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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6 18:32:11

에른스트 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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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st Thälmann ( 1886년 4월 16일 ~ 1944년 8월 18일)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독일의 정치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활약했던 독일 공산당(KPD)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2. 생애

함부르크의 항만노동자 출신으로 1902년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에 징집되어 1918년 독일 제국 패망 시까지 육군 포병으로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이후 1920년 독일 공산당(KPD)에 합류하였으며, 1921년에는 독일 공산당의 대표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함부르크에서 무장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따라 한동안 도피 생활을 하기도 한다.

1924년에는 국회의원, 1925년에는 독일 공산당의 중앙위원장이 되어 당의 대중화를 도모하였다. 같은 해에 독일 공산당의 준군사단체였던 적색전선전사연맹(Roter Frontkämpferbund)의 수장에 오르면서 독일 공산당의 총재직도 겸임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공산당의 후보로 192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애초에 상대는 타넨베르크 전투 이후 전 독일의 영웅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였기 때문에 바로 탈락하고 만다. 텔만이 출마해서 중도층의 표를 상당 부분 갉아먹은 덕분에, 힌덴부르크를 위협할 가장 큰 적수였던 가톨릭 중앙당 빌헬름 마르크스가 피를 본다.

하지만 이후 텔만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저지르는데,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하는) 중도 좌파 세력을 파괴하라'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지령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1928년 6차 코민테른 대회를 기점으로, 스탈린주의에 충실한 방향으로 공격적, 과격적 노선이 채택되면서 코민테른의 기능도 맛이 가기 시작한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한창 세를 불리고 있던 나치를 견제하지 않고 독일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으로 표기) 세력과 전력을 다해 싸우는 근시안적인 행보를 보였고, 이런 만평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19년,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카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가 준군사조직 자유군단에 의해 죽었는데, 그때 자유군단을 지휘한 구스타프 노스케, 그에게 지시를 내린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모두 사민당 소속이었다. 코민테른의 테제가 아니더라도 사민당과 공산당은 철전지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관계이긴 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출마한 텔만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 아돌프 히틀러에 이어 10.2%의 지지율로 3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힌덴부르크의 당선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득표율이었다. 참고로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에 공산당이 내세운 슬로건이 "힌덴부르크를 뽑는 것은 히틀러를 뽑는 것이고, 히틀러를 뽑는 것은 전쟁으로 가는 길이다"였다.[1] 그러다가 프로이센 쿠데타 이후에야 뒤늦게 노선을 전환하여 사민당과 공동투쟁에 나섰지만 그간의 갈등으로 쌓인 악감정이 많았던지라 이는 실현되지 않았고, 뒤늦은 노선전환은 정치적 인생에 종점을 찍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인 1933년에는 히틀러가 총리직에 오른 데 이어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체포하면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텔만을 비롯하여 4천여명의 공산당원들이 방화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며, 텔만 또한 체포되어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투옥되었다. 수감생활 중이던 1939년 8월, 나치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을 당시 소련 측의 의중에 맞춰 그를 석방하려던 계획이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

이후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줄곧 갇혀 지내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막판에 독일 패색이 짙어지자 1944년 히틀러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전해진다. 나치는 그가 연합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었다. 만약 그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동독의 지도자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사망 이후 전쟁이 끝나고서는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묻힌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펠데 공동묘지의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여담



[1] 이후의 역사를 참고. [2] 물론 이렇게 근시안적인 행보를 보였던 것은 당시 독일 정계 전반이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 말 기준으로 득표율이 꼴랑 3%인 군소정당이 어떻게 독일 전체를 장악하는 정당이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