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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07 10:11:19

츠가루 타메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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津軽為信

(1550년 ~ 1607년)

1. 소개2. 생애
2.1. 난부 가에서 독립2.2. 잇따른 불행과 죽음
3. 창작물에서의 모습

1. 소개

센고쿠 시대의 뛰어난 지장이자 권모술수에 능하였고 이 인물의 특징은 난부가를 배신때린 이후 그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말년은 온갖 불행과 불운으로 점철된 불행한 사나이라고 할수 있는 인물이다.

2. 생애

2.1. 난부 가에서 독립

출생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상태인데 오무라 모리노부(大浦守信, 1524 ~ 1568)의 아들설 혹은 구자 노부나가의 차남설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를 난부가의 사람으로 보고 난부 우쿄노스케(南部右京亮)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1567년 오우라 타메노리(大浦為則, 1520 ~ 1567)의 양자가 되어 오우라 가문을 이었고 난부가를 섬기게 되었다가 츠가루 정복의 야망을 품었는데 주군인 난부 하루마사의 동생이며, 나중에 당주가 되는 난부 노부나오(南部信直, 1546 ~ 1599)의 친아버지인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高信, 1495 ~ 1571)가 지키던 성을 1571년에 기습해서 함락을 시켜버리고 본격적으로 배신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시카와 타카노부는 이일로 인해 할복을 하고 말았다. 그후 나미오카 아키무라(浪岡顕村, 1555 ~ 1578)가 지키던 성까지 빼앗아서 츠가루 지방의 맹주가 되었다.

난부 하루마사는 당시 노부나오 대신 친아들 하루츠구(南部晴継, 1570 ~ 1582)를 후계자로 정하려 했기 때문에 노부나오의 친아버지를 친 츠가루 타메노부 토벌에 소극적이었다. 하루마사와 하루츠구가 모두 죽은 후 난부 가문의 총수가 된 노부나오는 히데요시에게 타메노부를 고발했으나 이미 히데요시에게 크게 환심을 사고 있던 타메노부를 오히려 비호하면서 큰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후 임진왜란에도 참전했으며 이때까지만 해도 승승장구하는듯 했다.

2.2. 잇따른 불행과 죽음

히데요시에게 총애를 받았음에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의 편이 되어서 참전했다.[1] 하지만 장남인 츠가루 노부타케(津軽信建, 1574 ~ 1607)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휘하에 있었고 이시다 미츠나리와의 인연도 있어서 그의 아들인 이시다 시게나리(石田重成, 1589 ~ 1641)를 데리고와서 적극적으로 보호했으며 시게나리의 여동생인 다쓰히메(辰姫, 1592 ~ 1623)[2] 가 타메노부의 셋째 아들인 츠가루 노부히라(津軽信枚, 1586 ~ 1631)와 결혼하기도 했다. 전투 이후 2,000석의 영지를 추가로 받았으며, 히로사키 번(弘前藩)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허나 타메노부 본인이 온갖 권모술수와 배신으로 살아왔었기에 남을 믿지 못하는것을 고치려고 불교에 더더욱 정진했으나 불행은 연달아 이어지고 있었다. 사이가 좋지 않던 첫째 아들 노부타케가 츠가루가와 의절한후 얼마안가 병사하고 말았으며 자신의 과실으로 손자인 츠가루 쿠마치요(津軽熊千代, 1600 ~ 1623)가 얼굴에 중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고 애지중지 아꼈던 딸인 토미히메도 일찍 요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좀더 지나서는 둘째 아들인 노부카타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서 자신의 아들딸 셋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행이 이어졌다. 비정한 인물이었지만 이런 불행이 계속 이어진후 말년에는 깊은 쓸쓸함과 죄를 뉘우치는 회개로 가득찼다고 한다.

1607년 셋째아들인 츠가루 노부히라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영광과 불행이 교차했던 삶을 마감했다.

죽고나서도 1608년에 츠가루 가문은 노부타케의 측근 쓰가루 다케히로(津軽建広, ? ~ 1640)[3] 등의 가신들이 노부타케의 맏아들 구마치요(熊千代)를 추대하고 다메노부의 정식 적자라 주장하며 막부에 재정(裁定)[4]을 요청하여 츠가루 소동(津軽騒動)이 발생하는데 처음에는 혼다 마사노부의 주장으로 구마치요로 갈 듯 했으나 로주 안도 나오츠구(安藤直次, 1555 ~ 1635)와 난부 가문과 서부 다이묘들이 반대하여[5] 노부히라가 당주로 인정받았고 구마치요는 쇼군의 명으로 가토 기요마사의 밑에서 일하였으나 병약함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고 나중에 에도성으로 와서 히로사키 번주가 보내는 매년 돈 100냥[6]으로 생활를 보내다가 병으로 죽게된다.

쓰가루 다케히로는 히로사키 번에서 추방당했지만 이후 에도 막부 직속 어의(御典医)로 일하게 되었다.

이처럼 타메노부 사후에도 수십여년간 집안에 잦은 소동이 잇따랐으나 어찌저찌 가문을 이어갔다. 9대 번주 야스치카(寧親) 대엔 에조 지역 경호 임무를 맡게된 대가로 고쿠다카가 10만석으로 늘었고[7][8], 이 규모 그대로 폐번치현때까지 이른다.

사실 츠가루 타메노부의 불행은 이시다 미츠나리의 인연을 포기 하지 않은 점도 한 몫 했고, 이 때문에 막부는 츠가루 가문에 제동을 많이 걸었다.[9]. 이러한 제동은 츠가루 노부히라가 가독을 상속받으면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10]

3. 창작물에서의 모습

파일:津軽為信2.jpg 파일:津軽為信3.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津軽為信30.jpg
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대대로 정치와 지력이 엄청난 수치를 자랑하면서 내정과 계략에 특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고 능력치 총합에서도 늘 상위 30위권안에 들어가는 뛰어난 인물이다. 허나 실제 역사에서 권모술수와 배신으로 살아왔던게 반영되어서인지 의리가 시리즈마다 1 ~ 3을 오가는 아주 낮은 수치로써 타메노부가 다이묘가 되기 이전 시대를 플레이할때는 주의깊게 관리해줘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오슈판 마츠나가 히사히데.

최신작들에 와서는 기존의 역사를 반영한 것을 바탕으로 그가 이시카와 타카노부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는 이벤트가 존재한다. 문제는 거기까지. 천도에서도 그렇지만 창조에서조차 츠가루 지역 석권이 끝난지 얼마 안되어 국력 차이로 인해 다시 난부가에 흡수. 시리즈 AI가 항상 그렇듯 이 사람 능력치가 원체 출중하다보니 난부측에서는 가신으로 등용한다.

다이묘로서 장수진은 빈약하다. 그나마 지략 7-80대에 나머지 6-70대인 누마타 스케미츠가 있어서 간신히 원맨쇼를 면할 뿐이고, 츠가루 3로인 오가사와라 노부키요, 카네히라 츠나노리, 모리오카 노부모토는 5-60대 수준이라 어디 내밀기도 민망하다. 도호쿠 수준에서야 다테, 모가미 빼면 츠가루 타메노부 원맨쇼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나름대로 높은 능력치에다 이름있는 인물임에도 창작물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지만 센고쿠히메에서는 여체화되어서 등장한다. 실제 역사의 타메노부가 굉장히 긴 수염을 가진데다 관우를 좋아해서 수염페티쉬로 등장.[11]

태합입지전 시리즈에서도 좋은 능력치이지만 고증대로 배신을 엄청 잘한다.


[1] 주변 영주들이 전부 동군에 참여해서 어쩔 수 없었다. [2] 사망이후 받은 법명은 쇼고인(荘厳院, 장엄원)이다. [3] 원래 성은 오오코우치(大河内)로, 미카와의 의사 가문 출신이었다. 후호조 가문을 섬겼으나 후호조가 멸망한 후 타메노부를 섬겼고 그의 장녀를 아내로 삼아 쓰가루 성씨로 고쳤다. [4] 따져서 결정하는 것. [5] 타메노부의 악명이 서부 다이묘들에게도 알려질 정도이었으니 반대하는 것을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6] 여기에서는 금화를 말한다. 쌀로 환산한다면 대략 400석의 가치가 있으며 쇼군가의 하타모토 격이라고 보면된다. [7] 문제는 10만석에 걸맞는 재정지출을 해야만 했는데, 겉으로만 늘었지 추가로 얻은 영지같은 건 없어서 이를 땜빵하기 위해 영지민들을 쥐어짜내야 했고 결국 잇키까지 유발했다. [8] 이곳이 일본의 벽지였던 점도 한 몫한다. 옆동네 난부 번도 재정 난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9] 대표적인 것이 타카오카 성인데, 타메노부는 생전에 이 성을 짓고 싶었지만, 막부에서 정식 허가를 해주질 않았다. 다만, 고작 5만석의 다이묘가 짓기엔 너무 화려하고 거대한 성인지라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외 세키가하라 전투 후 가증된 석고가 고작 2천석 밖에 안되는 점도 이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10] 앞서 언급한 타카오카 성 건축이 정식으로 허가가 나온 것도 노부히라 시절이고, 츠가루 소동에서도 노부히라 편을 들어주었다. 이외 석고 상승 2배를 미끼로 전봉까지 당할 뻔 하지만, 이 역시 취소된다. 이 때 노부히라는 막부를 거스르기 싫어 전봉 비용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11]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역사의 행적은 관우와 딴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