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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6:50:05

크리스틴 드 프랑스

<colbgcolor=#93B1D0><colcolor=#000000> 사보이아 공작부인
프랑스의 크리스틴
Christine de France
파일:Christine_Marie_of_France,_dowager_duchess_and_regent_of_Savoy.jpg
이름 프랑스어 크리스틴 마리 드 부르봉
(Christine Marie de Bourbon)
이탈리아어 크리스티나 마리아 디 보르보네
(Cristina Maria di Borbone)
출생 1606년 2월 10일
프랑스 왕국 파리 루브르 궁전
사망 1663년 12월 27일 (향년 57세)
사보이아 공국 토리노 마다마 궁전
배우자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
(1619년 결혼 / 1637년 사망)
자녀 루이지 아메데오, 루이사 크리스티나, 프란체스코 자친토,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 마르게리타 비올란테, 엔리케타 아델라이데, 카테리나 베아트리체
아버지 앙리 4세
어머니 마리아 데 메디치
형제 루이 13세, 엘리자베트, 니콜라 앙리, 가스통, 앙리에트 마리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사보이아 공작부인2.3. 섭정
3. 평가4. 가족 관계
4.1. 조상4.2. 자녀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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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의 개창자인 앙리 4세 마리아 데 메디치의 차녀. 루이 13세의 여동생이자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비 앙리에트 마리의 작은언니이다.

사보이아 공국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와 결혼해 프란체스코 자친토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를 낳았다. 남편이 사망한 뒤 10년 이상을 공국의 섭정으로 활동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파일:Christine_of_France_(future_Duchess_of_Savoy)_by_Frans_Pourbus_the_younger.jpg
어린 시절의 크리스틴 마리, 1615년

1606년에 루브르 궁전에서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셋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 크리스틴이라고 불렸으며, 크레티엔(Chrestienne)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형제자매들 중에는 온 가족의 사랑을 받던 막내 앙리에트 마리와 친해 각자 시집을 간 뒤에도 서신을 주고 받았다.

4살 때 아버지 앙리 4세가 가톨릭 광신도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후 오빠 루이 13세의 섭정이 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2.2. 사보이아 공작부인

프랑스와 사보이아 공국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12살에 사보이아 공작의 후계자 피에몬테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와 약혼했다. 13살이 되는 1619년 2월 10일에 루브르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에는 크리스티나로 불리게 되었다. 15살에 첫 아이를 가진 것을 시작으로 8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6명의 아이가 성인으로 자랐다.

1630년 7월 26일에 시아버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가 숨을 거두면서 사보이아 공작부인이 되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크리스틴은 프랑스의 문화를 토리노에 소개하고 여러 궁전과 성의 증축에 참여했다. 토리노 왕궁을 증축하고, 발렌티노 성과 마다마 궁전을 재건한 뒤 마다마 궁전을 거주지로 삼았다. 이후 오랫동안 토리노의 심장부 역할을 담당하는 산 카를로 광장(Piazza San Carlo)을 프랑스 바로크 양식으로 조성한 것 또한 크리스틴이었다.

크리스틴은 활발하지만 변덕스러웠고, 춤과 무도회를 좋아했다. 아름답고 관능적인 미인으로 자란 크리스틴은 궁중 가십의 중심이 되었다. 크리스틴은 수많은 애인을 두었는데, 첫 아이를 낳을 때부터 아이의 아버지가 비토리오 아메데오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러 귀족들, 프랑스 대사, 심지어 남편의 동생인 마우리치오[1]도 그녀의 애인이었다고 한다.

2.3. 섭정

1637년 10월 7일에 남편이 죽자 5살 된 아들 프란체스코 자친토의 섭정이 되었다. 1년 뒤 프란체스코 자친토가 열병으로 사망하고 또다른 아들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가 공작위에 오르자 이어서 섭정을 맡았다.

섭정 자리를 노리는 시동생 마우리치오 추기경과 사보이아카리냐노 공 톰마소 프란체스코[2]의 공격을 받았지만 프랑스의 지원으로 1642년에 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은 내부에만 있지 않았는데, 사보이아 공국을 프랑스에 편입시키려는 리슐리외 추기경 또한 경계해야 했다. 크리스틴은 정치적 수완을 활용해 아들이 친정을 할 때까지 사보이아 가문의 통치를 공고히 했다. 1648년에 섭정에서 내려왔으나 죽을 때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말년에는 쾌락주의적인 생활을 내려놓고 종교에 귀의했다. 1663년 12월 27일에 마다마 궁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3. 평가

당대에는 리슐리외 추기경으로부터 무식한 여자라고 조롱받았고, 시동생인 마우리치오 추기경과 사보이아카리냐노 공 톰마소 프란체스코로부터는 프랑스에서 온 첩자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후대 역사학자들은 사보이아 공국의 궁중을 문란하게 하고 나라를 프랑스의 영향력 하에 놓은 원흉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사보이아 공국이 프랑스에 넘어가지 않게 통치권을 수호하였으며, 통치 기간 동안 부실했던 공국의 행정력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는 재평가를 받고 있다.[3] 그리고 각종 시설의 설계와 조성에 관심을 기울이며 토리노를 보다 현대적으로 개조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토리노 왕궁도 그녀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차남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는 그녀의 영향을 받아 토리노를 바로크풍으로 바꾸었다.

4. 가족 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랑스의 크리스틴
(Christine of France)
<colbgcolor=#fff3e4,#331c00> 앙리 4세
(Henry II)
<colbgcolor=#ffffe4,#323300> 방돔 공작 앙투안
(Antoine de Bourbon,
Duke of Vendôme)
방돔 공작 샤를
(Charles de Bourbon,
Duke of Vendôme)
프랑수아즈 달랑송
(Françoise d'Alençon)
호아나 3세
(Joanna III)
헨리케 2세
(Henry II)
마르그리트 당굴렘
(Margaret of Angoulême)
마리아 데 메디치
(Maria de' Medici)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Francesco I de' Medici,
Grand Duke of Tuscany)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Cosimo I de' Medici,
Grand Duke of Tuscany)
레오노르 데 톨레도
(Eleanor de Toledo)
오스트리아의 요하나 여대공
(Joanna of Austria)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Holy Roman Emperor)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Anna of Bohemia and Hungary)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사보이아의 루이지 아메데오
(Louis Amadeus of Savoy)
1622년 1628년
1녀 사보이아의 루이자 크리스티나
(Luisa Cristina of Savoy)
1629년 7월 27일 1692년 5월 14일 사보이아의 마우리치오[4]
2남 사보이아 공작 프란체스코 자친토
(Francis Hyacinth, Duke of Savoy)
1632년 9월 14일 1638년 10월 4일
3남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
(Charles Emmanuel II, Duke of Savoy)
1634년 6월 20일 1675년 6월 12일 프랑수아즈 마들렌 도를레앙
사부아느무르의 마리 잔
슬하 1남[5]
2녀 파르마 공작부인 마르게리타 비올란테
(Margaret Yolande, Duchess of Parma)
1635년 11월 15일 1663년 4월 29일 파르마 공작 라누초 2세
3녀 바이에른 선제후비 헨리에테 아델하이트
(Henrietta Adelaide, Electress of Bavaria)
1636년 11월 6일 1676년 3월 18일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
슬하 2남 2녀[6]
4녀 사보이아의 카테리나 베아트리체
(Catherine Beatrice of Savoy)
1636년 11월 6일 1637년 8월 26일

5. 여담



[1] 이 사람은 1642년에 직책을 내려놓고 결혼하기 전까지 추기경이었다. 그리고 크리스틴의 딸 사보이아의 루이자 크리스티나와 결혼했다(...). [2] 사부아 공자 외젠의 할아버지로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보이아카리냐노 분가의 시조. [3] 비슷한 평가를 받는 사람으로 아메데오 9세에게 시집간 샤를 7세의 딸 욜랑드가 있다. 그녀 역시 사보이아 공국이 프랑스로 넘어가지 않게 노력했지만 당대 사보이아 공국 귀족들, 특히 시동생인 브레사 백작 필리포로부터 프랑스에게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첩자년이라면서 끊임없이 공격당했다. [4]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4남이자 루이자 크리스티나의 아버지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의 친동생으로 친숙부-조카간이다. [5]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6] 프랑스 왕국의 도핀 마리 안 빅투아르,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