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前) 성균관 수석부관장
<연보와 생애사>
1.연보
1933년,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에서 先考 정갑악과 先妣 박봉순의 長男으로 출생
1950년, 하동중학교 입학,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1953년, 하동중학교 졸업, 7월17일 휴전협정. 사회적으로 가장 혼란스럽고 빈곤했던 시기 생존을 위해 노력을 경주한 청년시기를 보냄.
1962년, 하동읍내 주조장 전무로 기업인의 길에 투신. 경제기획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 12월 국민투표에 의해 헌법이 개정되어 이듬해 제3공화국 출범. 군사정권의 개발독재라는 정치사회적 배경 하에서 기업인의 길을 걸어나가며 生業을 영위함
1970년에서 1973년, 玉泉양조주식회사 상무이사 역임
1973년 10월, 묵계주조장 인수 및 대표 취임
1974년 04월, 청암합동주조장 설립 및 대표 취임
1975년 03월, 합명회사 진교주조 지분 인수 및 대표사원 취임
1980년에서 1984년, 남해 창선합동주조장 지분 인수 및 대표 취임
1970년, 河東鄕校 출입을 시작. 儒家 經典과 先賢 文集의 강독, 詩賦와 書藝를 익히는 등 선비로서의 교양을 쌓으며 儒林의 일원으로 성장
1981년 11월, 成均館 儒道會 총본부 하동지부장에 임명되며 儒林 지도자의 길에 들어섬. 국제라이온스협회 하동클럽의 임원으로 사회봉사 활동을 시작
1982년 07월, 成均館 儒道會 총본부 경남본부 부위원장에 임명. 이 해로부터 본격적으로 하동향교의 보수를 계획하고 重建에 착수함
1982년 08월, 성균관으로부터 성균관 典學으로 임명되며 성균관 주요 임원으로서 활동을 시작.
1985년 08월, 성균관으로부터 하동향교 충효교실 강사로 위촉받음
1986년 11월, 成均館 儒道會 총본부 하동지부장에 再任
1988년 11월, 하동향교 典校로 선출되며 하동향교의 重建의 지속을 위한 사재출연과 국비 확보 등에 매진
1991년 02월,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지도자과정 수료
1991년 10월, 하동향교 典校로 再任. 재임기간 중 하동향교의 중건을 완수
1995년 03월, 하동향교 중건을 완수한 功을 향중 유림으로부터 인정받아 1415년(조선 태종15년) 하동향교 창건 이후 최초로 향교 중창 유공 현판이 하동향교 명륜당에 게시됨
1995년 12월, 성균관으로부터 성균관 典儀로 임명
1996년 10월, 유림과 유교문화 활성화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성균관 유교대상’을 수여받음
1998년 03월, 국제라이온스협회 총재로부터 그간의 봉사활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무궁화금장’을 수여받음
1999년 03월, 성균관으로부터 성균관 典儀로 재임명
1999년 01월, 국제라이온스협회 355-L지구 3지역위원장(지구부총재)에 선임
2001년 03월, 하동군으로부터 향토문화교육원 원장에 임명됨
2002년 09월, 유도회 총본부 상임위원으로 선출됨
2007년 11월, 하동향교의 정비 및 향토문화사업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하동향교 典校의 직책을 다시 맡게 됨
2010년 11월, 하동향교 典校로 재선출, 임기 중 하동향교의 정비와 지역연계 문화활동을 위한 여러 사업들을 계획하고 추진
2011년 08월, 유교TV방송 개국준비위원으로 위촉됨
2014년 03월, 성균관 부관장으로 보임
2014년 10월, 성균관 수석부관장으로 보임
2014년 12월01일, 서정기 성균관장의 유고로 인하여 성균관장 직무대행으로 보임
2015년 08월31일, 성균관장 직무대행으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고 차기 성균관장에게 업무를 인계
2015년 11월, 성균관 45년 근속공로장을 수여받음
2.생애사 : <기업인에서 유학자로, 하동향교의 중건과 성균관장에 이르기까지>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스럽고 생존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전쟁기와 전란의 회복기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하윤선생은 5.16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개헌을 통해 제3공화국의 출범을 확정짓던 1962년, 하동읍에 위치하였던 중소기업인 하동주조장의 전무에 선임되어 기업경영에 참여하면서 기업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하동주조장의 경영을 맡아 사업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회사의 규모 또한 차츰 커졌다. 와우아파트가 붕괴되고 오적필화사건이 벌어져 사회적으로 뒤숭숭하던 1970년, 당시 하동군 전체 세수의 70%를 담당할 정도로 규모있는 기업이었던 옥천양조주식회사의 상무를 맡아 경영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기업인으로서의 활동범위도 부산과 경상도, 전라도 지역까지 확대되며 각계 각층의 인사들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1960년대부터 지역사회에서 기업경영을 활발히 펼치던 하윤선생은 필연적으로 이러저러한 지역의 각종 단체에 가입을 권유받게 되었다. 사업이 안정기에 들어선 이후, 스스로도 바쁜 삶 속에서 의미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보고자 하는 생각이 차츰 들기 시작하였다.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에서 사회적 활동을 겸한 봉사활동을 추진해나가기 위해 국제라이온스협회 하동클럽에 가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향교를 출입하시던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인해 하동향교에 儒林의 일원으로 출입을 시작하면서 儒學者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향교를 출입하는 유림으로서의 교양을 쌓기 위해 한편으로는 四書三經을 중심으로 하는 經學의 공부에 몰두하게 되고, 漢文의 교양을 쌓기 위한 漢詩 학습에도 몰두하였다. 당시 지역의 저명한 서예가였던 유천 진상복선생의 지도 하에 선비로서의 필수교양인 書道에도 입문하게 되면서 낮에는 기업경영에, 밤에는 유학자로서의 修養을 쌓는 생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렇게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1970년대를 기업인이자 유학자로서의 생활에 집중하면서 보냈다.
하윤선생이 일평생을 출입하며 유림의 일원으로 뜻을 세우고 중건과 교화에 헌신한 하동향교는 朝鮮朝 초기였던 1415년(태종 15), 賢儒의 위패를 봉안·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지금의 고전면 고하리에 창건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에 왜적이 침입하여 문묘와 향교, 문적, 기물 등이 모두 소실되었는데, 이후 조선조 시기 몇 차례의 중건과 이전이 이루어진 바가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20년, 당시 군수였던 유상범의 지원으로 훼손된 곳에 대한 중수가 이루어지고, 문묘 향사와 건물 관리를 위해 都有司와 掌議 등을 두었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제대로된 보수는 장기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하동향교지편찬위원회 편, 河東鄕校誌, 하동향교, 경상남도 하동, 2003, pp.243-245.
1960년대부터 지역사회에서 기업경영을 활발히 펼치던 하윤선생은 필연적으로 이러저러한 지역의 각종 단체에 가입을 권유받게 되었다. 사업이 안정기에 들어선 이후, 스스로도 바쁜 삶 속에서 의미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보고자 하는 생각이 차츰 들기 시작하였다.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에서 사회적 활동을 겸한 봉사활동을 추진해나가기 위해 국제라이온스협회 하동클럽에 가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향교를 출입하시던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인해 하동향교에 儒林의 일원으로 출입을 시작하면서 儒學者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향교를 출입하는 유림으로서의 교양을 쌓기 위해 한편으로는 四書三經을 중심으로 하는 經學의 공부에 몰두하게 되고, 漢文의 교양을 쌓기 위한 漢詩 학습에도 몰두하였다. 당시 지역의 저명한 서예가였던 유천 진상복선생의 지도 하에 선비로서의 필수교양인 書道에도 입문하게 되면서 낮에는 기업경영에, 밤에는 유학자로서의 修養을 쌓는 생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렇게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1970년대를 기업인이자 유학자로서의 생활에 집중하면서 보냈다.
하윤선생이 일평생을 출입하며 유림의 일원으로 뜻을 세우고 중건과 교화에 헌신한 하동향교는 朝鮮朝 초기였던 1415년(태종 15), 賢儒의 위패를 봉안·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지금의 고전면 고하리에 창건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에 왜적이 침입하여 문묘와 향교, 문적, 기물 등이 모두 소실되었는데, 이후 조선조 시기 몇 차례의 중건과 이전이 이루어진 바가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20년, 당시 군수였던 유상범의 지원으로 훼손된 곳에 대한 중수가 이루어지고, 문묘 향사와 건물 관리를 위해 都有司와 掌議 등을 두었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제대로된 보수는 장기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하동향교지편찬위원회 편, 河東鄕校誌, 하동향교, 경상남도 하동, 2003, pp.243-245.
하동향교를 출입한지 10여년이 흘러 1981년 11월, 하윤선생은 成均館 儒道會 총본부 하동지부장에 임명됨으로서 儒林 지도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1982년 07월에는 成均館 儒道會 총본부 경남본부 부위원장에 임명되었고, 이 해로부터 본격적으로 하동향교의 보수를 계획하고 重建에 착수하였다. 말 그대로 하동향교의 대중건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1982년, 무너진지 80년이 넘었던 西齋를 복원하는 사업으로부터 시작하여 1984년에는 內三門을 해체하고 신축함과 동시에 풍화루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의 兵火로 소실되었던 養士齋의 신축 복원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관리사를 겸하여 활용할 목적으로 掌議齋를 신축하였다.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루어내었던 1988년에는 향교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인 明倫堂과 大成殿을 해체․복원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기둥과 椽木을 위시하여 마루바닥과 지붕기와를 전면적으로 중수하는 대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2년 뒤에는 東齋를 완전 해체한 후 기반공사부터 다시 신축하는 대대적인 보수사업을 벌였으며, 곧이어 東西廡를 중수를 이끌었다. 다시 2년의 시간이 흐르는 기간에는 風化樓의 난간과 마루바닥 공사 및 椽木의 개수와 번와 공사를 진행하고, 경내 주위의 담장을 복원하는 공정을 마지막으로 15여 년에 걸친 대역사를 마무리하며 현재 하동향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役事에는 적지않은 자금이 필요했다. 하윤선생은 하동향교의 중건을 위한 재원을 마련함에 있어 사재를 출연하는 것은 물론이요, 지역의 국회의원과 도지사, 군수 등을 만나 국비와 지방비 지원을 요청하는 일로 동분서주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는 지금은 故人이 된 全相秀 선생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하윤선생보다 연배는 높았지만, 나이를 뛰어넘어 평생의 교류를 이어나갔던 知友이자 동지로 하윤선생의 前任 儒道會長과 하동향교 典校를 역임하면서 머리를 맞대 계획을 수립하고, 함께 지역의 국회의원, 도지사, 군수와 만나 국비와 도비를 확보하는 일에 힘을 보태었다. 그는 이후 초대 민선 하동군의회 의장을 지내며 고향의 발전에도 누구보다 헌신하였던 지역의 巨人이었다.
하동향교의 중건사업이 완성된 이후 지역사회의 유림들은 이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노고를 치하하며 공로 헌판을 제작하여 하동향교 명륜당에 게시해주었다. 이 일은 하윤선생이 유학자로서의 일생에 있어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일대 사건이기도 하였다.
시간을 되돌려 1982년, 하윤선생은 성균관 典學에 임명되며 전국적인 유림조직의 일원으로 중앙조직에 진출하게 되었다. 하동향교의 중건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1990년에는 하동과 서울을 오가며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지도자과정을 수료하였다. 1995년과 1999년에는 성균관 典儀로 임명되어 성균관에서의 활동에도 집중하며 유교문화의 활성화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급격한 사상과 환경변화 속에 유교와 유림은 제대로 된 방향성을 설정하지 못하였고, 2000년 이후 성균관의 내분까지 겹쳐지며 급격한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유림지도자의 일원으로서 성균관 및 유림의 개혁이 절실함을 인식하였지만, 보수적인 유교계의 분위기는 쉽게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계속된 성균관의 혼란에 환멸을 느낀 그는 다시 지역유림 및 하동향교의 발전에 눈을 돌렸으며, 2007년 하동향교의 정비사업 및 향토문화사업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내려놓았던 하동향교 전교의 직책을 다시 떠안게 되었는데 전후 모두 6차례에 걸쳐 전교직을 역임하면서 경상남도 향교전교협의회 회장직을 맡아 유학과 지역문화의 발전에 공헌함이 컸다.
2013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속칭 “성균관 스캔들”로 인해 오랜기간 전횡을 일삼던 최00관장이 구속되었다. 2014년, 국내 천만 유림의 총본산인 성균관의 새로운 수장으로 勳老 徐正淇 선생이 성균관장으로 선출되어 흐트러진 성균관과 유림을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호남출신 성균관장이었던 서관장은 영남 유림의 대표격으로 하윤선생에게 수석부관장의 직을 맡아 성균관의 개혁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오랜 성균관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유림의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새로운 집행부의 일원으로서 성균관의 개혁을 이끌었지만, 기존 세력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힘든 여건 속에서 성균관과 유림의 개혁을 위해 함께 동분서주하던 서정기 관장은 그해 10월, 전주향교에서 열린 행사 참석 중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성균관은 다시금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수석부관장이었던 하윤선생이 성균관장 직무대행을 맡아 혼란의 수습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차기 관장의 선출까지 성균관장의 직을 수행하기 위해 하동과 서울을 일주일에 몇 차례씩 오가며 성균관의 재정적 위기 극복과 신임 관장의 선출 및 여러 현안들의 해결을 위해 노력을 경주하였다. 지역 유림들 간의 갈등, 사익을 위해 성균관을 이용하고자 했던 관련 집단들의 갈등을 해결하는 일은 요원하기만 했다. 노구를 이끌며 서울과 하동을 오가며 성균관과 유림을 어느정도 수습하고 혼란 속이나마 신임관장의 선출이 마무리된 2015년 8월 말, 하윤선생은 홀가분한 마음가짐으로 새롭게 선출된 성균관장에게 그 직을 넘기고 고향 하동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윤선생은 유학자로서 하동향교 진사생원양성과정 교재 3권을 집필했고, 漢詩 작가와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松林吟社의 社長으로 한시를 교육하고 천 여수가 넘는 한시를 지었으며 15여 년에 걸쳐 한시집 6권의 발간을 주관하였다. 문장가로서 하동, 사천, 산청, 진양 등지에 공적비 기적비 등 비문 백여 장을 撰하였다.
2023년 4월 28일, 경남 하동군 하동읍에 소재한 하동향교 앞 풍화루 옆에서 ‘하윤(河允) 정한효(鄭漢孝) 전 성균관장 직무대행 및 전 하동향교 전교 공덕비 제막식’이 열렸고 공적비가 건립되었다.
이 役事에는 적지않은 자금이 필요했다. 하윤선생은 하동향교의 중건을 위한 재원을 마련함에 있어 사재를 출연하는 것은 물론이요, 지역의 국회의원과 도지사, 군수 등을 만나 국비와 지방비 지원을 요청하는 일로 동분서주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는 지금은 故人이 된 全相秀 선생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하윤선생보다 연배는 높았지만, 나이를 뛰어넘어 평생의 교류를 이어나갔던 知友이자 동지로 하윤선생의 前任 儒道會長과 하동향교 典校를 역임하면서 머리를 맞대 계획을 수립하고, 함께 지역의 국회의원, 도지사, 군수와 만나 국비와 도비를 확보하는 일에 힘을 보태었다. 그는 이후 초대 민선 하동군의회 의장을 지내며 고향의 발전에도 누구보다 헌신하였던 지역의 巨人이었다.
하동향교의 중건사업이 완성된 이후 지역사회의 유림들은 이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노고를 치하하며 공로 헌판을 제작하여 하동향교 명륜당에 게시해주었다. 이 일은 하윤선생이 유학자로서의 일생에 있어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일대 사건이기도 하였다.
시간을 되돌려 1982년, 하윤선생은 성균관 典學에 임명되며 전국적인 유림조직의 일원으로 중앙조직에 진출하게 되었다. 하동향교의 중건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1990년에는 하동과 서울을 오가며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지도자과정을 수료하였다. 1995년과 1999년에는 성균관 典儀로 임명되어 성균관에서의 활동에도 집중하며 유교문화의 활성화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급격한 사상과 환경변화 속에 유교와 유림은 제대로 된 방향성을 설정하지 못하였고, 2000년 이후 성균관의 내분까지 겹쳐지며 급격한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유림지도자의 일원으로서 성균관 및 유림의 개혁이 절실함을 인식하였지만, 보수적인 유교계의 분위기는 쉽게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계속된 성균관의 혼란에 환멸을 느낀 그는 다시 지역유림 및 하동향교의 발전에 눈을 돌렸으며, 2007년 하동향교의 정비사업 및 향토문화사업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내려놓았던 하동향교 전교의 직책을 다시 떠안게 되었는데 전후 모두 6차례에 걸쳐 전교직을 역임하면서 경상남도 향교전교협의회 회장직을 맡아 유학과 지역문화의 발전에 공헌함이 컸다.
2013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속칭 “성균관 스캔들”로 인해 오랜기간 전횡을 일삼던 최00관장이 구속되었다. 2014년, 국내 천만 유림의 총본산인 성균관의 새로운 수장으로 勳老 徐正淇 선생이 성균관장으로 선출되어 흐트러진 성균관과 유림을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호남출신 성균관장이었던 서관장은 영남 유림의 대표격으로 하윤선생에게 수석부관장의 직을 맡아 성균관의 개혁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오랜 성균관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유림의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새로운 집행부의 일원으로서 성균관의 개혁을 이끌었지만, 기존 세력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힘든 여건 속에서 성균관과 유림의 개혁을 위해 함께 동분서주하던 서정기 관장은 그해 10월, 전주향교에서 열린 행사 참석 중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성균관은 다시금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수석부관장이었던 하윤선생이 성균관장 직무대행을 맡아 혼란의 수습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차기 관장의 선출까지 성균관장의 직을 수행하기 위해 하동과 서울을 일주일에 몇 차례씩 오가며 성균관의 재정적 위기 극복과 신임 관장의 선출 및 여러 현안들의 해결을 위해 노력을 경주하였다. 지역 유림들 간의 갈등, 사익을 위해 성균관을 이용하고자 했던 관련 집단들의 갈등을 해결하는 일은 요원하기만 했다. 노구를 이끌며 서울과 하동을 오가며 성균관과 유림을 어느정도 수습하고 혼란 속이나마 신임관장의 선출이 마무리된 2015년 8월 말, 하윤선생은 홀가분한 마음가짐으로 새롭게 선출된 성균관장에게 그 직을 넘기고 고향 하동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윤선생은 유학자로서 하동향교 진사생원양성과정 교재 3권을 집필했고, 漢詩 작가와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松林吟社의 社長으로 한시를 교육하고 천 여수가 넘는 한시를 지었으며 15여 년에 걸쳐 한시집 6권의 발간을 주관하였다. 문장가로서 하동, 사천, 산청, 진양 등지에 공적비 기적비 등 비문 백여 장을 撰하였다.
2023년 4월 28일, 경남 하동군 하동읍에 소재한 하동향교 앞 풍화루 옆에서 ‘하윤(河允) 정한효(鄭漢孝) 전 성균관장 직무대행 및 전 하동향교 전교 공덕비 제막식’이 열렸고 공적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