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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6 18:04:03

줄리어스 니에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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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연합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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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연합 공화국 초대 대통령
줄리어스 니에레레
Julius Nyerere
파일:President_Nyerere_van_Tanzania,_koppen,_Bestanddeelnr_928-2879_(cropped).jpg
본명 므왈리무[1] 줄리어스 캄바라게[2] 녜레레
Mwalimu Julius Kambarage Nyerere
출생 1922년 4월 13일
탕가니카 지역 부티아파
사망 1999년 10월 14일 (향년 77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국적 파일:탕가니카 지역 기.svg.png 위임통치령 탕가니카 지역
[[탄자니아|]][[틀:국기|]][[틀:국기|]]
직업 혁명가, 독립운동가 → 정치인
경력 탕가니카 영연방 왕국 수상 (1960–61)
탕가니카 총리 (1961–62)
탕가니카 공화국 대통령 (1962–64)
탕가니카-잔지바르 연합 공화국 대통령 (1964)
탄자니아 대통령 (1964–85)
재임기간 초대 탄자니아 대통령
1964년 11월 1일 ~ 1985년 11월 5일
학력 마케레레 대학교 (DipEd)
파일:에든버러 대학교 아이콘.png 에든버러 대학교 (MA)
정당 탕가니카 아프리카 국가연합당[3] (1954–77)
탄자니아 혁명당 (1977–99)
수상 레닌 평화상 (1985/86)
세계평화평의회 상 (1988)
간디 평화상 (1995)
배우자 마리아 니에레레 (1953년 결혼)
자녀 8명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평가
3.1. 긍정적3.2. 부정적
4. 기타5. 관련 문서6.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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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www.reunionblackfamily.com/nyerere.jpg
쿠바의 국가평의회장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탄자니아 국부이자 초대 탄자니아 대통령.

2. 생애

탄자니아가 아직 통합되기 전, 그러니까 탕가니카 잔지바르 술탄국으로 양분되어 있었을 때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한 독립운동가였다. 1929년에 탕가니카 지역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탕가니카에서 아프리카 민족연합(TAA)를 조직하여 탕가니카인들의 권익을 위해 힘썼다. 이후 탕가니카가 독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서 1962년에는 탕가니카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탕가니카가 잔지바르와 통합하고 탄자니아가 출범했을 때도 국민들의 그에 대한 지지는 열광적이여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1년 동안 장기집권하면서 독재자 소리도 들었지만 정작 후술되어 있듯 비판받자 쿨하게 자리에서 내려왔으며 권력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생활하다가 말년에 으로 쓰러지자 정부에서 영국으로 병치레를 보낼 정도로 지지가 나쁘지 않았다. 1999년 10월 14일 런던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탄자니아는 이 날을 국부기일로 지정했다.

대통령 시절 윗 나라인 우간다 탄자니아 선전포고하자 독재자 이디 아민 축출을 위해 탄자니아군을 파병해 우간다를 공격하여 아민의 폭정에 대항하는 우간다 반군 세력들을 지원한 바 있었고 나중에는 아예 자기가 직접 탄자니아군, 우간다 반군과 함께 우간다 아민 정부군과 싸우기도 했다. 여전히 독립국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유럽 강대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던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독립 운동을 지원해 주기도 했으며 1960년대 말 나이지리아 내전에서 나이지리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시도하려던 비아프라도 독립국가로 인정한 바 있었다.

3. 평가

3.1. 긍정적

문맹률을 줄이고 민족, 지역 통합을 추구하여 탄자니아를 아프리카에서 내전과 쿠데타가 없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로 만들었기 때문에 탄자니아에서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은 탄자니아 보츠와나, 가나 등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면 지금도 민주주의 등 정치 권력의 견제가 제대로 안 이뤄지거나 국가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등 독재와 쿠데타, 내전, 민족 갈등으로 국정이 불안정한 나라들이 상당하다.

탄자니아 인구의 약 60%가 기독교인이고 약 35%가 무슬림인데 침팬지 연구로 유명한 제인 구달 박사의 책에서도 언급하듯 1960–70년대 탄자니아에서 연구하던 그녀는 국경 근처를 봐도 이웃 나라들에서 화염이 올라오는 걸 자주 본 반면 탄자니아에선 그런 일을 한번도 겪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자 탄자니아 독립 이후에도 남아서 귀화하여 선거로 국회의원이 된 유일한 백인 데보 브라이슨도 이 나라만큼 아프리카 주변국에서 평화로운 나란 없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참고로 브라이슨이 지지하던 사람이 그였다. 덕분에 그에게 도움도 많이 받아서 정치 관련해선 말을 삼가던 제인 구달 박사도 탄자니아의 안정 및 침팬지 연구 보호에 그의 공이 있다고 칭찬했다.

무상 의무교육제도를 확고하게 정착하게 만들어서 독립 직전에 80%를 넘나들던 문맹률을 20%대로 크게 낮추는 데 공헌한 점도 인정받는다. 다만 이후 정권들이 교육 정책에 있어 영 성과가 좋지 않다 보니 니에레레 정부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는 점은 큰 흠이다.

자신의 정책이 실패했음이 드러나자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유혈사태 없이 사임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많은 파탄국가들의 지도자가 이걸 거부했기 때문에 내전과 쿠데타로 얼룩졌음을 생각해 볼 때 위대한 결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3.2. 부정적

전술한 긍정적 평가와는 반대로 서방권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도 많은데 이유는 민족 통합 과정에서 지방민들에게 스와힐리어 사용을 강제로 권하는 등 문화 탄압적 요소가 많은 정책을 시행하고 나아가 탄자니아 내 외국 자본 독점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는 반론하는 쪽이 있다. 전자는 식민지배국의 언어를 쓰는 것보다 낫다는 반응도 많으며 후자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집단농장(우자마촌)을 만들면서 대대적으로 장려했는데 이는 운영 미숙으로 대차게 말아먹어서 결국 농업생산량은 인구증가율에 못미치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는 데 그쳤고 주력했던 산업화도 석유 파동과 겹쳐서 별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 집권 후반기인 1974년부터 1984년까지 경제성장률은 2.6%로 인구증가율 3.4%에도 못 미치는 침체를 보였으며 이 때문에 1990년대 초반에 탄자니아는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미만의 극빈국으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시장경제 중심 체제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퇴임 직전 제2대 대통령이 된 알리 하산 음위니에게 다른 건 몰라도 경제 정책만은 잘 이끌어 달라고 조언했을 정도였다. 사실 집단농장 자체가 인프라가 어느정도 깔릴 것을 전제해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인데 이러한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냥 밀어붙이기나 하니 평이 나쁠 수 밖에 없기는 했다. 그나마 악정까지는 아니라서 식량은 꼬박꼬박 보급하고 의료혜택도 받을 수 있게 하면서 애들 교육은 확실히 시키는 식으로 지지기반을 꾸역꾸역 유지시킬 수는 있었다.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1년이란 그의 집권 기간도 비판의 대상으로[4], 독재자라고 불러도 큰 부족함이 없었다. 1965년 선거에서 그는 96% 득표로 당선되었고 의회도 여당이 전석을 차지했으며 그가 물러난 뒤에도 집권 여당인 탄자니아 혁명당(CCM)의 일당독재 체제는 1995년 선거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일당제가 폐지되고 다당제로 바뀐 후에도 탄자니아는 사실상 일당우위제가 유지되고 있는데 그나마 2015년 총선, 대선 때 개헌선이 무너지긴 했지만 아직은 1당으로 강력한 지지기반을 유지하고 있다.

이 외에도 비판이 있는 편이지만 주변국 지도자들이 더 막장이다 보니 그가 그래도 상대적으로는 고평가받긴 한다. 경제 문제만 빼면 탄자니아를 안정화시켰고 언론이나 정적탄압도 정도가 덜했기 때문에 일부 참작해 주는 것도 있다.[5]

4. 기타

파일:attachment/탄자니아 실링/tsh202.jpg

탄자니아 1000실링 지폐에 그의 모습이 들어가 있으며 모든 지폐의 워터마크로도 새겨져 있다.

자국에서의 인지도는 굉장해서 오늘날에도 그의 이름을 딴 탄자니아의 국제공항과 문화 센터가 존재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인 기니는 탄자니아와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이라서 코나크리에는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학도 존재할 정도다.

문인이기도 해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극들을 스와힐리어로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의 모드 Wind Blow에서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에서부터 (플레이하기에 따라) 마다가스카르, 잠비아, 로디지아( 짐바브웨), 모잠비크까지 아우르는 동아프리카공화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아프리카 국경선 워낙 이상하기 때문에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6]

5. 관련 문서

6. 관련 기사



[1] 스와힐리어로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2] '비를 내리는 영혼'이란 의미로, 그가 태어났을 때 심한 폭우가 내려 붙어졌다. (저작권자 Articles and Transcripts, " Nyerere and the Catholic Church", juliusnyerere.org) [3] Tanganyika African National Union, TANU. [4] 물론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정당한 선거를 통해 20년 가까이 집권하는 케이스도 드물지만 있긴 하다. [5] 한국으로 치면 박정희라고 봐도 된다. 다만 오히려 아프리카의 박정희에 가까운 이는 르완다의 폴 카가메다. [6] 국경선이 워낙 이상하니 누군가는 불만을 가지고 조정하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정을 하든 못하든 어마어마하게 피를 흘려야 하니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자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아프리카는 제국주의 시절에 열강들의 편의로 그어진 국경선 때문에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충돌이 일어나는 지역이 부지기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