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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17 23:03:04

왕장(동음이의어)


1. 인명
1.1. 후한의 인물이자 팔주의 한명1.2. 전한의 인물 11.3. 전한의 인물 21.4. 전한의 인물 31.5. 전한의 인물 41.6. 전한의 인물 51.7. 왕소군의 본명1.8. 충선왕의 본명1.9. 고려의 왕족1.10. 명나라의 인물1.11. 배우
2. 지명
2.1. 旺場2.2. 望江2.3. 旺場2.4. 王葬
3. 아악의 곡의 이름4. 王丈5. 王葬

1. 인명

1.1. 후한의 인물이자 팔주의 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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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전한의 인물 1

王臧
(? ~ 기원전 139년)

전한의 유학자이자 관료. 동해 난릉 사람으로 신공의 제자이다. 따로 열전이 없으며 왕장의 기록은 사기 유림열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를 익혀 경제 때 태자소부를 지냈으나, 면직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경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제는 왕장을 불러들여 숙위를 맡겼는데 왕장은 승진을 거듭하여 무려 한 해만에 낭중령이 되었다. 이때 무제는 유학을 숭상하기로 하여, 왕정과 함께 신공의 밑에서 수학한 조관을 불러들여 어사대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노자를 숭상하였던 두태후는 무제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곧 왕장과 조관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무제를 꾸짖었다. 결국 왕장과 조관은 함께 자결 하였다. 이후 왕장의 후임은 석건(石建)이 이었다.

1.3. 전한의 인물 2

王臧
생몰년도 미상

전한의 관료로 기원전 134년에 태상에 임명되었다. 기원전 131년 수양후(睢陽侯) 장광국(張廣國)[1]이 왕장의 뒤를 이어 태상에 임명되었다.

1.4. 전한의 인물 3

王章
(? ~ 기원전 24년)

전한의 인물로 자는 중경(仲卿)이며 태산 거평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장안에서 학문을 익혔다. 아내와 단 둘이서 살았는데, 병들었을 때 제대로 된 담요조차 없어 조잡한 옷가지 위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왕장은 울면서 아내의 임종을 준비하려 하였는데, 아내는 도리어 그러한 왕장을 질책하였다.

이후 왕장은 관직에 나아가 간대부(諫大夫)가 되었고, 직언을 잘하여 조정에서 명성을 떨쳤다. 원제 초기에 좌조중랑장(左曹中郞將)으로 발탁되었는데, 어사중승 진함과 함께 권신 석현을 탄핵하였으나 도리어 파면되었다.

성제가 즉위한 후 다시 간대부가 되었고, 이후 사례교위가 되어 대신과 외척들의 두려움을 샀다.

기원전 25년, 치적이 나빠 파면된 송등의 뒤를 이어 경조윤에 임명되었다. 당시 대장군 왕봉이 외척으로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왕장은 비록 왕봉의 천거를 받은 자였지만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내는 왕장에게 지난날의 어려웠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왕봉을 거스르지 말라고 하였으나, 왕장은 듣지 않고 성제에게 왕봉을 파면하여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성제는 왕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왕봉의 후임을 누구로 할 지 물었고, 왕장이 풍야왕을 추천하니 그대로 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왕봉의 친척인 시중(侍中) 왕음이 이를 엿듣고는 왕봉에게 알렸고, 왕봉은 곧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왕태후마저 소식을 듣고는 울면서 밥도 먹지 않으니, 성제는 차마 왕봉을 파면하지 못하고 잠시 대기시켰다.

한편, 왕봉은 처제 장미인(張美人)을 성제의 후궁으로 들여보냈었는데, 그녀는 다른 남자와 혼인한 적이 있었다. 왕장은 왕봉을 탄핵하면서, 오랑캐들조차 개가한 여자의 맏이를 죽이는 풍습을 갖고 있음을 거론하며 황실의 혈통을 지켜야 함을 주장하였다. 왕봉 또한 왕장을 탄핵하였고, 정위 범연수는 왕장이 천자를 오랑캐와 비교하는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판결하였다. 결국 왕장은 옥중에서 죽었다.

함께 하옥되었던 처자식은 합포로 유배되었다. 이후 왕봉의 아우 왕상이 권력을 휘둘렀을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합포에서 진주를 캐내어 엄청난 돈을 벌고 있었다. 태산태수 소육은 예전에 왕장의 소유였던 밭과 집을 이들에게 돌려주었다.
왕장의 후임은 봉신(逢信)이 이었다.[2]

1.5. 전한의 인물 4

王章
(? ~ 기원전 22년)

전한의 외척으로 자는 자연(子然)이며 경조 장릉사람이다.

기원전 35년 아버지 왕순이 죽자 안평후(安平侯)에 정해졌다. 이후 2년 뒤 기원전 33년 중소부에서 집금오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31년 태복으로 임명되었으나 5년 뒤 병으로 면직되었고 우장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광록훈에 임명되었으나 얼마안가 죽었고 시호를 내려 강(剛)이라고 했다. 왕장의 뒤는 아들 왕연이 이었다.

1.6. 전한의 인물 5

王章
(? ~ 기원전 3년)

전한 말기의 제후로 제남사람이다. 승상 왕흔의 증손이자 태상 왕함의 아들이다.

기원전 10년, 왕함의 뒤를 이어 의춘후(宜春侯)에 봉해졌으나 기원전 3년 죽으니 시호를 희(釐)라고 했다. 뒤는 아들 왕강(王強)이 이었다.

1.7. 왕소군의 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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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충선왕의 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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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고려의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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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명나라의 인물

王章
(? ~ 1644년)

명나라 상주부(常州府) 무진(武進) 사람. 자는 한신(漢臣)이다. 숭정(崇禎) 원년(1628) 진사가 되고, 제기지현(諸曁知縣)이 되었다가 은현(鄞縣)으로 옮겼다. 어사(御史)에 발탁되어 내조(內操)를 없앨 것을 건의하고 강남(江南)의 부족한 부세(賦稅)를 관대하게 처리했다. 감숙(甘肅)으로 나가 아무 죄도 없는 달단인(韃靼人)을 죽여 공을 세우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자성(李自成)이 경사(京師)를 공격하자 부성문(阜城門)을 지켰다. 성이 함락되어도 굽히지 않다가 피살당했다.

1.11. 배우

Tino Wong

중국의 배우

2. 지명

2.1. 旺場

충북 음성군의 감곡면에 있는 지역. ‘사람이 붐비는 왕성한 시장’이란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사람과 물건은 교통수단에 의해서 이동되므로, 교통 요지에 사람과 물건이 모여 교환 경제는 성립된다. 이것이 시장이며 과거로 갈수록 2일과 7일 등 정기적인 날짜에 모였다. 그러므로 정기시(定期市) 또는 5일 간격으로 모인 것을 내세워 5일장이라 했다. 다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이름이 약간씩 달라졌을 뿐이다. 시장이 선다는 의미로서 입장(立場), 물건이 풍족하다는 의미로서 풍장(豊場), 새로운 시장이란 의미로서 신장(新場)으로 구분될 뿐이다. 왕장은 청미(淸美)천을 사이에 두고 장호원과 이어지고 있지만,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기와 충북이라는 도 단위의 행정구역이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거주 공간, 생활양식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전제할 때, 옛날의 정기시장에서 성장한 지리적 기초의 동질성을 읽을 수 있다.

2.2. 望江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안칭(安慶)에 있는 현(縣).

2.3. 旺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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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王葬

평안남도 평원군 원암리 푸메산 북쪽에 있는 마을. 큰 무덤이 있는 언덕에 위치해 있다 하여 왕장마을이라 하였다.

3. 아악의 곡의 이름

아악의 곡 이름. 당악에 속하는 평조곡으로, 중국 당나라 서융(西戎)의 반란 때, 재상 왕효걸(王孝傑)이 정벌에 나갔다가 황장곡(黃麞谷)에서 전사하였으므로 그 충렬을 사모하여 지었다고 한다.

4. 王丈

남의 할아버지를 이르는 말.

5. 王葬

임금의 장례를 이르는 말.
[1] 장광(張廣)이라고도 한다. [2] (? ~ ?) 자는 소자(少子) 우부풍 현릉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