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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7:49:55

이해찬/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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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입문 전2. 정치 활동
2.1. 정계 입문2.2. 교육부 장관 및 국무총리 시절2.3.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2.4. 난항 끝의 재등원(再登院)2.5. 문재인 정부 시기2.6. 더불어민주당 3대 당대표2.7. 21대 총선 대승2.8. 정계 은퇴 이후

1. 정치 입문 전

1952년 7월 10일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면(현 청양읍) 벽천리 180번지에서 아버지 이인용(李寅鎔)과 어머니 박양순 사이의 5남 2녀 중 3남이자 다섯째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부친 이인용이 청양 면장 출신이기 때문. 이인용은 1941년 일본 주오대학 전문부를 졸업하고 귀국해 8.15 광복 후 청양군청 학무주임(學務主任), 청양수리조합장을 거쳐 32살의 나이로 청양면장을 맡아 4.19 혁명 때까지 면장을 지냈을 정도로 마을주민들에게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말기에 치러진 지방선거[1]에서 야당 후보로 나서 면장에 당선 되었다고 하니, 지역 주민들의 신망이 투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자유당 정권하에서도 당선될 정도로 금품 살포 능력이 뛰어날 정도로 집안 재력이 대단했음을 알수 있는데, 본인 회고록에서도 어머니가 민주당 인사들이 선거 때 오면 100명 넘게 식사 대접할 정도 였다고 하며, 자신이 정치하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

서울 덕수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않아 자퇴하였고, 이듬해 문리과대학 문학부 사회학과로 재입학했다.[2]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3]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4] 약 1년간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후 무역회사를 다니기도 했고,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으며, 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는 등 재야 인사로 지냈다. 1979년에는 돌베개 출판사를 창업했다.

그러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복학하여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참고로 재밌는 에피소드가, 이 때 이해찬과 유시민이 멱살잡이 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1학년생들의 병영집체훈련 응소 문제를 두고 운동권 내부에서도 총학생회측과 복학생협의회 사이에 의견이 달라 노선 싸움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집회에서 총학생회 간부였던 유시민이 사회를 봤는데 복학생협의회측에 발언권을 주지 않고 집회를 끝내려 하자 복학생협의회장이었던 이해찬이 달려들어 유시민의 멱살을 잡은 뒤 욕설을 했고 이어서 주먹을 날리려던 찰나에 사람들이 말려서 다행히 주먹다짐으로 번지진 않았다고 한다. 그 뒤로 둘은 화해를 했고 절친한 운동권 선후배 사이로 남게 되었으며, 훗날 잘 알려졌다시피 이해찬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유시민을 보좌관으로 영입하게 된다. 그로부터 30년 뒤, 유시민에게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하라고 요구한 것도 이해찬이다.

그해 6월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수감 2년 6개월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었다.[5] 이후 재야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여 1983년 민청련 상임위 부의장[6]을 맡았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총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군사 독재 정권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삼아 감시했으나 굴하지 않고 반독재운동과 출판 활동 등에 종사했다. 1985년 서울대를 처음 입학한 지 14년 만에 졸업하였다. 1987년 말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으로 참여했다.

2. 정치 활동

2.1. 정계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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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19대 총선 포스터
1988년 재야인사 98인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구 을 지역구로 공천을 받아 민주정의당 김종인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수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7] 이후 이곳에서 내리 5선을 지냈고 2012년 19대 총선 세종시로 지역구를 옮겨 20대까지 7선의 기록을 세웠다.
제5공화국에서 방영된 이해찬 의원의 5공 청문회 모습[8]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5공 청문회의 위원으로 참석해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사건과 녹화사업 등을 추궁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꼬마 민주당의 노무현, 김정길, 이철과 같이 정치발전 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91년에 치러진 지방선거에 앞서 신민당을 탈당한 뒤 신동아 7월호에 인터뷰로 신민당을 두고 '공천을 돈 받고 하는 걸 봤다. 이렇게 부패한 야당으론 정권을 교체 할 수 없다. 국민들은 김대중이 권력욕이 강하다고 생각한다.'며 김대중을 비판하기도 했다. 몇몇 책에선 이해찬의 이 발언이 지선에 큰 영향을 끼쳤고 김대중의 정치 생명을 위협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발언의 영향력은 알 수 없으나 당시 60석 이상이 날아간 것도 사실이기도 하고.... 훗날 김대중은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 이해찬에게 비록 탈당한 뒤 당을 매도하고 선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나 '13대 국회의 의정활동이 좋았단 점'과 '경험이 부족했다며 잘못을 반성하고 있단 점'을 들어 젊은 사람에겐 기회를 한번 더 줘야 한다며 받아들여주었다. #[9]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민주당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고 조순이 당선되면서 1996년 초까지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했다. 제15대 국회가 출범하자마자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1997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을 맡았다.

1988년 등원 직후부터 5공 청문회에서 통일민주당 노무현, 이인제 의원과 함께 송곳 질의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는 스타가 되었지만, 당내 활동에서는 DJP연합 당시 정책 공조 협상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면서 선거 전략가로 더 알려지게 된다. 확인되지 않은 카더라에 따르면 선거 운동 들어가기 직전에 이긴다고 말하며 예측한 백분율이 소수점까지 딱 맞아떨어져, 한동안 '선거의 제왕'이라 덕담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2.2. 교육부 장관 및 국무총리 시절

김대중 후보의 당선으로 여당의 일원이 된 이후로는 48세에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 교육 정책을 주도하고 공무원 성과급 제도를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은 부작용들로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수험생들의 부담을 줄이고 특기-적성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로 도입한 정책들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을 딴 이해찬 세대를 양성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교육부 장관 퇴임후 중앙정치로 복귀하면서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의장과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국민의 정부가 저물 때쯤 차기 대통령 후보로 노무현을 지지하였고, 참여정부 출범 이후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여[10]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이 되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가 출범하기 직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정책위의장 경선에서 본인은 원내대표, 강봉균 의원은 정책위의장 후보로 러닝메이트로 나섰으나, 천정배- 홍재형 조에게 밀려 패하였다. 고건 당시 국무총리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고 얼마 안 가 국무총리에서 사임하자[11]후임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 시절 국회 질의에서 야당 측과의 공개 설전을 마다하지 않은 파이터 기질을 발휘했다. 이로부터 먼 훗날인 2018년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을 때에는 이때의 모습들을 거론하며 '야당과 잘 지낼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는데, 이해찬 의원은 "이 당시 야당의 질의가 너무 수준 이하여서 그랬다"고 반박하기도. 당시 질의자가 홍준표

국무총리 대통령과 더불어 내각을 이끄는 막중한 자리지만, 대통령의 강력한 권한에 눌려 제대로 권한 행사를 하지 못하고, 그냥 얼굴마담이나 대통령의 방패막이나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DJP 시기를 거치며 자민련 출신 총리들이 연립 정권의 지분자로서 어느 정도 역할을 했고, 참여정부 시기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역할을 분담하면서 당대의 국무총리들은 비교적 강력한 권한을 휘둘렀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때 대통령 권한대행을 수행했던 고건 전 총리도 사례에 해당된다.

이해찬 총리도 그 혜택을 본 인물로서 '대표적인 책임총리(또는 실세 총리)'[12]라는 타이틀이 생겼고,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을 지휘하는 등 현실 정치에서도 실세 총리로서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 지금도 책임총리나 실세 총리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 이해찬 총리다. 그래서 이 시기를 이해찬의 친노 경력으로 손꼽는 시기긴 했지만, 이 시기에 이해찬은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권에 충돌을 일으키거나 월권행위를 저지르고 결국 좋지 못한 모습으로 사퇴를 하는 등 정부의 원동력에에 누를 끼치는 행보도 보였다.

대표적으로 인사에 영향력을 끼쳤으며 이 부분에선 청와대와 충돌이 있었던 편이라고 한다.[13] 이기준 교육부총리는 도덕성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어도 이해찬이 임명을 강행했다가 결국 3일만에 사임하면서 한나라당에 꼬투리를 잡혔던 적이 있다. #

노무현 대통령의 탈권위 이야기에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유명한 노무현 대통령과 고성을 내지는 사임까지 운운하는 이야기도 노무현 대통령이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의 임명을 결정한 상황에 이해찬 총리가 유시민의 입각을 반대해 국무위원 제청권을 행사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후일 2018년에 엠팍의 게시물에서 스스로를 이해찬의 보좌관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댓글에서 밝히길, 노무현 대통령은 이재정, 이상수, 유시민을 고려하고 있었으나, 이재정과 이상수는 정치자금법, 유시민은 야당에 미운 털이 박혔던 상황이라 이해찬이 유시민을 지금이 아닌 차차기 장관으로 미루는 게 좋겠다고 주장하여 언쟁이 있었다고 했다. #

그러나 그 당시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윤태영 씨가 쓴 '바보 산을 옮기다'에 나와있는 내용에 의하면 # 정작 유시민의 입각엔 야당이 아닌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 반발이 있었기에 개각 명단에 포함하지 않았다가, 여당 의원들의 반발이 사그러들지 않았는데도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강행해서 이를 반대하는 이해찬과의 언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당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한 점을 보면 그 자리에서 이해찬이 말한 내용은 열린우리당에서 반대 의견이 나오는 유시민을 입각시키지 말잔 입장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를 '차차기 장관으로 권유'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한나라당 의원들보다도 오히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유시민을 더 싫어한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열린우리당 의원들 사이에서 유시민에 대한 반감이 심했었다.[14]

또한 대통령 측근과 사조직 발호를 막아야 한다며 민정수석에게 지시했음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있다. # 좋게보면 일 잘하란 얘기겠지만, 대통령의 권한인 청와대 수석의 지휘권에 대해서도 월권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 외에도 노무현 대통령의 척추가 좋지 않단 헛소문을 경솔하게 퍼트리기도 했다. #[15]

2003년 유명한 부안 사건이 있은 이후 방폐장 문제를 해결한 것은 국무총리 이해찬의 치적으로 흔히 이야기 된다. 당시 원자력 위원회(위원장 이해찬 총리 겸임) 회의결과 발표에서 중저준위 폐기물[16] 처분장 부지에는 향후에도 사용후연료 관련 시설은 건설하지 않기로 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17] 문재인 정부 (이해찬 당대표) 출범 이후 월성원전 지역실행기구라는 관변 단체를 만들어 사용후 핵연료 저장시설인 맥스터 건설(확장)을 추진하고 있어 지역사회 등의 반발을 사고 있다. 오마이뉴스기사 - 이런데도 경주 시민이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총리시절에는 특히 골프 관련 부적절한 처신으로 언론과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받았고 이는 결국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나게되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에게까지 어려움을 가중시켜 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는데, 강원도 양양군에 산불이 번지는 와중에도 골프를 친 사건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고, 이후로도 이런 행적은 정치적 부담이 되어버려 야당 공격의 주요 소재가 되어버렸다. 이후 골프와 관련된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국무총리에서 사퇴했다.[18]

사실 이해찬 총리가 재직 시절 골프로 구설에 오른 것은 양양 낙산사 산불건 외에도 몇 차례 더 있었다. 가장 먼저 구설에 오른 포천 포사격 훈련 사고는 당시 골프를 치다가 사건 보고를 받고 즉각 조문을 가서 별 문제가 안 됐지만, 양양 낙산사 산불 사건으로 상당한 논란이 되었고, 같은 해 남부 지역에 홍수로 수해를 입고 있었는데도 제주도에서 골프를 치는 바람에 빈축을 샀다. 결정적으로 2006년 3.1절 기념식에 불참하고 부산에 골프치러 갔던 것이 밝혀지자 청와대에서도 쉴드를 포기했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3.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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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이후 대선예비후보 5인 컷오프에서 살아남아 유시민, 한명숙과 단일화하여 지원을 받았으나, 결국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반감과 이해찬 본인의 이해찬 세대, 골프 이미지(...)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최종 대선후보가 되지 못 했다.

결국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고 일어난 10년 만의 정권 교체로 다시 야당이 된 이후 유시민 친노 세력을 모아 탈당했다. 그리고 기존의 열린우리당의 부활을 염두에 둬 신당 창당에 박차를 기울였다. 바쁜 일정 때문인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고 연임 기록은 일단 5선으로 마감했다.

이후 한동안 야인 생활을 했고 대선이 임박해오자 친노 및 진보 NGO 인사들과 함께 가칭 ' 시민통합당'[19]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한 뒤 민주당과 합당하는 방식으로 민주당에 복당하였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서울 호남이라고 불릴 만큼 서울에서 민주당 지지세가 제일 막강했고 자신이 내리 5선을 지내기도 했던 서울특별시 관악구 을[20]을 떠나 세종특별자치시에 출마했다.

이해찬 후보는 자유선진당 심대평을 무려 14%p차로 밀어내고[21] 4년 만에 국회로 복귀했다. 당초에는 지역 거물 정치인이던 심대평의 당선이 점쳐졌지만[22] 이해찬 후보는 국무총리를 지낸 경력 하나만으로도 전국적인 인지도가 월등한 데다 국무총리 시절 세종특별자치시 설립에 앞장선 경력도 있고 여기에 지역적 연고까지 있어서 생각보다 큰 7,000여 표 차로 이겼다. 여담으로 2년 뒤 치러진 6.4 지방선거에서도 세종특별자치시장은 이해찬의 측근인 이춘희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당선되기도 했다.

민주통합당의 첫 지도부였던 한명숙 지도부가 19대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그 뒤를 이을 당대표를 뽑는 전당대회 경선에 출마해 김한길 의원 등을 쓰러뜨리고 당선되기도 했었지만 대선 국면에서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지도부 인적쇄신론이 나오면서 결국 문재인 후보에게 당대표 대행을 맡기고 사퇴했다.

대선 이후에 한동안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다가 박근혜 정부 개성공단을 일방적으로 폐쇄하는 조치를 내리자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노동자들에게 들어가는 임금의 70%가 북한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개발에 들어간다'고 주장했다가 야당이 ' 이명박 정부부터 지금까지 약 5억 2,000만 달러가 개성공단에 들어갔는데, 이 돈이 무기 개발에 쓰여진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방치했다는 얘기가 아니냐?'고 반론하자 급히 말을 바꾼 것을 두고 한 차례 비판한 뒤, 개성공단의 임금 흐름을 설명하며[23] 홍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사자후를 보여주기도 했다. #

2.4. 난항 끝의 재등원(再登院)

2016년 3월 14일,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지도부가 그의 지역구인 세종시를 ' 전략공천 지역'으로 선정해 이 의원을 쫓아내면서 다시 그의 존재감이 되살아났다.

공천관리위원회는 이해찬 후보에겐 부적격 사유가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그를 공천하려고 했지만 김종인 대표가 차일피일 결재를 미뤘다고 한다. 이 행동을 놓고 모두들 김종인 대표가 이해찬 의원에게 '내 손으로 잘라내기 전에 본인이 명예롭게 물러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해찬 의원은 자진 사퇴 의사를 밝히지 않았고 결국 더민주 지도부는 이해찬 의원을 쫓아내기에 이른다.

김종인 대표는 '정무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며 이해찬 후보를 컷오프한 구체적인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언론에선 주로 당내 다선 의원 물갈이의 연장선상에서, 또는 실체없다는 말도 많지만, 어쨌든 많이 비판받는 '친노 패권주의'를 표면적으로나마 청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친노계 좌장인 이해찬 의원을 제거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부수적인 이유로는 과거 서울 관악 을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해찬과 맞붙었다 패했던 김종인 대표의 사적인 감정에서 기인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고, 세종시에서 여론조사를 돌려보니 결과가 형편없어서 탈락시켰다는 말도 나온다. 심지어는 문재인 전 대표가 친문계 세력으로 친노계를 재편하려고 배후에서 조종해 친노계의 2인자인 이해찬 의원을 김종인 대표를 통하여 쫓아낸 거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다 나왔다.

언론 보도를 인용하자면, 문재인 전 대표 쪽은 김종인 대표가 이해찬 의원을 잘라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재고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해찬 의원 컷오프가 확정되기 전날, 문재인 전 대표와 김종인 대표가 전화 통화를 했는데 여기서 김 대표는 '전체 선거 구도를 위해 어쩔 수 없다. 내게 맡겨달라'며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 기사를 보면 김 대표 본인도 ' 친노 패권주의' 프레임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일반 대중의 시각을 생각해 이해찬 의원을 일찌감치 잘라내기로 마음을 먹었던 거 같다.

어찌되었든, 탈당은 없을 거라는 언론의 추측성 보도와는 달리 이해찬 후보는 3월 15일, "어떠한 결격 사유도 없는데 모욕을 주고 강제로 쫓아내면서 친노를 척결한다고까지 말하는 객관적이지 않은 공천 방식은 인정할 수 없으므로 무소속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자길 따라 동반 탈당하겠다는 세종시 당원들과 시장, 시의원들은 당에 남아 있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하고, 본인도 당선될 경우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하겠다는 뜻을 밝혔다.[24]

그리고 결과는 새누리당 박종준 후보, 더민주 문흥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당선된 직후 인터뷰에서 이해찬 의원은 김종인 대표의 '정무적 판단에 따른 컷오프'에 대해 엄중히 항의해 사과를 받아낼 것이며 복당이 된다면 당을 바로잡겠다'며 복당하면 차기 당대표 선거를 겨냥한 듯한 뉘앙스를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 당선으로 그는 7번의 선거에서 한 번도 지지않고 전승한 국회의원이 됐는데[25], 이는 윗 당선 수를 따져봐도 9선 의원인 김종필 자민련 총재 외에는 없다. 허나 그 JP조차 비례대표 1번을 받고도 떨어지는 굴욕을 겪은 바가 있다.

참고로 JP와 같은 9선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4대 총선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준규 전 국회의장은 3대 총선 4대 총선에서 낙선한 흑역사가 있다. 8선 의원 중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경우 2의 낙선, 정일형 전 의원의 경우 한 번의 2위가[26] 있으며, 새누리당 서청원 전 최고위원의 경우 1번의 낙선이 있어 김재광 전 의원만 8선 모두 당선(!)되는 진기록을 가졌다.

같은 7선 의원인 정몽준 전 의원은 국회의원 선거는 7회 모두 당선되었으나, 2014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패배하여 1번의 낙선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이해찬 의원은 농담 삼아 "좀 교만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왜 선거에서 지는지 모르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캠프의 선대위원장을 맡아 승리를 함으로써 선거의 제왕이라는 타이틀을 이어가게 되었다. [27]
파일:external/img.focus.kr/2016041400020743542_1.jpg 파일:external/pbs.twimg.com/Cf7pjPtUEAAbS5S.jpg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마감된 가운데 이해찬 무소속 후보가 세종시 도담동 선거사무소에서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자 선거 캠프 직원들 및 지지자들과 함께 박수를 치고 있다.[28] 지지자들과 20대 총선 당선 축하 떡을 자르는 이해찬 당선인. 참고로 사진상으로 이해찬 바로 왼쪽에 있는 인물은 이춘희 세종특별자치시장.[29] 표정만 보면 매우 화난 사람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이다.

당선되는 즉시 복당하겠다며 복당을 일찍이 천명했지만, 탈당한 인물들을 복당시키느냐 마느냐를 놓고 싸우고 있는 새누리당과는 달리, 더불어민주당은 탈당해 무소속으로 20대 국회에 입성한 이해찬, 홍의락 두 의원의 복당 문제를 거의 거론하지 않는 분위기다.

홍의락 의원이야 본인이 복당할 뜻이 없다고 말했으니[30] 그렇다고 친다지만, 이미 본인 스스로도 복당을 천명한 바 있고, 더불어민주당의 가장 튼튼한 지지층인 친노 성향의 지지자들에게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한 이해찬 의원의 복당을 입 밖에도 꺼내지 않는 것은 이해찬 의원이 복당해 전당대회에 출마하면 아마도 가장 유력한 당권 주자가 될 것이고, 그럼 김종인 대표는 자기가 갖고 있었던 당 지휘권을 앙숙(?)인 이해찬 의원[31]에게 넘겨줘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걸 원치 않아서라고들 보고 있다.

그래서 이해찬 의원의 복당은 빨라도 아마 더불어민주당의 새로운 공식 지도부가 선출된 다음인 2016년 가을 즈음, 늦으면 대선 직후에나 이뤄질 듯하다. 이해찬 의원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아마도 2016년 9월 쯤에 복당할 수 있을 거라 내다보는 중이라고. # 일단 일여다야 구도에서 무소속으로 나갔는데도 무난히 당선돼 '컷오프는 잘못됐다는 걸 세종시민들이 입증해 주었다'는 등의 명분도 생겼고 전당대회에서 친문 성향 최고위원들이 다수 당선되고 친문 진영에서 밀었던 추미애 대표가 압도적 득표율로 새로 당선되면서, 복당은 시간 문제일 듯.

2016년 8월 18일, 세종시 전동면에 있는 자신의 전원주택 근처에서 퇴비 냄새가 난다고 해서 민원을 넣었다.[32] 이에 세종시청에서부터[33] 심지어 세종시 행정부시장까지 나서서[34] 이웃 농민의 퇴비를 15톤이나 수거해 가는 바람에 갑질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35] 악취의 농도도 허용치 안이었다는 말이 있었다. 관련 기사

그러자 이해찬 의원실에서 반론을 제기했다. 문제의 퇴비는 일반적인 퇴비가 아닌 돼지 분변을 바탕으로 한 퇴비로, 악취가 심해 그 주변에서 살고 있던 주민들이 찜통 더위에도 창문을 열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이해찬 의원도 세종시를 지역구로 하는 국회의원이지만 무엇보다도 함께 피해를 보고 있었던 인근 주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주민들을 대표해 민원을 넣었다는 거였다. 세종시청에서는 '가축분뇨의 관리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땅 주인에게 수거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36]

보수 진영 지지자들이나 반노/반문 성향의 야권 지지층의 반응들은 대체로 '전원 생활을 하려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것'이라며 갑질이라고 주장한다. 새누리당 세종시당도 '이해찬 의원의 민원은 황제 민원이다'라며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 문제의 해당 비료를 조사한 결과 중금속 아연 함유량이 기준치를 초과해 부적합 결과가 나왔으며 설상가상으로 해당 마을은 상수도를 쓰지 않고 지하수를 쓰는데, 비료가 뿌려진 땅이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중금속인 아연이 마을의 상수원으로 흘러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 또한 이 사건을 보도한 언론의 발행인은 김종인 대표가 이해찬 의원 쪽과 가까웠던 당직자를 몰아내고 더민주 세종시당 사무처장에 앉힌 사람이라 중립적인 시각에서 나온 보도인지 의심스럽다는 주장도 나왔다. #

2016년 9월 30일 열린 더불어민주당 당무위원회의에서 이해찬 의원과 징계를 받았던 세종시당 당원들의 일괄 복당을 의결하면서, 더불어민주당에 복귀했다. # 그리고 11월 2일 더불어민주당이 당 국정자문회의를 외교안보통일 자문회의와 국가경제 자문회의로 이원화한 뒤 이해찬 의원을 외교안보통일 의장에 선임했다. #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 경선에선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선거 캠프에 참여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고 중립을 지켰다. 몇 차례 경선 과정을 비판하는 의견을 낸 적은 있지만 특정 후보를 겨냥하지는 않은 원론적인 의견에 가깝다. 이후 문재인이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에 선대위원장이 되었다.

2.5. 문재인 정부 시기

이해찬 의원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집권 여당의 원로로써 예전처럼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2선으로 물러나 있었다. 2017년 중국 특사로 파견된 것을 제외하면 그가 언론에 비추는 빈도는 훨씬 줄어든 상태였다.

그런데 그냥 언론에 모습을 안 드러낸 것뿐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20대 국회 전반기,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중 국회 결석률이 매우 높은 편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국회 결석률 상위 20명 중 유일하게 민주당 소속으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고(...).

2.6. 더불어민주당 3대 당대표

6.13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을 거둔 이후부터 추미애 대표의 임기가 끝나는 2018년 8월에 있을 전당대회에서 차기 민주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이해찬 의원은 민주당 현역 의원들 중 최다선 의원이고, 또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민주통합당의 당 대표를 역임한 경험도 있어 민주당의 당 대표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 중 가장 연륜과 수완을 모두 갖추고 있는 카드로 평가 받아 왔다.

게다가 현재 민주당 내에서 영향력이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친문 성향 당원들의 표심을 상당 부분 가져갈 것으로 보여져, (또 다른 유력 당권 주자로 꼽혀온 김부겸 행안부 장관이 불출마한다는 가정하에) 만일 당대표 자리에 재도전한다면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가 될 거라고들 보았다.

민주당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후보군으로 거론되었던 정치인들 중에서 확실한 친문계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최재성, 전해철, 이해찬 세 명으로 좁혀진 상황에서 이해찬 의원이 출마를 결심할 경우, 나머지 두 의원이 단일화에 응할 가능성이 높을 거라는 예측도 나왔다. 그렇지만 전해철 의원은 김진표 의원을 지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최재성 의원은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다.

추미애 대표의 뒤를 이을 민주당 신임 당 대표는 임기가 2020년에 있을 21대 총선에 걸쳐져 있어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 대한 전권을 휘두를 수 있다. 따라서 후보 공천 과정에서 여러 모로 계파 사이의 갈등으로 인하여 잡음이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당원들 중에는 이해찬처럼 카리스마 있고 정치 경력이 어마어마한 거물급 인사가 당 대표로 있어야 잡음이 덜할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사람들이 제법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해찬 의원은 제법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후보 등록 마감을 앞둔 2018년 7월 20일 본격적으로 당 대표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2018년 7월 26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당대표 후보 예비 경선을 통과해 본선에 진출했다. 이해찬 본인은 당대표가 되어 마지막 소임을 다하고 싶고, "다음 총선에 나갈 생각이 없다"라며, 더불어민주당의 제3대 당대표 직을 끝으로 정치 인생을 마무리할 뜻이 있음을 시사했다.

그리고 민주당 8.25 전당대회 본선에서 대의원 투표, 권리당원 투표, 일반국민 여론조사, 일반당원 여론조사를 합산하여 총 득표율 42.88%를 기록해 더불어민주당의 제3대 당대표의 자리에 올랐다. 다음 날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을 축하하며 인연이 많은 만큼 당청 관계가 잘 맞을 것이란 말과 동시에 저번 대선을 언급하며 "2012년 대선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이 (이 대표가 당시 민주통합당 대표를) 중간에 그만두게 돼서 그런 것"이라며 "(이번에는) 완주해 제대로 해 볼 수 있겠다"고 말했다. # 그러나 당시 홍영표 상황실장이 쓴 <비망록>에 의하면 이 대표가 자의로 그만 둔 것이 아니었다. 안철수 진영과 단일화 과정에서 안철수 진영에서 "성의를 보여라"라며 친노의 수장인 이해찬 대표의 사퇴하라고 노골적인 압박을 가해 어쩔수 없이 응한 것. 문재인 대통령의 당시 상황 언급은, 이해찬 대표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안철수 진영의 무리한 요구에 끌려다니다가 대선에 패했다는, 철수 돌려까기에 가깝다.

8월 27일, 취임 첫 일정으로 현충원을 찾아 참배했다. 이때 이승만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지를 찾아 눈길을 끌었다. 이 대표가 첫 일정으로 민청학련 사건 때 자신을 구속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며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를 던졌는 평. 또한, 이날 하루 4개 야당 지도부를 모두 만나며 광폭 협치의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사자명예훼손의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이 치매를 이유로 법정 출석을 거부하자 “오늘 법정에 출석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도 용서 받지 못할 것 같은데 법원에 불출석한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라며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라면 전두환을 반드시 법정에 세워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9월 18일, 제5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정당 대표로 방북했다. 남북정상회담 둘째 날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 남북 국회 회담 논의 등에 관해 의견 교환을 했다. 이 과정에서 노쇼 논란이 벌어졌다.

9월 25일, '이해찬호' 출범 한 달을 맞이했다. 정기 국회 연설에서 참여 정부에서 추진했던 수도권 공공기관 지방 이전 카드를 다시 한번 꺼내들며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에서 큰 파급 효과를 불어왔고, 정국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부동산 문제에서도 공급 확대와 초고가주택 종부세 강화 등의 해결 방안을 거침 없이 제시하는 등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 다만 당대표 당시에 1달 이내로 진행하겠다던 당원 게시판 신설 공약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이 후로도 당원 게시판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9월 26일, 노무현재단 이사장 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전해졌다. 노무현재단 관계자는 "이 대표가 당대표와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겸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최근 사임계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우선 새로운 이사장이 선임될 때까지는 이 대표가 계속 이사장을 맡기로 한 상태"라며 "늦어도 올해 안에는 이사장이 바뀔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이해찬 의원은 신임 이사장으로 유시민 작가(!)를 추천한 것으로 전해졌다. * 그리고 10월 1일 이사회에서 유시민 작가를 선임하였다. 다만 10월 4일 평양에서 열리는 10.4 남북공동선언 기념 행사에는 이해찬이 참석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유시민의 이사장 임기는 10월 15일부터 시작한다.

더민주 당대표로써 이해찬 당대표의 장점이라면 선거시기에 귀신같은 지지층 확보와 결집 능력. 또한 본인이 친문의 전신인 친노의 원로중에 원로이며 그의 화려한 역임 직위와 카리스마로 선거기간 중에 당내 기강확보를 상당히 잘했다.

21대 총선 직전, 건강이 나빠져서 병원에 입원하고 선거 일정을 이낙연에게 일임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서 선거의 결과를 떠나서 총선 직후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조기 전당대회를 치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김성환 당대표 비서실장은 4월 16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당이 이제 예측가능하게 시스템적으로 가는 것이 맞다. 전당대회는 원래대로 8월에 한다"며 이 대표가 본래 임기인 2020년 8월까지 당대표직을 수행한다고 밝혔다. 21대 총선에는 불출마하였고 20대 국회의원 임기는 2020년 5월 29일까지이므로 그 이후에는 원외 신분으로 남게 된다.

2.7. 21대 총선 대승

2020년 21대 총선을 이낙연의원과 함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진두지휘 하면서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이미 총선 이전에 정치인생 마지막 정치 선거라고 했다는 주변 사람들의 카더라식 말이 나왔고, 실제로 21대 총선에 불출마하였으므로 본인이 마지막으로 주도하는 선거에서 유종의 미를 거둔 것이다. @ 또한 이해찬 대표의 임기는 올 8월까지 예정되어 있는데, 총선에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전 대표인 추미애 대표에 이어 민주당계 역사상 임기를 모두 채우고 퇴임하는 두 번째 대표가 될 전망이다.

총선 직후 과거에 여러번 대립했던 김종인과의 마지막 대결을 압승으로 끝내면서 결국 정치적 라이벌로서 이해찬 vs 김종인의 대결은 이해찬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

총선에 출마한 서청원 우리공화당 의원(8선), 천정배 민생당 의원(6선), 손학규(4선), 정동영(4선), 박지원(4선)과 달리, 일찌감치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여의도 올드보이' 손학규·서청원·박지원 줄줄이 '고배'

21대 총선 과정에서 이해찬에겐 아주 약간 아쉬워할 법한 결과도 있었다. 이해찬 계열로 꼽히는 민주당 내 이해찬의 측근 인사들은 대부분 선거에 나가기는 커녕 공천에서 컷오프 당하거나 경선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이해찬 본인은 '자신들이 못한 걸 어떻게 하겠나'라며 담담하게 반응하고, 해당 인사들도 대부분 결과를 수용하고 큰 마찰 없이 당 선거운동에 합류하면서 별다른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

이러한 개인에게 아쉬워할 법한 결과도 받아들이며 공천 과정의 잡음을 앞장서서 제거함으로써 옆동네 미래통합당과 같이 내부에서 총질하는 상황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물론 황교안 전 대표와 이해찬 대표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황교안 전 대표는 억지로라도 국회에 자신의 파벌을 더 늘려야 하는 당내 세력이 약한 케이스이나,이해찬은 본인의 세력을 남기며 대권 욕심을 비칠 이유가 없다. 이미 과거에 대통령은 하늘이 점지해준다며 자신은 그 감이 아니라며 대권 의사를 접었음을 수차례 밝힌 적이 있고 당내에 세력이 없더라도 본인은 곧 정계은퇴를 할 뉘앙스를 수차례 비쳤으며 남은 당대표직의 수행에서 친노 원로인 이해찬 본인을 공격할 당내 세력도 없다. 이렇게 기존의 당내 계파 정리를 깔끔하게 해놓았기에 가능한 선거 전략으로 선거 전략의 귀재라고 평가 받는 본인의 명성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국회의원 7선에 장관, 국무총리, 당대표 등, 대통령 빼고 다 해보며 화려한 경력을 남겼다. 대통령 빼고 다해본 사람 중에서는 김종필이나 이회창과 비교할 수 있다.1980~2000년대에 활동한 정치인 중에서는 굉장히 깔끔하게 정치인생을 마무리한 케이스다. 특히나 이번에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천부터 선거운동까지 전방위에서 안정적으로 대표직과 공동선대위원장을 수행하며 당의 승리를 이끌었다. 당대표가 되었을 때에만 해도 평소 막말이나 실언을 많이 했던 전적으로 인해 선거 지휘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일부 여론도 있었으나 우려를 뒤집고 거의 잡음 없이 21대 총선을 시작, 완승으로 마무리지었다. 본인의 지역구인 세종시 역시 갑/을 선거구 모두 더불어민주당 후보인 홍성국(갑), 강준현(을)이 승리하며 승계에 성공했다.

웹툰 작가 굽시니스트는 자신이 시사IN에 연재하는 본격 시사인 만화 658호 '7전8기'에서 이런 이해찬의 정치적 일생[37]을 그려내기도 했다.

2.8. 정계 은퇴 이후

2020년 8월 29일 당대표 임기를 모두 마치고, 32년간의 정치인 생활을 마무리짓고, 정계에서 떠나 비정부기구인 동북아평화경제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새 당대표는 이낙연 의원이 맡게되었다.

3월에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사적인 자리를 가졌다는 말이 나오면서 다음 대선에서 친이재명 친문의 교두보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2021 재보궐선거에서 이해찬도 지원사격을 했으나 결국 더불어민주당이 참패를 거두면서 김종인처럼 다시 한번 비대위원장에 올라 정계복귀 썰이 있었지만 은퇴 선언을 했던지라 도종환 비대위 체제로 전환되었다.

친문계의 2인자 이낙연이 이명박, 박근혜 전대통령 사면론으로 시작된 하락세와 2021 재보궐선거 참패 이후 대선주자에서 멀어진 이후 대선주자로 떠오른 이재명 현 경기도지사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었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38] 실제로 친이해찬 계열 인사들이 이재명 경기도지사 측에 붙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

게다가 이재명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도 있었던 황교익 내정 논란 당시엔 황교익에게 직접 전화해 민주당 상임고문으로서 사과를 하고 황교익의 후보 사퇴를 이끌어낸 뒤 이재명과 함께 황교익을 위로하는 언사를 하며 논란을 정리했다.

이재명 대선후보자의 지지율 반등이 지지부진하고 윤석열 야당후보가 이준석 당대표와 극적화해와 원팀을 구성한 뒤 젠더갈등에서 2030남성들을 위한 공약들을 내세운 덕에 지지율이 비등비등해지고 설 연휴를 기점으로 윤석열 후보쪽이 오차범위 밖으로 우세하다는 평가에 대해 "세번의 대선에서 이기게 만든 경험으로써 자신이 보기에는 여론조사와는 달리 이재명 후보가 윤석열 후보를 너끈히 이길 것이다. 이재명 후보는 준비되고 검증되었지만 윤석열 후보는 아니다. 현명한 국민들이 이재명 후보를 투표할 것"이라며 여당 채널에 등장하여 지지층 결집 발언으로 지원해주고 있었으나 20대 대선은 결국 윤석열의 신승으로 끝나게 되었다.

2024년 3월 11일, 22대 총선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김부겸과 함께 선임됐다 #. 이로서 이재명과 함께 삼두체제로 총선에 임하게 됐는데, 당의 최고원로이자 선거통인 이해찬을 선임함으로써 공천 파동 여파를 봉합하고 단합된 대열로 선거를 치루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4월 5일, 더불어민주연합 상임선대위원장도 겸직하게 되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선대위원장 겸직은 당직과 무관하다고 유권해석했다고 한다. #

[1] 1956년 지방선거로 추정. [2] 신경민 MBC 앵커, 前 더불어민주당소속 국회의원과 같은 과 동기(72학번) [3]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휴교령이 내려 고향에 내려오자, 아버지가 불러앉혀놓고 "나라가 이 모양인데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느냐"며 질책을 받고 며칠 뒤 서울로 올라가 학생운동 서클에 가입했다고 한다. [4] 당시 이해찬이 지휘한 시위에 참여했다가 함께 연행되었던 정치인 박우섭(9년 뒤 이해찬과 함께 민청련과 민통련 간부로 8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의 회고에 따르면, 경찰들이 연행당한 다른 학생들 앞에서 시위주동자를 조져서 본보기를 보이겠다며, 경찰서로 데려가 일부러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이해찬을 죽도록 폭행했다고 한다. 유치장에서 이해찬만 나오라고 한뒤, 조사는 안하고 나오자마자 말도 없이 바로 주먹으로 때려서 쓰러뜨린 뒤 경찰 몇명이 주먹과 발로 쉬지않고 폭행했다고 한다. "사람이 저렇게 끝없이 두들겨 맞고 어떻게 살아 있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친 듯이 계속 때려서 경찰서 바닥이 피범벅이 되고 이해찬은 거의 누더기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가 되어, 이를 본 다른 학생들이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을 정도였다고. 경찰들이 폭력을 멈춘 직후에 당시 목격자들은 다들 이해찬이 이미 죽은게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라 한다. [5]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참조. 이때 당시 딸에게 쓴 편지 당시 학생운동 전력의 요시찰 인물들이 많이 피해를 봤다.이로 인해 대부분 군면제를 받긴 했지만. [6] 당시 집행부 의장, 즉 민청련의 지도자는 김근태였다. [7] 그 당시 보좌관 중 한 명이 유시민이었다. [8] 녹화사업 관련으로 녹화사업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박준병 장군에게 질의를 하는 모습이다. "안 하겠다는 사람에게는 부탁을 하고..."라는 궁색한 변명에 "군대에서 부탁이란 게 있습니까?"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백미. 청문회 당시 박준병은 민주정의당 소속 현직 국회의원이었다. [9] 여담으로 김대중은 이때 이해찬이 한 비난에 대해 야당이 공천 때만이 아니라 평시에 자금을 받을 환경이 있어야 한다며 자금적인 이유로 공천을 해준 건 사실이고 이를 부정하진 않지만, 공천시에만 돈을 받게 한 환경 때문에 야당은 이 때 받는 돈이 없으면 선거도 치를 수 없음을 호소하기도 했다. [10] 당장 열린우리당이라는 당명을 지은 이가 이해찬이다. [11] 원래는 본래 보수정당 당적으로 3선 경상남도지사와 당시 현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인 김혁규가 물망에 올랐으나, 불과 반년전까지 만해도 한솥밥을 먹었던 한나라당 의원들이 "철새를 총리로 임명하려고 한다."고 반대하자 노무현 대통령 당선 1등공신이자 최측근이었던 이해찬을 국무총리 후보지명을 하였다. [12] 사실 이회창이나 공동정부 지분을 갖고 있었던 김종필도 비슷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는 권한을 행사하려 해도 대통령과 마찰을 일으키고 사퇴하거나, 공무에 바쁜 총리직에서 물러나 당무 및 국정 지원에 몰두하는 모습이 더 자주 비춰졌다. 이해찬은 본인 의지와 노무현 대통령의 자발적인 역할 분산이라는 박자가 맞아 이를 온전히 누릴 수 있었고 실질적으로 부통령, 아니 그 이상의 내각 수반이나 다름없게 된 셈. [13] 이해찬이 총리로 일하던 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으로 일했던 박남춘은 후일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이해찬이 강행하던 인사 문제로 고생했단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이해찬이 인사권에 영향력을 끼쳤음을 밝혔었다. [14] 문재인 정부의 첫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입각한 김영춘 의원이 열린우리당 시절 유시민을 두고 "옳은 소리를 저렇게 싸가지 없게 말하는 재주는 대체 어디서 배워왔을까"라며 대놓고 디스한 일화가 매우 유명하다. [15] 대통령의 건강은 최고급 기밀사항인 점도 있으나, 주치의쪽에서도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했으며 정계 은퇴 후에도 건강상의 무리가 없었단 내용들을 보면 이해찬이 거짓소문을 퍼트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16]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작업복, 장갑, 폐필터나 산업체에서 발생하는 폐기물등 [17] 방폐물유치지역법에서도 18조 사용후핵연료 관련시설은 유치지역 안에 건설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문화 함 [18] 여담으로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골프로 물의를 빚어내 골머리를 썩게 만드는 이해찬의 해임을 촉구하기도 했다. # 한편, 이용마 기자의 책인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에 따르면, 이 사건과 관련되어 유시민은 '삼일절에 골프 좀 치면 어떠냐. 권력 잡아서 우리도 좀 골프 쳐보겠다는데'란 반응이었다고 한다. [19] 정치 고관심층에게는 '혁통'으로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 [20] 이 지역은 관악구청장 출신의 김희철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이해찬 비서관 출신의 정태호가 이어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민주당은 이 지역을 19대, 19대 재보선, 20대 3연속으로 야권 연대나 야권 분열 등의 사유로 타 정당에 넘겨주기도 했으나 돌고돌아 2020년 21대 총선에서 12년만에 탈환에 성공한다. [21] 정확히는 이해찬 47.9%, 심대평 33.8% [22] 심대평은 공주시 출신으로 관선 대전광역시장, 관선 1회 + 민선 3선 충남도지사에다 대전 서구을과 공주시 - 연기군에서 총 2번의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으로 충남의 맹주를 노리는 인물이었다. 정당 활동으로는 충남도지사 시절에 자민련 세력을 모아서 국민중심당을 창당, 이후 당대표를 거쳐 17대 대선에 나가기도 했다. 이후 합당하면서 자유선진당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특이하게 보수 진영임에도 보수 본당 격인 한나라당-새누리당과의 접점은 적은 편. 이해찬에게 패한 후 결국 그대로 자유선진당과 함께 정계에서 사라졌다. [23]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은 월급을 달러나 북한의 현금이 아닌, 일종의 상품권으로 받는다고 한다. 이 상품권으로 개성에 있는 대형 마트 같은 곳에서 생필품을 사가는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즉, 박근혜정부는 북한 노동자들이 개성에서밖에 쓸 수 없는 상품권까지 강제로 뜯어내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24] 이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총선 공천 결과에 불복해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 시 영구 제명하겠다는 발언을 해 내로남불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25] 그의 인접한 지역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7번 출마한 최현호는 7번의 선거에서 모두 낙선했다. 이 중 4번은 당선자가 오제세였다. [26] 9대 총선, 중선거구제하에서의 당선 [27] 훗날 일이지만 21대 총선에선 선대위원장을 맡아 역사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28] 저 사진에선 무표정한데, 사실 저 사진은 박수부터 치는 걸 찍어서 그런 거고 실제로는 웃었다.(!) [29] 단순히 자치단체장과 지역 국회의원의 관계가 아니라, 이해찬 의원이 총리 시절 지금의 세종시를 적극 추진하고 이춘희가 행정복합도시건설청장으로 현장 실무를 담당했던지라 매우 사이가 각별하다. 그래서 이해찬 의원의 컷오프 때 이춘희 시장까지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려 했으나 이해찬이 적극 만류했다고. [30] 당선 이후 대선 전까지 무소속 신분을 정리하겠다는 발언을 했지만, 더민주는 TK지역의 수구정서와 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인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을 고려할 때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새누리당 역시 그동안의 스탠스를 고려했을 때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바른정당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자체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국민의당에 입당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방향을 다시 틀어, 결국 2017년 5월 4일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하였다. [31] 위에 쓰여있듯이 김종인 대표는 13대 총선에서 본인의 출신지인 서울 관악 을에 출마했다가 이해찬에게 패배해 낙선한 적이 있다. [32] 여담이지만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경우 실거주중인 집과 본인 지역구가 따로따로인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지역구에 출마하려면 해당 지역구로 주소를 옮겨야 하기 때문에 지역구 내에 전세 혹은 월세로 거처를 구한 뒤 지역구 활동을 할 때 지내고, 의정 활동 혹은 의회 출석을 할 때는 서울에 있는 집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박지원(목포) 전 의원, 유승민(대구 동 을) 전 의원 역시 지역구와 별개로 각각 서울 여의도, 개포동에 자택을 소유하고 있다. 이해찬 의원처럼 사는 곳과 지역구가 일치한 국회의원은 그리 많지 않은 편. 서울특별시장의 경우도 장관급이기 때문에 주무 부처 장관의 명령과 권고도 거부할 수 있다. [33] 1차적으로는 전동면사무소에서 주무관이 출장나와 확인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그 상급기관에서 직접 나왔다는 것. [34] 군 계급으로는 투스타에 해당하는 1급 공무원으로, 세종시청 서열 2위. 관할 면사무소의 주무관, 면장은 물론이고 시청의 국과장들도 상대하기에 상당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직급. [35] 하위직급 주무관이 대응할 일을 지역구 국회의원이 민원을 넣는 바람에 행정부시장이 직접 나서게 할 정도로 판을 키워버렸다는 것. [36]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찬 의원이 진짜 '갑질'을 할 요량이었다면, 정식 절차 거쳐 민원 넣을 것도 없이 자신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이춘희 당시 세종시장에게 직접 전화 한 통 걸어 담당부서에 내리갈굼을 시전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이해찬 본인도 서울시 정무부시장, 장관, 총리를 모두 지내본 만큼 공직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알았을 것이므로. [37] 참고로 출판 버전에서는 이해찬의 머리에 광배( 헤일로)를 씌우고 '이제 여한이 없어'라는 대사를 써서, 이해찬을 곧 죽을 사람인 것처럼 묘사했다. [38] 물론 이해찬은 민주당 내에서 'OO계'라는 평을 들을 급이 전혀 아니며, 본인이 주창한 '20년 집권론'을 위해 현실적으로 가장 집권 가능성이 높은 이재명의 멘토를 자처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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