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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20:49:49

치셰위안

제섭원에서 넘어옴
파일:치셰위안.png
중화민국 소환강순열사 겸 강소독군
정체 齊燮元
간체 齐燮元
한국식 독음 제섭원
영문 Qi Xieyuan
요산(耀珊)
무만(抚万)
출생 1879년 4월 28일
청나라 직예성 톈진시
사망 1946년 12월 18일 (향년 67세)
중화민국 난징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임시정부[1]
파일:왕징웨이 정권 국기.svg 왕징웨이 정권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흥기와 몰락2.3. 매국과 죽음
3. 참고문헌4.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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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직계군벌의 일원으로 강소독군을 지내면서 장강 하구를 지배했으나 제노전쟁으로 몰락하고 한간의 길을 택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79년 직예성 톈진에서 태어났다. 과거 시험을 보아 수재가 되었으며 북양수사학당 포병과를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6사단장, 강소독군 리춘의 참모장, 강녕진수사를 역임했고 1920년 10월 강소독군 리춘이 갑자기 자살한 이후 장쭤린은 후임 강소독군으로 전 장강순열사 장쉰을 추천하였으나 직계군벌은 장쉰은 여론이 좋지 않다고 반대하며 12월에 치셰위안을 강소독군에 임명했다. 1922년 1월 펑위샹, 진광원, 톈중위와 함께 량스이 내각을 이완용에 빗댄 우페이푸의 통전에 지지하는 통전을 보냈다.

결국 직계와 봉계의 갈등이 심해져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발발했는데 직계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통전을 보내 안휘파가 옹립한 총통 쉬스창에게 하야를 강요하였다. 1923년 5월 임성 사건이 일어났을 때 교섭원을 파견하여 사건의 처리에 참여했으며 그해 10월, 직계의 수령 차오쿤이 대총통에 당선되기 위해 회선 사건을 일으켰을 때 선거자금 50만원을 지원했고 1923년 소환강 순열사에 임명되었다.

2.2. 흥기와 몰락

파일:강절전쟁 시절의 치셰위안.jpg
강절전쟁때의 치셰위안

1924년 9월, 절강독군 루융샹이 지배하던 상하이를 탐내어 4성 연군 총사령관에 취임, 강절전쟁을 일으켜 절강독군 루융샹을 격파하고 상하이와 절강성을 점령한 이후 미국에 상하이 무전전신국 설립을 약속하며 미국의 지지를 받고자 했다. 허나 강절전쟁으로 인하여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났고 2차 직봉전쟁에서 직계군벌은 몰락했다. 이후 10개성과 연명하여 펑위샹이 옹립한 황부 섭정내각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겠다고 통전했으나 11월 15일에 임시 집정으로 추대된 돤치루이 정권에 대해서는 11월 19일, 쑨촨팡, 소요남, 유진화, 두시구이, 주음인, 채성훈, 왕보, 이병지과 연명으로 지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돤치루이 정권은 치셰위안 토벌을 결정, 1924년 12월 11일 치셰위안을 강소독군에서 면직시키고 루융샹을 소환선무사에 임명하여 치셰위안을 토벌하게 했다. 이후 장갑열차를 앞세운 장쭝창의 봉군 10만 대군이 남하하자 패배하고 일본 제국으로 망명했다. 이때 우군이었던 쑨촨팡은 절강독판 자리를 보장받고 치셰위안의 몰락을 방관했다.

1925년 10월, 손봉전쟁 이후 장강에서 봉천군벌이 축출되고 쑨촨팡이 오성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직계군벌의 세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우페이푸의 막하에 들어가 토적연합군 부총사령 겸 제4군 총사령에 임명되어 직봉풍전쟁에 참가했지만 1927년 국민당의 1차 북벌 도중 하남성으로 봉군이 국민당 토벌을 구실로 남하해오자 장쭤린에게 투항했다. 1930년 3월 21일, 옌시산 펑위샹이 장제스 토벌을 통전하여 중원대전이 일어나자 우페이푸, 쑨촨팡 등과 함께 호응하여 재기를 도모했지만 실패하고 톈진의 영국 조계지로 도주했다. 이후 일본의 화북분리공작에 호응하여 친일운동을 전개했다.

2.3. 매국과 죽음

파일:1941년제섭원.jpg
1941년의 치셰위안

1935년 기동사변이 일어난 이후 성립된 기찰정무위원회 정무위원에 임명되었고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자 7월 14일 쑹저위안의 대리로 장즈중, 진각생과 함께 일본군 화북주둔군 참모장 하시모토와 회담하여 29군의 즉각적 철병, 항일분자 단속, 해당 대대장 처벌에 동의하였고, 베이핑 시장 친더춘이 일본군에게 직접 사과했으나 무타구치 렌야를 비롯한 일본군의 과격파 장교들이 난동을 부리면서 사소한 충돌이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치셰위안은 초기에는 쑹저위안의 부탁을 받고 루거우차오 사건의 협상을 맡기 위해 일본군과의 교섭에 들어갔으나 베이핑-톈진 전투로 베이핑이 함락된 이후 일본군에 투항하여 왕커민, 왕이탕(王揖唐), 왕음태, 주심, 탕이화 등과 함께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 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임시정부 상무위원, 의정위원회 위원, 치안총장을 지냈다. 왕커민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화북 치안을 이유로 화북치안군이 증강되자 이를 기반으로 왕이탕과 힘을 합쳐 왕커민 추방을 기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사실 치셰위안은 왕이탕과도 크게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파일:중화민국임시정부수립.jpg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선포를 알리는 괴뢰인사들, 왼쪽에서부터 가오릉웨이, 치셰위안, 왕커민, 강조종, 동강, 탕이화, 왕이탕

왕징웨이 공작으로 왕징웨이가 일본에 포섭되어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된 이후 화북 정무위원회 치안총서독판, 화북수정군총사령관 등의 요직을 역임했으나 중일전쟁 종결 이후 국민혁명군에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인루겅, 왕음태 등 화북의 주요 한간들과 함께 1946년 5월, 난징으로 압송되었다. 1946년 12월 18일, 난징 우화대 형장에서 반역죄로 총살당했다.
파일:치셰위안이 처형당하기 직전.jpg
처형당하기 일보 직전의 치셰위안.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



[1] 일본 제국의 괴뢰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