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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02:53:55

일본 제국 내무성

내무성
内務省 | Home Ministry
파일:일본 제국 내무성 심볼.svg
<colbgcolor=#000000><colcolor=#fff> 설립 <colbgcolor=#fff,#1f2023> 1873년 11월 10일
폐지 1947년 12월 31일
후신 지방재정위원회[1], 경찰청[2], 국토교통성[3], 후생성[4]
내부부국[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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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관방 (大臣官房)
지방국 (地方局)
경보국 (警保局)
국토국 (国土局)
조사국 (調査局)
1. 개요2. 산하 조직3. 경보국4. 패전 후 해체5. 부활6. 역대 대신7.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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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무성()은 일본 제국의 옛 중앙행정조직으로, 대장성과 함께 '관청 중의 관청'이라 불릴 정도로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했다. 내무성 수립 초기에는 식산흥업이나 철도, 통신 등과, 대장성· 사법성· 문부성의 3성의 소관사항을 제외한 내정 전반에 이르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농상무성· 체신성 등 각 성이 독립해, 다이쇼 시대에는 지방행정·경찰·토목·위생·사회(노동)· 국가신토만 관할했다. 하지만 지방관청의 장을 직접 임명했고, 도부현청의 재정감독권 및 토건사업권을 쥐고있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각 성의 소관 사항에도 간접적으로 관여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 특히, 문부성은 내무성에 사실상 지배하에 놓여 있어, 내무성 문부국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경찰권과 국가신토 관리 역시 내무성의 소관이었기 때문에 전전 내무성은 군부와 함께 일본 군국주의 체제유지의 선도기관으로 활약하였다.

1938년에 위생국과 사회국이 후생성으로 분리되었다.

1876년에는 독도의 지리에 대하여 조사하기도 했다. 당시 시마네현 울릉도, 독도를 시마네현 지도에 포함시킬 것인지 내무성에 질의서를 보냈는데 내무성이 조사해서 두 섬은 일본과 관계가 전무하다고 결론지었다. 1877년 3월에는 태정관 ( 내각제 시행 이전 메이지 정부의 최고 결정 기관)에 품의서를 제출해 "본방은 관계가 없다"는 승인을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태정관 지령 문서 참조.

2. 산하 조직

설립 당시 내부부국은 다음과 같다.
1936년~1941년 기준 내부부국은 다음과 같다.
1937년~1942년 기준 내부부국은 다음과 같다.
폐지 당시 내부부국은 다음과 같다.

출신인물로는 다음이 있다.

3. 경보국

일본제국 보통경찰 특별고등경찰이 내무성의 소관이었다. 일본 본토 내의 육군 헌병도 내무성이 지휘했다. 육군 헌병대는 식민지에서는 육군성의 소관, 해군 주둔지에서는 해군 법무관들의 지휘를 받아 수사했다.

내무성의 경보국(警保局)은 치안유지기관과 방첩기관을 겸하고 있었다. 휘하에 검열과(도서과), 외사과, 보안과가 있었는데 검열과는 불온도서를 검열하는 역할, 외사과는 현대 일본 경시청 공안부 외사과, 보안과는 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을 지휘했다. 종교의 경우에도 기성 종교는 문부성 종교국의 소관, 국가신토는 내무성 신사국의 소관, 사이비 종교는 내무성 경보국의 소관이었다. 기요우라 게이고가 이 경보국장 출신으로 총리가 된 사람이다.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자 일본 정부 계엄령을 선포했고 내무성에서는 각 경찰서에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 내용 중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풀기, 방화, 약탈,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확산되었고 조선인들이 학살당했다.

4. 패전 후 해체

일본제국이 패전한 뒤에 내무성은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위해 포고문(외국군 주둔지에 있어서의 위안시설 설치에 관한 내무성 경보국장 통첩)을 내려 특수위안시설협회를 만들었다. 주일미군 전용 일본인 호스티스라고 보면 된다. 내무성이 자주적으로 만든 것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던 전직 퍼스트레이디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여성인권 문제로 격분했고 성병이 만연하면서 몇 달 후 폐지되었다.

게다가 내무성이 휘두르는 막강한 권한에 대하여 위험하다고 판단한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내무성을 해체하면서 기존의 보통경찰(경보국과 경시청 도도부현청의 경찰부)을 모두 폐지하고, 시정촌 공안위원회의 자치경찰로서 오늘날의 일본 경찰을 새로 창설했다. 직계인 총무성[9]을 비롯해, 일본 경찰청, 국토교통성, 후생노동성[10] 등을 구 내무성계 관청이라고 하며, 1940년대 이후에도 한동안 이들 관청 간 인사 교류가 활발했다. 그밖에도 내무관료 출신들을 중심으로 육상자위대 고위 간부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육상자위대의 내무관료 출신 인사를 내무군벌이라는 용어로 따로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관청 중의 관청이라는 타이틀은 전후 경제발전을 앞장서서 이끈 대장성이 승계하게 된다.

5. 부활

1956년, 행정심의회는 자치청과 건설성을 통합하여 내정성을 설치하자고 주장했고 이는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 의해 내정성 설치법안이 제24대 국회에 제출된다.

자치청의 구 내무성 지방국 출신 내무관료들의 목표는 구 내무성의 회복과 건설성이 쥐고 있는 방대한 금액의 공공사업비가 목표였으며, 그 자금을 이용해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통제력 강화도 노렸다. 하지만 이는 구 내무성계 관청인 건설성의 엄청난 반발을 가져오게 되는데 당시 건설성은 기술관료인 기관파[11]와 사무관파가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는 건설성의 전신이던 구 내무성 토목국[12] 시절, 기관은 승진해도 최대 과장으로 국장이 될 수 없었다. 건설성은 구 내무성계 관청들 중에서도 건설부라는 특성상 기관이 사무관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내정성으로 통합되면, 다시 사무관이 상위인 시대로 돌아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므로 구 토목국 출신 내무관료 기관파들이 결사 반대했고 결국 실패하게 된다.[13]

결국 내정성은 실패하였지만, 이후에도 자치청의 구 내무성 지방국 출신의 내무관료들의 성 승격 여론은 커져서 “내정성”, “지방성” 등의 승격안이 계속 나오게 되었고 60년대 안보투쟁으로 인해 자치성이 설립되게 된다. 이에 일본 정부는 자치청 장관은 국무대신이면서 법률, 정령안 등에 대해서 개시 청구권이 없고, 성령의 제정권도, 예산의 요구, 집행상의 독립된 권한도 인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성으로 승격함으로써 자치청의 지위가 향상되고, 지방 자치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평하면서도 구 내무성의 부활이라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구 내무성은 경찰권을 가지고 있었고, 도도부현지사와 지방 관료의 임명권, 지방 단체에 대한 직접적인 지도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경찰권은 공안위원회 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제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을 선거로 선출함을 근거로 그러한 비난을 일축했다.

1963년, 임시행정조사회에서는 자치성 경찰청을 통합해 자치공안성 또는 내정성을 설치하고 국가공안위원회를 외국으로 하고, 자치공안대신 또는 내정대신이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자고 주장했지만 이는 구 내무성의 부활을 염려하는 대장성, 법무성, 통상산업성, 건설성의 반대에 실패하고 만다.

6. 역대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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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내무대신 (1885년~1947년)
초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임시대리·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초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2·14대
사이고 주도
3대
시나가와 야지로
4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임시대리·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6대
고노 도가마
7대
이노우에 가오루
8대
노무랴 야스시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10·13대
이타가키 다이스케
11대
가바야마 스케노리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10·13대
이타가키 다이스케
2·14대
사이고 주도
15대
스에마쓰 겐초
16대
우츠미 다다가쓰
17대
고다마 겐타로
18대
가쓰라 다로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20대
기요우라 게이고
21·23·25대
하라 다카시
22대
히라타 도스케
21·23·25대
하라 다카시
24·27대
오우라 가네타케
21·23·25대
하라 다카시
26·28대
오쿠마 시게노부
24·27대
오우라 가네타케
26·28대
오쿠마 시게노부
29대
이치키 기토쿠로
30·34대
고토 신페이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2대
도코나미 다케지로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0·34대
고토 신페이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6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37대
하마구치 오사치
38·44대
스즈키 기사부로
39대
다나카 기이치
40대
모치즈키 게이스케
141대
아다치 겐조
42대
나카하시 토쿠고로
43대
이누카이 쓰요시
38·44대
스즈키 기사부로
45대
야마모토 다쓰오
46대
고토 후미오
47대
우시오 시게노스케
48대
가와라다 가키치
49대
바바 에이이치
50대
스에쓰구 노부마사
51대
기도 고이치
52대
오하라 나오시
53대
코다마 히데오
54대
야스이 에이지
55대
히라누마 기이치로
56대
다나베 하루미치
57대
도조 히데키
58대
우자와 미치오
59대
안도 기사부로
60대
오다치 시게오
61대
아베 겐키
62대
야마자키 이와오
63대
호리키리 젠지로
64대
미쓰치 주조
65대
오무라 세이이치
66대
우에하라 에쓰지로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67대
기무라 고자에몬
폐지 }}}}}}}}}

7. 매체에서

현대 일본에 있는 실제 국가기관인 총무성을 등장시키기는 꺼림칙할 때 적당히 사용하는 가상의 기관이다.

[1] 지방자치청, 자치청, 자치성 등을 거쳐 후에 우정성, 총무청과 합쳐 총무성으로 승격 [2] 내무성 경보국은 내사국과, 문부성 문화국으로 분리되어, 경찰부분은 국가지방경찰본부를 거쳐, 국가공안위원회의 감독을 받는 경찰청으로 승격했다. 또한 문화국은 문부성의 외국인 문화청으로 승격했다. [3] 내무성 국토국이 내각직속의 건설원과 운수성으로 분리, 승격했다. 건설원은 건설성으로 바뀌고 운수성은 체신성, 전기통신성 등을 거쳐 건설성과 함께, 중앙성청 재편으로 국토교통성으로 통합되었다. [4] 다만 후생성은 다른 내무성계 관청과 다르게 1938년 창설되었다. [5] 1947년 폐지 당시의 기준으로, 1938년 후생성으로 분리된 위생국(衛生局)과 사회국(社会局)은 포함되지 않는다. [6] 국가신토 관리. 내무성 사찰국에서 내무성 신사국과 문부성 종교국으로 신불분리가 이루어졌다. [7] 경찰, 고등경찰, 일본 제국 육군 헌병 관리기관. 1887년에 경시국으로 바뀌었다가, 1891년 경보국으로 환원. [8] 주택정책 총괄. 이들은 주택공급목적의 특수법인으로서 영단(경영재단)을 만들었다. [9] 지방국이 지방재정위원회, 지방자치청, 자치청, 자치성을 거쳐 총무성. [10] 다른 관청과 달리 전신인 후생성은 태평양 전쟁 이전 1938년에 먼저 분리. [11] 일본의 국가공무원 기술직은 기관, 지방공무원은 기술이원이라고 한다. 국가공무원 행정직은 사무관, 지방공무원 행정직은 사무이원. [12] 1942년부터 토목국에서 국토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3] 다만 건설성의 사무관들은 몰래 내정성 설립에 협력했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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