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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팔레스타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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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팔레스타인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고대2.2. 중세2.3. 근세2.4. 근대2.5. 20세기2.6. 21세기
3. 교통 교류4. 대사관5. 관련 문서

1. 개요

팔레스타인 이라크의 대외관계.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양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속하고, 고대 유대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6세기에는 신바빌로니아 제국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상당수의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 바빌로니아 본토로 끌고 갔다. 이를 바빌론 유수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유다 왕국 북부의 사마리아 왕국은 아시리아 제국의 영향권으로 바빌로니아 대신 아시리아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바빌론 유수는 유대인 사마리아인이 서로 갈라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셈이다.

신바빌로니아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였다. 아케메네스 제국에서는 과거 아시리아 제국의 공용어였던 아람어가 사실상 공용어로 사용되었는데, 그 결과 페르시아 시대부터 헬레니즘 제국 파르티아, 고대 로마를 거치며 아람어는 팔레스타인 일대와 이라크 일대에서 폭 넓게 사용되는 링구아 프랑카로 기능하게 되었다.

2.2. 중세

두 지역들은 7세기 정통 칼리파 시대 당시 이슬람 제국에 점령되었다. 우마이야 칼리프조는 치세 중반 디완(회계 등을 담당하는 관청)에서 아람어와 그리스어 사용을 중지시키고 오직 아랍어로만 업무를 볼 것을 지시하는데, 이를 계기로 천 년 넘게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공용어로 사용되던 아람어는 아랍어로 급속히 대체되기 시작하였다.[1]

이라크 일대는 아랍인들의 정복 직후 쿠파(도시), 바스라같은 신도시들이 들어서고 상당수의 아랍인들이 정착한 것을 계기로 초기 이슬람 제국에서 가장 무슬림 비중이 높은 지역이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적어도 초창기 정통 칼리파 시대와 우마이야 칼리프조 시대까지는 상당한 수준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었고, 기독교도 인구 비중이 높게 유지되던 지역이었다.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트리고 들어선 압바스 칼리프조는 전임 왕조들과 다르게 팔레스타인 일대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압바스 칼리프조의 중심지는 오늘날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그리고 사마라였고, 전성기 당시 압바스 칼리파들은 중앙아시아 흑해를 연결하는 무역으로 얻는 수입에 관심이 더 많았다. 한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은 시아파 이스마일파 계열의 파티마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파티마 왕조의 세력이 서서히 몰락하자 압바스 칼리파를 섬기는 셀주크 제국이 샴(레반트 지역)을 점령하고 이로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한동안 다시금 바그다드의 칼리파 정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시작된 제1차 십자군 전쟁의 결과 팔레스타인 일대에는 예루살렘 왕국 같은 십자군 국가들이 들어서고, 십자군 전쟁이 백 년 넘게 지속되는 와중에... 13세기 몽골 고원에서 발흥한 몽골 제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바그다드를 약탈하면서 칼리파를 시해하였다. 수백여년 간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 역할을 맡았던 이라크 지역은 몽골군의 약탈과 초토화를 계기로 몰락하였다. 이라크 일대에 기반한 제국이나 정권이 팔레스타인 일대에 갑 역할을 하던 것은 압바스 칼리프조[2]가 마지막이었다.

2.3. 근세

팔레스타인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나, 이라크의 경우 북서부 지역은 오스만 제국이 남동부 지역은 사파비 제국과 같은 이란 시아파 12이맘파 제국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이라크의 종교 지형은 북서부는 순니파, 남동부는 시아파로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2.4. 근대

오스만 제국이 약화된 것을 계기로 19세기에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기독교인 보호를 구실로 예루살렘 내정 문제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와 러시아 이외에도 상당수의 서구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온 유대인들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다른 한편 당시 이라크의 남동부를 지배하던 카자르 왕조 역시 영국과 러시아의 간섭을 받긴 하였으나, 서구인 입식자들이 자리잡은 팔레스타인에 비하면 비교적 그 영향이 적은 편이었다.

한 편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아랍 민족주의 그리고 이슬람 모더니즘의 영향이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일대에도 동시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2.5. 20세기

두 지역들은 1920년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라크는 1932년에 독립되었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경우 이스라엘이 1948년 건국되었다가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1994년에 본격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나타났다.

제1차 중동전쟁 때에는 이라크 왕국은 팔레스타인 세력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이후에도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세력들은 서로 협력적이었고 제3차 중동전쟁 때 이라크 공화국(1958~1968)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을 도와주었고, 제4차 중동전쟁 때에도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세력들과 바트당 정권 치하의 이라크 공화국은 이집트를 도왔다.

걸프 전쟁 당시 팔레스타인인들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요르단과 함께 이라크를 지지했었다. #, #

1990년 사담 후세인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입국을 전면 허용했다. #

1990년 야세르 아라파트는 사담 후세인으로부터 1억5000만달러에 해당되는 자원금을 받았다. #

2.6. 21세기

2000년 10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무력충돌 및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이라크는 "팔레스타인은 성전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또한 중동에서 반이스라엘 시위가 일어날 때 이라크에서는 바트당 주도 하의 시위가 열렸으며 수천 명의 시민들이 참가했다. #

2000년 10월 22일 이라크는 팔레스타인에 식량과 의료품을 지원했다. #

2001년 1월 이라크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팔레스타인 시위대의 유족들에게 포상금을 지급했다. #

2001년 3월 야세르 아라파트는 사담 후세인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

2001년 8월 14일 이라크와 시리아, 이란은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

2002년 2월 시사 주간지 뉴스워크는 바그다드에도 팔레스타인 단체 몇몇이 본부를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

2002년 4월 4일, 팔레스타인의 자살폭탄 테러범에게 지원금을 증액했다. #

4월 8일, 사담 후세인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 점령에 대한 항의로 30일간 석유수출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 #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 때에는 팔레스타인에서 이라크의 항전을 환호했다. #

팔레스타인에서 사담 후세인의 포스터나 그의 얼굴이 그려진 T셔츠가 인기가 있었다. #

이라크 전쟁 발발 당일부터 가자지구에서 13개의 정치, 사회단체들이 모여 만들었던 '이라크 지원을 위한 팔레스타인 위원회'에서는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사진을 내놓았다. #

2003년 4월 바그다드가 함락되자 팔레스타인에서는 공식적 반응이 없었으나 하마스는 반이스라엘, 반미 전쟁이 일어나길 바란다고 전했다. # 또한 일부 팔레스타인의 일부 과격파들은 이라크에서 반미 시위가 일어나길 바란다고 언급했다. #

2003년 12월 사담 후세인이 체포되자 대다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부정적으로 보았다. # 사담 후세인 체포를 전후하여 이라크의 시아파 주민들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대상으로 린치를 가하는 사태가 빈발하기도 했다. #

2008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시기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습하여 많은 사망자들이 나오자 이라크 내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고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바그다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 #

모술에서도 대규모 가자지구 공습에 대한 항의시위가 일어났으며, 동시에 시위 도중 자전거를 이용한 폭탄 테러가 일어나 1명이 사망하고 16명의 부상자들이 나왔다. #, #

2008년 12월 이라크 정부는 가자지구에 물품을 전달했다. #

2009년 4월 5일,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수반은 이라크를 방문하여 잘랄 탈라바니 대통령과 누리 알 말리키 총리를 만나 회담을 나누었다. #

2012년 11월, 아랍연맹 주재 이라크 대사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과 관련해 아랍 국가들이 석유를 무기로 이용해 미국과 이스라엘을 압박해야 한다고 밝혔다. #

2017년 10월 24일,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서 사담후세인 기념탑을 세웠다. #

3. 교통 교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라크로 가려면 비자가 필요하며, 이라크인의 경우 팔레스타인의 대다수를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있다보니 이스라엘을 통해서 방문해야 되는데 이라크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데다가 갈등이 많은 관계로 현재로서는 가지 않는다.

현재 공식적으로 두 나라들을 잇는 항공은 없다.

4. 대사관

이라크 바그다드에 팔레스타인 대사관이 있다. 또한 쿠르디스탄의 중심지 아르빌에도 팔레스타인 총영사관이 있다.

5. 관련 문서



[1] 아람어와 아랍어는 같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언어로 서로 공통점이 많아 아람어 사용자가 아랍어를 익히기 수월한 편인 점도 한 몫 했다. [2] 카이로 압바스 칼리파 시대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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