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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7:32:39

조제 보싱와

조세 보싱와에서 넘어옴
포르투갈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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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조제 보싱와
José Bosingwa
[1]
본명 조제 보징와 다실바[2]
José Bosingwa da Silva
출생 1982년 8월 24일 ([age(1982-08-24)]세)
자이르 음반다카
(現 콩고민주공화국 음반다카)
국적
[[포르투갈|]][[틀:국기|]][[틀:국기|]]
|
[[콩고민주공화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3cm / 체중 75kg
직업 축구 선수 ( 라이트백 /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SC 프레아문데 (2000~2001)
보아비스타 FC (2001~2003)
FC 포르투 (2003~2008)
첼시 FC (2008~2012)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2012~2013)
트라브존스포르 (2013~2016)
국가대표 27경기 ( 포르투갈 / 2007~2015)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여담

[clearfix]

1. 개요

포르투갈의 前 축구선수.

2. 클럽 경력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나라인 포르투갈로 건너와 보아비스타 FC 유스 출신으로서 축구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는 측면 미드필더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오가며 활약했다. 그리고 2000년에는 포르투갈 2부 팀인 SC 프레아문데로 임대가 활약하다가 2001년부터 친정팀인 보아비스타 FC에서 뛰었다.

2002/03시즌부터 주전 자리를 확보한 보싱와는 좋은 활약을 보여 2003년, 주제 무리뉴 감독의 눈에 들어 FC 포르투로 이적했다. 허나 그 시즌에는 파울루 페레이라에게 밀리며 자주 기용되지는 못했으며, 주제 무리뉴 히카르두 카르발류, 파울루 페레이라 등을 데리고 첼시 FC로 건너가면서부터 주전으로 자리잡아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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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자신 역시 2008년 첼시 FC로 건너갔다. 첫 시즌 초반에는 대활약을 펼치며 첼시 팬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축구팬들에게 오른쪽의 지배자급으로 찬양을 받았다. 하지만 루이스 스콜라리 감독의 전술이 모두 노출되고 공략법이 나오자 첼시는 몇시즌간 보이지 않았던 극심한 부진을 겪게되었고 결국 팀에서 돌파와 스피드가 모두 받혀주는 선수는 살로몬 칼루와 보싱와가 전부였고 칼루는 당시에도 후반 조커로 기용되는 선수였다. 스콜라리의 답없는 전술은 오히려 첼시의 강점이었던 팀워크마저 잃어버리게 만들었고 결국 공격상황에서 보싱와에 대한 의존도가 쏠리는 악영향을 초래했다. 상대팀은 상대팀대로 보싱와만 잘 막으면 공격흐름이 끊기게 되었기 때문에 이걸 노리고 첼시전을 준비하는 팀도 많았고, 보싱와도 시즌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서서히 부진하기 시작하였다. 스콜라리가 경질되고 거스 히딩크가 임시 감독직책을 맡았을때는 오히려 센터백 백업으로 영입되었던 브라니슬라브 이바노비치에게 주전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이바노비치가 정상급 라이트백까지 성장한 시기는 아니었기때문에 완전히 밀렸다고 보기는 어려웠고 주로 더 공격적인 전술을 사용할때는 보싱와가 기용되었다. 챔피언스리그 바르셀로나와의 준결승 경기에서는 리오넬 메시를 완벽봉쇄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9/10시즌에는 잘 뛰다가 갑작스런 장기 부상을 당해 무려 1년 가까이 출전하지 못하고 2010/11시즌 중반 즈음에야 겨우 출전하게 되었다. 다시 돌아온 보싱와는 이전과 같지 않은, 폼이 급격하게 떨어진 선수였으며, 당시 부진하고 있던 첼시에 맞게 본인 역시 OME급의 활약을 선보이며 자책골까지 기록할 정도였다.

거의 방출이 확정되다시피 할 정도로 부진해 시즌 종료 후 이적설이 나올 정도였는데,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감독이 부임하고, 쩌리 생활을 하던 유리 지르코프가 떠난 후에도 이적하지 않고 오히려 주전 자리를 꿰차며 시즌을 맞이했다. 빌라스 보아스의 전술은 스콜라리와 약간 비슷한 측면이 있었는데 보싱와가 그런 전술에 잘 들어맞았기에 이바노비치보다 더 선호되기도 했다.

그리고 2011/12시즌, 첫 세 경기에서 생각보다 훨씬 준수한 활약을 보이며 골까지 넣고 어시스트도 하나 기록했다. 얼리 크로스 남발이 좀 심하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움직임이나 드리블은 확실히 전성기 급을 보여줘 팬들은 기대를 갖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후로는 공격, 수비 모두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공격적인 풀백 스타일이었지만 드리블, 크로스 모두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첼시팬들에게 까였다. 그리고 겨울 이적 시장에서 방출 명단에 들었다는 기사가 나왔으나 정작 겨울 이적 시장이 끝나도 계속 팀에 남아있었다. 당연히 팬들은 분노. 그리고 재계약을 할 거라는 뉴스까지 나오면서 팬들은 2차 분노했다. 게다가 브라니슬라프 이바노비치의 부상공백이 생겼는데 라이트백은 딱히 파울루 페레이라밖에 없어서 은퇴를 번복하고 팀에 돌아온 리저브팀 오른쪽 풀백 샘 허친슨이나 다비드 루이스를 쓰자는 의견도 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2012/13시즌을 앞두고 첼시에서 방출되었으나 QPR이 공짜로 데려갔다. 그리고 레드냅 감독과 싸우기도 하면서 QPR 강등 멤버가 됐다. 강등이 확정된 경기에서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며 욕만 더 먹었다. 결국에는 방출되고 2013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트라브존스포르로 이적하였다.

3. 국가대표 경력

2007년 5월 UEFA 유로 2008 지역예선 벨기에전에 출전하면서 포르투갈 국가대표에 첫 데뷔했다. 이후 UEFA 유로 2008에 출전하여 기존의 주전이었던 미구엘을 제치고 대회 4경기 전부 주전으로 출장한다. 그러나 2010년 월드컵에는 장기 부상으로 인해 출전이 좌절되었다.

2011년 11월 UEFA 유로 2012 지역 예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홈 & 어웨이 경기에 명단 제외되었고, 보싱와는 이를 결정한 파울루 벤투 포르투갈 국가대표팀 감독을 맹비난했다. 벤투 감독은 보싱와의 제외 이유를 두고 그의 태도와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다며 설명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보싱와는 감독이 바뀌지 않는 한 내가 국가대표에 돌아갈 일은 없다고 말하며 포르투갈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3년 후, 2014년 11월 UEFA 유로 2016 지역예선 아르메니아전과 아르헨티나와의 친선 경기에 페르난두 산투스 감독이 보싱와를 재발탁하면서 국가대표에 복귀했다. 그러나 많은 나이로 인한 노쇠화와 젊은 세드릭 비에이리냐에게 밀려 UEFA 유로 2016 최종 명단에는 탈락했다. 나갔으면 또 호날두랑 페페의 트로피를 뺐었을테니 다행이다.

4. 플레이 스타일

활발한 오버래핑과 스피드, 그리고 간간히 찔러주는 패스와 중거리 슛을 가진 선수이다. 일대일 마크 능력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지만 강한 압박 수비를 통해 상대의 패스길을 차단하는 것을 통해 수비력을 메꾸는 선수. 전성기 시절에는 풀백과 윙어도 겸하며 적극적인 공격 참여와 크로스로 상대를 위협하는데에 능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예전만한 움직임과 스피드 및 공격력은 떨어졌지만 수비력이 상승하면서 2012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는 FC 바이에른 뮌헨의 맹공을 협력 수비로 막아내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여담

6.1. 빅 이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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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테리 프랭크 램파드를 가리고 주인공을 차지한 보싱와
11/12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경기가 끝난 후, 보싱와가 전세계에서 욕을 먹고 엄청난 후폭풍을 남긴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트로피 강탈 사건.

선수들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중요한 순간, 당시 팀의 에이스이자 고참이었던 디디에 드록바는 첼시가 중하위권이던 시절부터 쭉 팀을 지켜온 주장 존 테리와 부주장 램파드가 정중앙에서 빅 이어를 동시에 들어올릴 수 있도록 선수들에게 길을 트라고 지시하였다.[3] 팬들도 꿈에 그리던 이 광경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흥분해 있었다.

그런데... 드록바가 계속해서 비키라고 말하는데도 이를 끝까지 무시하고 앞에서 길을 막고있던 보싱와[4]는 선수들의 환호 속에 테리와 램파드가 트로피를 들려는 순간, 앞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트로피를 낚아채 자신이 들어올려버렸다. 당황한 동료들은 테리와 램파드가 앞으로 나가서 들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시도했는데, 이에 보싱와는 한 술 더 떠서 트로피를 아예 빼앗아버렸다.[5] 그렇게 보싱와는 첼시 역사에 남을 사진에 주인공 포지션으로 위치하게 되었고 영원한 첼전드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누구보다 피해자는 첼시 팬들. 로만 아브라모비치 부임 이후 강팀으로 올라선 뒤 마침내 챔스를 제패하면서 진정한 명문으로서의 역사를 시작하는 순간이었고, 팀의 리빙 레전드인 테리와 램파드가 빅이어를 들어올리는 상상만 해왔던 장면을 드디어 라이브로 지켜보며 감격할 준비를 하고있었는데 보싱와가 제대로 뒷통수를 가격하면서 흥이 완전히 깨져버린 것이다.

이게 당시 첼시 팬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고, 어이없고, 열불나서 죽을 것 같고,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날때마다 짜증나는 상황이냐면...당시 첼시는 0708 챔스결승 승부차기에서 팀의 상징인 존 테리가 미끄덩 하며 실축을 하며 창단 최초의 빅 이어를 눈앞에서 놓치는 뼈아픈 경험을 했었다. 그후로 수년간 4강[6]-16강[7]-8강을 맴돌며 존 테리는 합성짤과 움짤로 타 팀팬에게 비웃음 당하는데 뭐라 대꾸할 말도 없고 모두가 '그때 우승 했었어야 했다'는 한이 맺혀있는 상황에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1112시즌에 꾸역꾸역 토너먼트를 통과하더니 역사상 최강팀이라는 바르셀로나를 꺾고, 다시 결승에서 분데스의 거인 뮌헨의 홈이라는 절대적 열세의 상황에서 기적같은 첫 빅이어를 차지하고 마침내 존 테리와 램파드, 드록바 그리고 체흐가 기나긴 여정 끝에 아름다운 해피엔딩을 차지한 순간이었는데 보싱와가 저 짓거리를 한 것이다. 이것을 당신이 응원하는 팀으로 바꿔서 생각해보라.

이 사건으로 인해 보싱와는 첼시 팬들 사이에서 완벽히 비호감으로 낙인이 찍혔고 지금도 잊을만 하면 소환되어 까이고 있다.[8][9][10]

심지어 보싱와는 저것 말고도 이미 여러번 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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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 트로피 세레머니 때마다 항상 센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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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포르투 시절에도 센터에서 설쳐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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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20-21 시즌 챔스 결승에서 첼시가 우승하며 주장인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가 빅 이어를 맛깔나게 들어올렸다. 마침내 첼시 팬들은 더 이상 챔스 우승 사진으로 센터싱와 사진을 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11] 참고로 보싱와도 이 장면을 현장에서 직관했다. 이런 사고를 친 것이 문제여서 그렇지, 첼시에 대한 애정은 진짜였던 모양이다. 마침 경기 장소가 모국 포르투갈인데다 친정팀 홈구장이기도 했다.

이 결승에 앞서 보싱와는 인터뷰에서 말하길, "트로피는 존 테리 프랭크 램파드가 들었고 난 그 앞에서 그저 환호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트로피를 드는 것 처럼 보였다." 라고 거짓말이나 다름없는 해명을 했다.

최근에는 트로피를 세레머니를 하는 곳(포디움)과 멀리 떨어뜨려 놓고, 주장에게 트로피를 전달하여, 주장이 트로피를 들고 세레머니를 하는 곳으로 걸어가서 트로피를 들어올리게끔 하는 방식이 점차 자리잡아 가고 있는데, 이것이 보싱와가 일으킨 트로피 사건 때문에 바뀐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12]


[1] 영어 해설에서는 '보싱과'라고 발음한다. [2] 로망스어 게르만어권의 인명이나 지명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 [3] FA컵 우승 세레모니 상황과 같다. 그런데 보싱와는 이 사진에서도 트로피를 낚아채려고 벼르고 있다. 말루다가 앞으로 뛰쳐나오려는 보싱와를 막았기에 세레모니는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 [4] 이바노비치-존테리의 결장으로 뛰게 되었다. [5] 시상식 영상을 풀로 보면 시상대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로베르토 디 마테오 감독 다음으로 입장해 계속해서 트로피 바로 옆에서 서성거리는데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닌가 싶다. [6] 이것마저 그 유명한 오브레보의 오심 경기가 나왔을 때였으며 첼시만 오심으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은 아니었지만 첼시가 충분히 올라가서 맨유와의 리벤지 매치도 가능할 만 했었다. [7] 이 시즌은 안첼로티가 리그 우승컵과 FA컵 우승을 하며 더블을 달성했지만 당시 시즌 트레블을 기록한 무리뉴의 인터 밀란을 만나 일찌감치 탈락한다. [8] 11-12시즌에 보여준 폼을 생각하면 방출은 거의 예정되어있는 수순이었다. 부상 복귀 후 폼이 너무나도 떨어져 공격과 수비 모두 불안했고 주전 자리도 이바노비치에게 많이 넘어간 상황이었다. 괜히 첼시 팬들이 챔스 결승전에서 보싱와가 보여준 준수한 수비력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니다. [9] 2021년 첼시가 다시 한번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했을때, 시상식을 중계하던 첼시팬 장지현 해설위원이 트로피를 뺏어가는 선수가 없다면 주장인 아스필리쿠에타가 트로피를 들어올릴 거라며 보싱와를 돌려서 까기도 했다. 다행히 이때는 아래에 있는 사진처럼 아스필리쿠에타가 멋지게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10] 여담이지만 농구에서도 이런 비슷한 사건이 일어날 뻔한 적이 있다. 1996년 당시 마이클 조던이 이끌던 시카고 불스는 네번째 우승을 차지했는데, 야구에서 복귀한 조던이 호사가들의 비판을 제치고 다시 정상에 오른 점, 72승이란 당시 역대 1위 기록을 남긴 팀이 화룡점정을 찍은 점, 무엇보다 강도에게 아버지가 살해당해 충격받아 은퇴한 조던이 하필이면 아버지의 날에 우승해 감정이 폭발한 그가 우승이 결정되는 순간 농구공을 붙잡고 코트에 쓰러져 오열한다. 당연히 언론도 그 극적인 순간을 잡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근데 조던의 파트너인 스카티 피펜이나 감독 필 잭슨도 아니고 눈치없는 랜디 브라운이란 후보가드가 조던과 같이 공을 잡고 그를 안고 같이 코트 바닥에 눕는 바람에 정작 세계가 보려고 했던 조던은 완전히 가려지고 왠 듣보잡 유니폼만 보이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한 팀 관계자가 브라운의 등을 계속 치며 비키라고 한 덕에 늦게나마 그가 정신을 차리고 비키고, 조던이 코트 위에서 엎드려 오열하는 그 유명한 사진이 찍히게 됐다는 점에서 보싱와 사건과 다르게 결말은 해피엔딩이 됐다는 점이 다행. 게다가 랜디 브라운은 비키라고 하자 정신을 차리고 비켜주었다는 점에서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 못해서 팀의 레전드를 끌어안은 거지만 보싱와는 상술 되었듯이 말 그대로 완벽한 계획범죄이자 전과범이었기에 랜디 브라운과 비교해도 훨씬 더 악질이다. [11] 이번에는 부주장인 조르지뉴가 센터에 있지 않았는데, 당사자 본인은 우승의 기쁨에 취했던 나머지 그냥 신경도 안 쓴 모양이다. 위 사진에서 보면 아스필리쿠에타 다음으로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있는 선수가 훗날 첼시의 라이벌 팀으로 이적하게 되는 카이 하베르츠이긴 한데,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결승골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첼시 팬 입장에서는 거액의 이적료도 구단에 안겨주고 좋게좋게 헤어졌으니 그냥 뭐 그러려니. 사실 하베르츠의 경우에는 하베르츠의 고주급을 정리하고 싶어했던 첼시와 당시 고주급을 떠안아서라도 미드필더 뎁스 보강을 원했던 아스날의 니즈가 모두 맞아서 성사된 이적이기 때문에 이후에 열린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의 세레모니 사건 당시 말고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는 편이다. [12] 다만 이렇게 바뀐 건 5년 뒤인 2017년 결승전부터이다. 이때는 그나마 트로피가 포디움 바로 옆에 있었고, 2020년 결승전부터 본격적으로 멀찍이 떨어뜨려 놓기 시작했다. 실제로 보면 2017, 18년에 트로피를 들어올린 세르히오 라모스와 2019년에 들어올린 조던 헨더슨은 트로피를 들고 몇 발짝 안 뗐지만, 2020년에 들어올린 마누엘 노이어부터는 몇 미터를 걸어가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