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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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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내선 류형원 이서우 김덕원 민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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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남 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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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정 오시수 오정창 류혁연 허견
경종 이후
(17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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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문숙공(文肅公)
채제공
蔡濟恭
<nopad> 파일:채제공 초상.jpg 이명기, <채제공 초상 일괄 - 흑단령포본>, 18세기 후반
출생 1720년 5월 12일
(음력 숙종 46년 4월 6일)
충청도 홍주목
(現 충청남도 홍성군)
사망 1799년 2월 22일 (향년 78세)
(음력 정조 23년 1월 18일)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재임기간 제211대 영의정
1793년 7월 2일 ~ 7월 11일
(음력 정조 17년 5월 25일[1] ~ 6월 4일[2])
시호 문숙(文肅)
본관 평강 채씨 19세 공(恭) 항렬
백규(伯規)
번암(樊巖), 번옹(樊翁)
붕당 남인( 청남, 근기남인), 시파
가족 할아버지 채성윤
아버지 채응일 / 어머니 연안 이씨
아내 동복 오씨
아들 채홍원[양자], 채홍근[서자], 채홍신[서자]

1. 개요2. 생애
2.1. 남인 최후의 거물로서2.2. 남인의 집권을 위한 승부수2.3. 불량 유생들과의 충돌2.4. 사후
3. 여담4. 가족 관계5. 대중매체
5.1. 소설5.2. 만화5.3. 드라마5.4. 영화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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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문관이다. 영조 정조 때 살았고 당색은 남인이며 시파에 속한다.[6] 조선 후기 내내 탄압받는 야당 이미지였던 남인 중에서는 최고이자 최후의 거물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

할아버지는 참판 채성윤(蔡成胤)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채응일(蔡膺一)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 현감 이만성(萬成)의 딸이고, 충청도 홍주목에서 태어나 강박, 오광운과 이익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스스로 남인의 학통을 이황 - 정구 - 허목 - 이서우(李瑞雨) - 이익으로 규정했다. 숙종조 초반 각각 탁남 청남의 영수였던 허적 윤휴에 대해선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1735년 15세로 향시에 급제한 뒤 음서로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하던 도중에 1743년(영조 19년)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 5위로 급제했다. # 그 뒤 정6품 홍문관 수찬(修撰), 교리(校理), 익릉별검(翼陵別檢), 승문원의 가주서(假注書), 예문관검열 순으로 맡다가 중인의 분산[7]을 강제로 뺐었다고 양사의 탄핵을 받은 뒤 파직되었다. 그리고 1년 동안 삼척에 유배되었다.

1753년에 호서암행어사로 관직에 돌아와 균역법 조사 및 폐단과 문제를 파악한 뒤 보고했다. 이후 홍문관 수찬,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집의를 역임하다 사도세자의 스승으로써 그를 가르쳤다. 한편, 나주 괘서 사건 당시 조정에 얼마 안 남은 소론 남인을 지키려 노력했고, 본인을 비롯한 소수 남인은 조정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또한, 동부승지 시절엔 사도세자 후견인이 되어 사도세자가 영조와의 갈등이 심각해졌을 때 이를 중재해 주는 역할을 주로 했다.

1758년(영조 34년)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한다는 교지를 내렸는데 당시 동부승지였던 채제공이 눈물까지 흘리며 만류하는 통에 그만두었으나 4년 뒤에는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모친상을 당해 내려가 있어서 사도세자를 돕지 못했다. 물론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사도세자는 결국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영조가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나중에 세손(정조)에게 말할 정도였다.

이후 정조 때에는 홍국영과도 잘 아는 사이였고[8]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여 선왕(영조)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등의 공격을 받아 이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 은거 생활을 하였다.

2.1. 남인 최후의 거물로서

공격을 받은 채제공임에도 정조는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중용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하려 했던 효심깊은 정조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1786년(정조 10년)에는 평안병사에 제수했다.

남인 채제공의 복귀에 노론 벽파와 소론이면서 벽파에 우호적인 서명선 등이 손을 잡고 격렬하게 탄핵하였고 서명선은 "채제공이 역적이 아니면 제가 역적입니다!"라고 선언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도 채제공이 이전에 하던 벼슬의 높이를 생각하면 별 거 아니다. 그런데 막상 김종수, 심환지 등 노론은 서명선이 소론이라는 이유로 도리어 원수 취급했다.

1788년(정조 12년) 2월에는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1790년(정조 14년)에는 좌의정, 1793년(정조 17년)에는 영의정을 역임했다. 좌의정에 있을 때는 영의정이 없어 독상이라고 불려 실제 조정의 영수였는데 1791년 신해통공[9]을 적극 추진하는 입장에 섰다. 이것은 자유로운 상업의 발달을 하는데 이바지했고, 조선 후기의 경제가 크게 발달하는데 기여했다.[10] 그러나 노비종모법을 폐기해 많은 양인 천민으로 돌리고 서얼 허통은 국법이 아닌 집안 별로 행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1]

이외에도 이조전랑의 권한인 정3품 이하의 관리 추천하는 통청권과 자기 후임을 지명하는 자대권[12]을 없애 당쟁을 완화하려 했다.

2.2. 남인의 집권을 위한 승부수

채제공은 영의정에 오른 직후 승부수로 사도세자의 신원을 하자는 동호지필(董狐之筆)이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노소론을 막론하고 조정 내에서 반발이 심해지자 정조는 영의정 채제공을 파직하면서 벽파인 좌의정 김종수도 함께 파직해버린다. 이렇게 쌍으로 묶이며 임용과 강경 상소, 파직과 낙향을 반복하던 채제공과 김종수는 며칠 차이를 두지 않고 1799년 세상을 떠난다. 1800년 정조도 세상을 떠나니 정조 시대의 벽파와 남인의 대결도 이렇게 끝났다.

영의정까지 역임하며 당대 관리들은 물론 남인이란 것은 감안해서 엄청 성공한 채제공이 승부수를 띄운 것에는 이유가 있다. 과거 남인은 숙종 시절 갑술환국으로 사실상 박살났고 정조 시기 조정은 벽파가 원내 다수당이었다. 채제공은 이 판을 뒤집고 조정을 다시 남인 주도로 돌리기 위해 수시로 사도세자의 추숭을 건의했고 이에 따라 노론 벽파(특히 이들의 수장이었던 김종수)와는 극한 대립의 관계였다. 영의정이 된 이후 사도세자의 추숭을 건의하다가 바로 벽파의 역풍을 맞은 적도 있었다.[13]

사망하기 1년 전엔 정조가 은언군을 만나는 것을 반대하다 왕의 화를 사 잠시 파직됐다가 다시 복직했다.

이른바 다섯 신하인 김종수, 심환지, 정민시, 서명선, 채제공은 정조가 아끼고 신임했으나 거기까지였다. 개인적으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정도로 불협화음이 심했고 정조가 이를 조율하고 제어하는 데 힘이 부칠 정도였다. 벽파이자 노론 강경파인 김종수, 심환지와 남인인 채제공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지만, 소론 서명선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서명선 본인이 직접 채제공을 등용하면 본인을 역적이라고 칭하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서명선과 서명응 형제가 소론임에도 벽파 입장에 있긴 했지만. 재미있는 건 5명 모두 1790~1800년대 사망[14]함으로써 정조조 준론 탕평의 막도 내리게 된다. 그만큼 정조의 준론 탕평에 있어 강한 상징성을 가진 인물들인 것이다.

2.3. 불량 유생들과의 충돌

1790년(정조 14년) 7월 4일(음력 5월 22일)에 좌의정이었던 채제공이 갑자기 사직상소를 내면서 이유를 설명한 바...

하루는 채제공이 권두(權頭)[15]와 함께 돈의문(서대문)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김관순(金觀淳)과 김병성(金炳星)이라는 젊은 유생 둘이 웃통을 까고 팔짱을 끼고 서서 한 명은 곰방대를 물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한 명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들은 체재공의 가마가 옆을 지나가는데도 본체만체하자 그들의 난행을 보다 못한 권두가 담배를 그만 피우라고 훈계했다. 여기까지라면 좀 타이르고 말 일이겠지만 담배를 물고 있던 김관순이 이를 듣고 내뱉은 한마디가 일을 키우고 말았다.
(채제공?)[16] 내가 무엇 때문에 저자를 보고 담뱃대를 빼겠는가(吾豈見渠而去竹乎)?
그러니까 "체제공이라는 저 노친네가 뭐라고 나보고 담배를 빼라고 지랄이야"며 대든 것이다. 김병성은 돈령부(敦寧府) 참봉 김세근(金世根)의 아들이었고, 김관순은 동부(東部) 봉사(奉事) 김이의(金履毅)의 아들이었다. 돈령부는 왕실의 친족 중 종친이 아닌 인사들의 명단을 관리하는 부서이고 동부 봉사는 한성부의 동부 관아에 속한 관료이다. 종8~종9품 관료의 자식한 국가의 재상에게 저 따위의 망발을 한 셈.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한 채제공 대신 권두가 하인들을 시켜 두 청년을 옥에 가뒀다.

여기까지만 해도 큰 일은 아니었다, 체제공은 이 두 청년을 아침 쯤 석방시키려 하였으나, 그날 밤 일이 더 커지게 된다. 인정종(人定鍾)이 있은 후 3경쯤(밤 11시~새벽 1시 사이) 되었을 때 중부학당의 유생 수십 명이 두 유생이 갇힌 옥사 앞에 몰려온 것이었다. 이들은 전옥서 관리들에게 '지금 갇혀 있는 유생은 곧 중부학당의 장의(掌議)[17]이며 또 소청(疏廳)의 담당자[18]이다. 너네 관원에게 말하고 대신에게 전달하여 풀어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옥문을 때려부술 기세로 과격 농성을 벌였다. 만약 두 사람을 석방하지 않으면 전옥서의 관리를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나중에 비변사에서 전옥서 관리들에게 심문한 내용을 보면 더 가관이다. 전옥서 관리들이 이걸 입직관(入直官)[19]에게 보고했고, 입직관은 "이들은 대신(채제공)이 체포를 명령했으므로 대신의 허락이 없이는 함부로 석방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내용을 학당 유생들에게 말하였으나 유생들은 물러나지 않고 계속 버티고 서서 '아, 됐고 풀어내라고' 식으로 전옥서 관리들을 거의 협박했다고. 이 과정에서 "너희를 지금 당장 학궁으로 끌고 가서 쳐죽여줄까?", "우리가 지금 여기서 옥문의 자물쇠를 부수고 갇힌 사람 빼낼까?" 하는 식의 이게 학생이야 깡패야 살벌한 말이 유생들로부터 나오기도 했다.[20]

소식을 듣고 놀란 채제공은 두 청년을 아예 형조로 넘겼다. 그러자 다음 날부터 유생들이 채제공을 욕하고 헐뜯는 사발통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화가 난 채제공은 이들을 정식으로 고발해서 엄히 다스릴 작정을 했다. 그러나 김병성의 아버지 김세근이 하인들 보는 앞에서 아들의 볼기를 쳤고, 김관순의 할아버지도 채제공에게 '패역한 손자를 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애걸했다. 그리하여 채제공도 이쯤하고 일을 끝내려 했다.

위에 언급했듯이 두 사람의 아버지들은 각기 종8~종9품 정도의 미관말직 나부랭이였지만, 채제공은 그냥 정1품도 아니고 조정 내 인사권을 틀어쥔 판이조사를 겸직하는 최고의 실세인 좌의정이었고, 이것만으로도 엄청난데 당시 채제공은 조정의 독상(獨相)[21]이기까지 했다. 아무리 김병성·김관순이 김상헌· 김상용의 후손으로 명문가 자제였다고는 하지만, 어찌됐건 말단직의 자식들이 왕의 신임을 받는 정승에게 무례한 짓을 하고 그 동기들이 관아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아무리 정적가문이라지만 이 경우에는 그럴싸한 정치사안도 아닌, 기초적인 예절문제였기 때문에 가문 빽으로 무마되긴 커녕 "고관대작 집안이라는 것이 기본적인 자식 교육도 똑바로 안해서 집안 망신이나 시킨다"는 식으로 손가락질 당하기 딱 좋은 행위였다. 게다가 연좌의 풍습이 지금보다 훨씬 강한데다 예를 중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채제공이 당한 모욕이면, 종8~종9품인 부친 따위는 파직으로 끝나면 다행인 수준이었으니 그냥 알아서 길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끝나면 좋았겠으나 또 일이 더 커졌으니, 난동을 일으킨 유생들이 도리어 '채제공이 유생들을 모욕했다'면서 '선비는 죽일 수 있어도 모욕할 수 없다'고 투서를 마구 쏟아냈다. 처음부터 누누히 설명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쪽은 유생들로, 윗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무시해서 훈계하자 '내가 왜 너 때문에 꺼야 하느냐'는 수습할 수 없는 망언을 했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고 한들, 애초에 그 유생들이 채제공에게 행한 행동에 대한 제재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봐도 말이 되지 않는다. 거기다 그 동기들이 친구를 구하겠다며 감옥에 쳐들어가 관리를 협박하고 체제공을 모욕하였으니 체제공도 인내심의 한계를 넘었다.

결국 폭발한 채제공은 조정에서 대놓고 이렇게 말했다.
대낮 큰 길가에서 홀옷 차림으로 담뱃대를 피워물고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앞으로 선비라는 이름으로 온갖 패악질을 해도 가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대로 사표를 낸 것. 정조는 황급히 채제공을 어르고 달랜 뒤, 사건의 시발점인 두 유생은 이미 가정에서 처리했으니 더 처벌할 것이 없었지만, 전옥서 난동건은 엄히 처벌했다. 난동의 주동자 이위호(李偉祜)에게 과거 응시 종신 금지와 동시에 충청도 부여현으로 유배보냈고, 가담한 조학원(趙學元), 윤선양(尹善養), 원재형(元在亨), 원재행(元在行) 등에게는 응시 10년 금지를 먹였다. 그리고 김정순(金鼎淳)에게는 경상도 청하현에 충군[22]할 것을 명령하였다. 과거시험이 당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면, 주동자에게는 거의 매장 선고였다. 더 나아가 정조는 '이딴 짓거리에 가담한 놈들은 선비도 아니다'라 하며 아예 유적(儒籍)[23]에서 이름을 빼버리고, 이 불량유생들이 처벌받은 기록을 널리 알려 다른 선비들의 반면교사로 삼도록 명령하였다.

조선시대 당시에 과거 응시를 금하고 유적에서 뺐다는 것은 양반의 자제가 성인 양반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는 유생의 자격을 박탈한 것으로, 생원시나 진사시에도 응시를 할 수 없게 되니 관직에 진출하기는 커녕 양반의 자격도 유지할 수 없고 평민들처럼 군역과 노역의 의무를 지도록 하는 사실상의 폐서인 조치였다. 행패를 부린 이 유생들은 본인 뿐만 아니라 후손들 신세까지 망친 것이다. 현대에도 뿌리 깊게 남아있는 공무원 선호 사상과 당시의 유교적 출세주의를 생각해봤을 때, 당사자들은 제대로 사회적 매장을 당한 셈이며, 현대인의 처지에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다. 예나 지금이나 발 뻗을 자리를 보고 뻗어야 하며, 명분이 없으면 개기면 안 된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건. 또한 해당 시기에 담배를 둘러싼 폐해가 유교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24]

이상 이야기의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정조 14년 5월 22일 임인 4번째 기사이다.

2.4. 사후

채제공은 정조가 승하하기 1년 전인 1799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실록은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정조가 매우 애통해하다고 기록하였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백성을 걱정하는 한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채제공이 별세했다는 비보를 들으니, 진실로 그 사람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내가 이 대신에 대해서는 실로 남은 알 수 없고 혼자만이 아는 깊은 계합이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 품부받은 인격이 우뚝하게 기력(氣力)이 있어, 무슨 일을 만나면 주저없이 바로 담당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그 기상을 시(詩)로 표현할 경우 시가 비장하고 강개하여, 사람들이 연조비가(燕趙悲歌)의 유풍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 이때부터 영고(寧考)(영조)께 인정을 받아 금전과 곡식을 총괄하고 세법(稅法)을 관장하였으며, 어서(御書)를 윤색(潤色)하고 내의원(內醫院)에 있으면서 선왕의 옥체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매양 주대(奏對)할 적마다 선왕의 웃음이 새로웠는데, 그때는 그의 수염이 아직 희어지지는 않았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참소가 여기저기서 빗발쳤으나 뛰어난 재능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극히 위험한 가운데서 그를 발탁하여 재상 지위에 올려 놓았었다. 이어 내각(內閣)에서 기사(耆社)[25]로 들어갔고, 나이가 80이 되어서는 구장(鳩杖)[26]을 하사하려고 했었다. 그 지위가 높고 직임이 나와 친근하였으며, 권우가 두텁고 은총이 성만하여 한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입을 못 열고 기(氣)가 빠지게 하였으니, 저렇듯 신임을 독점했다고 이를 만한 사람으로서 옛날에도 들어보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50여 년 동안 조정에 벼슬하면서 굳게 간직한 지절은 더욱 탄복되는 바인데, 이제는 다 그만이구나. 죽은 판부사 채제공 집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의당 관례에 의거해서 거행하되, 승지가 치조(致吊)하는 일은 홍 영부사(洪領府事)[27]의 전례에 의거해서 하고, 내각의 속관을 보내어 상제(喪制)를 돌봐주는 일과 호상(護喪)하는 등의 절차에 대해서는 각신(閣臣)과 대신의 전례에 의거해서 할 것이며, 성복일(成服日)의 치제(致祭)는 승지가 스스로 의당 거행할 것이나, 내각의 치제에 대해서는 또한 김 봉조하(金奉朝賀)[28]의 전례에 의거하여 제문(祭文)을 지어 내리기를 기다려서 각신을 보내 거행하도록 하고, 녹봉은 3년 동안 그대로 보내주도록 하라. 그리고 장사지내기 전에 시호를 의정하도록 하라."하였다. - 정조 23년( 1799년) 1월 18일의 기사
정조 사후 1801년 그는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한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면서 삭탈관직됐으나 1823년 영남만인소로 원상 회복되었다.

김종수가 세상을 떠난 이후 벽파는 정순왕후 수렴청정과 함께 몇 년이나마 집권했지만 남인은 채제공 이후로 정승 하나도 배출 못할만큼 위축되고 신유박해로 그야말로 정계에서 퇴출당한다. 당초 채제공은 영조 시대의 탕평 분위기를 타고 성장했으나 정조가 채제공의 후임으로 키우려던 이가환 판서까지는 올라갔지만 서인들의 반발로 인해 정승에 올라가지 못했다. 서인 일변도의 정국에서 채제공의 입지가 그만큼 불안했다는 증거이지만 거꾸로 말하면 남인에게 그만큼 중요한 거물이었다는 뜻.

3. 여담

다음은 진산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일이다.
그 학술은 오로지 천당과 지옥의 설이 중심인데, 그 본뜻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자는 것에서 생긴 듯하나, 그 폐단은 마침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른바 아비가 없다고 한 말은, 아비로 섬기는 것이 셋이 있는데, 그중에 상제(上帝)를 높여 첫째 가는 아비로 삼는 것은 그나마 서명(西銘)의 ‘하늘을 아버지라 부른다.[乾稱父]’는 뜻에 속하지만, 조화옹(造化翁)을 2번째 아비로 삼고 낳아준 아비를 3번째 아비로 삼는 점에 있어서는 윤리가 없고 의리에 어긋나는 설입니다. 임금이 없다고 한 말은, 그 나라의 풍속은 본디 임금이 없고 일반 백성 가운데 뛰어난 자를 골라서 임금으로 세운다 하니, 더욱 흉악합니다. 또 그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선을 행한 자는 천당으로 돌아가지만 악을 행한 자는 지옥으로 빠진다. 그러니 비록 제사를 지내더라도 천당으로 돌아간 자는 반드시 기꺼이 와서 흠향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지옥에 빠진 자는 또한 와서 흠향할 수가 없다. 그러니 쓸데없는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예의의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요망한 설에 미혹되니, 실로 가증스럽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5년 10월 25일 병인일의 기사

4. 가족 관계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충선왕 제정 재상지종 15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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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각각 75세, 80세로 장수한 편이다. 본인도 80세까지 당대 기준으로 장수할 수 있던 것은 유전의 영향일 있었을 것 같다.

5. 대중매체

5.1. 소설

5.2. 만화

5.3. 드라마

5.4. 영화

6. 관련 문서


[1]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705025_001 [2]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706004_001 [양자] 동생 채민공의 아들을 입양. [서자] [서자] [6] 시파는 노론뿐만 아니라 소론과 남인도 섞였다. [7] 墳山, 분묘를 쓴 산. [8] 하지만 친하다고 보기에는 무리인게 1779년(정조 3년) 홍국영과의 마찰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던 적이 있었다. [9]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 상인의 특권( 금난전권 등)을 박탈해 자유로운 상권 보장. 육의전은 비단, 무명, 종이, 모시, 생선, 명주 등을 말한다. [10] 물론 당연하게도 시전 상인들은 채제공의 행차까지도 막아가면서 원상 복귀를 호소했지만 정조도 채제공만큼이나 정책을 지지해서 결국 신해통공이 이루어졌다. [11] 평안병사 시절에는 이런 논지 때문에 서얼에게 멱살이 잡히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12] 이 자대권이 동서분당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13] 벽파가 직접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책임이 없었음에도 나서지 않은 것은 그것이 채제공의 남인이 내세우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남인은 '사도세자의 죽음은 세자 본인의 과실이 아니라 모함이었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일으킨 것은 당시의 조정 세력이다'라는 논리를 폈고 그렇게 되면 당시의 집권당인 노론은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처럼 쓸려나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모함은 실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세자 제거의 주체는 영조라는게 정설이지만 정조와 시파가 세자를 신원하고 추숭하려는 마당에 왕조 국가의 특성상 감히 선왕이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책임은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노론에게 돌아간다. 남인은 이걸 노리고 추숭 지지파인 시파로 들어간 거기도 하다. [14] 서명선(1791 졸), 채제공(1799 졸), 김종수(1799 졸), 정민시(1800 졸), 심환지(1802 졸) [15] 정1품 아문에서 보좌관 역할을 하는 일종의 비서. 주업무는 경호. [16]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되어있다. [17] 지금의 학생회장. [18] 소청은 유생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조정에 상소하는 일종의 민원 창구이면서, 동시에 조정에 대해 유생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언론 창구의 역할도 있었다. 즉 '소청의 담당자'를 강조한 건 '그를 옥에 가둬두는 건 유생들의 여론을 탄압하는 행위'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대형 언론사 대표가 어떤 비리 혐의로 검찰에 구금되는 경우, 언론에서 앞다투어 정권이 '언론 길들이기' 하려는 것 아니냐는 보도를 내는 것과 같다. [19] 이날 당직 책임자. [20] 다만 비변사에서 조사·보고할 때는 "그 때에 전옥서의 관리가 여러 유생들의 공갈을 못 이겨 대신에게 가 보고할 때 사실을 더 보태어 대신을 놀라게 할 계책을 쓴 것은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한마디로 전옥서 관리들의 진술에 나온 유생들의 깽판이나 막말이 그대로 사실일 리는 없고, 서로 간에 감정이 좀 격해지다 보니 어느 정도 과장된 말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21] 독상은 삼정승이 모두 갖추어 재임하지 않고, 그중 한 정승만이 재임하여 다른 정승들의 업무와 권한을 행사하던 일, 혹은 그런 정승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당시 영의정·우의정이 공석이었으므로, 채제공은 조정의 수상(首相)이자, 병권을 책임지는 판병조사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22] 유배형의 일종으로 군역을 지게 하는 것이다. [23] 유학자들의 가계·학통 등을 기록하는 문서 [24] 담배에 의한 폐해는 숙종 시기의 이익 시기부터 지적되어 왔지만, 이 사건이 일어난 정조 시기에는 담배의 사회적인 폐해에 대해서 지적이 많이 되고 있었다. 다만 왕인 정조가 골초여서 딱히 제대로 된 결론은 안 나왔다. [25] 기로소 [26] 손잡이에 비둘기를 새긴 지팡이. 임금이 70세 이상의 공신이나 원로 대신에게 주던 것으로 이것을 하사받는 건 신하로서 최상의 예우를 받는 셈이다. [27] 정조의 모친 혜경궁 홍씨의 6촌 형제이자 영의정을 지닌 홍낙성이다. 그는 1년 전인 1798년에 세상을 떠났다. [28] 좌의정을 역임한 김종수이다. 그는 노론 벽파의 거두로서 채제공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심환지와 같은 강경파는 아니었으며 사안에 따라서는 협력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채제공보다 11일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거의 열흘 간격으로 두 당파의 핵심 지도자가 사망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뿐만아니라 1년 후인 1800년, 정조가 승하하기 직전 총신이자 시파의 중진 정민시마저 사망하면서 정조의 건강은 더욱 악화된다. [29]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온전히 담아야 제대로 된 것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대부분 극사실주의로 유명하다. [30] 순서상 예수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31] 위에서 채제공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지필묵을 청하러 갔던 그 재상이라고도 한다. [32] 참고로 박문수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33] 80년대 어느 한국만화에선 이걸 각색해서 채제민이 장사치로 일했지만 돈도 못 벌고 하다못해 집에서 나무를 패는데 2조각낸 나무땔감이 장독대를 깨부수는 개그로 각색되어 나왔다. 산에서 나무라도 베려고 하다가 사유지로 들어가 나무를 베는 통에 사유지 주인에게 두들겨맞고 나무를 상처입은 댓가로 지게와 도끼를 돈대신 주고 집으로 와야했다. 채제민은 불같이 화낼 장인을 피하려고 몰래 들어왔지만 장인이 방안에서 분노한 채로 기다리고 있어서 몽둥이를 내던져 맞고 별을 보는 것으로도 나온 바 있다…. [34] 그러나 그의 돌림자는 '제'가 아니라 '공'이다. 이 일화가 훗날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35] 우리 선조의 참다운 삶 슬기로운 삶 - 역사 속의 인물들이 남긴 멋과 기지의 자취, 성심도서, 1992년작 관련 링크 [36] 이만성(李萬成)의 딸. [37] 오필운(吳弼運)의 딸 [38] 권상원(權尙元)의 딸 [39] 6촌 동생 민공(敏恭)의 아들 [40] 조카 홍기(弘璣)의 아들 [41] 두 사람이 같이 살았던 동네는 형제간의 의리가 두텁다는 뜻에서 돈의동이라 불렸다. 위치는 현 종로 3가. [42] 3부 《 설중매》에서는 정창손역, 5부 《 임진왜란》에서는 류성룡 역, 11부 《 대원군》에서는 오경석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