해 기존 타이타닉의 항해사들은 한 계급씩 내려갔다. 이로 인해 머독은 수석→1등 항해사로, 찰스 라이톨러는 1등→2등 항해사로 강등되었으며, 원래 2등 항해사인 블레어는 항해에서 제외되었다. 라이톨러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회사 측에서 타이타닉의 자매선을 담당했던 와일드의 경험을 활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당연히 졸지에 강등당한 꼴인 머독과 라이틀러는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물론 이건 선사 측의 지시였지 항해사들간 재배치 희망으로 인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항해사들간 사이엔 별 영향은 없었다. 와일드 역시 예정돼 있던 선장 부임을 못하게 된 불이익을 받았기에, 되려 항해사들 모두 동지 의식이 있었다.

견시들이 쌍안경을 사용하지 못했고 육안으로 위험요소를 확인해야 했는데 사고 초기에는 이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었으나 나중에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실제로 동일한 환경 속에서 당시 쌍안경을 사용하여 실험한 결과 이것조차도 무용지물이었다. 실험 결과 그냥 검은 원만 보였다고 한다. 애당초 당시의 차가운 공기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달이 없는 칠흑같은 밤에 파도도 없어서 빙산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여러 악조건이 겹쳤기 때문에 쌍안경을 사용하지 못했던 것은 그 많은 악조건 중 하나일 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거기다 탐조등을 설치하지 않아서 빙산을 발견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결국 쌍안경이 있었더라도 탐조등이 없는 한 당시 타이타닉이 항해하던 조건에서는 충돌을 막을 수 없었다.

출항 오전부터 빙산이 돌아다닌다는 위험한 소식이 선박 사이의 무선통신으로 공유되고 있었으며 적어도 타이타닉호는 4월 14일 6통의 경고를 통신으로 받았지만 화이트 스타 직원이 아니라 마르코니 사 파견 직원들인 타이타닉호의 통신사 2명은 승객들의 통신 발신 업무에 쫓기고 있었고 이 계절의 북대서양의 항해에는 자주 있는 일이라고 여겨서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3.1. 빙산과의 충돌

파일:Titanic_iceberg.jpg 파일:5damiaa3y4l51.jpg
타이타닉을 침몰시킨 것으로 추측되는 빙산[4], 오른쪽은 컬러로 재현한 그림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표현된 충돌 당시 상황

운명의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39분 레지놀드 리와 함께 견시를 보던 갑판부 선원 프레드릭 플리트가 전방 450m에 높이 20m 미만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했다. 빙산의 10분의 9는 숨어 있기 때문에 빙산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Titanic_porting_around_English.svg.png

플리트가 빙산을 발견하고 종을 몇 번 울린 후 급히 선교에 전화로 보고했고 당직 항해사인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가 조타실에서 접수하고 선임 당직자인 1등 항해사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에게 보고했다. 보고와 비슷하게 종 소리에 전방을 바라보며 빙산을 확인한 그는 바로 좌현전타[6]를 명령하고 엔진 오더 텔레그래프(EOT)[7]전속 후진(Full Astern)[8]으로 돌려 기관실에 지시한 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보일러실의 방수격벽이 닫힐 것임을 알리는 알람을 울렸다.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지시에 따라 왼쪽으로 키를 최대한 돌렸으며 기관실에서도 배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노력했으나 배의 회전반경이 너무 크고 빙산과의 거리가 가까운 탓에 충분한 회전과 감속을 하지 못했다.[9] 결국 11시 40분 우현은 빙산이 있는 곳으로 서서히 접근하여 정통으로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우현 측면이 빙산과 충돌하였다.

1997년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빙산 발견 보고에서 빙산 충돌까지 장면을 약 2분 정도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23노트로 달리는 배가 450m의 거리에서 빙산을 발견했다고 계산해 보면 발견에서 충돌까지의 시간은 약 38초 정도로 실제로는 영화에서 묘사되는 시간의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영화상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보니 당시 긴박한 상황을 실제 시간보다 더 장황하고 자세하게 묘사하도록 상당한 영화적 각색이 가해져 있다고 봐야 된다. 항목에 업로드된 영화 타이타닉 유튜브 영상과 당시 실제 상황을 시간으로 비교해 보면 선교 장면에서 기관실 장면으로 넘어가는 38초 부근에서 이미 빙산과 충돌했을 것이다.

38초의 시간은 현대의 선박이 대응하기에도 매우 촉박한 시간으로, 영화상에서는 기관실에서 선교에서 내린 명령대로 신속하게 역추진 명령을 실행해 프로펠러가 역회전을 시도하던 도중에 충돌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당시 현대의 선박보다 훨씬 더 복잡한 기관 메커니즘을 가졌던 타이타닉호는 선교에서 전속 후진(Full Astern)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기관실에서 손 쓸 새도 없이 빙산과 충돌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봐야 한다.

3.1.1. 충돌 당시 가설 및 반론

3.1.1.1. 충돌 당시 항해술 관련
빙산 충돌 직전 타력 유지 측면에서 후진보다 정지가 선회에 유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반대로 후진을 걸지 않았으면 충격력이 높아져 더 큰 파손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황상 빙산과의 거리를 육안으로 확인한 1항사 머독이 회피가 어렵다고 보고 가볍게 스치는 경충돌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됐든 다수의 전문가는 빙산을 너무 늦게 발견했으므로 어떠한 대응을 했어도 침몰은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침몰에 이를 정도의 손상을 받은 원인으로 "정면이 아닌 측면에 빙산이 충돌해 피해가 가중되었다"는 설도 있다. 만약 타이타닉호가 빙산을 정면으로 충돌했다면 침수된 방수 구획은 선수 일부의 좁은 범위(타이타닉호의 방수 한계범위 내)에 머무르는 것으로 끝나 침몰을 면할 가능성도 있었으며 결과적으로는 충돌을 회피하려고 키를 돌려 어중간하게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 피해를 가중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면 충돌 시 침몰하지 않았을 것이란 가설은 결과론적인 얘기다. 현대에 시뮬레이터로 결과를 보고 판단하는 것과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당대 최대 선박인 4만 6천톤짜리 타이타닉이 23노트 전속력으로 항해 중 빙산과 정면 충돌해도 침몰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전속항해 중인 타이타닉이 빙산과 정면으로 충돌했다면 충격이 배 전체에 전해졌을 것이고, 수많은 사람이 쓰러지고 집기가 날리며 최소 수백명의 중경상자와 일부 사망자까지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항해사는 빙산을 발견하고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들이박은 이유를 해명하지 못하면 법적 책임과 막대한 손해배상에 시달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피기동이라는 정석을 놔두고 정면충돌을 감행했어야 한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다. 그래도 침몰해 더 많은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항해사가 마치 신마냥 모든 경우의 수와 미래를 예견하고 당연한 정석 대신 기상천외한 변칙을 썼어야 했다며 책임을 묻는 건 가능하지 않은 논리다.

아울러 정면충돌을 했으면 침몰은 면한다는 것도 이론상 가정일 뿐이다. 이론적으론 선수 일부만 침수되어 버틸 수 있지만, 후술할 철판과 이음못의 강도 문제로 충격력을 버티지 못해 선체 곳곳이 휘거나 결합부가 터져 누수가 더 광범위하게 생겼을 수 있다. 이러면 그나마 있는 구명정을 띄울 새도 없이 순식간에 굉침해 거의 전원이 사망했을 것이다.

목재로 된 범선이 혼용되던 당시의 항해술은 회피만을 전제했으며 현대에도 고의 충돌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고려되고 회피를 우선한다. 충돌 당시 1등 항해사 머독의 지시(좌현전타/전속후진)는 회피를 시도하되, 여의치 않으면 최대한 스치듯이 가볍게 부딪혀 파손을 최소화하려던 의도[10]로 보이며 당시 상황에선 최선이었다.
3.1.1.2. 선체 재질 특성 관련
타이타닉호 선체에 사용된 강철판이 문제였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타이타닉에 사용된 강철은 그때 기준으로는 가장 최고급이었지만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당대의 제강 기술 수준은 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낮았고 이 근본적 한계로 인해 강철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많은 인 성분은 균열을 만들고 황은 이러한 균열을 더 확산시키며 낮은 망간 비율은 강철의 탄력성을 낮추어 메진 성질을 더 크게 한다. 참고로 현대의 질 좋은 강철은 망간과 황의 비율이 200:1이지만 타이타닉호의 선체에 사용된 1910년대 기준으로 '최고급' 강철은 겨우 6.8:1 수준으로, 현대의 시선에서 보면 저질로 취급받을 재료였다.

금속 자체의 특성과도 연관이 있는데 금속은 온도가 낮을수록 용접 부분이나 금속 그 자체에 충격이 가해졌을 때 파괴되기 쉬운 특징이 있다. 이를 '취성' 이라고 하는데 연성[11]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타이타닉호는 침몰 당시 북대서양[12]의 차가운 해수를 가로지르며 항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취성 파괴가 일어나기 쉬운 조건이었다. 당시의 야금술의 한계로 건조시 사용된 강철보다 영하의 기온 속의 빙산이 더 단단했으며 외부적 조건(낮은 온도)에 의해 금속의 특성이라는 악조건이 겹쳐 배가 파손당하기 쉬운 상태가 된 것이다.[13]

파일:빙산과 타이타닉호.svg

게다가 선체를 접합하는 데 사용했던 이음못( 리벳)이 생각보다 훨씬 더 약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타이타닉호의 잔해에서 채취한 이음못 48개를 분석한 결과 이음못에 유리 성분의 슬러그[14]가 높은 비율로 섞여 있었고 이로 인해 이음못이 메진 성질을 가져 쉽게 금이 간 것이다.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는 이쪽을 밀고 있는데 여기서의 내용에 따르면 선수 부분은 곡선이다 보니 리벳 머신으로 박을 수 없어서 강철 리벳 대신에 인력으로 박을 수 있는 연철 리벳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헌데 테스트용으로 만든 연철 리벳은 10,000psi(68,947kPa)의 압력을 견딜 수 없었고[15] 실제 타이타닉의 선수 부분의 리벳은 테스트용보다도 훨씬 약한 수준이었고 그 때문에 충격으로 리벳이 박살나면서 생겨난 틈으로 침수가 되었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현재 기준으로 타이타닉 선체는 지중해에서 관광용으로 쓰는 크루즈선으로 쓰기에나 적당하지 대서양을 건너는 여객선으로 쓰기엔 부적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기술의 한계를 고려했을 때 타이타닉이 선체의 결함에도 무리하게 대서양을 횡단하다가 침몰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타이타닉은 앞서 말했듯 당시 조달할 수 있는 최고급 강철을 써서 건조했기 때문에 상당 시간 버틴 것이고 보다 저질 강철을 쓴 다른 배였다면 파손이 훨씬 심해 더 빨리 가라앉았을 것이다. 당시 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그나마 이 정도로 된 배가 빙산과 박았을 시 가장 안전했다. 타이타닉이 충돌 후 가라앉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타이타닉을 설계한 토머스 앤드루스의 예측[16]보다도 더 오래 걸렸으며 구명정만 충분했다면 탑승자 대부분 어쩌면 전원이 생존했을 수도 있을 만큼 버텨 주었다. 당시에 훨씬 못한 수준의 선박들도 상시 노선으로 대서양을 횡단했고 그만큼 사고도 잦았지만 타이타닉 같은 대참사로 이어지진 않았다. 결국 이 사고가 대참사가 된 이유는 구명정 부족, 인근 선박 통신두절 등 다른 요인이 크지 배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3.1.1.3. 충돌 당시 천문기상학 관련
한편 미국의 민간 기상학자인 밀라 진코바는 사고 당시 태양 표면의 폭발 활동 때문에 발생한 지자기폭풍이 침몰에 일조했다며 연구 결과를 공개했다.[17] 타이타닉 침몰 당시 구명정과 인근 구조선박에서 오로라를 관측했는데 이런 오로라를 만들어낸 강력한 지자기폭풍이 타이타닉호의 항해 시스템에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나침반과 무선통신에 장애를 일으켜 항로 이탈과 구조 지연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다만, 나침반 오류로 정상 항로를 다소 이탈했다고 해도 침몰 위치와 항적을 볼 땐 경로를 크게 이탈해 유빙 지역인 북극해로 갔다고 보긴 어렵고 오히려 당시 기상 상황으로 유빙이 남하한 것이 더 유의미한 원인이었다. 무선통신도 일부 장애를 일으킨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당시 가장 가까운 위치이던 캘리포니안호는 1인 근무하던 무선사가 수신기를 끄고 취침해 있었고 그나마 가까운 카르파티아호는 최고 출력으로 왔음에도 4시간 가까이 걸렸으므로 의미가 없다.[18]

3.2. 충돌 직후

충돌 직후 머독은 우현전타[19]를 지시하여 빙산으로부터 벗어나는 한편[20] 방수격벽 폐쇄 버튼을 작동시켰다. 보일러실 2호, 6호의 화부장 프레드릭 배럿을 비롯해 화부 등 선원들은 쏟아져 오는 물을 피하며 허겁지겁 대피했다.[21] 일단 이 시점에선 다행히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빙산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아 타이타닉은 멈춰섰다. 아래쪽 승객들은 큰 충격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고 위쪽 승객들은 약간의 흔들림을 느꼈으나 잠에서 깨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은 흔들림을 느끼고 깨어났다. 선장실에서 쉬고 있던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도 흔들림을 느끼고 곧바로 조타실로 향했다.

스미스 선장은 머독으로부터 빙산 발견 및 회피 시도, 그리고 방수격벽 차단 여부를 간단하게 보고받았으며 좌현 윙브릿지에서 육안으로 빙산의 위치를 확인하고 4등 항해사 조지프 박스홀에게 피해 상황을 점검할 것을 지시했다. 11시 47분경 다시 조타실로 돌아온 스미스 선장 일행은 충돌에 따른 선체 피로를 고려해 엔진 오더 텔레그래프(EOT)를 미속 전진(Dead Slow Ahead)[22]로 설정했다. 타이타닉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피해상황 조사에서 박스홀은 별다른 이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대로 선장에게 보고했다.

당시 대부분의 승객들과 선원들은 빙산 충돌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갑판에 흩어진 얼음조각을 가지고 3등실 승객들은 축구를 하고 1등실 승객들은 위스키에 쓸 기념품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하지만 잠시 간의 예상을 깨고 타이타닉의 보수 책임자인 목공(Chief Carpenter) 존 홀 허친슨이 배의 누수현상이 심각하다고 조타실로 긴급하게 보고했다. 11시 52분경 박스홀 역시 배가 빙산과 충돌하고 화부들이 대피한 뒤 10분만에 충돌 구역인 보일러실 2호, 6호와 최하 갑판의 수하물 취급소가 침수되는 것을 확인했다. 잠시 뒤 타이타닉의 설계자 토머스 앤드루스와 브루스 이스메이 화이트 스타 라인 사장이 조타실로 도착했다. 이스메이는 배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물었고 갑자기 불안감을 느낀 스미스 선장은 그저 걱정된다고만 답한 후 선원들에게 만일을 대비하여 승객들을 깨우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엔진도 정지시켰다. 스미스 선장은 즉시 토머스 앤드루스 등과 함께 직접 피해상황을 점검했는데 11시 55분에는 최하 갑판이 완전히 잠기고 수선 바로 위 층인 G 갑판의 우편원들이 우편실에서 필사적으로 우편물을 구하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G 갑판의 승객들과 승무원들도 물이 복도로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하고 빠져나왔다.

영화 타이타닉의 연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빙하와 부딪히면서 선저에 길고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고 믿지만 만일 그 정도의 파공이 생긴다면 수만톤 규모의 배는 순식간에 해수가 유입되어 즉시 기울어 버린다. 후일 초음파 탐사로 밝혀진 실제 파공의 면적은 모두 합해 1.1~1.2제곱미터 정도로, 그 거대한 배를 침몰시킨 손상치고는 경미했다. 그러나 문제는 파공의 위치와 형태. 6개의 파공들이 총 5구획에 걸쳐 길게 나는 바람에 배의 침몰은 확실해져 버렸다. 타이타닉은 2구획(선수부터는 4구획)까지 물이 들어오면 침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으나 선수부터 5구획 이상에 물이 차면 그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타이타닉의 격벽은 위의 E갑판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라 침수구획이 5구획이 넘어버리면 선체가 부력을 잃고 앞으로 기울어지며 잠기는 와중에 해수는 격벽을 넘어 차례차례로 다른 구획까지 흘러 들어가 침몰해 버린다. #

다시 조타실로 돌아온 앤드루스는 장시간의 계산 끝에 이미 5구획에 걸쳐 누수가 진행되고 있음을 파악했고 이대로라면 타이타닉의 침몰까지 길어야 최대 2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고 결론을 냈다. 빌지펌프[23]를 동원해 물을 빼낼 수는 있었지만 누수 속도에 비하면 침몰을 고작 몇 분 더 연기할 뿐이었다. 스미스 선장은 다시 조타실로 돌아가 박스홀에게 긴급타전이 적힌 쪽지를 건내주고는 즉시 구조요청을 보낼 것을 지시하고 엔진 오더 텔레그래프전현 추진체 정지(All Engine Stop)[24]로 맞췄다. 오후 11시 59분 결국 타이타닉은 완전히 멈춰섰다.

4. 침몰 당일 (4월 15일)

4.1. 비상 탈출 준비

파일:external/i266.photobucket.com/titanic-distress-rockets-april-15.png

스미스 선장은 12시 5분에 탈출 명령을 내리되 혼란 방지를 위해 대놓고 승객들에게 침몰이 임박했다고는 알리지 않았다.[25] 우선 승무원들을 시켜 잠들어 있던 모든 승객들과 선원들을 갑판에 집결시키기 위해 깨우고 구명조끼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이 시각 충돌부위의 F 갑판이 침수되기 시작했다.

12시 15분 경부터 통신사들에 의해 첫번째로 구조 신호가 보내지고 좌현에서는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가, 우현에서는 1등 항해사 머독이 구명정을 내리기 시작했다. 보일러 폭발을 막기 위해 연돌에 달린 안전밸브를 모두 열어 연돌 4개 중 환풍구인 4번 연돌을 뺀 실제 연돌 기능을 하던 3개의 연돌이 동시에 증기를 뿜기 시작했는데, 이때 발생한 큰 소음으로 인해 이후 한동안 갑판에서의 의사소통이 어려워진다. 같은 시각에 충돌부위의 F갑판이 잠기고 방수격벽이 있는 가장 높은 층이며 기나긴 복도가 있는 E갑판까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제빵장 찰스 조그힌을 비롯한 조리사들은 비상식량으로 들을 준비해 구명정마다 약간씩 실었으며 악단은 승객들이 공황에 빠지지 않도록 음악을 연주했다.

처음에는 승객과 선원 대부분은 배가 침몰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형식적인 절차로만 여겨 구명정에 탈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배는 아직 몸으로 느끼기는 힘들 정도로 느린 속도로 가라앉고 있었고 어두컴컴한 북대서양 한복판에서 나무로 만든 조그마한 보트보다는 길이 270m의 강철로 만들어진 최신형 여객선이 훨씬 안전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26] 게다가 한밤중인 데다 추운 날씨 때문에 귀찮아했던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 배에서 가장 부자였던 존 제이콥 애스터도 아내에게 "여기가 저 조그만 보트보다 안전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는 선장에게 여성 어린이를 먼저 태울 것을 건의했고 선장은 이를 승인했다. 이건 당시는 물론 지금도 사회 통념 상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일이기도 했고 실제 통계상으로도 혼란스러운 재난 상황에서 여성과 어린이들의 생존 가능성이 더 낮은 점을 고려해 구조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4.1.1. 구조 요청

4.1.1.1. 무선 통신
타이타닉호가 주변 선박, 통신소들과 주고받은 무전을 정리 기록한 영상
CQD DE MGY[27]
CQD DE MGY
CQD DE MGY
(중략)
HERE MY POSITION 41.46N 50.24W COME AT ONCE.
HAVE STRUCK A BERG.
구조요청 여기는 MGY
구조요청 여기는 MGY
구조요청 여기는 MGY
(중략)
현 위치 북위 41.46 서경 50.24 즉시 와주기 바람.
빙산과 충돌했음.
0시 15분, 타이타닉의 긴급구조요청

4월 15일 0시 15분, 직전까지 뉴욕 무선국으로 1등실 승객들의 전보를 보내고 있던 타이타닉은 빙산충돌 이후 긴급히 조난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 보낸 것은 조난신호 CQD였다.[28]

이때, 타이타닉호와 불과 16km 정도의 거리에 빙산이 너무 많아 야간 항해는 무리라 판단하여 아침까지 투묘하고 있었던 화물선 SS 캘리포니안호(SS Californian)가 있었지만 1명밖에 없는 통신사 '시릴 에반스(Cyril Furmstone Evans, 1892 ~ 1959)'가 오랜 1인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으로 취침 중이라 연락을 받지 못했다. 이 배와 통신이 닿았다면 대부분의 승객이 구조 가능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지점이다.[29] 사실 캘리포니안호는 앞서 통신사 에반스가 선장의 지시에 따라 수시로 빙산경보를 주변 선박에 전파했다. 타이타닉호도 이를 수신했으나 동일한 경보 무선이 여러 차례 반복되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하루 12시간씩 1등실 승객들을 위한 전보를 보내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통신사 잭 필립스(Jack Phillips, 1887~1912)는 일 방해하지 말고 닥치라는 무선을 캘리포니안호에 날리기도 했다.[30]

CQD 신호를 6회 보내고 현재 위치를 말한 타이타닉호의 조난신호를 최초로 수신한 것은 약 250km 떨어져 있던 독일 선적 SS 프랑크푸르트호(SS Frankfurt)였다.[31] 이후 SS 마운트 템플호(SS Mount Temple)도 응답하여 상황을 물었고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충돌했다'며 사고상황을 구체적으로 전달했다. 마운트 템플호의 통신사 '존 듀란트(John Durrant)'는 "전 무선국 주목, 타이타닉호가 조난신호를 보내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좌표는 북위 41.46..."라며 주변에 조난신호를 전파했다. 마운트 템플호 이후 7분간 비슷한 내용의 송신이 레이스곶 무선국(Cape Race Wireless Station)[32]을 비롯한 여러 무선국으로부터 오갔다.[33]

0시 25분, 드디어 사고현장으로부터 대략 93km 떨어져 있던 여객선 RMS 카르파티아호(RMS Carpathia) 코드곶 무선국으로부터 조난신호를 전달받아 응답했다. 카르파티아호의 통신사 '해롤드 코탐(Harold Thomas Cottam)'은 처음엔 사고사실을 믿지 못했던듯 '코드곶에서 너네 조난신호를 일괄적으로 뿌리고 있는 거 알고 있냐?'라며 상황을 물어왔고, 타이타닉호는 조난신호가 맞으며 빙산에 의해 침몰하고 있다며 조난위치를 전달한다. 이에 카르파티아호가 선장에게 보고해서 구조하러가면 되냐고 재차 확인하자 타이타닉호는 맞으니 최대한 빨리와달라고 답한다. 이후로도 타이타닉호는 지속적으로 CQD를 송신했는데 조난위치와 함께 즉각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과 빙산에 충돌하여 가라앉고 있다는 내용을 추가해 보냈다.[34][35]

0시 26분, 타이타닉호가 SS 이피랑가호를 수십차례 호출하며 구조를 요청하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한다. 이피랑가호는 이미 앞선 18분에 레이스곶에서 보낸 광역호출 조난신호를 받아 주변에 재전파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이후론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다. 당시 하바나에서 출발하여 함부르크를 향해 동쪽으로 항해중이던 이피랑가호 동선상 타이타닉호 사고위치 근처에 있었을 것이기에 조난신호를 수신하고도 구조에 나서지 않은 것은 의아해 보인다.[36] 그러나 사실은 비극적이게도 이피랑가호는 사고 이틀전 남대서양에서 실종된 SS 아우크스부르크호[37]를 찾아달라는 요청에 응해 진로를 남쪽으로 튼 상태였고, 타이타닉호의 조난신호를 수신한 시점엔 당초 항로를 크게 벗어나 너무 멀리 떨어진 상태였기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0시 34분, 프랑크푸르트호는 그동안의 무선통신을 듣지 못하고 있었는지 타이타닉호에게 재차 상황을 물었다.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충돌했으며 프랑크푸르트호의 선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 이쪽으로 와 줄 것을 요청했고 프랑크푸르트호는 선교에 전달하겠다고 답했다. 이후 카르파티아호와의 통신이 이어졌으며 카르파티아호는 현재 전속력으로 가고 있고 도착까지 4시간이 예상되니 기다려 달라는 말을 했다. 이때 자매선 RMS 올림픽호도 타이타닉호에게 상황을 묻는 메세지를 보냈으나 타이타닉호가 응답이 없자 카르파티아호는 올림픽호의 메세지를 듣지 못했냐고 물었는데 타이타닉호는 침몰하고 있고 증기배출 소음이 워낙 시끄러워 듣지 못했다고 답했다.

0시 45분, 타이타닉호는 CQD와 함께 조난신호로 SOS를 섞어서 보내기 시작했다.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빠르게 침몰하고 있으니 즉시 와달라는 말이 추가되었다. 이 신호는 레이스곶 무선국을 비롯한 당시 사고현장 근처 모든 선박들에게 송신되었으나 응답한 선박 중 가장 가까운 카르파티아호가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으므로 다른 배들은 직접적으로 도울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타이타닉호의 조난신호를 재차 내보내면서 최대한 많은 선박에게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한편 타이타닉호에서 캘리포니안호를 지목해 호출하며 조난신호를 보내고 이어서 레이스곶도 캘리포니안호를 호출해 보지만 통신사가 1인 근무로 취침 중이던 캘리포니안호는 끝내 이를 수신하지 못했다.[38]

1시 3분, 대량의 무선신호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타이타닉호의 사고가 꽤나 중대하고 심각한 상황임을 다른 선박들이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와중에 카르파티아호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고 속력인 15노트로 달려가고 있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1시 10분, 패닉에 빠진 주변 선박들이 미친듯이 무선을 날리다 못해 재밍이 오기에 이르자 올림픽호의 통신사 '어니스트 무어(Ernest James Moore)'는 참다 못해 \'STOP TALKING\'이라는 메세지를 보냈다. 1시 15분에는 타이타닉호로부터 400km 떨어진 RMS 발틱호(RMS Baltic)가 구조요청에 응해 현장으로 향했고 1시 20분에는 270km 떨어진 RMS 버지니안호(RMS Virginian)가 응답하여 현장으로 향했다.

1시 27분, 타이타닉호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구명정에 실어 탈출시키고 있다는 무선을 보내며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고 기관 동력이 끊어졌다는 말도 보낸다.

1시 35분, 타이타닉호는 다시 CQD SOS 신호를 반복해서 보내면서 기관실이 침수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타이타닉호의 무선 송신이 일시적으로 끊겼다.

1시 50분, 100해리(약 185km)까지 접근한 프랑크푸르트호가 무슨 일이야? 라고 다시 물어왔는데, 엉뚱한 소리에 답답해진 타이타닉호는 "Fool. You fool. Stand by and keep out.(멍청아, 이 멍청아, 방해하지 말고 그냥 대기해라)"라며 프랑크푸르트호를 타박했다.
독일 선적인 프랑크푸르트호는 사실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을 뿐, 가장 먼저 구조 신호를 들었고 가장 먼저 뱃머리를 돌린 선박이다. 이 시점에서 100해리까지 접근한 것도 프랑크푸르트호가 매우 과속하면서 타이타닉호를 향해 다가오고있었던 것이다. 거리가 멀었을 뿐. 이후 RMS 카파시아호가 생존자를 모두 구조하고 떠났을 때, 구조를 위해 오던 다른 선박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것도 프랑크푸르트호였으므로, 프랑크푸르트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던 셈이다. [39]

2시 10분, 전력이 약해져 신호가 미약해진 상태에서도 타이타닉호는 계속해서 조난신호를 보냈다. 이에 주변 선박들은 신호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말을 보냈으나 타이타닉호도 마찬가지로 다른 신호들을 들을 수가 없었다.

2시 17분, 'CQD DE MGY CQD DE(구조요청 여기는 MGY, 구조요청 여기는-)\'라는 송신을 끝으로 타이타닉호의 무선신호가 사라졌다. 전력이 불완전해지고 통신실의 침수가 시작되어 필립스와 브라이트가 타전을 중단하고 탈출했기 때문이다.
4.1.1.2. 신호탄과 항해등
파일:타이타닉 폭죽1-1.png 파일:타이타닉 폭죽1-2.png 파일:타이타닉 항해등1-1.png 파일:타이타닉 항해등1-2.png
영화 타이타닉에서 묘사된 신호탄과 항해등[40]
한편 타이타닉호는 캘리포니안호 등 무선 통신이 되지 않지만 근접해 있는 다른 선박이 있을 것으로 보고 꾸준히 로켓형 폭죽으로 된 신호탄을 쏘아 올리고 항해등을 점등하며 조난신호를 발산했다. 타이타닉은 강렬하게 빛을 집중해 쏘는 탐조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통상 항해등으로 조명 신호를 보냈는데, 항해등은 탐조등에 비해 조도가 미약한데다 배 자체의 등화가 너무 밝아서, 깜박임이 인근 선박에서 관측되지 못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호탄의 불꽃과 타이타닉 전체에서 나오는 조명 불빛은 9해리(약 16km) 떨어져 있던 캘리포니안호에서 희미하게나마 관측되고 있었다.[41]

영국 청문회 조사에 따르면 사고 당시 투묘중이던 캘리포니안호는 이미 사고 전날인 14일 오후 10시 10분에 남쪽 멀리에 희미한 불빛을 관찰했고 선장 스탠리 로드(Stanley Lord)와 당직이던 3등 항해사 그로브스(C.V. Groves)는 강한 밝기와 움직임을 봤을 때 여객선의 불빛으로 보인다고까지 판단한 상황이었다. 11시에 선장과 3등 항해사가 하번하고 이어 상번한 2등 항해사 허버트 스톤(Herbert Stone)은 11시 50분쯤 문제의 불빛이 번쩍이더니 움직임을 멈추는 듯한 것을 보았고[42] 이에 탐조등을 통해 모스 부호 신호를 시도해 보도록 지시해 5일 오전 1시까지 몇 차례 실시했지만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후 1시 10분에 번쩍이는 불빛(타이타닉의 신호탄)이 5차례쯤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이에 해도실에 있던 선장에게 보고했다. 선장은 불빛의 색상을 물었고 항해사는 흰색이라고 답했는데 당시엔 불빛 색상의 의미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있지 않아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구조신호로 즉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3] 결국 선장은 탐조등으로 신호를 계속 보내라고 지시하고 잠에 들었다. 2등 항해사는 1시 50분에 3번의 번쩍이는 불빛을 추가로 관측했고 2시 15분을 넘어선 불빛이 더이상 보이지 않자 선장을 깨워 이를 보고했다. 선장은 불빛 색상을 재차 물었고 모두 흰색이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후 불빛이 사라진 것에 대한 해석이 분분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5시 30분에 이르러서야 자고 있던 통신사 에반스를 깨워 밤중에 알 수 없는 불빛을 관찰했다는 걸 알려주며 주변 선박과 교신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마침내 타이타닉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조를 위해 침몰지역으로 이동했으나, 이미 막대한 인명이 사망하고 남은 생존자는 카르파티아호가 모두 구조했음을 프랑크푸르트호가 알려왔다.

참고로 청문회에서는 스탠리 로드 선장에 대한 질타가 쏟아졌는데 탐조등이 닿지 않아 소통이 안되는 상황에서 즉각 통신사를 깨워 연락을 시도하지 않은 것의 안일함과 그로 인해 유일하게 적시 도착이 가능했던 캘리포니안호가 구조에 나서지 않아 대참사로 이어진 점이 주된 이유였다. 이에 선장을 비롯한 캘리포니안호의 선원들은 상세미상의 배에서 보내는 알 수 없는 불빛이었고 결국 의미를 알 수 없고 희미하게 반짝이는 이 불빛이 마스트에 설치된 점멸등(Masthead flickering)일 거라고 짐작했다며 항변했다. 불빛이 없어진 이후론 누군가는 그저 멀어져서 안 보이는 거라고 하고, 누군가는 증기에 가려진 거라고 하고, 누군가는 별이 넘어간 거라고 하며 의견이 분분해 통신사를 바로 깨울 생각을 미처 못했다고 했다. 결국 정황상 고의성이 없었다는 점이 인정되어 따로 재판이나 처벌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선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원은 선사에서 해고되었고 이후에도 사회적으로 천민 취급되며 멸시받는 등 사회적 불이익은 막대하였다.[44]

4.2. 구명정 진수

파일:타이타닉 구명정 진수1-1.png 파일:타이타닉 구명정 진수1-3.png 파일:타이타닉 구명정 진수1-2.png 파일:타이타닉 구명정 진수1-4.png
구명정은 좌현과 우현 양쪽에서 하나둘씩 내려지기 시작했다. 1등 항해사 머독은 더 이상 여성과 아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남자를 태우는 것을 허용하는 등 비교적 남성에게도 관대한 대응을 했지만 라이톨러는 "여자와 어린이 먼저"를 "여자와 어린이"으로 받아들여 혼란을 막기 위해 여성과 어린이 우선의 관습을 철저히 실시했다.[45] 이게 현장에선 도리어 역효과를 내기도 했는데 정원이 덜 찼음에도 성인 남자라는 이유로 탑승이 거부되거나 우현에 비해 구명정을 내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등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실제로 머독이 맡은 우현에서 구명정을 절반 가량 진수시킬 동안 라이톨러는 겨우 한 척을 내릴 수 있었다. 다만 좌현에서 남성 승객의 구명정 승선이 100% 거부된 건 아니고 구명정에 선원이 한 명뿐이라는 여성 승객의 이의로 인해 선원 대신 타게 된 요트 선수와 몇 명의 노인 등 약간의 예외도 있었다. 1등실 승객들 중 소년 한 명이 조숙한 탓에 성인인 줄 알고 탑승이 거부될 뻔하다가 소년의 아버지가 "얘는 아직 13살이라고요!"라고 라이톨러에게 이야기해 탈출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 장면도 1958년판 영화에 나온다. 이에 대해서 옹호하자면 일부러 죽게 남겨둘 생각은 없었고 당시 구명정에 대한 인식은 탑승자들을 다른 배에 태운 뒤 돌아와서 또 태우는 식이었고 라이톨러 본인도 자리가 남는 구명정들이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고 한다.[46]

이때 수많은 3등실 승객들이 여전히 배를 헤메고 있었다. 대피훈련도 하지 못했는데 여러 구역이 철창으로 막혀 제한되어 있었고 배가 미로처럼 복잡했기 때문에 탈출에 지장을 빚었으며 일부 승무원들은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 못하거나 혼란을 막는다는 이유로 승객들의 통행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3등실의 상당수 가난한 승객들은 미국 이민을 위해 전 재산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짐에 대해 미련을 가진 승객들도 많았다. 거기에다가 이 배는 영국인과 미국인만 탄 게 아니라 미국 이주 목적으로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많았고 3등실 승객들 중에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승객들도 많았다. 영화에는 영어 안내판을 본 어느 아랍계 승객들이 영어사전을 뒤져가며 Deck(갑판)의 의미를 찾는 장면도 있다. 이 상황에서 여러 3등실 승객들은 그냥 탈출 시도를 포기한 채 자신들의 숙실이나 식당, 복도 등에 남아 지시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고 일부 승무원들은 상부와의 소통 부재로 그냥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수백명의 승객들이 식당에 남아 묵묵하게 탈출 지시를 기다리거나 같이 모여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존 에드워트 허트를 비롯한 승무원들과 바일스 신부 같은 승객들은 배 밑으로 내려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3등실 승객들을 적극적으로 인도해 도와주기도 했다. 항해사들에 의하면 다시는 올라오지 못한 선원들도 있었다는데 이 중 허트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단, 1등실 승객이 먼저 탈출하도록 3등실 승객을 가둬 두었다는 통설은 사실과 다르다. 전술하였듯 3등실 승객은 대부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이민 올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출항 전에 전염병이 미국에 유입되는 걸 막기 위해 미리 선의가 간단한 검사를 한 뒤 태웠다. 갑판으로 나가는 가장 빠른 길은 3등실과 1-2등실을 직접 연결하는 통로였는데 마찬가지로 미국 이민법상 전염병을 막기 위해 이 통로를 차단해 놓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충돌 직후의 혼란 속에서 이 통로를 개방하라는 명령이 상당히 늦게 전달되었다. 항해사들도 이 사실을 파악하자 즉각 선원들을 파견해서 밑에 갇혀있을 승객들을 구출하도록 했으며 구명정에 바로 태울 수 있도록 현측에 출입문[47]을 열라는 지시도 내렸다.

배는 우현의 손상에 의해 우현쪽으로 기울어졌다가 E 갑판의 여러 구역과 이어지는 "스코틀랜드 로드"라는 방수격벽이 없는 긴 복도에 물이 흘러들어왔고 이후부터 좌현으로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중앙계단에서는 맨 밑에서 물이 차오르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최하부의 기관부 선원들은 동력 유지 및 펌프로 물을 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려진 최초의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5번 보일러실에서 펌프 작업 도중 6번 보일러실의 격벽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기관사 2명이 익사한 것이다. 화부장 배럿은 사다리에 매달려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12시 40분쯤 우현에서 정원 65명짜리 7호 구명정이 겨우 28명을 태우고 처음으로 내려졌다. 곧이어 43분에 41명을 태우고 5호정이 내려졌다.

1시경 3호정(우현)은 32명이, 8호정(좌현)은 39명이 탔고 1시 5분경 경 1호정(우현)은 겨우 12명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1시 10분에 6호(좌현) 구명정이 28명을 태우고 내려졌는데 여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빙산에 부딪히고 있었을 때 조타 당직자였고 6호정의 지휘자로 탑승한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 빙산을 처음 목격했던 견시 프레더릭 플리트, 그리고 훗날 "불침자(Unsinkable)"라는 별명을 갖게 된 마거릿 몰리 브라운도 있었다.

4.3. 혼란 가중

파일:타이타닉 혼란가중1-1.png 파일:타이타닉 혼란가중1-2.png
1시 반쯤에는 해수면이 상갑판(B갑판 및 C갑판)의 선수에 도달해 잠기기 시작했다. 밑에서는 1등실 식당이 있는 D갑판이 침수되기 시작했으며 E갑판의 스코틀랜드 로드에 물이 꽉 차 좌현으로 기울어지고 다른 구역으로 흘러가 침몰 속도가 점점 빨라졌는데 몇몇 생존자들은 좌현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보다 더 심했다고 한다.

구명정도 하나둘씩 떠나가고 배가 몸으로도 느끼고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기울어짐에 따라 승객들도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함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혼란이 점점 가중되었다. 구명정도 이제 정원에 어느 정도 맞추거나 초과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사고도 약간씩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1시 20분에 16호정(좌현)이 약 40명을 태우고 내려졌는데 여기 타고 있었던 사람들 중 간호사 바이올렛 제솝은 후에 자매선 HMHS 브리타닉이 침몰했을 때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1시 25분경 14호정(좌현)이 내려지려 하자 공황에 빠진 승객들이 필사적으로 타기 위해 우르르 몰려왔다. 이에 라이톨러의 지시로 14호정에 탄 5등 항해사 로우는 혼란을 저지하기 위에 허공에 대고 웨블리 리볼버를 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aving_the_sinking_liner.jpg
화가 찰스 딕슨의 그림
1시 35분경 11호정(우현)은 정원을 다섯 명 초과해서 내려졌고 배에서 펌프질로 빠져나오는 물이 들어갈 뻔했지만 가까스로 피했다. 13호정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문제를 가까스로 피했으나 밧줄에 문제가 생겨 1시 40분경 옆에서 함께 내려지던 15호정은 바로 위에 내려져 깔리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다행히도 15호정에 타고 있던 화부장 바렛을 포함한 선원들이 아슬아슬하게 밧줄을 잘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구명정이 하나둘씩 내려짐에 따라 이제 후미로 몰려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시 41분경에는 15호정(우현)이, 1시 45분에는 2호정(좌현)이 내려졌다. 이때 몇몇 외국인들이 타려 했지만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권총으로 위협해 쫓아냈다. 존 제이콥 애스터는 어린 아내를 태우고 아직도 빈 공간[48]이 많은 것을 보고 타도 되냐고 물었으나 라이톨러에 의해 거절당했다. 1시 50분경에 내려진 구명정 10호정(좌현)에는 어떤 여성이 배 사이에 떨어져 끼었다가 구조되었다. 같은 시각 4호정(우현)이 내려졌다.

어떤 승객들, 특히 탑승이 거부된 성인 남성들 중 몇몇은 구명정에 타기 위해 구명정을 내리고 방치된 줄을 타거나 물에 뛰어들어 구명정까지 헤엄쳐 가거나 아예 선원들의 제지를 뚫고 뛰어들기도 하였다. 어떻게든 구명정에 오르기만 하면 내려가는 중이거나 다 내려진 경우 쫓아낼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고 익수자는 일단 구조의 의무가 있는 사람이니 별 말 않고 건져줬다. 대부분의 구명정이 정원 미달이어서 여유 공간이 있었고 다 내려진 뒤라면 공중에서 내릴 때보단 좀 더 태울 수 있으므로 구조에 거부감을 표하는 이들이 거의 없기도 했다. 물론 이 와중에 부상자들도 생겨났다.
파일:타이타닉 최후의 순간1-2.png 파일:타이타닉 최후의 순간1-3.png
접이식 구명정 C호정(우현)이 2시 정각에 내려지기 직전 두 사람이 뛰어내려 탔는데 한 명은 가족을 버리고 도망간[49] 성인 남성 승객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화이트 스타 해운의 회장이자 배의 선주 브루스 이스메이였다. 그는 이 때문에 돌아와서 욕을 꽤 먹었으며 책임을 지고 회사에서도 사퇴했다. 이 구명정은 숨어 탄 네 명의 중국인을 비롯해 외국인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상적으로 내려진 구명정[50]은 접이식 구명정 D호정(좌현)으로 2시 5분에 내려졌다. 이때 해수면이 A갑판까지 도달해 산책로에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상용[51]으로 선교 위에 올려진 접이식 구명정 두 대를 제외한 모든 구명정이 떠나자 선장은 총원 퇴선 선언을 하고 남은 선원들에게 모두 제 살 길을 찾으라고 했다. 남은 사람들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살기 위해 발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배에 남은 사람들은 남은 항해사 네 명과 함께 진수되지 못한 접이식 구명정 2척을 기다리거나 후미 쪽으로 달아나거나 바다로 뛰어들었다. 배가 기울며 프로펠러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배에 남기로 한 사람들도 있었다.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즈 백화점을 소유한 스트라우스 부부는 금슬 좋은 노부부였는데 남편 이시도르 스트라우스가 노인의 경우 남성이라도 선원들이 대체로 태워주니 타라는 말에 다른 남자들이 구조되기 전까지는 타지 않겠다며 구명정 승선을 거절하자 아내도 선원의 구명정 승선 제안을 거절한 다음 하녀 엘렌에게 자신의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자기 대신 구명정에 태운 뒤 배에 남아 남편과 운명을 같이했다.[52] 영화에서는 물이 들어오는 선실 침대에 둘이 함께 껴안고 누워 있는 장면으로 등장하는데 이 두 사람의 내용은 2016년 3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소개된다. 철강업자 벤저민 구겐하임[53]은 현지처와 하인을 구명정에 태운 뒤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했다. 턱시도로 갈아입은 그는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라고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 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배의 설계자 토머스 앤드루스도 비슷한 길을 택했는데 목격된 그의 마지막 모습은 흡연실에서 구명조끼를 벗은 채 그림을 응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4.4. 최후의 순간

파일:타이타닉 최후의 순간1-1.png 파일:타이타닉 최후의 순간1-4.png
2시 10분에는 바닷물이 최상층인 보트 갑판까지 다다랐다. 그때쯤 체육관 바깥쪽 휴식터에서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맡은 악단이 마지막 음악을 연주했는데 어떤 곡이 연주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곡은 ' Nearer, My God, to Thee'[54]와 영국 민요 'Autumn'(가을)이다. 전자는 침몰현장에는 없었던 그의 가족이나 동료들이 그가 죽을 때 마땅히 연주했을 것이라고 주장한 내용이고 후자는 현장에 있었던 타이타닉의 무선사가 증언한 내용이다. 선장은 확성기를 쥔 채로 선교에 들어가 그대로 그곳에 남았다.

2시 12분경 마지막으로 남은 구명정인 접이식 구명정 A호정(우현)과 B호정(좌현)을 선원과 승객들이 힘을 합쳐 선교 옥상에서 내렸으나 A호정은 캔버스가 제대로 덮이지 않아 누수가 일어났고[55] B호정은 내려지던 중 받치던 노가 부러져 뒤집혀 버렸다.

2시 15분에서 17분 사이에는 바닷물이 마치 파도가 흽쓸듯이 보트 갑판을 본격적으로 삼키기 시작했다. 해수가 이제 배 위에서도 들어오면서 배가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통신실도 침수되기 시작했고 한계까지 버티며 구조신호를 보내던 통신사 잭 필립스와 조수 해럴드 브라이트도 더 이상은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구조 신호를 보낸 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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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접이식 구명정 두 척은 제대로 진수되지 못한 채 물에 흽쓸려 갑판 위를 떠다녔는데 접이식 구명정 B호정은 뒤집힌 상태에서 여러 명이 매달려 있었고 A호정은 물이 반쯤 찼다. 이때 몇몇 사람들(아치볼드 그레이시, 찰스 라이톨러, 잭 테일러 등)이 환기구 때문에 빨려들어갔지만 다시 보일러실에서 발생한 뜨거운 공기가 올라오면서 물 속으로 빠져나와 뒤집어진 B호정에 도달할 수 있었다. 2등 항해사 라이톨러는 그레이시 대령과 테일러 등과 함께 B호정에 매달려 살아남았지만 수석 항해사 와일드, 1등 항해사 머독, 6등 항해사 무디는 A호정을 풀려다가 물살에 떠내려갔고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던 중 연돌 1호기가 수압과 기울어진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선교루 쪽으로 쓰러지면서 물에 빠져 있던 사람들 여럿이 깔려 죽고 말았다. 근처 접이식 구명정들은 아슬아슬하게 피했으나 그 여파로 생긴 파도가 접이식 구명정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쓸어내리는 동시에 구명정을 배로부터 밀어냈다. 잠시 후 중앙계단의 유리 돔과 창문이 파도에 의해 깨져 물이 쏟아져 내렸다. 잠깐 후 2번 굴뚝이 석탄가루의 폭발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배가 기울어지면서 선내의 온갖 가구, 기관, 잡기 등등이 쏟아지며 굉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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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 18분, 깊은 곳에 있는 선실로부터 굉음이 네 번 발생한 뒤 침몰 속도가 가속되었다. 배가 더 기울어지자 잡을 것을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 또한 혼란 속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졌다.[56] 정전이 발생해 사방이 어두워지는데[57] 곧바로 유입 해수의 하중을 견디지 못한 선체는 2호기와 3호기 연돌 사이의 신축 이음을 중심으로 금이 가면서[58] 폭음과 함께 두 동강으로 쪼개졌다. 선체가 쪼개짐과의 동시에 3호기 연돌이 붕괴되어 바닷속으로 낙하하였다.[59] 다만 정전으로 인한 어둠 때문에 이는 소수만 목격했고 구명정에 탄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목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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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선수 부분은 잠기고 후미 부분은 분리되어 잠깐 떠 있는 듯했지만 후미도 좌측으로 돌면서 다시 빠른 속도로 거의 수직으로 기울었고 잡을 것을 찾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마침내 2시 20분 경, 타이타닉호는 수면 아래로 완전히 수장되었다.

이 때 구명정들은 빨려들어갈 것을 염려하여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선체 후미는 엘리베이터처럼 비교적 느리게 침몰했고 빨아들이는 상황 같은 건 없었다고 한다. 후술하듯이 당시 후미에 매달려있던 배 제빵장 찰스 조그힌은 머리도 젖지 않았다고 한다.

====# 선박이 어떻게 두 조각으로 나눠졌는가? #====
1985~현재까지의 모든 타이타닉 두동강 가설 모음
타이타닉 잔해 발견 시기인 1985년 이전까지는 두 동강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침몰 직후 타이타닉이 두 동강나는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생존자들에 의해 논쟁이 시작되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증언한 사람이 더 많았고 청문회에서 배가 두 동강으로 파손되지 않았다는 화이트 스타 라인의 주장이 인정되어 두 동강설은 74년간 부정되었다. 그래서 타이타닉의 최후(The Titanic, 1953), 타이타닉호의 비극(A Night To Remember, 1958) 등 1980년대 이전의 타이타닉 소재 영화에서는 배가 두 동강나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가라앉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1985년 9월 1일 미국 우즈홀 해양연구소 소속 로버트 밸러드 연구팀의 탐사로 각각 600m 떨어져 있는 두 구역의 잔해가 발견되었고 끝내 두 동강설이 정설로 밝혀졌다. 당시 뒤집어진 구명정 B호정에 매달려 살아남은 1등실의 젊은 생존자 잭 테이어(Jack Thayer, 1894~1945)의 증언을 다시 보면 상당히 정확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양손을 모은 채로 손가락을 V자로 만든 뒤 두 손을 떨어뜨리는 묘사가 있다. 즉 2번 굴뚝과 3번 굴뚝 사이가 갈라졌다는 말로, 1997년 영화판에서조차 오류를 범했던 파손 위치까지 정확하게 증언했던 것이다.[60]

생존자가 7백 명이 넘는데도 배가 두 동강이 났다고 정확히 증언을 한 사람은 오히려 소수였을 정도로 사고 현장을 정확히 목격한 사람이 극소수였다는 것에 굉장히 의아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해상근무를 해 본 경험이 있다면 알겠지만 원래 불빛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서의 시야는 보름달이 뜬 날이 아닌 이상 한 치 앞도 전혀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암흑천지다. 게다가 두 동강 나기 직전에 정전이 되었는데 밝다가 갑자기 어두워지면 더 안 보인다. 그러나 모든 생존자들이 이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어서 몇몇 생존자들은 선미의 거대한 실루엣이 다시 수면 위로 낙하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으며 잭 테이어는 확실히 두 동강이 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단, 어둠 속이기는 했지만 소리는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때 두 동강이 나는 것을 목격하지 못한 생존자들도 정전 이후 발생한 "끔찍한 굉음"을 들었다고 공통적으로 증언했는데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고 했으며 보지 못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당시 상황과 소음, 그리고 날이 밝아올 때 침몰 현장에 떠 있는 잔해들을 통해 배가 두 동강 났으리라는 짐작을 했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 두 동강이 날 당시 많은 생존자들이 정전 이후 보일러의 폭발이나 끊어진 전선으로 인해 발생한 스파크로 보이는 작은 폭발이나 화재를 보았다고 한다. 당시 제빵장 조그힌을 포함해 배 위에 남아있었던 소수의 생존자들은 갑자기 배의 각도가 급격하게 바뀐 것을 느꼈다고 한다.

배가 어떻게 두 조각으로 나뉘어졌는가에 대한 추측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해외 포럼인 타이타닉 위키에서는 무려 9개의 가설을 소개하고 있다. 가장 대중적인 가설은 하향식(Top-down) 가설이며 타이타닉(영화)에 적용된 가설은 '카메론 영화판 가설'로 별도로 구분되어 있다.

다음 상황들은 이미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1. 3번 굴뚝과 그것을 지지하는 갑판은 선체 분리 직후 정면으로 무너져 내렸다.
2. 최후에는 선미가 거의 수직으로 기울었다.
3. 완전히 가라앉기 전 선체가 수직축을 중심으로 반시계방향으로 천천히 회전하였다.
4. 굉장히 느리게 침몰하여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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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뉘어지기 직전까지 타이타닉 선수와 선미에 가해진 힘.

파일:Titanic Breakup 유형.jpg

하지만 세부적으로 기울어진 선박에 가해진 힘 중 위에서 잡아당기는 힘과 밑에서 뭉치려는 힘 중에 어떤 힘이 어떤 식으로 작용해 두동강 났는지에 따라 대표적으로 Top-down, 그리고 Bottom-up 가설이라는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뉜다. 현재 다수설과 제임스 카메론의 하향식 가설, 그리고 영화에 적용된 가설은 Top-down식, 그리고 Roy Mengot의 가설은 Bottom-up 가설을 따르게 된다.

Top-down 가설은 위에서부터 파괴되며 아래로 쭉 내려가는 가설이며, 바나나를 두 동강낼 때[61] 바나나가 위에서 반대편 껍질까지 갈라지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Bottom-up 가설은 밑에서부터 수축력으로 파괴되며 위로 쭉 올라가는 가설이며 보통 원통 튜브를 구부릴 때 밑에서부터 위로 굽어 버리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 현재의 다수설 #=====
선체가 크게 4개 부분으로 분리되는 현재의 다수설
밝기 보정효과 없이 실제 생존자들이 목격했을 시야를 연출한 영상

2015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은 'On A Sea Of Glass'에 소개된 현재까지 가장 신빙성 높은 가설이다.

선체가 기울어 최대 23도까지 도달할 동안 선미에서부터 가해지는 강한 하중 때문에 3번 연돌 부분 용골과 구조물 전체에 응력이 누적되었고 완전 침몰 3분 전인 2시 17분까지 선체는 이 누적된 피로 때문에 3번 연돌 하단의 구조물들이 파괴되며 끊임없이 우르릉 하는 소리를 냈다. 결국 신축 이음이 버티지 못하고 상부갑판으로부터 천천히 갈라지자 하방 압축력에 의해 위쪽으로 힘이 작용하는 용골이 엔진을 들어올리면서 선체는 크게 4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졌다.(선수부, 선미부, 전방 구조물, 후방 구조물) 분리와 동시에 선미 절단부로부터 강한 스파크가 발생하였고 일부 생존자들은 이를 목격하였다.

분리 직후 선미 부분에 매달려 하부 구조물의 지지 없이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전방 구조물과 그 위의 3번 굴뚝은 결국 정면을 향해 무너져내려 수면 아래로 잠겼다.

이후 선미부분은 다시 천천히 잠기기 시작해 거의 수직으로 기울었고 마침내 수직축을 중심으로 천천히 회전하며 가라앉았다.

=====# 하향식 가설(Top-down Breaku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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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포함한 여러 다큐멘터리와 유튜브 7천만 뷰를 달성한 'Titanic:Honor And Glory'등 수많은 매체를 통해 소개되었던 이론이다. 2012년은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100주기가 되던 해로, 여러 특집 방송과 다큐멘터리 방영, 타이타닉(영화) 3D 재개봉 등의 인기에 힘입어 다시금 타이타닉 신드롬을 불러온 해였다. 이 시기의 주류 의견이었기에 현재까지도 타이타닉(영화) 가설과 함께 현재까지 가장 대중적인 가설이다. 이중저(Double Bottom)가 완전히 부러지지 않고 버틴 원리를 바나나 껍질로 예로 든 제임스 카메론의 영향으로 바나나 이론(Banana Theory)이라고도 부른다.

이 가설의 골자는 선체의 분리가 상부 갑판에서부터 하향식으로 시작하여 용골 끝까지 그대로 전달되어 마치 칼로 절단하듯이 나뉘어졌다는 것이다. 선체 기울기가 20도에 다다랐을 때 이 분리는 대략 용골 부분에서 멈췄고 그때문에 이중저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아 먼저 가라앉은 선수 부분이 선미 부분을 잡아당기게 만들었다. 이중저는 선미 쪽 선체의 절단면이 완전히 잠길 즈음에서야 겨우 분리되었고 결국 선미 역시 빠르게 침몰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이중저란 선저 파손 사고시 해수의 유입을 막도록 이중으로 만든 바닥인데 이 부분은 내구성이 높다 보니 두 동강이 난 뒤에도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이중저까지 같이 부러졌다면 선미가 선수와 완전히 분리돼 조금 더 오래 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 Mengot 가설(Bottom-up Breakup) #=====
파일:Mengot_Titanic_Condition 1.jpg 파일:Mengot_Titanic_Condition 2.jpg
위키백과의 타이타닉 문서에서 하향식 가설과 함께 비중있게 소개하는 가설이지만 하향식 가설과 카메론판 영화 가설만큼 대중적이지는 않다. Mengot 가설에 따르면 선미부분으로부터 가해지는 하단 압축력으로 인해 바닥부터 파괴가 시작되었다.

Roy Mengot은 이중저가 하향식이나 다수설처럼 선수와 선미를 연결시킬 힘이 없다고 판단하며 오히려 뭉쳐지는 힘 때문에 부서지기 쉽다고 판단하였다. 때문에 이 가설에서는 이중저가 먼저 파괴되며 이중저의 두 조각이 위로 솟게 된다. 타이타닉은 상부 B갑판[62]에 의해 연결된 채 다시금 아래로 기울었으며, 솟은 이중저로 인해 선체 하부가 모두 파괴되어 해저 방향으로 쏟아진 이후에야 마침내 선수와 선미가 분리된다. 이 가설에 따르면 선체의 파괴가 수면 아래에서만 이루어지므로 배가 분리된 것을 보지 못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처럼 멀리서 보면 배가 두 동강 나는지 확인하기 어려워진다. 이 가설을 적용한 실시간 사고 재현 영상도 존재한다.

비슷한 이론으로 Top-Cant 가설이 있는데 이 가설은 바닥 구조물이 분리된 이후에도 상부 구조물로 버티다 한계 응력에 다다른 순간 한순간에 부러진다는 차이점이 있다.

=====# 타이타닉(영화) 가설 #=====

타이타닉(영화)에서 묘사된 방식과 같다. 선체가 대략 45도에 이를 정도로 가파르게 기운 상태에서 3번과 4번 연돌 사이에서 두 조각으로 나뉘었는 데 그 손상이 용골까지 부러뜨리지는 못하며 그 손상된 틈으로 해수가 급격히 밀려와 선수부와 선미부가 동시에 수면 아래로 잠기기 시작했다. 그 후 선미 부분이 선수 부분의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다시 앞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완전히 수직으로 선 후에 선수부가 분리되었으며 후미 부분은 에어포켓 효과로 한동안 수직으로 떠있다가 침몰하였다. 현재 이 가설은 영화 개봉 후 여러 연구와 시뮬레이션을 거쳐 정설과는 다소 거리가 생겼다.

=====# V형 분리 가설 #=====
2006년 이중저 잔해를 처음 발견한 해저 탐사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설으로 선체가 수면 아래에서 V자로 꺾여 분리되었다는 가설이다. 당시 신선한 충격을 준 가설이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로까지 만들어졌지만 현재는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2번째 가설은 선체가 수직으로 가라앉으면서 완전히 선체가 V자로 분리되면서 가라앉는(?) 가설인데 이 가설은 완전히 불가능해서 레딧 등 인터넷에서는 쓰레기 가설로 취급받고 있다.[63]

4.5. 해저로의 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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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타이타닉의 잔해는 불과 5~6분 만에 대서양 3,800미터 아래 해저에 가라앉았다. 동강난 선체 중 선수부분은 전면으로 낙하하여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였지만 선미부분은 부서진 면을 아래로 해서 수직으로 침몰하였기 때문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나서 선내의 에어포켓으로 엄청난 양의 해수가 밀려들어갔고 그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선체 외벽 일부가 뜯겨져 나갔다.[64] 이후 선미부분은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며 극심하게 훼손되었고 해저에 다다랐을 때는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65] 이 때문에 정확하게 선체가 파괴된 위치를 알기 어려워졌고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그 파괴 위치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오류를 범해 버리게 된다.

4.6. 침몰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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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 20분경, 배가 완전히 침몰하자 배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차가운 북대서양 한복판에 버려졌다. 익사한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천여명의 생존자들은 넉넉히 지급된 구명조끼와 많은 부유물 덕에 침몰 직후엔 대부분 살아 있었다. 진짜 문제는 당시 바닷물의 온도는 영하 2℃[66]였다는 것이다.[67] 바닷물에 빠졌다가 나온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의 회상에 따르면 '천 자루의 칼로 몸을 찌르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침몰 원인 자체가 빙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약 침몰 사고가 일어난 지역이 더운 바다였다면 적지 않은 사람이 바다 위에서 구조될 수도 있었다.[68] 당장 타이타닉호의 자매함인 브리타닉호만 봐도 침몰 자체는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침몰한 위치가 수온이 따뜻한 지중해라 저체온증으로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69]

깜깜한 밤, 배가 침몰한 곳에서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고통과 공포 속에서 한꺼번에 지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비명과 아우성이 울려퍼졌고 이는 구명정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PTSD를 남겼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어떤 생존자는 살아남은 후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서도 야구 경기를 보러 가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관중들의 함성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서였다고 한다. 배가 두동강나면서 배에서 떨어져나온 수많은 쇳조각 잔해들도 바닷물에 버려진 조난자들에게 부상 내지는 치명상을 입힌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명정에 탄 생존자들은 물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이 구명정을 끌어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현장으로 돌아가기를 주저했다. 물론 5등 항해사 해럴드 로우 같이 앞장서서 구조 작업을 한 경우도 있긴 했지만 가장 적은 탑승수인 12명을 태운 1호정에 탑승한 화부 헨더릭슨은 현장에 돌아가서 떠 있는 사람을 건져내자고 요구했으나 더프-고든 부부와 배를 맡은 선원 시먼스가 반대했고 나머지는 말이 없었고 결국 무산되었다. 5호정의 3등 항해사 허버트 피트만도 현장에 돌아가려고 했으나 몇몇 사람들이 이에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6호정에서는 마거릿 몰리 브라운이 현장에 돌아가서 사람들을 구하자고 요구했고 구명정에 탄 다른 사람들도 이에 동의했으나 배를 맡은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사람들이 배를 끌어당길 것이라며 거절했다.

한편 현장에서 비교적 가까운 약 50m 거리에 있었던 4호정에서는 완전히 침몰 전 헤엄쳐 온 3명이, 침몰 후에는 5명이 헤엄쳐와 구조되었는데 이 중 1명은 이후 구명정 위에서 사망했다. 접이식 구명정 D호정에서는 마지막 순간에 헤엄쳐온 한 명을 구조했다. 현장에 바로 있었던 뒤집어진 접이식 구명정 B호정에서는 30명이 넘는 사람들(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 아치볼드 그레이시, 잭 테일러 등)이 매달리고 있었는데 주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장에서 노를 저으며 느리게 벗어나야 했다. 이 중 구출되지 않은 한 남성은 "알겠소. 행운을 빌고 하느님의 축복이 있길 빌지요"라고 했다고 한다.[70] 이 남자의 정체는 모르지만 당시 구명정에 타고 있던 생존자들에게는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선장이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선장은 조타실에서 사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71]

물에 떠 있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침몰로부터 20분이 지나면서 점차 동사하고 익사해 가면서 점점 줄어들고 흐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14호정의 5등 항해사 해롤드 로우가 구명정들을 재편성한 뒤 지원자는 남기고(선원 7명, 승객 1명) 다른 사람들을 다른 구명정으로 옮겨 구조에 나섰으나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다에 있던 사람들은 저체온증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4명만을 구조할 수 있었고 이 중 3명이 생존했는데 처음으로 구조된 사람은 중국인이었다.

한편 배가 침몰할 때 제대로 내려지지 못하고 파도 위를 떠다니던 접이식 구명정 A호정과 B호정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물에 빠져 있던 사람들보다는 덜하지만 거의 지옥 같은 경험을 겪고 있었다. 뒤집어진 B호정은 안에 있는 공기가 불안정해지고 파도까지 일어서 모두가 구명정의 균형을 맞춰야 했고 몇명은 이전에 동사하거나 도중에 힘이 빠지면서 익사했으며 물이 찬 A호정에서는 반이 동사했다. 이 두 접이식 구명정에 남은 생존자들도 다른 구명정에게 구조된다. 그나마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B호정의 생존자들을 적절히 지휘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버티는 데 성공했다. 라이톨러가 구조된 직후 한 말에 따르면 카르파티아호가 30분만 늦게 구하러 왔어도 B호정은 침몰했을 거라고 한다.[72]

이 때 바닷물에 있었던 사람 중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은 제빵장인 찰스 조그힌이었는데 뒤집어진 B호정에 매달렸다가 자리가 다 찼다며 거절당했지만 타고 있던 누군가가 사망하고 그 시신이 버려져 자리가 남자 끌어올려져 살아남았다. 침몰 후 무려 3시간이나 버티며 살아남은 이유를 술을 잔뜩 마셨기 때문이라고 본인은 주장했지만 사실은 머리가 젖지 않는 등 여러 이유로 운이 좋았을 뿐이다. 도리어 술을 마시면 저체온증이 오기 쉬우므로[73] 좋을 게 하나도 없다. 1958년작은 아무래도 주인공이 라이톨러이므로 침몰 직후의 B호정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데 조그힌이 침몰하는 도중에 자기 방으로 돌아와 숨겨두었던 술을 꺼내 마시며 이후 술에 취해서 구명정 위치를 묻는 주연 일행들에게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한다는 대사를 날린다. 침몰 이후 위에 적힌대로 구명정에 건져지자 딸꾹질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4.7. RMS 카르파티아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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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나드의 홍보 전단에 등장한 카르파티아와 「 타이타닉호의 비극」에서 묘사된 당시 상황

RMS 카르파티아호는 타이타닉의 선박사 화이트 라인 사와 경쟁 관계였던 큐나드 라인사의 여객선으로, 뉴욕에서 출발해 상당수 미국에서 여행을 가거나 유럽으로 돌아가려는 승객들을 싣고 타이타닉의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4월 15일 오전 0시 11분경 카르파티아호의 아서 로스트론(Arthur Rostron) 선장은 자고 있던 중 무전사 헨리 커텀으로부터 타이타닉이 침몰하고 있고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보고받았는데 처음에는 뭔 일이길래 이렇게 깨우냐고 짜증을 내다가 구조 신호라는 말을 듣자마자 정신을 차렸다. 선장은 27년 항해 경력에서 구조는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철저한 준비를 하고 사고 현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갈 것을 지시하고 다음을 준비했다.

즉, 타이타닉호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최선의 조치를 취했다.

표류한 타이타닉호의 구명정들은 바다의 파도가 점점 거칠어지고 특히 접이식 구명정들은 이미 물이 들어오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다.

카르파티아호는 전속력으로 항해했지만 최대 속도가 17.5노트(약 시속 31.48km)에 그쳐[75]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4시였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른 타이타닉의 완전 침몰 시각은 2시 20분경이므로 침몰 1시간 40분 뒤에야 도착했다. 그나마 이조차도 카르파티아호가 선박의 동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여 필사적으로 쥐어짜고 자신들도 빙하에 부딪히거나 보일러가 폭발할 위험을 감수한 끝에 예정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침수된 접이식 단정 A, B호정의 생존자들은 카르파티아가 빠르게 도착한 덕에 그 추위에도 많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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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파티아호 선상에서 촬영한 D호정의 모습으로, 아래 사진의 통상 구명정과 달리 선체 겉부분에 방수천을 덮은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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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파티아호 선상에서 촬영한 번호 불명의 구명정 2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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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정을 구조하는 카르파티아호

카르파티아호의 불빛은 이미 오전 3시 30분부터 볼 수 있어서 생존자들이 매우 환호했지만 모든 생존자를 인양하는 데는 몇 시간이 더 걸렸다. 오전 4시쯤 구명정 4호정을 최초로 발견하여 구조했고 약 4시간 30분 동안 12호정을 마지막으로 20척의 구명정에 타고 있는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안타깝게도 구조가 진행되는 동안 5명이 구명정 위에서 저체온증으로 추가로 사망했다. 선원들은 분주하게 생존자들을 위해 따뜻한 음료와 스프, 담요, 의료 서비스를 곳곳에 제공했으며 승객들도 생존자들에게 옷, 음식, 세면도구 등을 빌려주며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한다. 이 무렵 카르파티아호의 선원들과 승객들은 바다에 20개가 넘는 거대한 빙산들과 타이타닉호의 잔해들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오전 8시 30분에 마지막 생존자를 구조하고 나서 SS 프랑크푸르트를 선두로 45분 후 다른 배들도 구조를 위해 근접한 위치까지 달려왔지만 이미 다른 생존자들은 발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프랑크푸르트호에서는 추가 수색 및 구조를 위해 본인들도 침몰 위치까지 가겠다고 전했으나 카르파티아호는 이미 더 남은 생존자가 없다며 만류했고[76] 타이타닉호의 자매선이던 화이트 스타의 RMS 올림픽호가 회사 차원에서 책임을 지기 위해 생존자들을 인계받을 것을 제안했지만 로스트론 선장은 이제 겨우 다 태웠는데 생존자들을 또 옮기면 불편함만 줄 테고 무엇보다도 올림픽호는 타이타닉호의 자매선이라 거의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갑자기 나타나면 타이타닉의 유령선으로 오해하거나 심리적인 불안감을 줄 것이라고 판단했고[77] 이스메이 회장도 이에 동의하여 거절했다. 대신 카르파티아호에는 타이타닉호의 생존자들을 구호할 충분한 의약품과 물자가 없었기 때문에 출발지였던 뉴욕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원래 목적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피우메(현 크로아티아 리예카)였는데 생존자들을 위해 이 정도까지나 불편을 감수한 것이고 승객들 역시 이해해 줬다. 카르파티아호는 속도를 줄이고 침몰 현장으로 돌아가 혹시나 있을 다른 생존자들을 찾았지만 단지 1구의 시신만 인양할 수 있었다. 대신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도식을 열었다. 뒤늦게 달려온 화물선 캘리포니안호에게 잔해를 더 뒤져 보라고 부탁하고 오전 8시 50분에 미합중국 해군의 정찰 순양함 USS 체스터 #의 호위를 받으면서 뉴욕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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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호 승객 전원 구조,
핼리팩스로 예인 중
1912년 4월 15일자 《이브닝 메일》의 오보.

한편, 당시 육지의 기자들은 이 대참사에 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당시 부족했던 무선통신 기술 때문에 실시간으로 날아오는 모스무호들은 잡음이 왕창 껴 있었고, 북대서양에서 항해 중인 모든 배들이 패닉에 빠져 통신망으로 타이타닉 관련 정보를 계속 퍼트렸기 때문에 일상적인 무선 통신에 중대한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 그 와중에 연료 부족으로 인해 표류한 SS 도이칠란트 호 캐나다 핼리팩스로 예인되어 간다는 통신이 타이타닉 생존자들의 구조 통신이랑 겹치는 바람에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박았지만, 손상만 조금 입고 예인 중이다'라는 소문이 퍼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타이타닉호가 캐나다로 무사히 견인 중이라는 전대미문의 오보가 발행되기도 했다. 다음날인 4월 16일에야 비로소 오보는 정정되었고 때문에 그냥 가벼운 사고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은 신문을 보곤 전부 경악했다.

카파시아호는 배 자체가 썩 빠른 속도를 못 냈고 뉴욕으로 돌아가는 항로가 빙산, 안개, 폭풍, 거친 파도 등 악천후의 영향, 그리고 침몰 사고를 겪은 직후라 보다 조심해서 항해하는 등의 이유로 타이타닉이 침몰 지점에서 하루만 더 항해하면 도착했을 곳을 나흘이나 소모한 끝에 4월 18일 뉴욕 항에 입항했다. 타이타닉호의 생존자들과 그들이 탔던 구명정들을 항구에 내려놓으며 구조 작업을 완수하였다. 뉴욕 항은 사고 소식을 들으려는 수만 명의 사람들로 북적였고 취재하려는 기자들도 많았지만 로스트론 선장은 생존자들의 휴식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 기자들에게 취재를 자제할 것을 요구하며 배에 올라오게 하는 것을 금지했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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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파티아호가 입항 후 뉴욕항에 내려놓은 타이타닉호의 구명정들과 조사를 위해 올라탄 조사관들.

아서 로스트론 선장은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1912년 미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수여받았다. 생존자들은 고마운 마음에 돈을 모아 사례금을 전달했지만 그는 그 돈을 하나도 받지 않고 대신 생존자들의 구조를 도와준 자신의 선원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활약했고 1926년 그동안의 군공을 인정받아 2등급 대영제국 훈장(KBE)도 받았다. 훈장 등급이 기사 서임 대상에 해당하는 2등급이었으므로 이 때 경(Sir) 칭호도 함께 받았다. 로스트론 선장은 1940년 11월 4일 폐렴이 악화되어 사망했으며 웨스트앤드 교회의 묘지에 장례를 지냈다.

안타깝게도 RMS 카르파티아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1918년 7월 17일에 독일 제국 해군 잠수함 U-55의 어뢰에 맞고 침몰하면서 그 영웅적인 함생을 끝마쳤다. 침몰한 위치는 아일랜드 패스트넷 에서 약 190 km 떨어진 지점이다.

5. 시신 수습과 장례

4월 14일로부터 며칠 후 시신 수습을 위해 해저 전선 부설선인 CS 맥키-베넷(Mackay-Bennett)호를 포함한 몇몇 배들이 출항했다. 베넷호에만 70명의 수습 작업원과 100개의 , 시신 냉장용 100톤의 얼음 등을 탑재했다. 베넷호는 바이올리니스트 윌리스 하틀리, 미국의 갑부 존 제이콥 애스터, 이시도르 스트라우스 등 1등실 승객, 116구의 3등실 승객 등의 유해를 수습했다.

총 328구의 시신이 인양됐는데 이 중에서 119구의 수장 장례를 치르길 희망하는 유가족의 동의를 얻은 수장 희망자들의 시신과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연고자가 없는 시신, 연고자도 있고 신원도 확인된 일부 3등실 승객들, 선원들의 시신은 영국 근해에서 수장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선원들은 본래 바다가 자신의 고향이라는 의미로 바다에서 죽은 선원은 자신의 고향 바다에 돌려보내는 수장이 일반적이었지만 본래 육지로 옮겨 장례해야 할 연고자도 있고 신원도 확인된 일부 3등실 승객들까지 수장한 것은 배의 협소한 공간으로 시신을 전부 싣고 갈 수도 없다는 점도 있었고 수배된 배들이 대부분 1등실 생존자나 유가족들이 낸 비용으로 출항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우선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물론 법적, 도덕적 문제로 3등실 사망자의 유가족들에게 절차를 설명하고 사전 동의를 얻었다.

수습된 시신 중 205구의 시신은 캐나다 핼리팩스에 매장 형식으로 안장되었다. 윌리스 하틀리는 태어난 고향인 잉글랜드 콜른에 안장되었고 하틀리의 장례식에는 4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런던의 침례교회 담임목사로서 2등칸에 탑승한 존 하퍼 목사는 영국 런던의 덴마크 힐에 매장 형식으로 안장되었고 뉴욕 메이시즈 백화점의 소유주 이시도르 스트라우스는 카네기 홀에서 장례가 치러지고 브루클린에 있는 베델 묘지의 Straus - Kohns 가족묘에 화장 후 납골 안치되었지만 그의 부인의 시신은 찾지 못했고 스트라우스의 가족묘의 부인을 위한 유골함 자리는 비워져 있다. 최고의 갑부 존 제이콥 애스터 4세는 뉴욕 맨해튼의 트리니티 교회 묘지에 묻혔다.

시신이 수습되지 않았지만 시신 없이 장례를 치른 경우도 있는데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과 그의 충직한 시종 빅터 가글리오 비서가 대표적이다. 구겐하임은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으나 철강업자답게 소속된 철강업의 회사장으로 가글리오와 함께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다.

당시 몇몇 신문 등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잠수부 등을 동원해 침몰 잔해에서 시신을 수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도 진지하게 검토됐지만 당연히 불가하다는 결론만 내렸다고 한다.[79] 과학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그 정도 심해에 가라앉은 시신의 수습은 매우 어렵거니와 애초에 타이타닉이 가라앉은 수심 3,700m에 이르면 수압으로 인해 시체 자체가 인간의 형체를 유지할 수 없을 지경으로 분해되어 버린다.

6. 생존자 및 피해자들


타이타닉호의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영국 상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1,514명에 달해 현재까지도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81]이다. 생존자는 710명에 불과하다. 물론 710명도 많지만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니 약 30%~40%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배가 침몰했을 때 선원들의 통제가 안 먹히는 경우 여성과 특히 어린이들의 생존률이 매우 낮아지는데 급박한 상황에서 아무래도 구명정으로 달려들 때 힘센 남성이 구명정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이타닉호 사건 때는 승객들에 대한 통제도와 선원들의 상선사관들의 명령 복종 정도가 매우 높았다. 이는 승객들이 타이타닉 같은 큰 배가 설마 3시간도 되지 않아 침몰하리란 생각을 못한 덕에 비교적 여유롭게 행동했고 구명정이 부족할 거란 생각을 못 했으며 무엇보다 60년 전인 1852년에 발생한 영국 육군 병력을 수송하다 가라앉은 영국 해군 HMS 버큰헤드(Birkenhead) 함이 침몰한 사건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병력 수송용 프리깃 HMS 버큰헤드 함에는 영국 해군 승조원과 해병대원, 10개 연대에서 차출되어 승선한 육군 병력 및 민간인 21명(남성 1명, 여성 7명, 어린이 13명) 등 총 643명이 타고 있었다. HMS 버큰헤드 함은 암초에 걸려 반시간도 안 돼 침몰하면서 탑승하고 있던 21명의 민간인을 우선 구명정에 태웠고 혼란을 막기 위해 함장 로버트 샐먼드(Robert Salmond) 해군 대령 이하 육해군 장병들은 갑판에 부동 자세로 도열한 채로 가라앉았으며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뒤에야 에드워드 WC 라이트(Edward WC Wright) 육군 대위 등 잔해를 붙잡고 살아남은 소수의 운 좋은 군인 173명(육군 113명, 해군 54명, 해병 6명)만이 구조되었다. 이후 영국에서는 "버큰헤드호를 기억하자"는 분위기가 일었는데 사건 당시 장병들의 희생정신이 알려져 영국 사회의 정신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성의 생존율이 높았던 또 다른 이유는 1912년 영국은 여성 참정권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시민이자 주체로 인식하지도 않았던 탓도 있다. 따라서 남성들이 본질적으로 약한 존재인 여성과 어린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유사한 지금 기준으로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차별적일 수 있는 관점으로 접근하여 많은 남성들이 자발적으로 여성, 어린이에게 자리를 구명정 자리를 양보하거나 승무원을 도와 구명정 주변에 스크럼을 짜고 사람들을 통제했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 승객들은 승무원들이 권총으로 위협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1854년에 침몰한 아틱호에서는 지휘가 마비되어 선원들이 먼저 도망가 버리고 힘센 남자들이 먼저 타는 바람에 여자와 아이들이 전부 죽었다.

구명조끼가 넉넉하게 지급되었기 때문에 익사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고 사망 원인의 대다수는 -2℃의 수온으로 인한 저체온증이었다. 물 속에서는 공기 중보다 체온 저하 속도가 훨씬 더 빠르며 20℃의 해수에서도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수 있다.[82] 사고가 발생한 북대서양 바다는 여객선이 통행하는 바다 가운데 가장 수온이 낮은 바다[83]로 영하 온도의 물속에 빠지면 건강한 성인 남자도 10분 내외로 목숨을 잃는다. 2등실, 3등실 남성 승객의 사망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2등실 남성 승객 중 92%가 사망했다.

6.1. 승객

객실별로는 3등실의 사망률이 월등하게 높으며 여자와 아이들도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3등실 선실이 구명정에서 가장 떨어져 있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구조인 데다 출입이 제한된 곳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 거기다가 외국인이 많아 영어가 통하지 않아 언어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일부 승무원들이 3등실 승객들의 출입을 제한하거나 가만히 있으라고 한 것도 있었는데 몇몇 매체에 나온 것처럼 1등실 승객을 먼저 탈출시키려고 막았던 것은 아니고 주로 상부와의 소통 부재 때문이었다. 후술할 일본인 승객은 외국인이라서 3등실 승객인 줄 알고 승무원에게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오히려 상선사관들은 3등실 승객들의 대피가 지연되는 것을 알게 되자 배 밑에 승무원들을 파견했다.

2등실 어린이들은 전원 생존했지만 1등실에서는 어린이 사망자 1명이 발생했다. 1등실에서 헬렌 알리슨이라는 당시 2살짜리 여자아기가 구조되지 못했는데 구조되지 못한 이유가 엄마를 찾아서라고 한다. 이는 1등실과 2등실에서 구조되지 못한 유일한 어린이였다. 그녀의 남동생인 당시 생후 11개월이었던 트레버 허드슨 알리슨은 알리슨 가에 고용된 간호사 앨리스 클레버에 의해 구조되었다. 반면 3등실에서 구조되지 못한 어린이는 구조된 수의 거의 두 배에 가까웠는데 1, 2등실 어린이까지 합친 총 어린이 수와 비교 시 절반에 가깝다.

생존자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장수한 이는 영국의 지도학자이자 교수인 밀비나 딘(Millvina Dean, 1912~2009)으로 타이타닉의 최연소 승객이기도 했다. 침몰 당시 생후 9주밖에 안 된 아기였다. 그녀는 2009년 5월 31일 세상을 떠났으며 사우샘프턴에 거주했다고 한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 오빠는 아버지의 침착한 대처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끝내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노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며 타이타닉 침몰 당시 갖고 있었던 가족의 유품을 경매에 내놓기도 했다. 1997년판 영화의 제작진들과 타이타닉 탐사협회가 생활비를 지원해 준 적도 있다. 다만 밀비나는 당시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사고에 대한 기억은 전혀 하지 못했다.

사고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던 마지막 생존자는 바로 2006년에 사망한 릴리언 에스플런드(Lillian Gertrud Asplund, 1906~2006)이었다. 릴리언은 6세에 4명의 오빠들과 함께 타이타닉에 승선했지만 엄마와 오빠 1명, 자신만 구조되고 아버지와 나머지 오빠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훗날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구조선에 탄 직후 무릎 위에 자신을 앉힌 뒤 온기를 불어넣어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릴리언과 어머니가 구조선에 타기 직전 "다음 구조선을 타고 갈테니 기다리라"고 모녀를 안심시켰지만, 끝내 구출되지 못하면서 이는 아버지와 릴리언의 생전 마지막 만남이 되어버렸다. 사고 이후 어머니는 평생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아들들을 그리워하며 절망의 세월을 보냈고, 누군가에게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1964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함께 구출된 오빠는 1983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2000년대까지 살아있던 타이타닉의 마지막 생존자 4명 중 1명이자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유일했다.[84]

타이타닉 탑승자 중에는 신대륙으로 이민가던 북유럽인, 레반트( 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출신 오스만 제국인도 있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시리아 출신자만 154명이 탑승하고 있었고 그 중 23명이 생존했다고 한다. 이런 이민자들은 대부분 3등실에 탑승했다.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피해 이주하려는 아르메니아인들도 있었다.

탑승자 중에는 동양인도 있었다. 3등실에 탑승한 중국인 8명[85]과 2등실에 탑승한 일본인 철도공무원 호소노 마사부미(細野正文, 1870~1939)[86]가 있었는데 이들 중 중국인 6명과 일본인 1명이 구조되어 생존률은 꽤 높았던 편이었다.

생존한 중국인들 6명 중 4명은 마지막 구명정에 뛰어내려 탑승했고 한 명은 수영해서, 다른 한 명은 5등 항해사 로우가 침몰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 구출됐는데 2017년에야 다큐멘터리로 이 중 몇 명의 행방이 밝혀졌다. 모두 홍콩 출신으로, 그들은 이전에 중국과 유럽 사이를 여행하는 화물선에서 노동자로 일했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타이타닉 3등선 티켓을 끊어 미국으로 이주하던 중이었다. 이 중국인 생존자들은 한동한 잊혀 있다가 2017년에야 다큐멘터리로 몇 명의 행방이 밝혀졌다. 잊힌 이유는 당시 미국의 중국인 노동자 배제법으로 미국 땅을 밟자마자 금방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필 중국 노동자 배제법이 시행될 때 미국에 도착했다. 1882년부터 1943년까지 시행된 이 법은 중국 노동자들이 미국으로 이민하는 것을 금지했다. 다른 생존자들은 뉴욕에서 환영을 받고 언론에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줄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중국인 생존자 6명은 24시간 내에 뉴욕에서 추방되어 역사에서 거의 사라졌다. 이들은 쫓겨난 뒤에도 계속 북미에서 살았고 평생 이 문제로 추방당할까봐 숨어 살았다고 한다. 여성과 아이만 탈 수 있었던 구명정에 숨어타서 수치스럽게 살아남았다는 인식 때문에 나서지 않은 것도 있다. 다른 남성 승객들도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욕을 먹었는데 중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더 욕을 먹었다. 중국에서도 이들의 존재와 생존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일본인은 일본 철도계의 관료였던 호소노 마사부미였다. 일본에서 선정한 제1회 철도원 재외 연구원으로 발탁되어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뉴욕으로 향하던 귀로에서 사건과 조우했는데 같은 타이타닉 생존자인 영국인 1912년 출판한 'THE LOSS OF THE SS.TITANIC'이라는 수기에서 "다른 이들을 제치고 구명정에 억지로 타려는 일본인이 있었다"는 증언이 일본에도 퍼져 '여자와 아이를 우선으로 구한다'는 원칙을 무시했다는 둥, 사무라이들은 전쟁에서 목숨을 바치고 돌아왔다는 둥 귀국하고도 언론에게 갖은 욕을 먹었고 다니던 직장에서도 해고되어 불운하게 생애를 마감했다.[87] 하지만 1997년에야 '다른 사람을 밀치고 억지로 탑승한' 동양인은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사실 생존자들의 증언을 보면 대부분 몰래 숨어 탔다고만 했지 여장을 했다거나 남들을 밀치고 들어왔다거나 하는 증언은 없다. 당시 미국의 동양인에 대한 반감 때문에 뉴욕 타임즈 등에서 과장되어 보도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탑승한 구명정 근처에 더 이상 여자와 어린이가 없어 항해사가 2명분의 자리가 아직 남아 있다고 소리쳐 그걸 듣고 탑승했다는 것이 드러나 수십년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호소노 본인도 구명정에 탄 후 너무나 참혹하고 끔찍한 기분이었다고 수기에 기록하였고 일본에 돌아오자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 그는 죽는 날까지 타이타닉에 대한 얘기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애완견 12마리 중 3마리가 생존했는데 이중 두마리는 포메라니안, 한마리는 페키니즈였다. 크기가 작은 덕에 몰래 구명보트에 태울 수 있었다.

6.2. 선원

가장 생존율이 높은 부서는 갑판부였는데 배 제일 위에서 일하는 것도 있고 직무 중 구명정 관리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조타수들과 견시들은 전원 살아남았는데 조타 항목에 서술되었듯 조타수는 키를 잡고 운전하는 게 직무인 입장에서 돌발상황 발생 시 항해사의 지시 없이도 배를 올바른 방향으로 몰 수 있는 감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능력 있고 어느 정도 근무 이력이 쌓인 이들에게 주어지는 직책이었다. 따라서 항해사 없이 작은 구명정을 바다에서 지휘하기엔 조타수들이 적합했으며 훈련되지 않은 승객들끼리만 탄 구명정이 엉뚱한 곳으로 멀리 흘러가 표류하지 않으려면 선원이 꼭 필요했다.[88]

반면 사망자가 제일 많은 부서는 기관부로, 이들은 배가 침몰하는 와중에도 배의 동력을 유지하고 물을 펌프로 빼내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고생했고 이들 덕에 배가 조금이나마 더 버틸 수 있었다. 특히 상선사관 중 항해사들과 달리 기관사들은 전원 순직했으며 최초 희생자들도 물을 빼다가 익사한 기관사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그나마 보일러실이 침수된 후 할 일이 없어진 화부들을 항해사 한 명이 단체로 한 구명정에 몰아 태우고 화부장 바렛 같이 노잡이 및 구명정 지휘 등을 위해 한두 명 태워져 살아남은 경우가 없진 않다. 일단 화부들은 기본적으로 직업 자체가 힘 쓰는 일이었기 때문에 노잡이 역할에 최적화된 것도 있었고.

특기할 만한 점은 유독 파견직 선원들의 생존률이 제일 낮았다는 것이다. 프랑스 레스토랑/카페 점원 중 69명 중 단 3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는데 일부러 갇혔다는 소문도 있었다. 악단은 끝까지 연주하다가 전부 죽었고 우편원들 또한 우편물들을 구하려 노력하다가 결국 마찬가지로 전원 사망했다. 조선사에서 보증으로 파견한 관계자들도 타이타닉호를 설계한 조선기사 토마스 앤드류스를 포함해 전부 죽었다.

타이타닉의 생존자 중에는 자매함인 RMS 올림픽호에 승무원으로 탑승했고 이후에 1차대전 때 병원선으로 징발된 HMHS 브리타닉호에도 탑승하게 되는 간호사 바이올렛 제솝(Violet Jessop, 1887~1971)도 있었는데 타이타닉 침몰 전 올림픽에 타고 있다가 영국 해군 순양함 HMS 호크(Hawke)와 충돌하는 사고[89]를 겪었고 브리타닉이 침몰할 때도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구조되었다. 이런 불운에도 불구하고 건강히 살다가 1971년 5월 5일 심부전증으로 향년 83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참고로 HMS 호크는 1914년 1차 대전 개전 얼마 후 U보트에 격침되었다.

타이타닉에 승선한 8명의 항해사들의 생존률은 정확히 절반이었다.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와 수석 항해사 헨리 와일드,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90], 그리고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는 사망했고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 3등 항해사 하버트 피트만, 4등 항해사 조지프 박스홀, 5등 항해사 헤럴드 로우는 생존했다.[91] 8명 중 살아남은 4명의 상선사관들 가운데 4등 항해사 조지프 박스홀이 1967년에 사망하면서 제일 오래 살았다.

타이타닉에서 살아남은 선원들은 계급을 불문하고 다른 배에서 일하면서 묘한 차별을 받았으며, 또한 항해사들은 다들 항해사 경력의 정점인 선장으로의 진급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92] 이들의 잘못은 없지만 뱃사람들은 미신에 민감한 경우가 많아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7. 종합

참사의 원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야말로 악조건의 연속이자 총체적 난국이었다.

8. 사고의 영향

9. 영웅들과 저명인사들

승객들을 구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아 충분히 구명정에 타려고 하면 탈 수 있었지만 모범을 실천하며 품위 있게 생을 마감한 영웅들도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영화 타이타닉에도 등장한다.

이 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배에 끝까지 남아 운명을 함께하거나 구명정에 탑승해 열심히 생존자들을 도왔다.

각 생존자들의 디테일은 이 문서보다 본 항목 상단에 언급된 타이타닉(영화)/실존인물 항목에 훨씬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워낙 규모가 큰 사고였기에 생존/사망자 중 영화에서 다뤄지지 못한 이들도 워낙 많으며 이들 중 일부는 다른 타이타닉 관련 창작물에서 등장하기도 한다.

10. 기타

11. 둘러보기

역대 미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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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2023년 8월 8일 ~ 8월 11일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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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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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2019년 9월 2일
34 컨셉션호 화재
2019년 8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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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엘 파로호 침몰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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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샌디 훅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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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어퍼 빅 브랜치 탄광 폭발사고
[ 20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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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12일
50 콜간 항공 3407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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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초크 오션항공 101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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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선 앨런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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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허리케인 카트리나 집단 안락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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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미 해병대 CH-53E기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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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스테이션 나이트클럽 화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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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2 나이트클럽 압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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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에어 미드웨스트 5481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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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아메리칸 항공 587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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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6 9.11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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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24 싱가포르항공 006편 이륙 사고
2000년 1월 31일
88 알래스카 항공 261편 추락 사고

[ 199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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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99년 10월 31일
217 100 이집트 항공 990편 추락 사고
1999년 5월 9일
23 뉴올리언스 버스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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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110 스위스에어 111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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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케냐 미 대사관 폭탄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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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헤븐즈 게이트 집단 자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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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컴에어 3272편 추락 사고
1996년 11월 21일
33 푸에르토리코 가스 폭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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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트랜스 월드 항공 800편 추락 사고
1996년 5월 11일
110 밸류젯 592편 추락 사고
1996년 4월 3일
35 미 공군 CT-43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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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아메리칸 항공 965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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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알래스카 보잉 E-3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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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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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아메리칸 이글 4184편 추락 사고
1994년 9월 8일
132 US에어 427편 추락 사고
1994년 7월 2일
37 US에어 1016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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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그린 램프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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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루비스 카페테리아 총기난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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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햄릿 닭고기 가공 공장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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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애틀랜틱 사우스웨스트 항공 2311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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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유나이티드 항공 585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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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지상충돌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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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해피랜드 나이트클럽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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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아비앙카 항공 052편 추락 사고
[ 198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89년 10월 23일
23 필립스 정유 회사 폭발 사고
1989년 9월 21일
21 알톤 버스 추락사고
1989년 7월 19일
111 유나이티드 항공 232편 착륙 사고
1989년 4월 17일
47 아이오와급 전함 주포 폭발사고
1989년 2월 8일
144 인디팬던트 에어 1851편 추락 사고
1988년 12월 21일
270 팬 아메리칸 항공 103편 폭파 사건
1988년 5월 14일
27 캐롤튼 버스 충돌 사고
1987년 12월 7일
43 퍼시픽 사우스웨스트 항공 1771편 추락 사고
1987년 11월 15일
28 컨티넨탈 항공 1713편 추락 사고
1987년 8월 16일
156 노스웨스트 항공 255편 추락 사고
1987년 5월 17일
37 USS 스타크 피격 사건
1987년 4월 23일
28 람비안스 플라자 붕괴사고
1986년 12월 31일
97 듀폰트 플라자 방화 사건
1986년 9월 5일
20 팬 아메리칸 항공 73편 납치 사건
1986년 8월 31일
82 세리토스 상공 공중 충돌 사고
1986년 6월 18일
25 그랜드 캐니언 공중충돌 사고
1986년 5월 30일
21 캘리포니아 워커 버스 사고
1985년 12월 12일
256 애로우 항공 1285편 추락 사고
1985년 9월 6일
31 Midwest Express 105편 추락 사고
1985년 8월 2일
137 델타항공 191편 추락 사고
1985년 6월 25일
21 오클라호마 폭죽공장 폭발 사고
1985년 1월 21일
70 갤럭시 항공 203편 추락 사고
1985년 1월 1일
29 이스턴 항공 980편 추락 사고
1984년 12월 19일
27 윌버그 탄광 화재 사고
1984년 9월 20일
24 1984년 베이루트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1984년 7월 18일
21 샌 이시드로 맥도날드 총기난사 사건
1983년 10월 23일
307 베이루트 미군 숙소 테러
1983년 9월 1일
269 62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6월 2일
23 에어캐나다 797편 화재 사고
1983년 4월 18일
64 1983년 베이루트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1983년 2월 10일
31 SS Marine Electric 침몰 사고
1982년 9월 11일
46 만하임 미 육군 CH-47c 추락 사고
1982년 9월 4일
25 Dorothy Mae Apartment-Hotel 방화 사건
1982년 7월 9일
153 팬 아메리칸 항공 759편 추락 사고
1982년 1월 13일
78 에어 플로리다 90편 추락 사고
1981년 7월 17일
114 하얏트 리젠시 호텔 고가 통로 붕괴 사고
1981년 1월 9일
29 뉴저지 요양병원 화재 사고
1980년 12월 4일
26 스토퍼스 인 호텔 화재
1980년 11월 21일
85 MGM 그랜드 호텔 화재
1980년 9월 12일
34 Florida Commuter Airlines 65편 추락 사고
1980년 7월 27일
23 브래들리 인 요양원 화재
1980년 6월 5일
20 아칸소 재스퍼 버스 사고
1980년 5월 9일
35 선샤인 스카이웨이 대교 붕괴사고
1980년 3월 14일
87 28 LOT 007편 추락사고
1980년 1월 28일
23 USCGC 블랙손 침몰 사고
[ 197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79년 11월 28일
257 22 에어 뉴질랜드 901편 추락 사고
1979년 10월 31일
73 웨스턴 항공 2605편 착륙 사고
1979년 5월 25일
273 아메리칸 항공 191편 추락 사고
1979년 4월 3일
25 스르라우한 웨이사이드 요양원 화재
1978년 11월 18일
918 인민사원 집단 자살 사건
1978년 9월 25일
144 샌디에이고 상공 공중충돌 사고
1978년 4월 27일
51 윌로우 아일랜드 참사
1978년 1월 28일
20 코트스 하우스 호텔 화재 사고
1977년 12월 13일
29 Air Indiana 216편 추락 사고
1977년 11월 6일
39 켈리 반스 댐 붕괴사고
1977년 7월 19일
40 로럴 런 댐 붕괴 사고
1977년 6월 26일
42 모리 카운티 교도소 화재 사고
1977년 5월 28일
165 비버리 힐즈 서퍼 클럽 화재
1977년 3월 27일
583 테네리페 참사
1976년 10월 24일
25 푸에르토리코인 사교 클럽 화재
1976년 10월 20일
78 MV 조지 프린스호 침몰 사고
1976년 6월 4일
46 에어 마닐라 항공 702편 추락 사고
1976년 5월 21일
29 유바 시티 버스 추락사고
1976년 4월 27일
37 아메리칸 항공 625편 추락 사고
1976년 3월 9일, 3월 11일
26 스코샤 탄광 폭발 사고
1976년 1월 30일
23 윈크레스트 요양병원 화재 사고
1976년 1월 10일
20 패스파인더 호텔 폭발 사고
1975년 11월 10일
29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 침몰 사고
1975년 6월 24일
113 이스턴 항공 66편 추락 사고
1974년 12월 1일
92 트랜스 월드 항공 514편 추락 사고
1974년 9월 11일
72 이스턴 항공 212편 추락 사고
1974년 9월 8일
88 트랜스 월드 항공 841편 폭파 사건
1974년 6월 30일
24 걸리버즈 나이트클럽 방화 사건
1974년 4월 22일
107 팬 아메리칸 항공 812편 추락 사고
1974년 4월 4일
72 서던 에어웨이즈 242편 추락 사고
1974년 3월 3일
346 25 터키항공 981편 추락 사고
1973년 12월 17일
34 1973년 로마 공항 습격·납치 사건
1973년 8월 28일
24 휴에바 미 공군 C-141 추락 사고
1973년 7월 31일
88 델타 항공 723편 추락 사고
1973년 7월 23일
38 오자 에어 809편 추락 사고
1973년 7월 22일
78 팬 아메리칸 항공 816편 추락 사고
1973년 6월 24일
32 업스테어 라운지 방화 사건
1973년 3월 22일
32 MV Norse Variant 침몰 사고
1973년 2월 10일
40 스태튼 아일랜드 가스 폭발 사고
1972년 12월 29일
101 이스턴 항공 401편 추락사고
1972년 12월 8일
45 유나이티드 항공 553편 추락사고
1972년 10월 30일
45 1972년 시카고 열차 추돌사고
1972년 9월 24일
22 새크라멘토 캐나디어 세이버 추락 사고
1972년 6월 9일
238 Canyon Lake 댐 붕괴 사고
1972년 5월 2일
91 선샤인 광산 화재
1972년 2월 26일
125 버팔로 댐 붕괴 사고
1971년 9월 14일
111 알래스카 항공 1866편 추락 사고
1971년 9월 9일 ~ 9월 13일
43 애티카 교도소 폭동
1971년 8월 18일
37 페그니츠 미 육군 CH-47 추락 사고
1971년 6월 7일
28 Allegheny Airlines 485편 추락 사고
1971년 6월 6일
50 휴즈 에어웨스트 706편 공중충돌 사고
1971년 2월 3일
29 티오콜 화학공장 폭발 사고
1970년 12월 30일
39 Hurricane Creek 탄광 폭발 사고
1970년 12월 20일
29 파이어니어 호텔 화재
1970년 11월 27일
79 미 공군 C-123K기 추락 사고
1970년 10월 2일
31 위치타 주립대학교 미식축구팀 비행기 추락사고
1970년 11월 14일
75 서던 에어웨이즈 932편 추락 사고
1970년 5월 2일
23 ALM 항공 980편 사고
1970년 3월 20일
20 오자크 호텔 화재 사고
1970년 1월 10일
21 하머 하우스 요양원 화재
}}}
[ 196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69년 9월 9일
83 앨러게네이 항공 853편 공중충돌 사고
1969년 6월 3일
74 USS Frank E. Evans 충돌 사고
1969년 2월 18일
35 허손 네바다 항공 708편 추락 사고
1969년 1월 18일
38 유나이티드 항공 266편 추락 사고
1969년 1월 14일
28 USS 엔터프라이즈 화재 사고
1968년 12월 27일
28 노스 센트럴 항공 458편 추락 사고
1968년 12월 24일
20 앨러게네이 항공 736편 추락 사고
1968년 12월 12일
51 팬 아메리칸 항공 217편 추락 사고
1968년 12월 2일
39 Wien Consolidated 항공 55편 추락 사고
1968년 11월 20일
78 파밍턴 광산 참사
1968년 10월 25일
32 노스이스트 항공 946편 추락 사고
1968년 8월 14일
21 로스엔젤레스 항공 417편 추락 사고
1968년 5월 27일
99 USS 스콜피언 침몰 사고
1968년 5월 22일
23 로스엔젤레스 항공 841편 추락 사고
1968년 5월 3일
85 브래니프 항공 352편 추락 사고
1968년 4월 6일
41 리치몬드 가스 폭발사고
1967년 12월 15일
46 실버 브리지 붕괴사고
1967년 11월 20일
70 트랜스 월드 항공 128편 추락 사고
1967년 7월 29일
134 USS 포레스탈 화재 사건
1967년 7월 19일
82 피드몬트 항공 22편 공중충돌 사고
1967년 6월 23일
34 Mohawk 항공 40편 추락 사고
1967년 6월 8일
34 USS Liberty 피격 사건
1967년 3월 9일
26 트랜스 월드 항공 553편 공중충돌 사고
1967년 3월 5일
38 레이크 센트럴 항공 527편 추락 사고
1967년 2월 7일
25 데일즈 펜트하우스 레스토랑 화재 사고
1967년 1월 16일
37 플로리다 교도소 화재
1966년 10월 26일
44 USS 오리스카니 화재 사고
1966년 8월 6일
42 브래니프 항공 250편 추락 사고
1966년 6월 16일, 6월 28일
37 MV 알바 케이프호 충돌 및 화재 사고
1966년 4월 22일
83 American Flyers 항공 280/D 추락 사고
1965년 11월 11일
43 유나이티드 항공 227편 추락 사고
1965년 11월 8일
58 아메리칸 항공 383편 추락 사고
1965년 8월 24일
59 미 해병대 KC-130F 추락 사고
1965년 8월 16일
30 유나이티드 항공 389편 추락 사고
1965년 8월 9일
53 시어시 미사일 기지 화재 사고
1965년 2월 8일
84 이스턴 항공 663편 추락 사고
1965년 1월 16일
30 위치타 미 공군 KC-135기 추락 사고
1964년 12월 18일
20 맥그로우 요양원 화재
1964년 11월 23일
50 트랜스 월드 항공 800편 이륙 사고
1964년 11월 15일
29 본자나 항공 114편 추락 사고
1964년 7월 9일
39 유나이티드 항공 823편 추락 사고
1964년 5월 11일
79 마닐라 미 공군 C-135B기 추락 사고
1964년 5월 7일
44 퍼시픽 항공 773편 추락 사고
1964년 3월 1일
85 파라다이스 항공 901A편 추락 사고
1964년 2월 25일
58 이스턴 항공 304편 추락 사고
1963년 12월 29일
22 루즈벨트 호텔 화재 사고
1963년 12월 8일
81 팬 아메리칸 항공 214편 추락 사고
1963년 11월 23일
63 골든 에이지 양로원 화재
#!wiki style= "margin:0px -10px;"
1963년 11월 19일
26 아틀란틱 시티 요양원 화재
1963년 11월 18일
25 서프사이드 호텔 화재 사고
1963년 10월 31일
81 인디애나 주립 박람회 회관 가스 폭발 사고
1963년 9월 17일
32 추알라 버스 충돌사고
1963년 6월 3일
101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항공 293편 추락 사고
1963년 5월 18일
27 사우스 캐롤라이나 버스 추락 사고
1963년 4월 10일
129 USS 스레셔 침몰 사고
1963년 2월 12일
43 노스웨스트 항공 705편 추락 사고
1962년 11월 30일
25 이스턴 항공 512편 추락 사고
1962년 10월 3일
23 뉴욕 텔레폰 컴퍼니 빌딩 폭발 사고
1962년 7월 22일
27 Canadian Pacific 항공 301편 추락 사고
1962년 6월 3일
130 121 에어 프랑스 007편 추락사고
1962년 5월 22일
45 컨티넨탈 항공 11편 폭파 사건
1962년 3월 16일
107 플라잉 타이거 라인 739편 실종 사건
1962년 3월 1일
95 아메리칸 항공 1편 추락 사고
1961년 12월 14일
20 콜로라도 에반스 스쿨버스 충돌 사고
1961년 11월 8일
77 임페리얼 항공 201/8편 추락 사고
1961년 9월 17일
37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항공 706편 추락 사고
1961년 9월 1일
78 트랜스 월드 항공 529편 추락 사고
1961년 6월 15일
73 34 사베나 548편 사고
1961년 1월 15일
28 텍사스 레이더 기지 붕괴 사고
1961년 1월 6일
20 토마스 호텔 화재
1960년 12월 17일
52 뮌헨 미 공군 C-131 추락 사고
1960년 12월 16일
134 뉴욕 공중충돌 사고
1960년 10월 29일
22 캘리포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학교 미식축구팀 비행기 추락 사고
1960년 10월 4일
62 이스턴 항공 375편 추락 사고
1960년 9월 19일
80 World Airways 830편 충돌 사고
1960년 3월 17일
63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항공 710편 추락 사고
1960년 2월 25일
61 리우데자네이루 미 해군수송기 공중충돌 사고
1960년 1월 18일
50 캐피털 항공 20편 추락 사고
[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59년 12월 1일
25 Allegheny 항공 371편 추락 사고
1959년 11월 16일
42 내셔널 항공 967편 실종 사고
1959년 10월 30일
26 피드몬트 항공 349편 추락 사고
1959년 9월 29일
34 브래니프 항공 542편 공중분해 사고
1959년 6월 28일
23 조지아 유조열차 탈선 사고
1959년 5월 12일
31 캐피털 항공 75편 추락 사고
1959년 3월 5일
21 아칸소 흑인학교 화재 사고
1959년 2월 3일
65 아메리칸 항공 320편 추락 사고
1958년 12월 1일
97 천사들의 모후 학교 화재
1958년 11월 18일
33 SS Carl D. Bradley 침몰 사고
1958년 9월 15일
48 뉴어크 만 열차 탈선 사고
1958년 8월 15일
25 노스이스트 항공 258편 추락 사고
1958년 4월 21일
49 유나이티드 항공 736편 공중충돌 사고
1958년 4월 6일
47 캐피털 항공 67편 추락 사고
1958년 3월 19일
24 뉴욕 속옷공장 화재 사고
1958년 3월 7일
26 오키나와 미 해병대 C-119C 추락 사고
1958년 2월 28일
27 켄터키 버스 추락 사고
1957년 11월 8일
44 팬 아메리칸 항공 7편 추락 사고
1957년 2월 17일
72 워렌턴 요양병원 화재 사고
1957년 3월 22일
67 미 공군 C-97기 실종 사건
1957년 2월 1일
20 노스이스트 항공 823편 추락 사고
1956년 10월 10일
59 미 해군 R6D-1기 실종 사고
1956년 9월 5일
20 로빈슨 열차 충돌 사고
1956년 6월 30일
127 그랜드 캐니언 공중충돌 사고
1956년 4월 1일
22 트랜스 월드 항공 400편 추락 사고
1956년 1월 22일
30 로스엔젤레스 열차 탈선 사고
1955년 11월 1일
44 유나이티드 항공 629편 폭파 사건
1955년 10월 6일
66 유나이티드 항공 409편 추락 사고
1955년 8월 11일
66 알텐슈타이그 미 공군기 공중충돌 사고
1955년 8월 4일
30 아메리칸 항공 476편 추락 사고
1955년 2월 12일
29 바턴 호텔 화재 사고
1955년 3월 22일
66 하와이 R6D-1기 추락 사고
1954년 5월 26일
103 USS Bennington 폭발 사고
1954년 2월 1일
35 홋카이도 미 해병대 C-46D 추락 사고
1953년 9월 16일
28 아메리칸 항공 723편 추락 사고
1953년 7월 17일
43 USMC R4Q NROTC 추락 사고
1953년 6월 18일
129 타치카와 미 공군 수송기 추락 사고
1953년 4월 17일
35 시카고 하버 공업 빌딩 화재
1953년 3월 27일
21 오하이오 열차 추돌 사고
1953년 3월 27일
33 라르고 요양원 화재
1953년 2월 14일
46 내셔널 항공 470편 추락 사고
1952년 12월 20일
87 워싱턴 C-124기 추락 사고
1952년 11월 22일
52 알래스카 C-124기 추락 사고
1952년 11월 16일
25 강릉 공항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52년 10월 16일
44 양평 미 공군 C-119C 추락 사고
1952년 8월 4일
29 웨이코 버스 정면 충돌사고
1952년 4월 29일
50 팬 아메리칸 항공 202편 추락 사고
1952년 4월 26일
176 USS Hobson 침몰 사고
1952년 4월 11일
52 팬 아메리칸 항공 526A편 추락 사고
1952년 2월 11일
33 내셔널 항공 101편 추락 사고
1952년 1월 22일
23 아메리칸 항공 6780편 추락 사고
1951년 12월 29일
26 컨티넨탈 차터스 항공 44-2편 추락 사고
1951년 12월 21일
119 오리엔트 탄광 폭발 사고
1951년 12월 16일
58 마이애미 항공 C-46기 추락 사고
1951년 9월 1일
45 펠리컨호 침몰 사고
1951년 8월 24일
50 유나이티드 항공 615편 추락 사고
1951년 6월 30일
50 유나이티드 항공 610편 추락 사고
1951년 4월 25일
43 Cubana de Aviacion 항공 493편 공중충돌 사고
1951년 3월 23일
53 미 공군수송기 실종 사건
1951년 2월 6일
85 우드브리지 열차 탈선 사고
1950년 11월 22일
78 큐 가든스역 열차 충돌사고
1950년 9월 26일
23 아시야 미 해병대 C-54D 추락 사고
1950년 8월 31일
55 트랜스 월드 항공 903편 추락 사고
1950년 8월 25일
23 USS Benevlonce 침몰 사고
1950년 7월 26일
25 오시마 인근 미 공군 C-47D 추락 사고
1950년 6월 30일
23 부산 미 공군 C-54G 추락 사고
1950년 6월 23일
58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항공 2501편 실종 사고
1950년 5월 25일
34 1950년 시카고 노면전차 충돌사고
1950년 4월 21일
35 카타가와현 미군 C-54기 추락 사고
1950년 2월 17일
32 뉴욕 열차 충돌 사고
1950년 1월 26일
32 미 공군 C-54D기 실종 사건
1950년 1월 7일
41 대번포트 요양원 화재
[ 194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49년 11월 29일
28 아메리칸 항공 157편 추락 사고
1949년 11월 1일
55 알렉산드리아 상공 공중 충돌 사고
1949년 7월 12일
35 스탠다드 에어 항공 897R편 추락 사고
1949년 6월 7일
53 스트라토 프레이트 커티스 C-46A 추락 사고
1949년 4월 4일
74 성 안토니오 병원 화재
1948년 12월 28일
32 에어본 운송 DC-3 실종 사고
1948년 10월 27일 ~ 10월 31일
26 도노라 스모그 사건
1948년 8월 29일
37 노스웨스트 항공 421편 추락 사고
1948년 6월 17일
43 유나이티드 항공 624편 추락 사고
1948년 3월 12일
30 노스웨스트 항공 4422편 추락 사고
1948년 1월 28일
32 로스 가토스 DC-3 추락 사고
1947년 11월 28일
20 알프스 미 공군 C-47B 추락 사고
1947년 10월 23일
52 유나이티드 항공 608편 추락 사고
1947년 7월 24일
27 올드 밴 8번 탄광 폭발 사고
1947년 6월 13일
50 펜실베니아 센트럴 항공 410편 추락 사고
1947년 5월 30일
53 이스턴 항공 605편 추락 사고
1947년 5월 29일
43 유나이티드 항공 521편 추락 사고
1947년 4월 16일
581 텍사스 시티 폭발 사고
1947년 3월 25일
111 센트레일리아 탄광 참사
1946년 12월 7일
119 와인코프 호텔 화재사고
1946년 7월 19일
25 마운트 톰 B-17 추락 사고
1946년 6월 5일
61 라 살레 호텔 화재
1946년 4월 25일
45 네퍼빌 철도 참사
1945년 12월 24일
21 나일가 요양병원 화재
1945년 11월 1일
26 가게나우 미 육군 C-47 추락 사고
1945년 8월 9일
34 노스 다코다 미시간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9일
372 USS 마운트 후드 폭발 사고
1944년 12월 31일
50 배글리 열차 추돌 사고
1944년 10월 20일
131 클리블랜드 가스 폭발 사고
1944년 8월 23일
61 프레클톤 항공 참사
1944년 8월 4일
47 스톡턴 열차 충돌 사고
1944년 7월 17일
320 시카고 항구 참사
1944년 7월 6일
167 하트퍼드 서커스 화재
1944년 5월 21일
163 웨스트 로치 참사
1944년 2월 10일
24 아메리칸 항공 2편 추락 사고
1944년 1월 6일
115 USS 세인트 어거스틴 침몰 사고
1944년 1월 3일
138 USS 터너 침몰 사고
1943년 12월 18일
34 USS 로그데이 침몰 사고
1943년 12월 16일
74 레너트 열차 충돌 사고
1943년 9월 7일
55 걸프 호텔 화재
1943년 9월 6일
79 프랭크 포드 정션 열차 탈선 사고
1943년 8월 30일
29 라카와나 열차 추돌 사고
1943년 7월 28일
20 아메리칸 항공 63편 사고
1943년 6월 12일
42 USS R-12 침몰 사고
1943년 2월 27일
75 스미스 탄광 폭발 사고
1943년 1월 31일
32 레이크 포레스트 요양원 화재
1942년 11월 28일
492 코코넛 그로브 나이트클럽 화재
1942년 6월 5일
46 졸리엣 탄약 창고 폭발 사고
#!wikibstyle="margin: 0px -10px;"
1942년 2월 18일
203 USS 폴룩스, USS 스럭스톤 침몰 사고
1942년 1월 24일
48 USS S-26 침몰 사고
1941년 6월 19일
33 USS O-9 침몰 사고
1940년 9월 12일
52 허큘리스 화약 공장 폭발 사고
1940년 8월 31일
25 로베츠빌 DC-3 추락 사고
1940년 7월 31일
43 두들버그 참사
1940년 7월 15일
63 손만 탄광 폭발 사고
1940년 4월 23일
209 리듬 클럽 화재
1940년 4월 19일
31 리틀 폴스 열차 탈선 사고

[ 193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39년 10월 12일
24 샌프란시스코 열차 탈선 사고
1939년 5월 12일
26 USS 세일피쉬 침몰 사고
1938년 6월 19일
23 조던 고등학교 버스 건널목 사고
1938년 6월 19일
47 커스터 강 열차 탈선 사고
1938년 6월 19일
45 레드 자켓 광산 폭발 사고
1938년 5월 16일
34 터미널 호텔 화재
1937년 5월 6일
36 힌덴부르크 참사
1937년 3월 18일
295+ 뉴 런던 학교 폭발 사고
1936년 1월 12일
34 SS 아이오와호 침몰 사고
1934년 12월 11일
34 켄 호텔 화재
1934년 9월 8일
137 모로 캐슬호 화재
1934년 7월 22일
21 뉴욕 오싱 버스 사고
1934년 3월 24일
22 린치버그 빌딩 화재
1933년 4월 3일
73 USS 아크론 추락사고
1933년 10월 3일 ~ 10월 4일
29 그리피스 공원 화재
1932년 9월 9일
72 옵저베이션호 폭발사고
1932년 12월 24일
54 모웨아쿠아 탄광 폭발사고
1931년 7월 25일
31 리틀 시스터즈 보육원 화재
1930년 11월 5일
82 밀필드 탄광 참사
1930년 4월 21일
322 오하이오 교도소 화재
[ 192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29년 10월 22일
52 SS 밀워키 침몰 사고
1929년 9월 9일
25 SS 안다스테 침몰 사고
1929년 8월 29일
77 SS 산 후안 침몰 사고
1929년 4월 21일
123 클리블랜드 클리닉 화재
1928년 11월 10일
111 SS 베스트리스 침몰 사고
1928년 11월 8일
20 프레블 박스 토 회사 폭발사고
1929년 8월 20일
22 스터디 클럽 화재
1928년 5월 19일
195 매터 광산 참사
1928년 4월 13일
38 웨스트 플레인스 댄스홀 폭발 사고
1928년 3월 12일
431+ 세인트 프란시스 댐 붕괴 사고
1927년 12월 17일
40 USS S-4 침몰 사고
1927년 11월 14일
28 피츠버그 가스 폭발사고
1927년 5월 18일
45 배스 학교 폭파 사건
1927년 11월 14일
26 SS 파푸스 침몰 사고
1925년 7월 4일
33 USS S-51 침몰 사고
1925년 7월 4일
44 픽 윅 클럽 붕괴 사고
1925년 6월 16일
47 록포트 열차 탈선사고
1925년 5월 27일
53 글렌 광산 참사
1925년 5월 17일
77 클리블랜드 학교 화재
1924년 12월 24일
36 밥스 학교 화재
1924년 9월 21일
26 SS 클리프톤 침몰 사고
1924년 6월 12일
48 USS 미시시피 주포 폭발 사고
1924년 5월 31일
24 호프 학교 화재
1924년 4월 28일
119 벤우드 광산 참사
1924년 3월 8일
172 캐슬 게이트 광산 참사
1924년 3월 8일
20 닉슨 니트로 공장 폭발사고
1924년 2월 5일
41 밀포드 광산 폭발 사고
1923년 9월 27일
30 겐록 열차 탈선 사고
1923년 9월 8일
23 혼다 포인트 참사
1923년 2월 8일
123 도슨 광산 폭발 사고
1923년 1월 3일
35 앨렌 대교 붕괴 사고
1922년 8월 27일
47 아르고넛 광산 폭발사고
1922년 2월 21일
34 로마 비행선 추락사고
1922년 2월 21일
29 슈피리어 시티 침몰 사고
1922년 1월 28일
98 니커보커 극장 붕괴사고
1920년 9월 16일
40 월스트리트 폭탄 테러
[ 191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19년 12월 20일
23 오나와 열차 탈선 사고
1919년 12월 18일
35 J.A 챈슬러 침몰 사고
1919년 6월 5일
92 발티모어 탄광 폭발 사고
1919년 1월 15일
21 보스턴 당밀 홍수 사건
1919년 11월 11일
101 맬본 스트리트 탈선사고
1918년 10월 12일
453 클로켓 화재
1918년 10월 4일
100 T.A 길레스피 회사 공장 폭발사고
1918년 7월 9일
101 1918년 내슈빌 열차 충돌사고
1918년 7월 5일
87 콜럼비아호 침몰 사고
1918년 6월 22일
86 해먼드 서커스 열차 충돌사고
1918년 6월 2일
52 스플릿 락 폭발사고
1918년 2월 26일
30 USS 체로키 침몰 사고
1917년 12월 20일
49 셰퍼드빌 열차 탈선사고
1917년 6월 8일
168 스페큘레이터 광산 참사
1917년 4월 27일
121 해스팅 광산 폭발 사고
1917년 4월 10일
139 에디스톤 광산 폭발 사고
1916년 8월 3일
24 배런 댐 붕괴 사고
1916년 11월 7일
46 서머 스트리트 다리 참사
1916년 8월 29일
43 USS 테네시 침몰 사고
1916년 5월 8일
2p SS S.R. 커비 침몰사고
1915년 10월 28일
21 세인트 존스 학교 화재
1916년 10월 20일
25 제임스 B. 콜게이트 침몰 사고
1915년 9월 27일
50 아드모레 폭발 사고
1915년 7월 24일
848 이스트랜드호 참사
1915년 5월 7일
1198 128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1915년 3월 25일
112 레이랜드 광산 참사
1915년 3월 2일
21 USS F-4 침몰 사고
1914년 9월 18일
60 프랜시스 H. 레짓 침몰사고
1914년 4월 28일
180 에클스 광산 참사
1914년 1월 30일
41 SS 먼로 침몰 사고
1913년 12월 24일
73 이탈리안홀 참사
1913년 12월 4일
28 아르카디아 호텔 화재
1913년 11월 10일
25 SS 헨리 B. 스미스 침몰 사고
1913년 10월 22일
263 도슨 광산 폭발 사고
1913년 7월 22일
31 브링햄턴 공장 화재
1913년 5월 24일
39 롱비치 피어 오디토리움 붕괴 사고
1913년 3월 7일
33 알룸 샤인 폭발 사고
1913년 2월 28일
25 듀이 호텔 화재
1913년 1월 10일
26 제임스 T. 스테이플 침몰 사고
1912년 7월 4일
39 코닝 열차 탈선 사고
1912년 4월 14일 ~ 4월 15일
1514 238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1911년 12월 9일
84 크로스 마운틴 광산 참사
1911년 9월 30일
78 오스틴 댐 붕괴 사고
1911년 8월 26일
21 캐논스버그 오페라 하우스 압사 사고
1911년 4월 9일
128 배너 광산 참사
1911년 3월 25일
146 트라이앵글 의류공장 화재사고
1910년 12월 22일
24 시카고 가축 판매소 화재
1910년 10월 7일
42 보데트 화재
1910년 10월 1일
21 로스 앤젤레스 타임즈 폭탄 테러
1910년 9월 8일
29 페레 마켓 18 침몰 사고
1910년 10월 5일
84 팔로스 광산 폭발사고
1910년 3월 21일
52 그린 마운틴 열차 탈선사고
1910년 3월 1일
96 웰링턴 눈사태
1910년 2월 6일
31 USS 니나 침몰 사고

[ 190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09년 12월 8일
30 ~ 38 마르케트 & 베세머 No.2호 침몰 사고
1909년 11월 13일
259 체리 광산 참사
1908년 12월 1일
24 D.M 클렘슨호 침몰 사고
1908년 3월 28일
59 1908년 한나 광산 폭발 사고
1908년 3월 4일
173 콜린우드 학교 화재
1908년 1월 13일
170 로드 오페라하우스 화재
1907년 12월 19일
239 다르 광산 참사
1907년 12월 9일
362 모농가 광산 참사
1907년 12월 1일
35 나오미 광산 참사
1907년 10월 11일
22 키프러스호 침몰 사고
1907년 9월 15일
26 카난 열차 탈선 사고
1907년 7월 21일
88 콜럼비아호 침몰 사고
1907년 2월 15일
20 우드론 열차 사고
1905년 12월 30일
602 이로쿼이 극장 화재 사고
1905년 7월 15일
66 USS 베닝턴 보일러 폭발 사고
1905년 6월 21일
21 20세기 리미티드 열차 탈선 사고
1905년 3월 20일
58 글로버 신발 공장 참사
1905년 3월 18일
24 1905년 레드 애쉬 광산 폭발 사고
1904년 9월 24일
56+ 뉴마켓 열차 사고
1904년 8월 7일
97 에덴 열차 탈선 사고
1904년 6월 15일
965+ 제너럴 슬로컴호 화재
1904년 4월 13일
36 USS 미주리호 주포 폭발 사고
1904년 1월 25일
181 해윅 광산 참사
1903년 12월 26일
21 이스트 파리스 열차 탈선 사고
1903년 12월 23일
64 코넬스빌 열차 탈선 사고
1903년 8월 6일
26 듀랑 서커스 열차 추돌사고
1903년 7월 29일
22 미국 탄약공장 폭발 사고
1903년 6월 30일
169 1903년 한나 광산 폭발 사고
1902년 9월 19일
115 샤일로 침례교회 압사 사고
1902년 9월 8 ~ 12일
65 야콜트 산불
1902년 7월 10일
112 롤링 광산 폭발 사고
1901년 9월 15일
24 허드슨호 침몰 사고
1901년 8월 15일
40 아일랜더호 침몰 사고
1901년 2월 22일
128 시티 오브 리오 데 자네이루호 침몰 사고
1900년 11월 29일
21 1900 빅 게임 참사
1900년 7월 4일
44 타코마 노면전차 참사
1900년 6월 30일
326+ 호보컨 부두 화재
1900년 6월 23일
35 ~ 37 캠프 크릭 열차 탈선 사고
1900년 5월 1일
200+ 스코필드 광산 참사
1900년 3월 6일
46 1900년 레드 애쉬 광산 폭발 사고
[ 189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894년 9월 1일
418 힝클리 대화재
1890년 2월 16일
100+ 월넛그로브댐 붕괴 사고
[ 188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889년 5월 31일
2208 존스타운 홍수

[ 1870년대 이전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876년 12월 29일
92+ 애슈터뷸라 철도 참사
1876년 12월 5일
278 브루클린 극장 화재
1871년 7월 30일
125 1871년 스태튼섬 참사
1871년 10월 8일 ~ 10일
300+ 시카고 대화재
1871년 10월 8일
1700+ 페시티고 대화재
1865년 4월 27일
1700+ 술타나호 침몰 사고
1860년 9월 7일
300+ 레이디 엘진 호 침몰 사고
1860년 1월 10일
88 펨버튼 공장 붕괴사고
||

역대 영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wiki style="margin:0 -10px -5px"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word-break: keep-all; min-width: 100px; min-height:2em"
{{{#!folding [ 2020년대 ]
{{{#!wiki style="margin:-5px 0"
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
[ 201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2019년 10월 23일
39 영국 냉동 컨테이너 집단 사망사건
2017년 6월 14일
72 런던 그렌펠 타워 화재사고
2017년 5월 22일
23 2017년 맨체스터 경기장 테러
[ 200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2005년 7월 7일
56 2005년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
2004년 2월 7일
23 모어캠 만 참사
2002년 10월 12일
204 23 2002년 발리 폭탄 테러
2001년 9월 11일
2,996 67 9.11 테러
2000년 6월 18일
58 2000년 도버항 밀입국 참사

[ 199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99년 10월 31일
217 21 이집트 항공 990편 추락 사고
1999년 10월 5일
31 라드브로크 그로브 열차 충돌사고
1999년 9월 28일
26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국 관광객 버스 사고
1999년 9월 28일
29 오마 폭탄 테러
1994년 6월 2일
29 1994년 RAF 치누크 추락 사고
1992년 9월 28일
167 36 파키스탄 국제항공 268편 추락 사고
[ 198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89년 8월 20일
51 마치오네스호 참사
1989년 4월 15일
97 힐스버러 참사
1989년 1월 8일
47 브리티시 미들랜드 국제항공 92편 추락 사고
1988년 12월 21일
270 팬 아메리칸 항공 103편 폭파 사건
1988년 12월 12일
35 클래펌 정션 열차 충돌사고
1988년 7월 6일
167 파이퍼 알파 화재 사고
1987년 11월 18일
31 런던 킹스 크로스 역 화재사건
1987년 3월 6일
193 해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참사
1986년 11월 6일
45 1986년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헬리콥터 치누크 추락 사고
1985년 6월 23일
329 27 에어 인디아 182편 폭파 사건
1985년 5월 11일
56 브래드포드 시티 구장 화재
1985년 8월 22일
55 영국항공 투어 328편 화재 사고
1985년 2월 11일
21 랑겐브루크 버스 사고
1983년 7월 16일
20 영국 항공 헬리콥터 S-61 추락 사고
1980년 9월 9일
44 더비셔호 침몰 사고
1980년 8월 16일
37 덴마크 플레이스 방화 사건
1980년 4월 25일
146 단 에어 1008편 추락 사고
[ 197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78년 2월 11일
42 퍼시픽 웨스턴 항공 314편 추락 사고
1976년 9월 10일
176 자그레브 상공 공중충돌 사고
1975년 5월 27일
32 디블스 다리 버스 추락 사고
1975년 2월 28일
43 무어게이트역 지하철 충돌사고
1974년 11월 21일
21 브링엄 펍 폭탄 테러
1974년 6월 1일
28 플릭스버러 폭발사고
1974년 3월 3일
346 177 터키항공 981편 추락 사고
1973년 8월 2일
50 서머랜드 참사
1973년 4월 10일
108 인빅타 국제항공 435편 추락 사고
1972년 7월 5일
30 콜드 하버 병원 화재
1972년 6월 18일
118 브리티쉬 유러피언 항공 548편 추락 사고
1971년 11월 9일
52 영국 공군 허큘리스 추락사고
1971년 10월 21일
21 ~ 22 클락스턴 폭발 사고
1971년 1월 2일
66 1971 아이브록스 참사
1970년 7월 3일
112 단 에어 1903편 추락 사고
}}}
[ 196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69년 1월 5일
50 아리아나 아프간 항공 701편 추락 사고
1968년 11월 18일
22 제임스 와트 스트리트 화재
1968년 11월 5일
49 히서 그린 열차 탈선 사고
1967년 2월 26일
21 셀턴 병원 화재
1967년 11월 4일
37 이베리아 항공 062편 추락 사고
1967년 6월 4일
72 스톡포트 비행기 추락 참사
1966년 10월 21일
144 애버밴 참사
1966년 7월 31일
31 다윈호 침몰 사고
1965년 10월 17일
36 브리티시 유러피언 에어워이즈 비커스 951 추락 사고
1965년 7월 4일
41 영국 공군 C.1A 추락 사고
1965년 5월 17일
31 1965년 캠브리안 광산 참사
1965년 4월 14일
26 BUA DC-3 추락 사고
1960년 6월 28일
45 식스 벨즈 광산 폭발 사고
[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58년 8월 14일
99 KLM 607-E편 추락 사고
1958년 2월 27일
35 윈터힐 비행기 참사
1958년 2월 6일
23 뮌헨 비행기 참사
1957년 12월 4일
90 루이섬 열차 충돌사고
1957년 11월 5일
45 아퀼라 항공 S.45 추락 사고
1957년 5월 1일
34 이글 항공 비커스 비스카운트 추락 사고
1957년 3월 14일
20 브리티시 유러피안 항공 비커스 701 추락 사고
1957년 3월 5일
20 영국 공군 베버리 C.1 추락 사고
1954년 12월 25일
28 영국해외항공 보잉 377 추락 사고
1954년 1월 10일
35 영국해외항공 781편 공중분해 사고
1952년 12월 5일 ~ 9일
4000+ 1952년 런던 그레이트스모그
1953년 1월 31일
154 프린세스 빅토리아 호 침몰사고
1953년 1월 5일
27 1953년 브리티시 유러피언 항공 비커스 610 추락 사고
1952년 10월 2일
112 해로우 앤 윌드스톤 열차 추돌사고
1952년 9월 6일
31 판버러 에어쇼 추락 사고
1952년 1월 10일
23 에어 링구스 C-47 추락 사고
1951년 12월 4일
24 질링엄 버스 참사
1951년 4월 16일
75 어프레이 호 침몰 사고
1950년 10월 31일
28 1950년 브리티시 유러피언 항공 비커스 610 추락 사고
1950년 10월 17일
28 브리티시 유러피언 항공 C-47 추락 사고
1950년 3월 12일
80 랜드로우 항공 참사
[ 194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49년 8월 19일
24 브리티시 유러피언 항공 DC-3 추락 사고
1949년 1월 17일
20 미 공군 B-29 추락 사고
1948년 10월 20일
40 KLS L-049 추락 사고
1948년 7월 4일
39 노스우드 상공 공중충돌 사고
1948년 4월 17일
24 윈스포드 열차 충돌 사고
1948년 3월 2일
20 사베나 DC-3 추락 사고
1947년 10월 26일
28 고스윅 열차 탈선 사고
1947년 10월 24일
32 사우스 크로이던 열차 충돌 사고
1947년 4월 23일
39 샘탬파호 침몰 사고
1946년 3월 9일
33 번든 파크 참사
1946년 1월 1일
20 리치필드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9월 30일
43 본 엔드 열차 탈선 사고
1945년 9월 14일
21 볼벤터 영국 공군기 추락 사고
1945년 6월 15일
27 처치 노웰 미 공군기 추락 사고
1945년 5월 6일
31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45년 4월 23일
31 맨 섬 미 공군 B-17 추락 사고
1945년 4월 22일
21 풀벡 영국 공군기 추락 사고
1945년 2월 19일
20+ 질스 다코다 3 추락 사고
1945년 1월 10일
22 밸리 마카렛 열차 충돌 사고
1944년 11월 27일
70 영국 공군 창고 폭발 사고
1944년 8월 23일
61 프렉턴 항공기 참사
1944년 7월 27일
22 미 공군 DC-3 추락 사고
1944년 2월 19일
20 미 공군 DC-4 추락 사고
1943년 7월 3일
20 영국 공군 포커 FXII 추락 사고
1943년 3월 27일
379 대셔호 폭발 사고
1943년 3월 3일
173 베스널 그린 지하철역 참사
1943년 2월 24일
37 반달호 침몰 사고
1942년 10월 2일
239 큐라소호 침몰 사고
1942년 4월 13일
25 임버 민간인 오사 사건
1942년 1월 1일
57 스네이드 광산 참사
1941년 12월 30일
23 에클스 열차 충돌 사고
1941년 10월 31일
49 허더스 필드 공장 화재
1940년 11월 4일
27 노턴 피츠워렌 열차 사고

[ 193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39년 12월 12일
136 두체스호 침몰사고
1939년 10월 28일
35 밸리필드 광산 참사
1939년 6월 1일
99 테티스호 침몰사고
1937년 12월 10일
35 캐슬커리 열차 충돌 사고
1937년 7월 2일
30 홀디치 광산 참사
1936년 8월 6일
30 완클리프 우드무어 광산 참사
1934년 9월 22일
266 그레스포드 참사
1932년 1월 26일
60 M2호 침몰 사고
1931년 11월 20일
45 벤틀리 광산 붕괴 사고
1931년 1월 29일
27 1931년 헤이그 광산 폭발 사고
1930년 10월 5일
48 R101호 추락사고
[ 192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29년 12월 31일
72 글렌 극장 참사
1928년 6월 27일
25 달링턴 열차 충돌 사고
1923년 9월 25일
40 레딩 광산 침수 사고
1922년 9월 5일
39 1922년 헤이그 광산 폭발 사고
1921년 10월 9일
22 로완호 침몰 사고
1921년 8월 23일
28 R38급 비행선 추락 사고
[ 191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19년 10월 20일
31 레벤트 광산 사고
1919년 1월 1일
201 ~ 205 로라일호 침몰 사고
1918년 9월 25일
470 오틀란토호 침몰 사고
1918년 7월 14일
37 UB-65 침몰 사고
1918년 10월 24일
364 프린세스 소피아호 침몰 사고
1918년 9월 16일
79 글래턴호 폭발 사고
1918년 7월 1일
134 칠웰 탄약 공장 폭발 사고
1918년 2월 24일
94 플로리젤호 침몰 사고
1918년 1월 31일 ~ 2월 1일
105 메이 섬 전투
1918년 1월 12일
155 민니 광산 참사
1918년 1월 12일
188 오팔호 침몰 사고
1917년 7월 9일
843 뱅가드호 폭발 사고
1917년 6월 13일
43 애쉬톤 언더 라인 폭발 사고
1917년 2월 21일
650+ 멘디호 침몰 사고
1917년 1월 29일
32 K13 침몰 사고
1917년 1월 19일
73 실버타운 폭발 사고
1917년 1월 19일
30 E36호 침몰 사고
1916년 12월 5일
35 번보우 탄약 공장 사고
1916년 8월 21일 ~ 24일
40 로우 무어 폭발 사고
1916년 4월 2일
115 파버샴 공장 참사
1915년 6월 22일
226 퀸틴스힐 철도 참사
1915년 5월 27일
352 프린세스 이레네호 침몰 사고
1915년 5월 7일
1198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1914년 10월 30일
83 로힐라호 침몰 사고
1914년 10월 14일
439 셍헤니드 탄광 참사
1914년 5월 29일
1014 엠프레스 오브 아일랜드호 침몰사고
1914년 1월 16일
58 A7호 침몰 사고
1912년 7월 9일
91 카데비 광산 참사
1912년 4월 14일 ~ 4월 15일
1514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1910년 10월 21일
344 프레토리아 광산 참사

[ 1900년대 이전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09년 2월 16일
168 웨스트 스탠리 광산 참사
1908년 10월 27일
29 야머스호 침몰 사고
1906년 12월 28일
22 엘리엇 정션 열차 충돌 사고
1906년 7월 1일
43 세일스버리 열차 충돌 사고
1905년 11월 19일
39 왓슨 스트리트 하숙집 화재
1905년 7월 27일
20 홀로드 열차 충돌 사고
1905년 3월 10일
33 1905년 캠브리안 광산 참사
1903년 1월 27일
52 코니 병원 화재
1902년 4월 5일
25 1902 아이브록스 참사
1898년 6월 21일
34 알비온호 진수식 참사
1896년 4월 30일
82 펙필드 광산 참사
1892년 8월 26일
112 파크 슬립 광산 참사
1888년 9월 5일
63 모리스우드 광산 참사
1887년 9월 5일
186 엑세터 극장 화재
1887년 2월 13일
39 와트슨 광산 참사
1887년 5월 23일
73 우드스톤 광산 참사
1885년 12월 23일
81 마디 광산 폭발 사고
1884년 7월 16일
24 불하우스 브리지 열차 탈선 사고
1883년 7월 3일
124 다프네호 참사
1883년 6월 16일
183 빅토리아홀 참사
1882년 2월 16일
63 트림돈 그랜지 광산 참사
1881년 10월 14일
189 아이마우스 참사
1879년 12월 28일
59 테이 브리지 붕괴 사고
1878년 9월 11일
268 애버컨 광산 참사
1878년 6월 7일
189 우드핏 광산 폭발 사고
1878년 9월 3일
600+ SS 프린세스 앨리스 침몰 사고
1877년 10월 22일
207 블랜타이어 광산 참사
1874년 12월 24일
34 쉬프톤 처웰 열차 탈선 사고
1874년 9월 10일
25 소프 열차 충돌 사고
1873년 3월 20일
535 SS 아틀란틱 침몰 사고
1871년 2월 24일
38 펜터 광산 폭발 사고
1868년 12월 26일
26 퀸핏 광산 폭발 사고
1867년 1월 15일
40 리진트 공원 참사
1866년 12월 12일
361 오크스 폭발 사고
1866년 1월 11일
220 런던호 침몰 사고
1865년 3월 15일
20 벨 스트리트 홀 화재
1865년 1월 16일
20 던디 압사 사고
1864년 10월 6일 ~ 7일
53 뉴캐슬 대화재
1864년 3월 11일
244 데일 디크 저수지 붕괴 사고
1861년 8월 25일
23 클레이턴 터널 열차 충돌 사고
1853년 10월 20일
30 하트레이크 참사
1852년 2월 26일
444 ~ 450 버큰헤드호 침몰 사고
1850년 3월 30일
150+ 로얄 애들레이드호 침몰 사고
1849년 2월 19일
70 로얄 극장 참사
1848년 8월 18일
100+ 모레이 어선 참사
1846년 7월 9일
39 이스트 휠 로스 광산 참사
1845년 5월 2일
79 그레이트 야머스 대교 붕괴사고
1844년 9월 28일
95 해스웰 광산 폭발 사고
1838년 7월 4일
26 휴스카 광산 참사
1812년 5월 25일
92 펠링 광산 참사
1808년 9월 20일
23 로얄 오페라 하우스 화재
1807년 11월 19일
400+ 로치데일호 프린스 오브 웨일스호 충돌 사고
1807년 4월 18일
60 ~ 90 하위치 페리 참사
1807년 2월 23일
27 ~ 34 1807년 뉴게이트 참사
1806년 12월 25일
22 스톳필드 어선 참사
1806년 3월 16일
400+ 인빈시블호 침몰 사고
1800년 5월 17일
673 퀸 샬롯호 화재
1727년 9월 8일
80 번웰 인형극 극장 화재
1707년 10월 22일
1400+ 실리 영국 해군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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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헤드라인 내용은 실제와는 살짝 다르다. 침몰 시간과 생존자 숫자 등이 맞지 않지만, 사고 후 혼란스러웠던 정보수집 속에서 나온 실수이다. 당시 타이타닉 침몰을 취재하던 기자들의 정보 수집 수단은 대서양에서 날아오는 모스 부호밖에 없었다. [2]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타이타닉 침몰 실시간 영상의 업로더인 Titanic: Honor and Glory가 만든 영상이며 그에 따르면 생존자 증언록 'On A Sea Of Glass'를 토대로 역사가들의 협력과 생존자 증언을 교차검증하여 만든 영상이라고 한다. [3] Queenstown이란 지명은 빅토리아 시대 대영제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아일랜드에서는 1921년에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자치권)하면서 "코브(Cobh)"로 바뀌었다. 파일:아일랜드 코브.png [4] 1912년 4월 15일 아침 독일의 여객선 SS 프린츠 아달베르트호의 승무원이 찍은 사진으로, 검붉은 페인트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5] 수면 아래의 빙하는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빙하가 수면에 보이는 것처럼 예쁜 모양으로 아래로 쭉 뻗어 있을 리가 없고 실제로는 수면 아래에서 얼마나 넓고 울퉁불퉁하게, 또 얼마나 깊고 얕게 뻗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빙산에 대해 잘 알려진 현재조차도 눈에 보이는 빙산만 보고 방심했다가 꽤 떨어진 거리임에도 수면 아래의 빙산에 닿아서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가 잦다. [6] 명령은 우현전타(Hard Starboard)였는데 틸러 명령법에 따른 것이다. 당시 항해술의 원류던 범선에서 기인한 조타술은 진행방향과 조타지시가 반대였다. 즉 당시의 우현전타(Hard Starboard)는 좌현(Port side/Larboard)으로 배를 최대한 꺾으라는 말이 된다. 언뜻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이 조타술은 타륜이 없던 시절 노잡이가 키(Rudder)에 연결된 노(Tiller)를 직접 밀고 당기며 방향전환하던 것에서 기원한 명령법으로 오늘날에도 소형 보트 등에서 사용되며 헷갈리지 않게 'Wheel to~'를 덧붙여 명령하도록 보완되었다( 영어 위키백과 <Tiller> 항목 참조). 타이타닉 시절은 이런 틸러 명령법이 자동차 핸들처럼 선체의 진행방향을 기준으로 조향하는 러더 명령법으로 변하던 과도기다. 타륜이 17~18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이에 맞는 러더 명령법은 20세기가 돼서야 표준화되었는데 이는 제도와 관습이 기술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 지체 사례 중 하나다. 영화 타이타닉(1997)에서도 이런 점들을 고증해 당시 상황을 표현했다( 참조1, 참조2). 최근 들어 당시에 조타수가 이런 조타법의 과도기에 따른 혼란으로 타륜을 잘못 조작해서 빙산과 충돌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당시 청문회 결과와 대치되는 유족 한 명의 증언이 근거의 전부이며 영국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19세기 말부터 러더 명령법으로 바꾸기 시작할 때도 일관성과 전통 유지를 위해 틸러 명령법을 계속 고수하다가 러더 명령법으로 국제 표준이 정립된 1933년에 이르러서야 조타법을 바꾸었으므로 영국 선적인 타이타닉의 숙련된 조타수가 명령을 오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7] 선박의 엔진은 자동차나 항공기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배를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조작이 무척 까다롭다. 더구나 지금과 달리 컴퓨터도 없고 전자공학적 기술이 미흡했던 시절 어선 수준이 아닌 커다란 군함이나 여객선은 조타실/ 함/선교에서 간단히 출력을 늘이고 줄이는 것이 불가능했고 기관실에서 인력과 시간을 들여서야 할 수 있었다.(당장 위의 영상에서 봐도 알 수 있듯이 조타실에서 버튼 하나 누른다고 후진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기관실 화부들이 일사불란하게 온갖 복잡한 조작을 하고 나서야 겨우 엔진을 멈추고,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돌게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후진을 할 수 있었다. 만화 땡땡의 모험 <노예선> 편에서 이 모습이 잘 고증되어 있다. 아독 선장이 선교의 엔진 오더 텔레그레프가 고장나자 직접 전화로 기관실에 연락해 속도를 바꾸라고 지시한다.) 그래서 등장한 물건이 바로 엔진 오더 텔레그레프다. 교와 기관실에 같은 장치를 하나씩 둔 후 선교에서 원하는 속도를 지정하면 지정된 속도가 기관실에 전달된다.(때릉때릉하는 소리가 나는 이유는 혹시라도 당직 인원이 한눈을 판다던가 해서 기껏 속도 조절 명령 보내도 기관실에서 그걸 못 확인했을 수 있으니 때릉때릉 소리를 내서 선교 또는 기관실에 '속도 조절 명령이 내려왔다'는 정보를 청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그럼 기관실에서도 명령을 확인했다는 의미로 기관실의 엔진 오더 텔레그레프를 조작해 선교로 신호를 보낸 후(머독이 선교 밖에 나와 있을 때 아무도 손 안 잡고 있던 엔진 오더 텔레그레프가 소리를 낸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기관실에서 속도를 바꾼다. 컴퓨터 제어 장치가 발달해 아주 큰 선박도 조타실만으로 거의 모든 기능을 완벽에 가깝게 통제 가능하게 된 오늘날에도 예비용으로 엔진 오더 텔레그레프가 사용되고 있다. [8] 일설에는 주 기관 정지(Main Engine Stop)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다수설은 전속 후진이다. 본문의 재현 영상은 정지설을 따르고 있다. 한편 당시 기술의 한계를 고려했을 때 후진이든 정지든 충돌엔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항해사의 의도를 짐작하는데 참조될 뿐 무의미한 변수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당시에는 전진 방향으로 작동하던 프로펠러를 후진으로 바꾸려면 회전하던 프로펠러를 완전히 멈추게 만든 뒤 다시 반대 방향으로 돌려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상당히 많이 소모되었고 반응이 빠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빙산 발견 후 충돌까지 걸린 시간을 고려했을 때 타이타닉이 후진을 시도했더라도 충돌전까지 프로펠러를 완전히 정지시키지 못했거나 간신히 정지시킨 후 이제 막 역회전에 돌입하려던 찰나에 충돌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참고로 현대 선박은 헬리콥터의 주 프로펠러처럼 프로펠러의 날개 각도 자체를 바꾸는 식으로 전.후 추진력을 조절하기 때문에 신속한 후진이 가능하다. [9] 타이타닉은 배의 크기에 비해 방향타가 다소 작았고 총 3기의 프로펠러 중 Main Engine 프로펠러는 기관 유형이 유일하게 증기터빈 방식이었기에 후진이 되지 않았다. 물론 최근에는 프로펠러 피치를 가변해서 터빈 기괸도 손쉽게 출력 방향을 바꿀 수는 있지만 이런 기술은 당대에는 없었다. 이로 인한 느린 기동에 플리트는 항해사가 본인의 경고를 무시해 늦게 대응한 것으로 오인하기도 했다.(1997년 영화에서는 플리트가 "왜 배를 돌리질 않는 거야!"라고 초조해하는 대사를 넣어 이를 묘사했다) 이렇듯 선박 자체가 둔함에도 통상 절차로 빙산 회피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전속항진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10] 전타(비상타)로 회피하는 상황에서 정지가 아닌 타력을 낮추는 전속후진을 택한 점, 방수격벽 폐쇄 예비 알람을 울린 점 등을 볼 때 어느 정도의 충격은 각오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항해술에 비춰봤을 때 이 정도면 배의 특성(둔하지만 튼튼한 철선)을 고려해 노련한 임기응변을 보인 것이다. [11] 금속이 외부 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유연하게 변형되는 성질. [12] 북극해 주변이라는 소리가 있으나 사고 지점은 북위 41° 44′, 서경 49° 57′으로 북극해와는 거리가 멀다. [13] 여담으로 영화 앤트맨에서 주인공 스콧 랭이 금고를 털 때 금고의 재질을 말하면서 타이타닉호의 강재와 침몰 원인을 언급했고 액체질소로 금고 문을 동파시키는데 성공했다. [14] 연철 항목의 첫째 사진의 검은색 줄무늬가 바로 슬러그다. [15] 타이타닉이 충돌할 당시의 충격에 의한 압력은 계산결과 14,000psi(96,526kPa)로 추정되었다. [16] 피해 보고를 들은 앤드루스는 그냥 내버려둘 경우 침몰까지 대략 1시간, 펌프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잘 버텨봐도 2시간 안에 침몰할 것으로 예측했으나, 실제로는 예측 최대치였던 2시간을 훨씬 넘어 2시간 40분 가량을 버텼다. 배가 마지막에 부러지지 않았다면 더 버텨 3시간 이상 걸렸을 수도 있다. [17] 영국 왕립기상학회가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기상>의 2020년 8월 4일 발간지에 등재 [18] 타이타닉호가 구조요청을 발신한 것이 0시 15분이고 카르파티아호가 수신한 것이 0시 25분이다. 백번 양보해 즉각 수신했다고 하더라도 10분의 차이밖에 발생하지 않으며 10분 일찍 온다고 참사를 막을 순 없었다. [19] 마찬가지로 명령은 좌현전타(Hard Port) [20] 빙산과 충돌중인 우현으로 방향을 돌리라는 것이 얼핏 보면 피해를 더 가중시키는 모순된 행동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배는 자동차 같이 핸들을 돌리면 '앞쪽'이 돌아가며 회전하는 게 아니라 선미의 키를 돌려 '뒤쪽'을 회전시키며 조향한다. 다시 말해 앞쪽 선수는 그대로 있고 선미 부분만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좌현전타 상태를 그대로 유지했다면 배의 뒤쪽이 더욱 더 오른쪽으로 향하게 되어 우현 전체가 긁히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미 빙산과 충돌해 버린 이상 머독은 빙산을 일종의 디딤판 삼아 우현전타하여 배의 뒷부분을 왼쪽으로 돌려 빙산으로부터 벗어나서 충돌이 배 앞쪽 한정된 부분에 그치도록 한 것이다. [21] 실제 격벽은 닫히기 전에 경보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울리는 구조였고 닫히는 속도도 느렸다. 설령 격벽이 닫혔다고 해도 수동으로 다시 열 수 있는 데다, 영화에서 잭과 로즈가 러브조이를 피해 보일러실로 들어갈 때 썼던, 벽에 박혀 있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해치를 열고 위쪽으로 나가는 방법도 있어서 영화상의 묘사처럼 문 닫히면 죽는다는 식으로 무리해서 나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배럿이 5번 보일러실로 들어가 사다리를 오를 때 이미 6번 보일러실은 침수되고 있었다. [22] 또는 반속 전진(Half Ahead) [23] 선체 내 침수 발생 및 해수 유입 사고 등의 해수 관련 사고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선박의 배수 펌프 [24] 즉, 주기관 정지(Main Engine Stop), 좌현 기관 정지(Over Engine Stop), 우현 기관 정지(Port Engine Stop) [25] 수 천 명의 승객들이 패닉에 빠지는 순간 인원 통제는 물 건너가기 때문이다. 훗날 오세아노스호 침몰 사고 때에도 비슷한 방법을 사용해서 부상자 없이 전원이 구조되었다. [26] 아주 근거 없는 소리도 아니었던 게, 불과 몇 년 전인 1904년에 밴쿠버 근해에서 침수로 침몰한 클라람(SS Clallam)호는 구명정 3척에 여자와 아이들을 태워 보냈지만 풍랑으로 인해 200미터도 가지 못하고 전복되어 전원이 사망했다. 오히려 배가 뒤집힐 때까지 남아있던 남성들은 대부분 구조되었다. 이는 구명정에 보트를 지휘할 사관들이 한명도 타지 않은 것이 컸으며 배에 남은 남자들은 처자식들이 익사하는 참혹한 광경을 배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27] CQD는 SOS로 대체되기 전 사용되던 조난신호이며 DE는 영어로 'This is'에 해당하는 무선 약어, MGY는 타이타닉호의 콜사인이다. [28] CQ= sécurité, 뜻은 보안, 안전. 용도는 모든 무선국 호출, D= Distress, 조난. 둘을 합쳐 구조요청이 된다. 프랑스어 sécurité의 줄임말인 sécu를 음이 비슷한 두 개의 알파벳으로 짧게 정리하여 무선통신에 용이하게 한 CQ와 조난이라는 뜻의 영단어 Distress의 앞 글자를 합한 신호다. 프랑스어인 이유는 당대 외교 및 국제전보 등의 표준어는 프랑스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며 2차대전기까지 유럽의 주요 외교 담화문은 프랑스어로 작성되었다. [29] 캘리포니안호는 화물선이라 속도가 약 12~13노트로 느린 편이었지만 워낙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응답 즉시 전속력으로 달렸다면 길게 잡아도 1시간 이내로 도착이 가능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타이타닉 사고 이후 무전을 상시 켜 놓고 교대근무를 통해 통신사가 항상 대기하도록 하는 국제규약이 생겨났다. [30] 이것 때문에 침몰 후 조사 과정에서 빡친 에반스가 의도적으로 조난신호를 무시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애반스 본인이 "그렇게까지 화가 날 일은 아니었다."고 증언하며 부정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SS 캘리포니안호에는 통신사가 에반스 혼자였고 항해 내내 잠도 안 자고 근무할 수는 없으니 한마디로 통신사가 퇴근해 버린 것이다. [31] 프랑크푸르트호는 당시 해역에 있던 선박들 중 출력이 가장 높은 무선송신기가 장착되어 있어서 거리가 멀었음에도 가장 빠르게 신호를 수신할 수 있었다. [32] 뉴펀들랜드 섬 남단에 위치한 통신소. 당시 대서양을 오가는 선박들의 통신을 중계했다. [33] 이후로 타이타닉호나 레이스곶 등에서 보내는 조난위치가 북위 41.44나 41.46으로 서경 50.14나 50.24로 조금씩 다르게 전달되는데 혼란으로 인한 오타거나 타이타닉호가 표류하면서 생긴 오차로 보인다. [34] 당장 카르파티아호를 비롯해 당시 해역에 있던 상당수의 배들은 처음엔 타이타닉호가 침몰한다는 것을 선뜻 믿지 못하고 오보거나 기관고장 같은 덜 긴급한 사안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타이타닉호가 조난신호를 반복해서 보내며 침몰상황을 구체적으로 전달하자 주변 선박들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무선이 폭주하기 시작한다. [35] 여담으로 타이타닉의 통신사 해롤드 브라이드와 카르파티아의 해롤드 코탐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사이였다. 통신 기록을 잘 보면 서로 'Old man', 즉 영감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물론 농담인 애칭으로 브라이드는 당시 22세, 코탐은 21세로 새파랗게 젊은 청년들이었다. 코탐은 브라이드의 선임 통신사 필립스와도 친구였다. [36] 타이타닉호는 이피랑가호에서 답을 했지만 보일러 증기배출 소리에 묻혀 못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아무것도 안들리는 상태라는 말을 반복한다. [37] 뉴욕에서 더반으로 향하던 화물선인데 실종 이후 끝내 발견되지 못했고 폭풍우에 침몰한 것으로 여겨진다. [38] 타이타닉호는 침몰 전까지 광범위하게 조난신호를 송신하고 이에 응답하는 선박을 특정해 호출했는데 예외적으로 캘리포니안호는 먼저 호출하며 통신을 시도했다. 이는 타이타닉호의 선장(또는 항해사)가 캘리포니안호에서 보낸 빙산 경보에 있던 위치와 투묘 중이라는 정보를 토대로 인근에 있을 것으로 보고 호출을 지시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타이타닉호는 무선이 되지 않는 인근 선박에 구조 신호를 보내기 위해 폭죽을 끊임없이 쏘는 등 정황상 캘리포니안호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9] 그래서 왜 "What is the matter with you?(무슨 일이냐?)"라고 물어봤는지에 대해서는 프랑크푸르트호 통신원의 통역 오류였을것이란 주장이 정설이다. 독일어로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는 말을 영어로 직역했을때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 [40] 해당 장면 외에도 탈출이 시작된 이후 해당 위치의 항해등을 스쳐가는 장면들에서 항해등이 특정 모스부호로 깜박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41] 등대는 20~30km 거리에서도 관측이 가능하다. 타이타닉의 불빛이 등대만큼 강렬하지는 않았겠지만 16km 정도면 기상이 좋을 땐 관측 가능한 거리다. 당시 사고 해역은 저수지마냥 고요했고 달까지 어두워 빙산을 발견하기엔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빛을 관측하기엔 최상의 조건이었다. [42] 빙산 충돌로 배가 회전하며 조명이 상대적으로 적게 보이는 선수(또는 선미)를 거쳐 다시 현측을 보이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추정된다. 물론 희미하게 불빛만 보이는 상황에서 배가 도는 모습이 보일 리는 만무하고 잠시 빛이 약해졌다가 다시 강해지는 변화였을 것이다. [43] 이때가 타이타닉 완전 침몰 전 도착할 마지막 기회였으나 안타깝게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 일로 인해 1912년 미국에서 무선통신규제법을 개정하면서 붉은색 불빛은 비상 신호로 해석한다고 정의한 것을 시작으로 전세계적으로 바다에서 로켓 신호는 무조건 조난 신호로 간주하는 합의가 널리 퍼지며 정착되었다. [44] 로드 선장과 캘리포니안호의 선원들이 유독 비난을 받은 이유는 타이타닉호의 침몰 이후 청문회와 인터뷰 등에서 끊임없이 말을 바꿨고, 16km 떨어져 있던 캘리포니안호가 31.4km 떨어져있다고 한다던지, 캘리포니안호의 선내 일지를 조작하는 등 불리한 자료를 없애려고 해서였다. 오히려 최근(1992년)에 와서야 영국 정부는 로드 선장과 캘리포니안호가 최대한 빨리 갔었더라도 사고의 결과에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결정을 내렸지만, 그게 로드 선장이 사고에서의 미진한 대처 그 자체보다도 '그 후에 책임회피를 하려 한 모습'을 없앨 수는 없었다. [45] 1997년 영화에서도 이 장면이 나오는데 선장은 "Yes...Women and children first"라고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라이톨러는 승객들에게 "Women and children ONLY"라고 말한다. [46] 영화에서도 이런 혼란이 묘사되는데 침몰이 가속화되면서 승객들이 패닉에 빠져 난장판이 되려고 하자 라이톨러가 총을 겨누며 "질서 지키지 않으면 전부 개처럼 쏴버리겠소! 질서 지켜요!"라고 협박한다. 문제는 이때 빈 총이었기 때문에 이후 라이톨러가 뒤돌아서서 로우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살짝 떨리는 손으로 총을 몰래 장전한다. 실제로 1등석 승객인 아치볼드 그레이시를 포함한 다수의 승객들이 라이톨러, 머독, 로우 등 항해사들이 위협의 의미로 총을 허공에 쐈다고 증언했다. 일부 승객들은 조립식 단정인 A호정이 내려지다가 사고가 나 제대로 내려지지 못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항해사 한 명이 승객 두명을 쏴죽이고 자살했다고 증언했으나 당시는 이미 조명도 나가고 완전히 난장판이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확한 증언은 아니다. 해당 증언을 한 승객들도 자신들이 봤다는 항해사가 누구인지 지목하지 못했기 때문에 총을 쏜 사람이 항해사가 맞는지도 불명확하다. [47] 배가 항구에 정박했을 때 다리를 연결해 출입하는 문이다. [48] 정원 40명의 구명정에 25명이 타고 있었다. [49] 부인은 살아남았지만 이혼했다. [50] 선교 위에 비상용으로 탑재되어 있던 접이식 구명정 2척 제외. [51] 구명정이 애초에 비상일 때 쓰는데 무슨 비상용인가 싶겠지만 당시 구명정은 오늘날과 같이 '바다 위에서 구조될 때까지 버티는 용도'가 아니라 '다른 배나 장소에 사람을 옮기는 이동용'의 의미가 강했다. 산업혁명 이전까진 멀리 원양으로 나가는 배는 대체로 화물선이라 승선원이 적어 구명정이 넉넉했고 여객선은 지중해 같은 연안 위주로 돌았으므로 조난을 당해도 구조 선박이 금방 오거나 가까운 섬이나 육지에 내려놓고 돌아오면 되었기 때문이다. 타이타닉호 시절은 이제 막 대양 여객선이 우후죽순 생기던 때로, 구명정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범선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비상용 구명정은 기존처럼 일반 구명정으로 사람을 옮기는 방식으론 대처가 어려운 비상상황(급속 침몰, 화재, 망망대해에서 침몰 등)을 염두에 두고 그럴 때 쓰라고 둔 오늘날로 치면 구명벌(life raft)에 해당하긴 한다. 문제는 이 구명정이 초기 설계상 일반 32대, 접이식 32대로 총 64대까지 실을 수 있었지만 미관과 조망 그리고 규정상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일반 16대, 접이식 4대로 총 20대밖에 싣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접이식 구명정이 대거 축소되었는데 이는 연안에서 좌초되어 승객을 옮기는 일은 생길지언정 완전히 침몰해서 바다에서 버티는 상황은 결코 생기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었겠지만 결국 오만이 되어 대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52] 공교롭게도 이 노부부의 고손녀의 남편이 바로 타이타닉호 관광 잠수정 사고사망자가 되었다. [53]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을 개장한 솔로몬 구겐하임의 동생이다. [54] 한국에 번역된 곡으로는 개신교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 가톨릭 성가 '주여 임하소서'가 된다. [55] 접이식 구명정은 적재를 위해 슬라이드 도어마냥 보트가 반월 모양으로 접히는 형태였다. 당연히 짜맞춰 방수도료까지 바른 일반 보트와 달리 방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래서 보트 아래를 방수처리된 캔버스로 덮어야 했는데 급한 상황에서 이게 제대로 덮이지 않아 누수가 생긴 것이다. [56] 영화에서 묘사된 선체의 기울기는 거의 45도에 육박할 정도로 가파르지만 2012년 해당 영화 감독인 제임스 카메론과 여럿의 선박 전문가들이 재조사한 결과 실제 최대 응력 각도(두 동강 나기 직전의 각도)는 약 23도 수준으로 생각보다 완만했다. 그래도 사람이 20도 이상 기울어진 경사에 서면 굉장히 가파르다는 느낌은 받게 되며 나무로 된 갑판은 꽤 미끄럽다. 참고로 23도면 한국 도로 경사도 규격인 % 경사도 기준으론 43%에 해당하며 대다수의 4륜 구동 차량도 올라가기 힘든 기울기에 해당한다. [57] 당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정전이 발생했을 때 갑판 후미로부터 밑에 있는 선체 부분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음이 들렸다고 하였다. 소음의 원인은 2호기 연돌의 신축 이음으로 해수가 유입되어 무너지는 소음이었다. [58] 작은 균열이 1시 55분에서 2시 사이에 생기고 있었다고도 한다. [59] 영화 타이타닉에선 3호기와 4호기 연돌 사이가 갈라지는데 이는 영화 제작 당시인 1990년대 중반에는 타이타닉 후미의 침몰 잔해의 절단 부분이 해저로 향하며 물살에 선체의 15미터 정도가 유실되어 정확한 절단부위를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2년 영화의 성공 이후에 타이타닉도 재조명되면서 많은 조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영화 제작 당시와 달라진 점이 생겼다. [60] 심지어 배가 두 동강 나던 시점에는 이미 1,2번 굴뚝이 해수면 아래로 사라진 상태였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저게 몇 번째 굴뚝인지까지 봤다는 것은 굉장한 관찰력과 침착함이 있어야 한다. [61]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직접 예시를 들어본 적이 있다. [62] 이중저에 대응되게 설계된 갑판이며, Mengot은 이 갑판이 이중저 대신 잠시동안 선수와 선미를 서로 연결시켰다고 본다. [63] 가설 영상 애초에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한 위치 상 저런 식으로 가라앉는 건 불가능하다. 어뢰를 맞았으면 또 몰라도. 근데 그걸 7년 넘게 밀고 간 유튜버가 Aaron1912이다. 많은 논란과 그의 가설의 반박에 유튜브를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복귀해서 Aaron1912 Records&Research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놀라운 점은 이 극한 V자 가설을 처음부터 만들고 7년 동안 밀고 간 사람이 Aaron1912라는 점이다. 아직도 자신의 가설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64] 생존자들에 의하면 선체 후미가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은 후에도 10초간 폭발음과 같은 소음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65] 타이타닉 100주기 NGC 다큐멘터리에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마치 항공기 추락현장을 보는 듯 하다고 언급했다. [66] 얼마나 차가운지 체감이 안된다면 동네 목욕탕 냉탕 온도가 20도이다. 미주리 주에는 타이타닉 박물관이 있는데 관람객들이 영하 2도의 물에 손을 넣는 체험을 할 수 있는 코너가 있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손 한쪽만 넣음에도 1분을 버티지 못하고 2분 이상을 버티면 상당히 오래 참은 경우이다. [67] 액체에 다른 물질이 용해되어 있을 경우 어는 점이 낮아진다. 바닷물에는 소금이나 다른 무기물이 녹아 있는 데다 끊임없이 바람에 의해 파도가 치므로 어는 점이 더 낮아진다. [68] 다만 더운 바다에는 상어, 해파리 등 위해 생물들이 많이 서식하여 이들의 습격에 의한 피해를 입을 수 있으며 열대 수역일 경우에는 한낮에 태양의 직사광선과 바다의 습한 열기로 인한 갈증과 탈수 증상으로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런다고 바닷물을 마셨다가는 탈수 증상을 더욱 악화시키게 된다.) 후술할 브리타닉호의 사례는 사고 지점이 온난한 수역이었다는 점 이외에도 육지에서 멀지 않고 상어 등 위해 생물이 적으며 선박 통행량이 많은 지중해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69] 사망자가 30명 정도 있긴 했는데 이들은 타고 있던 구명정이 멈추지 않고 회전하던 배의 프로펠러로 빨려 들어가 사망한 사람들이다. 지중해와 대서양의 수온 차이는 지형에 의한 것으로서 타이타닉이 침몰한 대서양은 북극해와 전면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유럽 대륙에 의해 막혀있는 동위도의 지중해보다 수온이 낮을 수밖에 없다. 타이타닉호가 가라앉은 지점의 위도는 북위 41º 44'이고 브리타닉호가 가라앉은 지점의 위도는 북위 37º 43'으로서 크게 차이가 없고 기온보다도 수온변화가 느린 걸 감안해도 4월 중순의 수온과 11월 하순의 수온은 거의 차이가 없다. 당시 이상 저온이 발생한 것일 가능성도 높다. 이해 4월에는 서울도 이상 저온이었다. [70] 1958년판 영화에는 이 장면이 수록되었다. 한 남성이 B호정에 접근하자 이미 올라탄 사람들이 저지하였고 이 말을 하고 나서 다른 곳으로 헤엄쳐 갔다. 아직 구명정 주위에 있던 라이톨러가 돌아오라고 소리쳐 보지만... 1997년판 영화에서는 이 사실을 따온 장면이 촬영되었다. 단, 본편에선 삭제되어 미방영 장면 모음으로만 볼 수 있다. 알려진 이야기와는 좀 다르게 전복된 구명정이 아닌 로즈와 잭이 매달린 판자로 헤엄쳐 오다 잭에게 제지당하자 위 대사를 남기고 순순히 다른 곳으로 헤엄쳐 간다. 고증을 목적으로 넣은 건 같은데 잭이 너무 나쁘게 보여서 삭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71] 게다가 여기 매달린 사람 중엔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있었는데 자신의 상관을 못 알아봤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스미스 선장이 탈출해 살아보려고 했다면 훨씬 많은 목격담이 있었을 텐데 그에 대한 확실한 목격담은 조타실에 들어갔다는 것, (침몰 전) 선원들을 지시했다는 것에서 끊긴다. 즉 마지막 순간까지 선원들을 지휘하고 이후 본인은 탈출을 포기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72] 카르파티아는 다른 곳의 전력과 난방까지 아끼며 미친듯이 달려 3시간 반만에 왔는데 원래 추정했던 대로 최고속인 15노트로 달렸을 경우 소요 예정시간은 네 시간으로 딱 30분 차이가 난다. 카르파티아가 무리해서 운항한 게 라이톨러와 B호정 생존자들을 살린 셈이다. [73] 알코올은 혈관을 확장시켜 열을 많이 빼앗기게 만든다. [74] 아동이나 노약자처럼 줄사다리를 타기 어려운 사람들은 밧줄을 꿴 크고 튼튼한 자루 속에 들어가게 해서 끌어올렸다. [75] 평소 운항시 최고 속도는 물론이고 공식 스펙(테스트 속도)인 15.5노트보다 오히려 빠른 속도였다. 순항 속도가 21노트에 달하고 최고속도는 23노트인 타이타닉이 당시 여객선 중 얼마나 빠른 배였는지 알 수 있다. [76] 전술했듯 타이타닉호를 침몰시킨 것을 비롯해 빙산 여러 개가 여전히 현장 인근을 떠다니고 있어서 카르파티아호도 자기가 침몰할 위험을 감수하고 구조하러 간 상황이었다. [77] 방금 타이타닉호의 침몰에서 겨우 살아났는데 타이타닉과 똑같이 생긴 배에 타라고 하면 사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인 사람들이 옮겨 탈 리가 없다. [78] 죽다 살아나서 바닥난 체력과 사고로 인한 충격으로 인해 혼이 반쯤 빠진 생존자들에게 무턱대고 인터뷰를 시도하는 것은 매우 큰 실례다. 일례로 세월호 사고 당시 한국에서는 생존자들에게 무턱대고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고 물어본 질문의 수준까지 떨어지는 기자들의 행태가 질타를 받았다. [79] 당대에는 심해를 제대로 탐사할 수 있는 기술은 당연히 없었지만 추를 매단 밧줄을 바다에 내려 수심을 측정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고 그 정도 수심은 수압이 매우 높아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80] 이는 승선객 명부에 따른 수치이며 돌발상황 등으로 인한 변화내용은 반영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81] 자연적 재해 분야 최대 선박 사고 사망자이다. 다른 사고로는 1945년 조선인 수천명이 죽은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 같은 일이라든지 4천 명 이상이 죽은 1987년 12월 필리핀 도냐 파즈호 침몰 사고 같은 비극이 있다. 사망자 수가 타이타닉의 4배 가까이 된다. 사상 최악의 단일 선박 침몰 사망숫자는 빌헬름 구스틀로프호(1945년에 발트해 연안에서 후퇴하던 독일 국방군과 피난민을 태우고 가다가 소련 잠수함에 침몰. 최대 1만 명이 넘게 타고 있었다고 하는데 2,000명 정도가 구조. 게다가 장교들이 사람들을 가둬두는 바람에 탈출도 늦어졌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별 의미는 없었겠지만.), 고야호(같은 지역에서 침몰. 이쪽은 6천~8천명은 넘게 타고 있었는데 그 중 180명 정도만 생존). 소련의 아르메니아호(소련의 흑해 정기 유람선이었다가 징발된 병원선으로 루프트바페 He 111 폭격기 어뢰에 의해서 격침되어 최소 5천 명 가량의 사상자가 나 병원선 중에서는 가장 큰 인명 피해를 기록했다.) 등이 있으며 아르메니아호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병원선 격침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 기록도 1950년에 깨질 뻔했다. 흥남 철수 당시 14,500명의 군인 및 한국인 피난민들을 수송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해당 선박으로, 탑승한 한국인 피난민들이 항공유 드럼통 위에서 모닥불을 피웠다.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300톤의 항공유가 적재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불이 붙었을 경우 14,500명 전원이 폭사해 1,514명이 사망한 타이타닉호는 물론 9,343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되는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기록도 밀어냈을 것이다. [82] 한국인들이 흔히 방문하는 대중목욕탕 냉탕의 수온이 15도 전후다. 이 정도 수온만 되어도 전신을 담그고 있을 경우 5분도 지나지 않아 나가고 싶은 매우 강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타이타닉 영화 메이킹 필름에 다르면 실제로 촬영 당시 사용된 물이 15도 정도였다고 한다. 너무 따뜻하면 김이 나와서 편집하기 어렵고 너무 추우면 생명이 위험하므로 제작진이 닿은 타협점이다. 즉 배우들은 목욕탕 냉탕 정도에서 촬영을 한 셈이고 실제로 디카프리오는 촬영할 때 컷 소리가 나오면 욕을 뱉거나 윈슬릿이 비명을 지르곤 했다. 윈슬릿은 하차할 뻔하기도 했는데 다른 세트 제작이 늦어져 가장 처음 촬영했던 바다 한복판에서 허우적대는 씬을 찍던 도중 폐렴에 걸렸기 때문이다. [83] 위도는 북위 41º 44'에 불과하지만 빙산이 떠다니는 -2℃의 수온이면 남극해, 북극해 한가운데 수준의 수온이다. 예시로, 배로우 앞바다의 수온이 1-4월 기준 최저 -3℃ 정도고, 맥머도 기지 앞바다의 7-10월 수온도 -2℃ 정도다. 참고로 배로우는 북위 71º 17', 맥머도 기지는 남위 77º 51'에 있다. 그 차가운 동해에서 같은 위도인 청진시, 하코다테시 앞바다조차 4월 중순이면 수온이 10℃ 근방까지 오른다. 침몰 해역이 위도 대비 수온이 굉장히 낮은 이유는 강력한 한류인 래브라도 해류가 정통으로 뚫고 지나가는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북대서양 안에서 같은 위도를 가진 이베리아반도의 북서해안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난류 북대서양 해류가 뚫고 지나가 같은 4월 중순 기준 수온은 15℃ 전후로 높은 편이다. [84] 사고 당시 8세였던 위니프레드 통거루는 2002년 사망했다. [85] 10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타이타닉 탑승자에 관한 기록은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86] 이 사람의 손자가 일본 팝 역사계의 레전드라고 불리는 핫피 엔도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멤버 호소노 하루오미다. 때문에 하루오미 본인도 타이타닉 사건의 관련인으로 간간이 등장하는 편이다.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가 사망한지라 실제로 만났던 기억은 없다고 하지만 어쨌든 유족이므로 2012년에 사건 100주년 당시 피해자 위령비가 있는 핼리팩스에 가서 행사에 참석했다고 한다. [87] 여장을 했다는 낭설도 존재한다. [88] 충돌 당시 타를 잡았던 로버트 히친스는 지휘를 맡은 6번 구명정에서 여러 삽질을 저질러 악명이 높다. 배로 다시 오라는 선장 명령을 거부한다던지, 엉뚱한 소리로 사기를 쳐지게 한다던지... 자세한 내용은 타이타닉(영화)/실존인물 문서에 서술된 실존인물의 행적 참고. (영화에선 이 모습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서 리더 역할을 하며 탑승자들을 격려해 준 건 'Unsinkable' 몰리 브라운이었다. [89] 공교롭게도 이 때 올림픽 호의 선장이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이었는데 조사 결과 올림픽호의 과실로 결론났으나 선원들의 힘으론 불가항력이었다고 결론나서 딱히 책임을 지거나 경력에 흠집이 나진 않았다. [90] 1997년작 영화에서는 구명정 탑승을 통제하던 와중 우발적으로 두 명을 쏴 죽이게 되고 결국 그 죄책감으로 인해 자살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6등 항해사 무디와 함께 A호정을 옮기려다가 물살에 휩쓸려 사망했다. [91] 저들 중 라이톨러 이상 선임 사관들은 모두 구명정 승선을 포기했으며 3등 항해사 피트만부터 명령에 따라 승선했다. 6등 항해사 무디는 원래 승선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자신의 자리를 견시 레지널드 리에게 넘기고 결국 순직했다. 구명정 승선을 포기한 항해사들 중 라이톨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92] 다만 유일하게 찰스 라이톨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구축함 함장 자리까지 올랐지만, 실세로 여겨지는 순양함이나 전함 등 대형 주력함의 함장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93] 애초에 구름이 없었다 쳐도 달이 완전히 기울은 무렵이었다. 음력으로는 1912년 2월 27일이기 때문이다. [94] 일부 작품에서는 타이타닉호의 신호탄이나 무스부호 조난신호를 접수하고도 타이타닉호가 침몰할리 없다며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배들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가장 먼저 달려온 카르파티아호조차 타이타닉호에 사고난 게 진짜 맞냐고 물어올 정도로 사고사실을 반신반의하는 반응이 많았다. 타이타닉호가 그만큼 당대 최대이자 최신선박이였기 때문에 오보이거나 기관고장 같은 단순사고로 애써 축소해 생각하는 무의식적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타이타닉호가 조난신호를 반복하며 침몰상황을 구체적으로 전파하자 주변 선박과 무선국들이 심각성을 인지하여 무선이 폭주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패닉에 빠진 무분별한 무선에 재밍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당시 카르파티아호 외에도 프랑크푸르트호, 발틱호, 버지니안호 등 구조에 나선 선박이 많았으며 그중에 프랑크푸르트호는 카르파티아호처럼 배의 속력을 최대로 높이면서 생존자들이 저체온증에 걸려있을 것을 염려하여 담요를 준비하고 빵을 조리하도록 명령한 기록도 있다. 최대출력으로 달려간 프랑크푸르트호는 결국 연료부족으로 엔진이 퍼져버렸고 이후 구조를 위해 온 다른 선박의 예인을 받아야했다. 구조에 나선 다른 선박들의 열의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단지 전부 거리가 너무 멀어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을 뿐이다. [95] 비상시 대응방법 숙지를 강제하기 위해 일부 국가에서는 큰 유람선이나 여객선은 출항 시각이 임박해 오면 의무실 같은 곳만 빼고 모든 시설의 문을 닫고 훈련이 다 끝나고 나야 비로소 다시 이용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96] 원문: Do you know what an iceberg is composed of? [97] 원문: Ice, I suppose, sir. [98] 이 조약은 수없는 개정과 보강을 거쳐 현재까지도 효력이 지속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해상 규약 중 하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해상 규약 역사에는 정확히 들어맞는데 SOLAS와 함께 가장 중요한 해상 규약인 MARPOL(선박에 의해 발생하는 해양 오염을 규제하는 규약) 역시 사상 최악의 유조선 침몰&원유 유출 사고가 일어나고 나서야 제정되었다. [99] 이들은 2등실 이용자와 동일한 서비스가 제공됐다. [100] 당시는 아직 여성참정권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가부장제가 공고했던 시대였던지라 노골적으로 아내를 버리거나 하지 않는 한 정부를 두는 것 정도는 봐 주는게 일반적이었다. 이 시대보다 조금 앞선 벨 에포크 당시를 그린 모리 카오루의 엠마에도 킴벌 자작이 뮤지컬 가수를 정부로 두고 있는 묘사가 등장한다. 이 때문에 타이타닉 시대 여성참정권 운동은 달리는 마차에 뛰어들어 투신하는 등 매우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미국에서 최초의 여성이 포함된 보통선거는 1924년에 이루어졌다. [101] “이 배에는 나의 이기심으로 구조받지 못하고 죽어간 여성은 없을 것이오. 나는 금수만도 못한 삶을 살 바에야 신사답게 죽을 것이오.” [102] 이때 비서 빅터 기글리오 역을 맡은 배우가 인상적인데,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103] 1911년 결혼했으며 두 번째 아내였다. [104] 다른 항해사 머독이 남는 자리가 있을 경우 성인 남자도 태워보낸 데 반해 라이톨러는 철저히 여자와 어린이만 태우도록 조치했다. 라이톨러는 침몰하면서 뿜어져 나오는 선내의 공기에 의해 튕겨져 나와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며 이후 영-미 의회 합동 조사단에서 사고 정황에 관해 많은 귀중한 증언을 했다. [105] 영화에서는 주인공 잭 도슨의 친구가 연통에 깔려 사망하는 묘사가 있다. [106] 2009년에 부산 신세계백화점이 더 크게 지어지면서 기네스북 기록을 내주었다. [107] 둘 다 마르코니 사 파견 직원들이었다. 창립자 굴리엘모 마르코니도 여기에 탈 뻔 했다고 한다. [108] 그는 RMS 카파시아호의 통신사와 친한 친구였다. 서로 친한 만큼 무선 통신도 직설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카파시아호 "선장에게 말해야할까?" 타이타닉호 "어, 당장! 빙하에 박았다고!" 등등. [109] 충돌 당시 배를 맡고 있기도 했다. [110] 카메론 영화에서는 '폭력적인 남성성'에 대한 비판과 이에 희생되는 여성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이 자주 드러나므로 이를 감안한 각색일 수 있다. 주인공 로즈만 하더라도 남성들의 세상에서 예쁜 장신구 취급을 받다가 잭에게 구조되는 구도다. 물론 강인하며 영웅적이었던 실존 인물 몰리 브라운의 실제 멋진 행적을 "폭력적인 조타수에게 윽박질러지는 가련한 여성"으로 각색했다. 브라운은 당시 (대부분 금수저들이니까) 노를 젓는 것을 힘들어하던 승객들에게 "노를 저으면 우리 몸이 따뜻해지지 않겠어요?"라며 격려의 말을 건네며 히친스가 여러 어그로를 끄는 것에 일갈하던 구명정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히친스는 반대로 배로 돌아오라는 선장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카르파티아가 왔을 때 "우리 구하러 온 배 아니다."라고 헛소리를 하거나 심지어 취해있었다는 증언까지 나와(확인된 사안은 아니다.) 생존 선원들 중 가장 욕을 먹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참고로 선장의 복귀 명령 거부는 영화에서 촬영은 되었으나 삭제되었다. [111] 영화에서 잭의 친구가 죽은 것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