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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22:34:44

에른스트 바르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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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참전기록4. 독일에서의 평가5. 전후

1. 개요

독일의 군인이다.

2. 생애

독일 홀슈타인 키스도르프에서 1919년 8월 25일 농부의 아들로 출생하여 1935년 졸업 후 1936년 4월 SS 게르마니아 연대에 지원 입대하였다. SS 무장친위대 판터 전차 에이스로서 쿠르트 크니스펠과 함께 몇 안되는 부사관 에이스이다. 교차로에서 M4 셔먼 전차 9대를 격파한 바르크만의 교차로와 아르덴 대공세 당시 판터 전차를 탑승하고 미군 부대를 유유히 돌아다닌 만헤이 활극의 주인공이다. 전후 소방관으로 일했으며 2009년에 사망했다. 비록 무장친위대 출신이라 다른 전차 에이스들처럼 종전 후 대우는 받지 못했지만 독일 통일에 소련 해체까지 보고 죽는 천수를 누렸으니, 운이 좋은 걸지도.

3. 참전기록

1939년 폴란드전에 기관총사수로 참전했으나 부상당하였고 1941년 8월 독소전 초기 다시 한번 큰 부상을 입고 2급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같은해 네덜란드 소재 외국인 SS지원병학교의 교관 임무를 맡게 되나, 1942년 초 제2SS사단 '다스 라이히'의 기갑연대에 지원하여 2중대에 배속되었다. 1943년 초 제 3차 하르코프 전투에 참가하여 1급 철십자장을 받았다. 1943년 중순에 판터로 무장한 4중대로 전속되게 되었다. 1943년 말 SS하급소대지휘관(하사)으로 진급하였고 1944년 사단은 재편성을 위해 프랑스로 철수하였다.

노르망디 상륙전 직후, 다스 라이히 사단은 미군 9, 30보병사단, 3기갑사단의 진격을 막기 위해 생로로 진격하였다. 7월 8일 바르크만의 중대는 연대의 최선두에 서게 되었는데 이 날 바르크만은 생 로 근교에서 처음으로 미군 셔먼전차를 격파하였다. 12일에는 매복전술로 3대를 더 격파하였고 적진에 고립된 4대의 아군전차와 독일군 포로들을 구출하기도 하였으며 이 와중에 셔먼을 3대 더 격파하였다. 27일 새벽, 중대로 복귀하는 도중에 르 로리 마을 근교에서 15대의 셔먼과 차량을 장비한 미군 대열을 확인했다. 바르크만은 십자로부근 떡갈나무 숲속에 매복하여 미군이 접근하자 전투를 개시하였다. 선두의 셔먼 2대와 유조차 1대를 격파시키자 즉시 미군은 항공지원을 요청, 미군의 공습에 판터가 피격당하고 일부 승무원이 부상을 입었으나 추가 교전 후 뇌부르 마을 근교까지 철수하였다. 이 전투는 바르크만의 코너로 불리며 총 9대의 셔먼과 기타 차량 여러 대를 격파하였다. 7월 28일 바르크만은 쿠탕스에 있는 중대와 합류하였다. 그후로 이틀 동안 그는 15대의 셔먼과 기타 차량들을 격파하였다. 7월 30일 바르크만은 1대의 손상당한 판터를 견인하여 미군의 포위를 돌파하였다. 그 후 전차를 폭파방기한 후 7킬로미터를 걸어서 독일군 전선으로 복귀하였다. 8월 5일 아블랑셰에 도착, 9월 5일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SS상사로 진급 후 1944년 12월의 아르덴 대공세에도 참가하였으나 12월 25일 중상을 입었다. 그의 판터는 야음을 틈타 미국 제2기갑사단의 숙영지 한복판으로 돌진하여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러 대의 셔먼 탱크를 격파하였다(일명 만헤이의 활극). 한 대의 셔먼 탱크가 바르크만의 판터에 충돌하여 엔진이 정지, 몇 분 후 다시 엔진이 걸리고 추격하는 미군을 격퇴하였다.

1945년 3월 동부전선에서 T-34 4대를 격파하였다. 4월, 오스트리아 비엔나 남부에서 소련군과 전투중 아군의 오사로 파괴당하고 바르크만과 부하 승무원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후 그 곳에서 영국군에 항복하였다.

4. 독일에서의 평가

미하엘 비트만과 함께 그 명성과 업적이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부정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무장친위대이기 때문. 독일 국방군 오토 카리우스 쿠르트 크니스펠의 명성과 업적이 인정받고, 칭송받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꼭 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독일인들 사이에서 국방군과 무장친위대에 대한 인식차이는 천지차이이기 때문에 친위대에서 백날 천날 공을 세워서 철십자 훈장을 줄줄이 받아봤자, 철십자 훈장은 커녕 아무런 공적도 세우지 못한 국방군 출신 참전자보다 대접이 나쁘다.

5. 전후

학살에 참여했다는 증거는 없었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는 않았고 고향인 키스도르프에서 소방서장으로 근무했고 이후 마을이장이 되어 살다가 2009년 6월 27일, 90세의 나이로 별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