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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성(일본)

일본 제국 내무성에서 넘어옴
내무성
內務省 | Home Ministry
파일:일본 제국 내무성 심볼.svg
<colbgcolor=#000><colcolor=#fff> 설립 <colbgcolor=#fff,#1f2023> 1873년 11월 10일
폐지 1947년 12월 31일
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 (초대)
키무라 코자에몬 (말대)
후신 지방재정위원회, 경찰청, 후생성, 운수성, 건설원, 신사본청
소재지 도쿄도 치요다구 카스미가세키 2초메 1-2[1]
(東京都千代田区霞が関二丁目1番2号)
내부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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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관방(大臣官房)
지방국(地方局)
경보국(警保局)
국토국(國土局)
조사국(調査局)
위생국(衞生局): 1938년 후생성으로 이관
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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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원(神祇院)
철도청(鐵道廳): 1892년 체신성으로 이관
사회국(社會局): 1922년에 내부부국에서 외국으로 승격, 1938년 후생성으로 이관
부흥국(復興局): 1930년 부흥사무국으로 승계
부흥사무국(復興事務局): 1932년 폐지

1. 개요2. 역사
2.1. 설립2.2. 폐지2.3. 부활
3. 직제
3.1. 국가신토 관청3.2. 경보국
4. 역대 대신
4.1. 역대 내무경
5. 출신 인물6. 창작물7. 기타

[clearfix]

1. 개요

내무성()은, 1873년 11월 10일부터 1947년 12월 31일까지 존재한 일본의 옛 중앙행정조직으로, 치안, 지방행정, 건설, 국가신토 등을 담당한 기관이다.

내무성은 대장성과 함께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하여 '관청 중의 관청'이라 불렸다. 내무성의 대신직인 내무대신은 내각총리대신 다음가는 관직으로 사실상 부총리 정도로 간주되었다.

2. 역사

2.1.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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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tablealign=center><tablewidth=32>
빗금
}}}
: 영외관
<nopad> 천황
 
 
<nopad> 신기관 <nopad> 태정관
 
 
<nopad> 신기백
 
 
 
 
 
<nopad> 좌대신 <nopad> 태정대신
 
<nopad> 우대신
 
 
 
 
 
 
 
 
 
 
 
<nopad> 대납언
 
 
 
 
 
<nopad> 좌변관 <nopad> 소납언 <nopad> 우변관
 
 
 
 
<nopad> 외기
 
 
 
 
 
 
 
 
 
중무성 식부성 치부성 민부성 병부성 형부성 대장성 궁내성
}}}}}}}}}}}}


내무성 수립 초기에는 식산흥업이나 철도, 통신 등과, 대장성· 사법성· 문부성의 3성의 소관사항을 제외한 내정 전반에 이르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농상무성· 체신성 등 각 성이 독립하고, 다이쇼 시대에는 지방행정·경찰·토목·위생·사회(노동)· 국가신토만 관할했다. 하지만 지방관청의 장을 직접 임명했고, 도부현청의 재정감독권 및 토건사업권을 쥐고있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각 성의 소관 사항에도 간접적으로 관여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 특히, 문부성은 내무성에 사실상 지배하에 놓여 있어, 내무성 문부국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경찰권과 국가신토 관리 역시 내무성의 소관이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 내무성은 군부와 함께 일본 군국주의 체제유지의 선도기관으로 활약하였다.

1938년에 위생국과 사회국이 분리, 이관되어 체신성 간이보험국과 합쳐서 후생성이 설치되었다.

2.2. 폐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내무성은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위해 포고문(외국군 주둔지에 있어서의 위안시설 설치에 관한 내무성 경보국장 통첩)을 내려 특수위안시설협회를 만들었다. 주일미군 전용 일본인 호스티스라고 보면 된다. 내무성이 자주적으로 만든 것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던 전직 영부인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여성인권 문제로 격분했고 성병이 만연하면서 몇 달 후 폐지되었다.

게다가 내무성이 휘두르는 막강한 권한에 대하여 위험하다고 판단한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내무성을 해체하면서 기존의 보통경찰(경보국과 경시청 도부현청의 경찰부)을 모두 폐지하고, 시정촌 공안위원회의 자치경찰로서 오늘날의 일본 경찰을 새로 창설했다. 직계인 총무성[2]을 비롯해, 일본 경찰청, 국토교통성[3], 후생노동성[4] 등을 구 내무성계 관청이라고 하며, 1940년대 이후에도 한동안 이들 관청 간 인사 교류가 활발했다. 그밖에도 내무관료 출신들을 중심으로 육상자위대 고위 간부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육상자위대의 내무관료 출신 인사를 내무군벌이라는 용어로 따로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관청 중의 관청이라는 타이틀은 전후 경제발전을 앞장서서 이끈 대장성이 승계하게 된다.

2.3. 부활

1956년, 행정심의회는 자치청과 건설성을 통합하여 내정성을 설치하자고 주장했고,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은 내정성 설치법안을, 제24대 국회에 제출했다.

자치청의 구 내무성 대신관방, 지방국 출신 내무관료 사무관파들의 목표는 구 내무성의 회복과 건설성이 쥐고 있는 방대한 금액의 공공사업비가 목표였으며, 그 자금을 이용해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통제력 강화도 노렸다. 하지만 이는 구 내무성계 관청인 건설성의 엄청난 반발을 가져오게 되는데 당시 건설성은 기술관료인 기관파[5]와 사무관파가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는 건설성의 전신이던 구 내무성 토목국 시절, 기관은 승진해도 최대 과장으로 국장이 될 수 없었다. 건설성은 구 내무성계 관청들 중에서도 건설부라는 특성상 기관이 사무관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내정성으로 통합되면, 다시 사무관이 상위인 시대로 돌아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므로 구 토목국 출신 내무관료 기관파들이 결사 반대했고 결국 실패하게 된다.

결국 내정성은 실패하였지만, 이후에도 자치청의 구 내무성 대신관방, 지방국 출신의 내무관료들의 성 승격 여론은 커져서 “내정성”, “지방성” 등의 승격안이 계속 나오게 되었고 60년대 안보투쟁으로 인해 자치성이 설립되게 된다. 이에 일본 정부는 자치청 장관은 국무대신이면서 법률, 정령안 등에 대해서 개시 청구권이 없고, 성령의 제정권도, 예산의 요구, 집행상의 독립된 권한도 인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성으로 승격함으로써 자치청의 지위가 향상되고, 지방 자치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평하면서도 구 내무성의 부활이라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구 내무성은 경찰권을 가지고 있었고, 도도부현지사와 지방 관료의 임명권, 지방 단체에 대한 직접적인 지도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경찰권은 공안위원회 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제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을 선거로 선출함을 근거로 그러한 비난을 일축했다.

1963년, 임시행정조사회에서는 자치성 경찰청을 통합해 자치공안성 또는 내정성을 설치하고 국가공안위원회를 외국으로 하고, 자치공안대신 또는 내정대신이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자고 주장했지만 이는 구 내무성의 부활을 염려하는 대장성, 통상산업성 경제관료의 반대에 실패하고 만다.

3. 직제

3.1. 국가신토 관청

<rowcolor=#FFF>
1868년 2월 10일
1868년 2월 25일
1868년 6월 11일
1869년 8월 15일
1871년 9월 22일
<rowcolor=#FFF>
~
~
~
~
~
<rowcolor=#FFF>
25일
6월 11일
1869년 8월 15일
1871년 9월 22일
1872년 4월 21일
-
-
(독립)
신기관
(神祇官)
신기성
(神祇省)
신기사무과
(神祇事務科)
신기사무국
(神祇事務局)
<rowcolor=#FFF>
1872년 4월 21일
1877년 1월 11일
1885년 12월 22일
1900년 4월 27일
1940년 11월 9일
<rowcolor=#FFF>
~
~
~
~
~
<rowcolor=#FFF>
1877년 1월 11일
1885년 12월 22일
1900년 4월 27일
1940년 11월 9일
1946년 1월 31일
교부성
(敎部省)
사사국
(社寺局)
신사국
(神社局)
신기원
(神祇院)


본래 신토는 자연 발생한 신앙이고, 신불습합이나 전국시대에 기독교의 영향을 받는 등 이교와 융합하거나 각 지방의 토속문화에 적응하는 다신교적인 종교지만, 일본 제국 시기 국가신토 정책에 따라 일본인을 단합하기 위하여 전국의 신사를 일원화하는 관리체계를 설립했다. 전국의 신사들을 근대사격제도로 등급을 매기고, 국가 차원에서 신토 관련 제례나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을 만들었다.

율령제 전근대 일본에서 신기관(神祇官)은 태정관보다도 격이 높은 기관이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자 태정관 산하 7개 사무과 중 신기사무과로 격하되었다가 2월에 신기사무국으로 바뀌었다. 동년 6월, 정체서가 포고됨에 따라 신기관도 부흥하여 태정관 산하에 있는 모든 행정기관의 필두에 자리매김했다. 이듬해인 1869년에는 율령제 때처럼 신기관을 아예 태정관에서 독립시켰다. 하지만 1871년 종전의 신기관을 신기성(神祇省)으로 격하하여 다시 태정관 산하로 격하시켰지만, 이는 국가신토의 확립 및 제정일치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써 풀이된다.

다음 해인 1872년에 신기성을 교부성(敎部省)으로 개편해 국민교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학교 교육제도의 확충 및 문부성과 역할이 겹쳐서 1877년에 폐지되었다. 신사를 관장하는 기능은 사원 천리교를 비롯한 신흥종교를 포함하여 내무성 사사국(社寺局)이 맡게 되었다. 1900년 사사국은 내무성 내에서 신토의 신사국(神社局)과 여타 기독교· 불교·신흥종교를 관할하는 종교국(宗敎局)으로 분리됐다. 그러다가 1940년, 황기 2600년 기념으로 내무성 신사국을 내무성의 외국(外局)인 신기원(神祇院)으로 승격했다. 신기원의 장관인 신기원 총재는 내무대신이 겸임했고 기존 내무성 신사국장이 신기원 부총재가 되었다. 또한 산하 내부부국으로 총재관방과 총무국, 정무국을 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군최고사령부는 신도지령을 발령해 1946년 1월 31일에 국가신토 체계를 유지하던 신기원 조직과 근대사격제도를 폐지하여 2월 2일에 공포했다. 다음날인 2월 3일, 민간단체 신사본청이 세워져 신기원의 신사 총괄을 계승한다.

3.2. 경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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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경찰 특별고등경찰이 내무성의 소관이었다. 일본 본토 내의 육군 헌병도 내무성이 지휘했다. 육군 헌병대는 식민지에서는 육군성의 소관, 해군 주둔지에서는 해군 법무사관들의 지휘를 받아 수사했다.

내무성의 경보국(警保局)은 치안유지기관과 방첩기관을 겸하고 있었다. 휘하에 검열과(도서과), 외사과, 보안과가 있었는데 검열과는 불온도서를 검열하는 역할, 외사과는 현대 일본 경시청 공안부 외사과, 보안과는 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을 지휘했다. 종교의 경우에도 기성 종교는 문부성 종교국의 소관, 국가신토는 내무성 신사국의 소관, 사이비 종교는 내무성 경보국의 소관이었다. 기요우라 게이고가 이 경보국장 출신으로 총리가 된 사람이다.

종전 후, 내무성이 해체되자 경보국은 내사국 제1국[13]으로 개편되었다. 내사국[14]은 내무성이 폐지되고, 단 60일이라는 기간 동안만 존재한 임시 조직이었기 때문에, 해체 후 국가지방경찰본부를 거쳐 경찰청이 되었다.

4. 역대 대신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rowcolor=#ffffff> 내무경 (1873년~1885년)
초대
오쿠보 도시미치
2대
기도 다카요시
3대
오쿠보 도시미치
4대
이토 히로부미
5대
오쿠보 도시미치
6대
이토 히로부미
7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8대
야마다 아키요시
9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rowcolor=#ffffff> 내무대신 (1885년~1947년)
초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임시대리·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초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2·14대
사이고 주도
3대
시나가와 야지로
4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임시대리·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6대
고노 도가마
7대
이노우에 가오루
8대
노무랴 야스시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10·13대
이타가키 다이스케
11대
가바야마 스케노리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10·13대
이타가키 다이스케
2·14대
사이고 주도
15대
스에마쓰 겐초
16대
우츠미 타다카츠
17대
고다마 겐타로
18대
가쓰라 다로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20대
기요우라 게이고
21·23·25대
하라 다카시
22대
히라타 도스케
21·23·25대
하라 다카시
24·27대
오우라 가네타케
21·23·25대
하라 다카시
26·28대
오쿠마 시게노부
24·27대
오우라 가네타케
26·28대
오쿠마 시게노부
29대
이치키 기토쿠로
30·34대
고토 신페이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2대
도코나미 다케지로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0·34대
고토 신페이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6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37대
하마구치 오사치
38·44대
스즈키 기사부로
39대
다나카 기이치
40대
모치즈키 게이스케
41대
아다치 겐조
42대
나카하시 토쿠고로
43대
이누카이 쓰요시
38·44대
스즈키 기사부로
45대
야마모토 타츠오
46대
고토 후미오
47대
우시오 시게노스케
48대
카와라다 카키치
49대
바바 에이이치
50대
스에츠구 노부마사
51대
기도 고이치
52대
오하라 나오시
53대
코다마 히데오
54대
야스이 에이지
55대
히라누마 기이치로
56대
타나베 하루미치
57대
도조 히데키
58대
우자와 미치오
59대
안도 기사부로
60대
오다치 시게오
61대
아베 겐키
62대
야마자키 이와오
63대
호리키리 젠지로
64대
미츠치 추조
65대
오무라 세이이치
66대
우에하라 에츠지로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67대
키무라 코자에몬
폐지
섭관 · 원정 · 헤이케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오다 · 도요토미 · 에도 · 내무경 · 총리
}}}}}}}}}


4.1. 역대 내무경

<rowcolor=#fff> 대수 이름 임기 재임일수 비고
<rowcolor=#fff> 시작일 종료일
초대 파일:Toshimichi_Okubo_4.jpg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1830년~1878년)
1873년 11월 29일 1874년 2월 4일 67일 1차 재임
제2대 파일:Takayoshi_Kido_suit.jpg 기도 다카요시
木戸孝允
(1833년~1877년)
1874년 2월 14일 1874년 4월 27일 72일
제3대 파일:Toshimichi_Okubo_4.jpg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1830년~1878년)
1874년 4월 27일 1874년 8월 2일 97일 2차 재임
제4대 파일:伊藤博文.jpg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841년~1909년)
1874년 8월 2일 1874년 11월 28일 118일 1차 재임
제1·5·7·10대 총리 역임
제5대 파일:Toshimichi_Okubo_4.jpg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1830년~1878년)
1874년 11월 28일 1878년 5월 14일 3년 167일 3차 재임
암살됨
제6대 파일:伊藤博文.jpg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841년~1909년)
1878년 5월 15일 1880년 2월 28일 1년 289일 2차 재임
제1·5·7·10대 총리 역임
제7대 파일:0011_l.jpg 마쓰카타 마사요시
松方正義
(1835년~1924년)
1880년 2월 28일 1881년 10월 21일 1년 235일 제4·6대 총리 역임
제8대 파일:240px-Yamada_Akiyoshi_2.jpg 야마다 아키요시
山田顕義
(1844년~1892년)
1881년 10월 21일 1883년 12월 12일 2년 52일
제9대 파일:Yamagata_Aritomo.jpg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1838년~1922년)
1883년 12월 12일 1885년 12월 22일 2년 10일 마지막 내무경[15]
제3·9대 총리 역임

5. 출신 인물

6. 창작물

현대 일본에 있는 실제 국가기관인 총무성을 등장시키기는 꺼림칙할 때 적당히 사용하는 가상의 기관이다.

7. 기타


[1] 현재는 이 자리에 중앙합동청사 제2호관이 들어서있다. [2] 대신관방과 지방국이 지방재정위원회, 지방자치청, 자치청, 자치성을 거쳐 우정성, 총무청과 통합해 총무성. [3] 국토국이 내각 직속의 건설원과 운수성으로 분리, 승격했다. 건설원은 운수성 건설본부를 흡수해 건설성으로 개칭하고, 운수성은 2001년 중앙성청개편으로 건설성, 홋카이도개발청, 국토청과 함께 국토교통성으로 통합되었다. [4] 다른 관청과 달리 전신인 후생성은 태평양 전쟁 이전 1938년에 위생국과 사회국을 먼저 분리, 이관해 체신성 간이보험국과 합쳐서 1938년 창설되었다. [5] 전후 일본의 국가공무원 기술직은 기관, 지방공무원은 기술이원이라고 한다. 국가공무원 행정직은 사무관, 지방공무원 행정직은 사무이원. [6] 다이카 개신 이후 율령을 받아들이며 성(省) 산하에 료(寮)를 두었고 장을 두(頭)라고 했다. 예를들면 경보료의 장이면 경보두 이런식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궁내성을 제외하고 모든 성의 내부부국과 그 수장은 국(局)과 국장(局長)으로 바뀐다. [7] 농업 소관 [8] 상업 소관 [9] 농업 소관 [10] 상업 소관 [11] 내무성은 1945년 6월부터 11월까지 일본 전국을 8개로 나눈 지방총감부제를 실시했다. 규슈, 시코쿠, 주코쿠, 긴키, 도카이, 간토, 도호쿠, 홋카이도에 지방총감부를 각각 설치했는데 이는 오늘날 일본의 도주제 논의의 선구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12] 말 그대로 제국의 수도로, 도쿄를 의미. [13] 국(局) 산하에 국(局)이 있었다. 내사국의 수장은 내사국장관으로, 산하 국들은 국장으로 구분한다. 1국 외에 관방과 2국이 있었다. [14] 당초 내사국의 명칭 원안은 명칭은 내무잔무처리국으로 할려 했으나, 어감이 나쁘다는 이유를 들어 내무관료들은 내정국 혹은 내무국 등을 제안했다. 이러한 점 등을 고려해 최종적으로는 내사국으로 결정되었다. [15] 동시에 초대 내무대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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