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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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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 칸
검은색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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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 표시: 생전 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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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720년 11월 27일
724년
737년 8월 25일
(화력 서위일 불명)
요로 4년 10월 23일
진키 원년
덴표 9년 7월 25일
737년 11월 3일
749년 5월 4일
760년 9월 20일
762년 2월 28일
덴표 9년 10월 7일
덴표칸포 원년 4월 14일
덴표호지 4년 8월 7일
덴표호지 6년 2월 1일
770년 10월 23일
785년 6월 14일
785년 10월 31일
788년 6월 21일
호키 원년 10월 1일
엔랴쿠 4년 5월 3일
엔랴쿠 4년 9월 24일
엔랴쿠 7년 5월 13일
791년 1월
791년 1월
806년 6월
806년 6월
엔랴쿠 9년 12월
엔랴쿠 9년 12월
다이도 원년 6월
다이도 원년 6월
819년 1월 18일
823년 6월 17일
823년 6월 17일
826년 9월 1일
고닌 9년 12월 19일
고닌 14년 5월 6일
고닌 14년 5월 6일
덴초 3년 7월 26일
833년
833년
847년 11월 16일
848년 1월 28일
덴초 10년
덴초 10년
조와 14년 10월 5일
조와 14년 12월 19일
850년 9월
854년 10월 28일
858년
867년 11월 9일
가쇼(嘉祥) 3년 8월
닌주 4년 10월 4일
덴난 2년
조간 9년 10월 10일
869년 4월
872년 10월 9일
877년 1월
877년 1월
조간 11년 3월
조간 14년 9월 4일
조간 19년 1월
조간 19년 1월
884년 3월 23일
884년 3월 23일
891년 2월 24일
895년 9월 20일
간교 8년 2월 23일
간교 8년 2월 23일
간표 3년 1월 13일
간표 7년 8월 28일
897년 7월 19일
898년 1월 3일
900년 4월 15일
906년 6월 24일
간표 9년 6월 16일
간표 9년 12월 7일
쇼타이 3년 3월 14일
엔기 6년 5월 30일
907년
909년 4월 27일
913년 4월 27일
937년 11월
엔기 7년
엔기 9년 4월 5일
엔기 13년 3월 18일
조헤이 7년 10월
949년 9월 13일
949년 9월 13일
962년 11월 17일
967년
덴랴쿠 3년 8월 18일
덴랴쿠 3년 8월 18일
오와 2년 10월 18일
고호 4년
969년 12월 2일
970년 6월 26일
972년 12월 13일
978년 1월 1일
안나 2년 10월 20일
덴로쿠 원년 5월 20일
덴로쿠 3년 11월 5일
조겐(貞元) 2년 11월 20일
987년 3월
989년 8월 23일
992년 7월 18일
993년 6월 12일
간나 3년 2월
에이엔 3년 7월 20일
쇼랴쿠 3년 6월 16일
쇼랴쿠 4년 5월 20일
993년 8월 19일
995년 6월 25일
995년 6월 25일
1025년 9월 23일
쇼랴쿠 4년 7월 29일
조토쿠 원년 5월 25일
조토쿠 원년 5월 25일
만주 2년 8월 29일
1029년 11월 25일
1073년 6월
1073년 6월
1075년 11월 16일
조겐(長元) 2년 10월 17일
엔큐 5년 5월
엔큐 5년 5월
조호 2년 10월 6일
(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1094년
1107년
1146년 11월 9일
(화력 서위일 불명)
가호 원년
가쇼(嘉承)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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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6년 11월 9일
1166년 9월 8일
1168년 7월
1168년 7월
규안 2년 10월 4일
에이만 2년 8월 12일
닌난 3년 6월
닌난 3년 6월
1177년 8월 28일
1190년 5월
1220년
1242년
지쇼 원년 8월 3일
겐큐 원년 4월
조큐 2년
닌지 3년
1617년 4월 14일
1628년 7월
1632년 3월 30일
1651년 7월 4일
겐나 3년 3월 9일
간에이 5년 7월
간에이 9년 2월 10일
게이안 4년 5월 17일
1680년 6월 17일
1709년 3월 4일
1709년 10월 9일
1712년 12월 1일
엔호 8년 5월 21일
호에이 6년 1월 23일
호에이 6년 9월 7일
쇼토쿠 2년 11월 3일
1716년 7월 1일
1752년 7월 20일
1761년 8월 24일
1786년 10월 13일
쇼토쿠 6년 5월 12일
호레키 2년 6월 10일
호레키 11년 7월 24일
덴메이 6년 9월 22일
1841년 4월 8일
1848년 8월 7일
1853년 9월 23일
1858년 8월 29일
덴포 12년 2월 17일
가에이 원년 7월 9일
가에이 6년 8월 21일
안세이 5년 7월 21일
1866년 8월 29일
1880년 7월 20일
1882년 8월 7일
1885년 7월 20일
게이오 2년 7월 20일
메이지 13년 동월 동일
메이지 15년 동월 동일
메이지 18년 동월 동일
1891년 2월 18일
1898년 3월 18일
1899년 9월 26일
1900년 11월 16일
메이지 24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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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2년 동월 동일
메이지 33년 동월 동일
1901년 5월 16일
1901년 5월 16일
1903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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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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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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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일본의 방송국 닛폰 테레비가 일본인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일본인' 명단이다.
<rowcolor=#ffffff> 1위 2위 3위 4위 5위
오다 노부나가 사카모토 료마 도요토미 히데요시 마쓰시타 고노스케 도쿠가와 이에야스
<rowcolor=#fff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노구치 히데요 히지카타 토시조 사이고 다카모리 미소라 히바리 후쿠자와 유키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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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우대신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파일:Oda_Nobunaga.jpg
▲ 오다 노부나가의 초상화.[1]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출생 1534년 6월 23일
오와리국 아이치군 쇼바타성
(현 아이치현 이나자와시)
사망 1582년 6월 21일 (향년 47세)
야마시로국 가도노군 교토 혼노지
(현 교토부 교토시 나카교구)
재임기간 제4대 오다 단조노추 당주
1552년 3월 27일 ~ 1575년 11월 28일
우대신
1577년 11월 20일 ~ 1578년 4월
서명 파일:오다 노부나가 서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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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본명 노부나가(織田信長)
아명 깃보시(吉法師)
통칭 사부로(三郎)
신체 170cm
종교 무종교( 무신론)[2]
가문 오다 가문
부모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
어머니 도타고젠
형제자매 형 오다 노부히로
동생 오다 노부유키
동생 오다 나가마스
동생 오이치노카타 외 9명
배우자 정실 노히메
측실 이코마 키츠노 외 10명
자녀 장남 오다 노부타다
차남 오다 노부카츠
삼남 오다 노부타카 외 8남 9녀
}}}}}}}}}

1. 개요2. 가문 배경
2.1. 선조2.2. 가족과의 관계
3. 생애4. 평가5. 여담6. 참고 서적7. 창작물

[clearfix]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大名), 오와리 오다 단주노초 가문의 당주, 우대신 겸 우근위대장, 그리고 천하인(天下人). 무로마치 막부를 종결시키고 센고쿠 시대의 양상을 완전히 변화시켰기에 이 인물을 빼고 센고쿠 시대의 역사를 논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일본이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한복판에 서 있었던 사람이며, 당대에 많은 파격을 불러왔지만, 일본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죽은 점 등으로 인해 후대의 작가들에게 매우 사랑받고 있으며 대중적인 인지도와 인기가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군이기도 했다.

90년대 이전[3]에 청년기를 보낸 한국인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인 걸 대다수가 알고 있는데 비해, 오다 노부나가가 직전신장인 건 거의 다 모른다. 아무래도 조선왕조실록에 안 나온 영향이 큰 듯. 그나마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라는 게임이 신장의 야망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정도이다.[4]

2. 가문 배경

[ruby(織, ruby=お)][ruby(田, ruby=だ)][ruby(氏, ruby=し)]
오다씨
파일:오다 가몬.svg 파일:Oda_emblem_White.png
<colbgcolor=#ffd700> 오다 가문의 가몬
오다 외꽃
織田瓜
본성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스케모리류(資盛流)(자칭)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토시히토류(利仁流)?
인베씨(忌部氏)?
가조 타이라노 치카자네(平親真)
종별 무가(武家)
화족(華族)( 자작)
출신지 에치젠국 오다 장원
(越前国織田庄)
근거지 오와리국 키요스 성
미노국 기후 성
오미국 아즈치 성
지류
분가
츠다씨(津田氏)

2.1. 선조

가족 관계 이름 생년 몰년
6대조 오다 히사나가
(織田久長)
불명 불명
5대조 오다 토시사다
(織田敏定)
1452년 1495년
고조부 오다 토시노부
(織田敏信)
1466년 1517년
증조부 오다 요시노부
(織田良信)
불명 불명
조부 오다 노부사다
(織田信定)
불명 1538년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
(織田信秀)
1511년 1551년 4월 8일

2.2. 가족과의 관계

관계 이름 생년 몰년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
(織田信秀)
1511년 1551년 4월 8일
어머니 도타고젠[5]
(土田御前)
1511년 1594년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는 오와리의 호랑이라 불리던 걸물이었지만 말년에는 사이토 도산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사이에 껴서 곤란한 처지였다. 그래도 노부나가를 신뢰해서 그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부인 이름 생년 몰년 자녀
정실 노히메
(濃姫)
1535년 불명 없음
측실 이코마 키츠노
(生駒吉乃)
1528년 1566년 5월 31일 오다 노부타다(1557 ~ 1582)
오다 노부카츠(1558 ~ 1630)
도쿠히메(1559 ~ 1636)
오다 노부히데의 라이벌인 사이토 도산의 딸인 정실 노히메와는 정략결혼이었고 아이를 낳지는 못했지만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측실 이코마 키츠노는 생애 제일 사랑했다고 알려진 여자로,[6] 오다 노부나가는 24명의 자식들 중 이코마 키츠노의 아들인 오다 노부타다 오다 노부카츠에게만 군의 총대장 자리를 맡겼다.[7] 어느 정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 많은 만큼 미디어에서는 처첩들 중에서 이 두 사람이 자주 나온다.
자녀 이름 생년월일 사망일 비고
서장자 오다 노부마사(織田信正)
(무라이 시게카츠, 村井重勝)
1554년 6월 4일 1647년 12월 21일 [8]
장남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 1557년 1582년 6월 21일 [9]
차남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1558년 1630년 6월 10일 [10]
3남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
(간베 노부타카, 神戸信孝)
1558년 4월 22일 1583년 [11]
4남 오다 히데카츠(織田秀勝)
(하시바 히데카츠, 羽柴秀勝)
1568년 1586년 1월 29일 하시바 집안에 양자로 보내짐
5남 오다 카츠나가(織田勝長) 1569년 1582년 6월 21일 혼노지의 변에서 전사
6남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12] 불명 불명
7남 오다 노부요시(織田信吉) 1573년 1615년 5월 15일
8남 오다 노부사다(織田信貞) 1574년 1624년 7월 21일
9남 오다 노부타카(織田信高)[13] 1576년 1603년 1월 23일
10남 오다 노부요시(織田信好) 불명 1609년 8월 13일
11남 오다 나가츠구(織田長次) 불명 1600년 10월 21일
장녀 도쿠히메(徳姫) 1559년 11월 11일 1636년 2월 16일 마츠다이라 노부야스의 정실
차녀 소우오인(相応院) 1561년 1641년 6월 17일 가모 우지사토의 정실
3녀 히데코(秀子) 불명 1632년 5월 30일 츠츠이 사다츠구의 정실
4녀 에이히메(永姫) 1574년 1623년 3월 24일 마에다 토시나가의 정실
5녀 호우온인(報恩院) 1574년 1653년 9월 6일 니와 나가시게의 정실
6녀 오후리(於振) 불명 1643년 5월 26일 미즈노 타다타네와 결혼
사지 카즈나리와 재혼
7녀 겐코인(源光院) 불명 1600년 11월 13일 마데노코지 아츠후사의 계실
8녀 산노마루도노(三の丸殿) 불명 1603년 3월 1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니죠 아키자네의 계실
9녀 게츠묘인(月明院) 불명 1608년 9월 15일 도쿠다이지 사네히사의 정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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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일본사의 흐름을 바꿔놓았으며 현대 일본인들이 매우 존경하는 인물 중 1명이자[16] 사실상 센고쿠 시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많은 매체에 등장하다 보니 세계적으로 인지도와 인기가 상당히 높다.

그가 센고쿠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건 오다 노부나가가 그 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센고쿠 다이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노부히데는 오다 가문을 통일했지만 방계였기 때문에 집안에 적을 많이 만들어둔 상태로 죽었고 가독 계승 당시 노부나가는 인망이 없었다. 그런 불리한 조건에서 오다라는 약소 세력을 전국 통일 목전에까지 이끌어낸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이렇게 지방의 한 소규모 다이묘에서, 전국의 다른 좋은 땅 물려받은[17] 타고난 다이묘들을 다 제치고 천하인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보니 그 능력은 대단히 비범하게 평가된다.

주변이 말 그대로 적으로 둘러싸인 오와리에서[18], 심지어 원래 오와리를 통치하던 가문의 직계나 하다못해 방계도 아닌, 하극상을 일으키고 땅을 빼앗은 신하 가문의 방계였던 만큼 애초에 오다 가문 자체가 입지가 썩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내부적으로도 그리 통일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객관적으로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당대 최고로 보기엔 어려웠다. 노부나가 본인이 오케하자마 전투등에서 직접 최전선에 서서 적들을 참살하기도 했고, 오다 군은 뛰어난 진지 구축 능력을 앞세워 상당한 방어 능력을 보이긴 했지만, 오다 본인의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현대 역사학자들에 들어선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 등 당대 최고의 지휘관과 비교하면 확실히 끗발이 아래라고 평가받고 있고, 노부나가 공기 및 갑양군감같은 역사적 사료에서도 본인이 직접 친정했음에도 (주로 다케다 군에게) 패퇴한 적이 다수 있다는 기록도 있다. 심지어 오다 군의 병졸 수준 자체가 평균적으로 다케다나 호죠, 도쿠가와 가의 병졸에 비해 훨씬 약하다는 기술들도 많다.

그와는 별개로 그의 전략안은 기본적으로 신중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는 다케다 가문을 상대하는 것에서 두드러지는데, 다케다 신겐 생전 무적이라 불리던 신겐의 기병대를 상대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솔직히 받아들이고 신겐 생전엔 성급히 맞서싸우지 않고 외교적 방책만으로 버티고자 했고, 버티고 버티다가 맹자인 신겐이 죽고 다케다 카츠요리가 뒤를 계승하자마자 나가시노 전투를 일으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시점에서 사실상 다케다 가문보다 우위에 섰음에도 일부러 다케다 가문을 방치했고, 실제로 이후 다케다 가문은 경제적, 외교적 실책을 연달아 저질러 사실상 자멸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나가시노 전투 종전 후 7년만에 다케다를 완벽히 공략할 수 있는 완벽한 판도를 짜내는데 성공했다.[19][20]

노부나가의 진정한 장점은 전술보다는 전략, 야전보다는 정치력에 있다.[21]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외국과의 무역, 라쿠이치라쿠자(樂市樂座)[22], 다른 다이묘들에겐 쓸모없다 여겨졌으나 총포를 독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카이를 독점한것, 쇼군을 이용한 외교전 등 그의 다채로운 전략은 괄목할 만하다. 이러한 전략이 비록 노부나가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23], 하나의 세력을 이끄는 총 책임자로서의 능력은 확실히 뛰어났다. 오다 군이 꽤 큰 손실을 입고 패전한 적은 가끔 있지만, 항상 적보다 많은 병사를 이끌 수 있었다는 것은 전략적/정치적인 능력이 전술적인 실패를 언제나 메꿀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노부나가가 가독을 상속받았을 당시의 상황은 아버지 노부히데의 실패와 본인의 행실로 인해 가문 내의 분열에 더해 외부의 적들이 오와리를 노리고 있는 등 최악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런 불리한 상황에 묻히는 감도 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오다 가문의 입지나 지정학적인 위치 등은 상당히 유리한 편이었다. 오와리의 발전한 상업은 아버지 노부히데 대에 이루어진 성과를 물려받은 부분도 부정할 수 없고[24] 미노를 점령한 뒤 노부나가는 노비 평야로 알려진 미노와 오와리의 매우 비옥한 평지를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으며[25], 오와리와 미노는 위치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나이와 교토, 그리고 상업의 중심지인 사카이로 뻗어나가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이런 유리한 조건들이 노부나가의 능력을 깎아먹는 것은 아니지만 천하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재산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노부나가의 용인술은 매우 파격적인 편이다. 잔혹하고 용서가 없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배신자를 용서한 적도 많다. 다만 근무에 태만하고 별로 쓸모가 없는 인물이라 생각되면 아무리 중신이라고 해도 가차없이 내쳐버렸다. 굉장히 실리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부하들 입장에선 언제 내쳐질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전국시대의 많은 다이묘 가문은 고평가되는 다이묘들조차도 대부분 겉은 급성장하면서 내실은 그에 걸맞은 체제를 미처 다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덩치는 전국구급이지만 지방 다이묘의 가신단 수준의 약한 단결력을 가져서 뒤늦게 내분이나 가신단의 이탈, 반란 등의 사태로 인해 발목을 잡히는 사례가 많았는데, 노부나가처럼 가신을 수하의 독립된 영주로 취급하지 않고 단순히 노부나가라는 군주의 신하처럼 다루는 중앙집권적인 가신단을 구축한 사례는 거의 없었기에 매우 특이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의 행동이나 정책을 두고 유럽의 절대군주처럼 행동했다고 특기했고, 이것은 분명 다른 다이묘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노부나가의 이러한 선구적인 용인술은 어쩔 수 없이 봉건영주들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아라키 무라시게, 마츠나가 히사히데 등의 반란처럼 많은 도전에 직면했음은 물론, 결국에 가서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일본 역사를 다루는 Samurai Archive의 팟캐스트에선 이런 노부나가를 두고 매니저와 중간 관리자에겐 최악의 보스, 그 밑의 평사원이나 알바들에겐 더없이 좋은 보스 타입이라고 얘기했다.

또한 노부나가는 매우 근면한 편이었다. 그 자신이 워낙 건강한 체질[26]이어서 가능했겠지만, 가신들 중에서도 노부나가의 근면함에 따라올 수 있는 것은 하시바 히데요시[27]와 아케치 미츠히데[28] 정도였다. 어느 정도 근면했느냐 하면, 타 가문에 보내는 의례품들을 스스로 일일이 검사했을 정도. 노부나가의 지위를 생각하면 이는 근면한 정도가 아니라 깐깐한 수준이었다.

거기에 더해 노부나가는 자신의 근면함을 기준으로 하여, 부하가 조금이라도 태만하다 싶으면 곧장 벌을 내렸다. 더욱이 짬밥이 있는 노신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기에[29],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근면한 자들은 오히려 출세할 기회가 많아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30]의 사람들은 노부나가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한 연구에서 오히려 현대인보다 노동시간이 길지 않았다고 할 정도이던 당시에 이런 일중독자가 다이묘였으니 이 점도 반감을 살 하나의 요소였는지 모른다. 게다가 그 벌은 당시 기준으로나 오늘날의 기준으로나 절대로 가벼운 편이 아니었다. 이는 아직 봉건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본의 다이묘나 사무라이들에게 상당히 이질적이었고, 당시 기준으로 '잔혹하다'라는 평을 듣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오늘날은 더이상 봉건사회가 아니므로 비유하기 어렵지만, 굳이 예를 들자면, 가맹 점주를 최근 실적이 안나온다면서 직영점 점주처럼 내쫒는 프랜차이즈 사장 + 뭔가 수틀리면 사정설명도 없이 즉석에서 해당 직원에게 모욕을 주고 내쫒아버리는 스티브 잡스의 이미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종합해서, 뛰어난 전략 능력과 결코 태만을 용서치 않는 근면함 등이 노부나가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노부나가의 이러한 장점이 기업 경영자의 마인드에 적합하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21세기의 기업 경영을 전국시대 전쟁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도 "노부나가의 경영 비결!" 같은 책들은 굉장히 흔하고, 마케팅의 일환이긴 하지만 삼성전자 사장이 임원들에게 < 대망>을 읽으라고 권했다고 할 정도로 혁신이 중요한 현대에 이 혁신적이었던 남자의 조직 경영법은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일본의 비효율적인 거대 조직이나 복지부동의 관료 조직을 비판할 때 오래된 전통이라도 비효율적이라면 가차없이 개혁하던 노부나가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조직 몸집 줄이기가 중요한 불황이라서 후다이(譜代)[31]도 서슴지 않고 정리해고를 했던 남자의 경영법이 주목받는지도 모른다.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혁신자라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이루어지는 추세라고 서술되어 있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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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고 서적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 若松和三郎(2013年 10月 1日, 戎光祥出版)[83]
: 阿波三好氏 - 天野忠幸(2012年 10月 10日, 岩田書院)[84]
: 四国と戦国世界 - 四国中世史研究会 · 戦国史研究会(2013年 5月, 岩田書院)[85]
: 戦国史研究 第66号 - 戦国史研究会(2013年 8月 25日, 吉川弘文館 & 戦国史研究会)[86]

7.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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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장 유명한 노부나가의 초상이다. 원본은 아이치현 도요타시 조코지(長興寺)에 소장되어 있다. (三好一族と織田信長 p.11) 초상화가 제작된 시기는 노부나가의 1주기인 덴쇼 11년 6월 2일(조선 선조 16년, 1583년)이며 제작자는 카노 소슈(狩野宗秀, 1551 ~ 1601)이다. # [2]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3] 이때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을 한국식 독음으로 문자 표기하는 게 매우 흔했고, 한글이 아닌 한자로 인쇄하던 한국 신문에도 그냥 역사 이야기 보도에는 풍신수길, 덕천가강, 이등박문 등을 한자로 써서 기사를 쓰기 일쑤였다. 한국에서 한문 교육을 등한시하는 문화는 90년대 중후반이나 되어서야 생기기 시작하여 21세기에 자리잡혔고 지금의 표기 경향 또한 한 • 중 수교 수년 후부터 정책적으로 중국어와 일본어 이름을 한글로 그대로 쓰는 원칙이 생겨 21세기가 되어서야 자리잡혔다. [4] 정식 발매판의 경우 신장은 한자로 쓰고 그 밑에 한글로 노부나가라고 별도로 표기하여 발매하였다. [5] 아들 노부나가(1534 ~ 1582), 노부유키(1536 ~ 1557), 히데타카(? ~ 1555), 노부카네(1548 ~ 1614), 딸 오이치(1547 ~ 1583), 오이누(? ~ 1582)의 생모다. [6] 어찌나 아꼈는지 3년 연속으로 아이를 낳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셋째이자 장녀인 도쿠히메를 낳고 산후병으로 요절하였다. [7] 마침 둘이 장남과 차남이기도 했다. [8] 계도찬요에 기록된 노부나가의 장남. 일반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교토 겐쇼지의 기록에 따르면 오다 가신 무라이 사다카츠의 양자가 되었다고 한다. [9] 아명은 키묘마루. 노부나가의 후계자였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와 함께 죽었다. 유능한 편이라 만약 살아남아 오다 가문을 이어갔다면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10] 아명은 자센마루. 키타바타케 가에 양자로 보내졌으나 노부나가 사후 돌아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했지만 임의로 하시바 히데요시와 강화하면서 산통을 깨버렸고, 아버지의 역작이었던 아즈치 성을 태워버린 전적도 있어서 호부견자로 유명하다. [11] 아명은 산시치마로. 간베 가문에 양자로 보내졌다. 혼노지의 변 이후 시바타 카츠이에 등과 손잡고 하시바에 맞섰으나 힘이 미치지 못해 사망하였다. [12] 조부와 이름이 같다. [13] 셋째형과 이름은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 [14] 수많은 형제들이 있지만 주요 인물만 기재했다. [15] 1543년 8월 17일생이라는 설도 있다. [16] 한국의 이순신, 세종대왕의 위상과 비슷한 케이스라 생각하면 편하다. [17] 사실 정확히 말하면 노부나가가 물려받은 오와리 지역도 땅이 좁을 뿐이지, 농사짓기 알맞은 기름진 땅이라 ' 석고' 즉 쌀 산출량이 좋은 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넓이만 좁았을 뿐 산출량으로만 보자면 후호조씨가 다스리던 간토같은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선 상당히 좋은 편이다. 대신 전란의 시기에 땅이 좁다는 태생적인 한계는 산출량 외에도 여러모로 악영향을 끼쳤고 지리적/정치적 입지상 주변에 적도 많았다는게 문제. [18] 수도에 가깝고 주변이 평지라 사람을 모으기 쉽고 전력만 된다면 당장 수도로 달려갈 수도 있는 위치지만, 반대로 말하면 적이 쳐들어오기도 쉬운 입지이기도 했다. [19] 상술했듯 다케다는 전략적 실책으로 사실상 고립되었고 다케다를 지원해줄만한 세력이라곤 호죠나 우에스기밖에 없었는데, 우에스기는 비슷하게 내분으로 바빴으며 호죠는 아예 오다와 결탁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7년간의 기다림으로 오다는 병력 손실만 막은게 아니라 외교적으로나 국방적으로나 타 세력이 오다의 다케다 흡수를 방해하지 못할 판을 깐 셈. [20] 또, 굳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은 이유를 알 수 있는데 바로 다케다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사실상 다케다에 대한 방패로 도쿠가와를 내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도쿠가와를 이용해먹기만 한 것은 아니며 도쿠가와가 다케다에게 공격당할 때는 나름 원군을 보내줬다. 다만 노부나가 포위망으로 인해 오다 또한 불안한 상황일 때도 있어서 항상 그렇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도쿠가와와의 동맹은 서로에게 많은 이득이 되었고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21] 사실 성공한 왕자(王者)들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 외에도 유방과 항우, 테무진과 자무카, 주원장과 진우량 등의 관계가 대표적. [22] 기존 상인들이 형성한 동업자 조합인 이치자(市座)에 주어진 특혜를 폐지하고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한 시장이다. [23] 당장 노부나가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도 이러한 전략을 구사했다. [24] 사실 탄탄한 경제력의 기반은 조부 노부사다 때 부터 시작되었다. 시나노, 미노 오와리, 이세 등 4국을 관통하는 기소강과 인접한데다 츠시마 신사 아래 번성한 몬젠마치를 가진 이세만에 위치한 항구인 츠시마를 장악하고 거점을 아예 그곳에 옮겨 발전을 꾀한 이가 노부사다이며, 그 아들인 노부히데 역시 아츠다 신사를 낀 항구 아츠다를 지배하며 상업을 장려했다. 이러한 까닭에 홍수로 무너진 궁궐의 수리비로 무려 4천관(약 6억엔)에 달하는 비용을 헌상할 수 있었다. 라이벌이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500관, 사이토 도산은 한 푼도 내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격차. [25] 전국시대 지도를 보면 오다 가의 땅은 상당히 작아 보이지만 상술했다시피 매우 비옥한 땅이었기 때문에 고쿠다카로 치면 매우 알찬 땅이었다. [26] 사냥과 말달리기를 통해 늘 체력을 단련했다. [27] 이쪽은 한 손에는 야망, 한 손에는 근면성실로 패권자까지 올라간 일본 역사상 최고의 독종이기에 급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시바에 대한 당대 소문 중에는 하시바가 거의 노비급 신입 말단 부하였을때, 현대의 화장실과는 차원이 다르게 불결하던 당대의 변소를 하도 열심히 청소하고 깨끗이 만들어서, 귀가한 노부나가가 변소를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도 있었을 정도였다. 히익 변소가 이렇게 깨끗하다니! 그때부터 성실성을 눈여겨 보고 아주 조금씩 승진시켰는데, 승진을 하건 안하건 근면성실한 태도가 변하지 않길래 크게 신용하며 심복으로 키웠다는 것. [28] 단 이 쪽은 다른 다이묘 밑에 꽤 오래 있다가 온 사람이다. [29] 대표적인 예가 사쿠마 노부모리 [30] 노부나가의 근면함을 따라올 자는 드물었다. [31] 대대로 주군을 모시며 그 가문의 정치에도 관여해 온 측근 가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32] 에도 초기에 나온 군담소설. [33] 그의 일생을 다룬 사료 중 가장 신뢰성있는 것으로 꼽히는 책으로 한때 한일 양국 인터넷 회선을 달구던 노부나가 잔혹설의 근거와 노부나가 잔혹설에 반박할 근거가 모두 들어있는 신기한 책이다. 히라이 카즈사(平井上総) 박사는 신장공기를 1차 사료 쪽이 아닌 군키모노나 계도, 예수회 서간이나 실록 등의 편찬 사료 쪽으로 분류하고 있다. [34] 노부나가의 일족들이 배치된 곳은 전부 세토내해를 끼는 지역인데 세토내해에 많은 해안선이 걸쳐진 시코쿠 동부마저 3남 노부타카를 위시로 배치했으니 노부나가는 중세에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는 세토내해를 중심으로 한 친족 중심의 지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시코쿠의 아와와 사누키는 칸레이였던 호소카와 가문의 중요 거점이었으며 특히 아와는 미요시 가문 시대에 걸쳐 목재와 쪽(藍)으로 폭발적인 경제력을 확보했기에 이런 해운을 이용한 경제성을 보고 펼친 정치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상 야스나가의 복귀를 명분으로 동 세토내해를 차지하는 실리를 챙기려 했던 것으로 봐도 될 듯. 후에 히데요시가 아타기 진고로를 미요시 진고로로 부르거나 야스나가에게 양자를 맡기며 오사카에 군림한 것을 보면 노부나가가 동세토내해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었는지 간단히 알 수 있다. [35] 노부나가 주인장-야스나가 부장 또한 노부나가의 시코쿠 정책을 알아보는 것에 큰 영향을 주는 사료임에도 연호가 기입되어 있지 않기에 사료의 연도 비정과 오다-쵸소카베 관계를 알아가는데에 있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주인장 - 부장의 발급 시점은 오다 - 쵸소카베 관계에 있어서의 터닝포인트 취급을 받는 일이 많아 1578년, 1579년, 1580년, 1581년 등으로 많은 논의와 비정을 거치며 연구가 진행되었다. [36] 나카히라 케이스케 씨는 노부나가가 쵸소카베 가문을 대적하는 시기가 1581년의 말년까지 밀려난다는 것, 아와와 사누키에 모토치카에 의한 직접 지배가 보이지 않는 것을 근거로 노부나가의 시코쿠 정책은 쵸소카베 가문에서 미요시 가문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반 노부나가 세력이었던 마사야스가 노부나가에게 복속됨에 따라 적대 세력이 없어지고 쵸소카베 가문과 맞닿는 사태가 발생했기에 국분의 필요성이 생겨나 양자가 갈등하게 된 것이라 평가하고 있다. [37] 모토치카가 이요 남부의 우와군(宇和郡)을 침공하자 사이온지 가문이 이를 노부나가에게 전달했고 이를 받은 노부나가의 부교슈(奉行衆)가 사자(上使)를 파견한 것이 대표적인 예. [38] 다이묘를 말함. [39] 박수철 편역,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인물인가"에서 발췌. 해당 서적은 프로이스 일본사의 편역본이다. [40] 당시 승려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로 승려는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식인 계층이었으므로 불도를 닦는 것과 학문에 전념하는 것의 비중은 비슷했다. 이 점은 서양의 성직자도 비슷하다. [41] "그 소행(엔랴쿠지 방화/학살)이 비록 잔인하다고는 하나, 기나긴 에이잔 승려들의 해악을 뿌리뽑았기에 천하에 공을 세운 일이라 할 것이다."(아라이 하쿠세키, 에도 시대의 유학자) [42] "당이나 승방이나 전부 엉망인 꼬락서니였다. 아아, 한탄스럽다. 에이잔의 승려들은 완전히 엉망이고 학문을 닦는 것을 게을리하여 행실도 어지럽고 불법도 난잡해졌다. 산의 전 사찰이 전멸한 것도 당연한 과보라 할 수 있겠다. 여타 대부분 사찰이 전부 그런 식이었다. 진실로 가련하구나." (타몬인 일기, 승려 시점의 기록이다.) [43] < 신장공기>에는 대학살로 고명한 승려와 학자들이 몰살당하는 와중에 사찰에서 온갖 미소년과 미녀들이 쏟아져나와 "악한 승려들은 죽어 마땅하지만 우리는 살려달라"며 빌었다는 기술이 있다. [44] 중국 본토 [45] 히데요시는 평민 출신이라 가신들도 부족했고 또, 노부나가의 결실을 가로챈 면이 있는 데다가 이에야스한테도 패하고 타협한 적이 있어서 자기 위엄을 높일 필요가 있었지만 노부나가는 원래 다이묘 출신이고 고다이 역시 충실했으며 관동 역시 본인이 직접 개발할 수도 있었을 테니 위험 부담이 높은 대륙 침공을 할 이유는 적다. [46]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힘을 꺾어놓기 위해 전봉이라는 형태로(즉, 도쿠가와의 기존 영지를 뺏고 새로운 영지를 수여하는 형태로) 관동에 보냈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굳이 그럴 일도 없고 동맹인 도쿠가와의 힘을 꺾을 필요도 없었다. [47] 설령 노부나가가 조선을 침공했어도 조선 수군을 꺾지 못하고 명나라의 원군이 도착해 공세종말점에 이른 시점에서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다면 히데요시와 다르게 적당선에서 협상하여 정유재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48] 유통에 따른 상업 정책은 에도 시대 후기에 와서 중시되기 시작한 것으로 그 전까지는 연공(쌀)이 중시되었다. [49] 당시 일본인 평균 신장은 155cm였다. 현대 일본인 기준으로 치환하면 약 186cm에 달한다. [50] 겐지 헤이케가 번갈아가면서 정권을 잡는 것이 무가의 형세라는 사상. 센고쿠 시대 전에 일본을 지배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가인 아시카가 가문이 겐지였다. [51] 박수철, 오다 도요토미 정권의 사사 지배와 천황 [52] 대표적으로 우에스기씨가 후지와라 북가 카슈지계열이다. [53] 1570년 6월 28일 아네가와(姉川)에서 노부나가군이 양동작전으로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을 괴멸시킨 전투 [54] 아니메 빙과 20화의 대하 드라마가 바로 이 이야기를 방영한 것이었고, 이를 밖에서 잠긴 창고에 갇혀있다는 힌트로 써먹는다. [55] 阿波三好氏 p.239 [56] 宮本義己, 2010, 『誰も知らなかった江』, p. 61-62. [57] 엔랴쿠지 학살 및 방화사건이 대표적이다.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비는 사람들을 참살하는 묘사나, '눈뜨고 보기 힘들었다' 등의 구절이 있다. [58] 구태훈 교수, "오다 노부나가" [59] 四国と戦国世界 p.148 [60] 오다 도요토미 정권의 사사 지배와 천황 [61] 아츠모리 항목에서 볼 수 있는 일본 고전 무용 음악. 실제로 노부나가는 아츠모리를 좋아해 즐겨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62] 만화 히카루의 바둑의 번외편에 이 야사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63]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의 감각에서는 지방인 오와리 출신이며, 땀을 많이 흘리고 운동량이 많은 전장에서 영양분으로 삼기 위해 짠 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무사 계급 출신이었다. 반면 교토의 공가(公家)식 요리는 현재도 심심한 간에 은은한 귀족적 풍미가 특징이다. [64] 각각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거성 이름. 문화·예술사를 설명할 때 이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65] 오다와 도요토미의 앞글자를 떼어 음독한 것. [66]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철자법인 역사적 가나 표기법으로는 さうであるか로 쓴다. 오늘날의 일본어 표현으로는 '소-카(そうか)' [67] 출처 일본어 위키피디아 #. 문서에 따르면 작위를 받은 오다씨는 4명인데, 2명은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나가마스의 후손이고, 나머지 2명은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츠(信雄)의 후손들인데, 메이지유신 당시 오다 노부토시(織田信敏, 노부카츠의 4남 노부요시(信良)의 후손)는 텐도(天童)번, 오다 노부치카(織田信親, 노부카츠의 5남 타카나가(高長)의 후손)는 카이바라(柏原)번의 다이묘였던 이유로 자작을 받은 것. [68] 경관의 이름이 진짜 아케치인지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루머에 불과하다. 또한 노부나리가 노부나가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는 정확한 구체적 증거가 아닌 노부나리의 증조부가 자칭한 것이 시초라서 정말로 그가 노부나가의 후손인지는 미스테리. 참고로 앞서 나온 직계 후손 노부타카는 이를 우회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 [69] 사후에도 노부나가의 후손은 실록에 딱 2명 등장한다. 숙종시절에 사신으로 온 하타모토 오다 노부카도(織田信門, 노부카츠의 5남 타카나가의 외손자다)와, 구한말에 고종에게 훈장을 받은 화족 오다 노부치카(織田信親, 앞에서 언급했지만 타카나가계) 자작. [70] 제기차기와 비슷한 원리로 공을 높이 차올리며 그 횟수를 겨루어 노는 경기. 당시 교토 귀족들의 소양이었다. [71] 1위 오다 노부나가(1,059표), 2위 사카모토 료마(1,047표), 3위 스기하라 지우네(603표), 4위 쇼토쿠 태자(582표), 5위 사나다 노부시게(561표), 6위 다테 마사무네(508표), 7위 우에스기 겐신(458표), 8위 도쿠가와 이에야스(440표), 9위 히지카타 토시조(426표), 10위 구로다 요시타카(380표). [72] 신장공기 1권 '뱀을 물리친 일' 조. [73] 유명 무장으로 노부나가의 젖형제이기도 하다. 후일 하시바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맞붙은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하시바군으로 참전해 전사한다. [74] '키쇼'란 맹세 의식이다. 예를 들어 '키쇼몬'의 경우 맹세장을 의미한다. [75] 당시 히데요시의 거성이다. [76] 신장공기 14권 텐쇼 9년 4월 10일조 기사. [77] 키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용하던 이름으로 히데요시는 키노시타 도키치로 -> 하시바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요시 순으로 이름을 바꿨다. [78] 원문에는 목적어가 빠져있다. 殿라는 2인칭을 사용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현대어역에서 추가된 내용으로 보인다. 참고로 殿는 특정 지위 이상의 상대에게 사용하며, 보통은 남성이지만 여성에게도 사용할 때가 있다. 다른 번역에서는 そなた라는 2인칭을 사용했다. [79] 城下町. 다이묘의 성 근처에 조성된 상업 도시 구역. 전국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 [80] 일본, 중국, 인도를 의미한다. [81] 신장공기 13권 텐쇼 8년 3월 20일 기사. [82] 참고로 2년 전인 1915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1위로 추존받았다. [83] 내용 자체는 1989년에 와카마츠 씨가 출판한 『篠原長房』에 수정과 가필을 더한 서적이다.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凡例/新版の刊行にあたって [84] 아마노 박사가 중심이 되어 70 ~ 10년대의 논고들을 묶은 서적이다. [85] 참조한 것은 아마노 박사 논고. [86] 참조한 것은 나카히라 씨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