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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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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부르봉 왕조 초대 국왕
앙리 4세
Henri IV
파일:Pourbus the Younger - Henri IV HR.jpg
출생 1553년 12월 13일
나바라 왕국
사망 1610년 5월 14일 (향년 56세)
프랑스 왕국 파리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1589년 8월 2일 ~ 1610년 5월 14일
나바르 국왕
1572년 6월 9일 ~ 1610년 5월 14일
서명 파일:앙리 4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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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부르봉 가문
이름 앙리 드 부르봉
(Henri de Bourbon)
아버지 방돔 공작 앙투안
어머니 잔 달브레
형제자매 카트린
배우자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1572년 결혼 / 1599년 무효화)
마리 드 메디시스 (1600년 결혼)
자녀 루이 13세, 엘리자베트, 크리스틴 마리, 니콜라 앙리, 가스통, 앙리에트 마리, 세자르(사생아), 카트린 앙리에트(사생아)
종교 가톨릭 개신교 ( 위그노) 가톨릭
신체 168cm, 70kg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나바르 국왕2.3. 제8차 위그노 전쟁(세 앙리의 전쟁, 1587~1589)2.4. 제9차 위그노 전쟁(1589~1598)과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치세2.5. 암살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3.1.1. 쉴리 공작과 재정 강화3.1.2. 1주일에 1닭3.1.3. <낭트 칙령> 반포
3.2. 부정적 평가
3.2.1. 세무 정책과 매관매직3.2.2. 호색한
3.3. 총평
4. 가족
4.1. 자녀
5. 기타6.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Si Dieu me prête vie, je ferai qu’il n’y aura point de laboureur en mon royaume qui n’ait les moyens d’avoir le dimanche une poule dans son pot!"
(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짐은 왕국의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일요일이면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1]
"Vive Henri quatre, Vive ce Roi vaillant! Ce diable à quatre, A le triple talent: De boire et de battre, Et d'être un vert galant."
(앙리 4세 만세, 용맹한 국왕 만세! 이 네 악마들은 세 가지 재주를 가졌으니, 술을 마시고, 싸우고, 색을 밝히는 것이라네.)
샤를 콜레, 18세기 극작가이자 작곡가[2]

프랑스 왕국 나바라 왕국 국왕이자 부르봉 왕조의 개창자.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프랑스 절대왕정 체제)의 초석을 닦아 놓은 왕.

정치, 군사, 내정 다방면으로 유능했던 왕이며 역사적으로는 위그노( 개신교)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 낭트 칙령》으로 유명하다. 별명은 선량왕(선하신 왕 앙리) 또는 호색왕으로 재위 중 업적을 많이 남긴 관계로 대왕(le Grand)의 칭호를 받아서 앙리 대왕(Henri le Grand / 앙리 르 그랑)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553년 현재의 프랑스 서남부 피레네-아틀랑티크 지방인 나바르 왕국의 베아른 지역 포 성에서 '나바르의 앙리' 또는 '나바라의 헨리케'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방돔 공작 앙투안(Antoine de Bourbon, duc de Vendôme)은 초대 부르봉 공작 루이 1세의 8대손이었고[3] 어머니인 잔 달브레(Jeanne d'Albret)는 나바르의 여왕으로 프랑수아 1세의 누나 마르그리트 당굴렘의 딸이었다.[4] 그는 앙투안과 잔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일찍 죽은 형 앙리 대신 후계자가 될 수 있었으며 여왕인 모친이 사망하자 나바르의 왕위를 이어받아 '헨리케 3세'로 즉위했다.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았으나[5] 나바르 여왕이었던 어머니 잔 달브레는 신실한 위그노[6]답게 강경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위그노로 자랐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베아른에서 지냈다. 베아른 사람들은 대개 개방적이고 영리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그의 성품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앙에 기반한 이상주의자인 강경한 어머니와는 다르게 온건한 성품을 바탕으로 개방성을 발휘하여 훗날 행보에서도 알 수 있듯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1561~1567년까지 프랑스 발루아-앙굴렘 궁정에서 6촌인 앙리 2세의 자녀들과 함께 지냈으나 그 사이인 1562년 바시에서의 신교도 학살제1차 위그노 전쟁(1562~1563)이 일어나면서 그의 일가 전체가 프랑스 칼뱅파, 즉 위그노와 가톨릭으로 나누어졌다. 그의 아버지인 방돔 공작 앙투안은 위그노와 동맹을 맺다가 곧 편을 바꿔 가톨릭 편에 서서 싸웠고 노르망디의 루앙 전투에서 중상을 입어 결국 상처가 악화된 상태에서 사망했다. 1568년 그는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던 어머니 잔 달브레, 즉 호아나 3세의 곁으로 돌아와 프로테스탄트의 엄격한 원칙에 따른 교육을 받으면서 군사 교육도 받았다. 1569년 가을에 나바르 남부의 반항적인 가톨릭 무리를 진압하기 위한 토벌대의 이름뿐인 지휘자가 되어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다가 제3차 위그노 전쟁(1568~1570)이 발발하면서 그동안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던 잔 달브레는 적극적으로 위그노를 지지했고 아들인 그를 같은 위그노이자 시동생인 콩데 공 루이 1세에게 맡겼으나 1569년 3월 13일 자르냐크 근처에서 벌어진 앙주 공작 앙리의 기습 공격으로 패배하고 숙부인 콩데 공 루이가 전사하자(자르냐크 전투) 잔 달브레는 서둘러 전쟁터로 달려와 아들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허나 사령관의 모든 권한은 그의 군사교육을 맡은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에게 있었으며 이후 사촌인 소 콩데 공 앙리 드 부르봉[7]과 함께 10월 3일의 몽콩투르 전투에 참전했다. 1570년 6월 26일 16세의 나이로 아르네르뒤크 근처에서 처음으로 출전하여 위그노 기병대를 지휘했고 이후 푸아투에서 부르고뉴 심장부에 이르는 황폐해진 지역을 오랫동안 원정했다.

2.2. 나바르 국왕

1570년 8월 평화조약이 체결된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에게 아주 관대한 포교령이 내려졌고 내전의 종식을 기대하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아이디어[8] 앙리 2세와 카트린의 막내딸 마르그리트 공주와의 혼담이 프랑스와 나바르 사이에서 오갔다. 이 혼담은 1572년 봄까지 질질 끌다가 두 어머니들 간의 합의로 마침내 그는 마르그리트와 결혼하게 되었다.[9]

둘의 결혼이 확정된 뒤에 먼저 파리로 떠난 잔 달브레가 파리에 도착하고 2개월 뒤인 1572년 6월 9일 호흡기 질환으로 승하하면서 앙리 드 나바르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 나바라의 국왕 헨리케 3세가 되었다. 이후 8월 18일 예정대로 마르그리트 공주와 노트르담 성당에서 혼인성사를 하면서 카트린과 잔의 의도대로, 대립했던 발루아 가문과 부르봉 가문이 화해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풀릴 거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앙리와 마르그리트의 결혼식이 열린 1572년 8월 24일에 프랑스 역사상 손꼽히는 대학살인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나 버렸다.

위그노파의 콜리니 제독이 아들인 샤를 9세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카트린이 가톨릭파의 기즈 공작가와 결탁해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샤를 9세를 충동질하여 벌인 대학살극 당시 헨리케 3세는 카트린에 의해 반쯤 감금당하기도 했고 그 사이에 콜리니 제독을 포함한 파리에 있던 위그노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면서 고립되고 말았다.[10] 이후 프로테스탄트를 포기하라는 샤를 9세의 명령에 굴복해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3년 동안 감금되었다.

이후 파리에서 그럭저럭 유폐생활을 보내던 중 샤를 9세가 죽고 앙리 3세가 즉위한 후 암군으로 돌변하면서 1576년을 기점으로 국내의 혼란을 틈타 탈출하여 나바르 왕국에 도착해 다시 위그노로 개종해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나바르 왕국은 신교도의 집결지[11]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헨리케 3세는 제6차 위그노 전쟁(1576~1577)에서 신교도의 맹주가 되었다.

하지만 헨리케 3세는 위그노들이 계속 연패를 해오면서 열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하여 1577년 위그노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베르주라크 평화조약을 체결했으나 가톨릭 진영에서 가론 강 연안의 라레올 성을 점령하자 곧바로 폴뢰망스를 기습 공격했다. 1580년 봄에 카오르를 공격해 점령했고 나아가 1583년 자신의 소유지였던 몽드마르 시가 반환되지 않자 야간 공격을 감행해 점령했다.

1584년 2월 앙리 3세의 동생인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가 네덜란드의 신교도인 빌럼 판 오라녜에 의해 네덜란드의 군주로 추대받았다가 안트워프의 참변으로 많은 병력을 잃고 실의에 빠져 파리로 돌아온 후 죽으면서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 발루아-앙굴렘 왕가의 가까운 친척으로는 나바르 부르봉-방돔가의 헨리케 3세와 그의 숙부였던 루앙의 추기경 샤를 밖에 없었는데 특히 헨리케 3세의 경우, 앙리 3세와는 그닥 멀지 않은 6촌 형제 관계[12]였지만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계로는[13] 21촌 관계였다.[14] 하지만 살리카법에 의해 훗날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2.3. 제8차 위그노 전쟁(세 앙리의 전쟁, 1587~1589)

후계자 문제로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지만 앙리 3세는 위그노인 나바르 왕 헨리케 3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기즈 가문을 위시한 가톨릭 동맹(즉 신성동맹) 내에서도 가톨릭의 성직자였던 헨리케 3세의 숙부 샤를을 다음 왕위계승자로 내세우면서 헨리케 3세는 기즈 공작 앙리를 위시한 가톨릭 동맹과 대립했다.[15] 1587년 10월 20일 헨리케 3세는 8,000명의 국왕군을 이끌던 앙리 3세의 총신 안 드 주아이외즈 공작을 쿠트라 전투에서 격퇴했다. 그러다가 1588년 12월 23일 블루아에서 앙리 (1세) 드 기즈와 그의 동생인 추기경 루이 (2세) 드 기즈가 앙리 3세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전황은 헨리케 3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앙리 드 기즈의 죽음은 그와 그의 기즈 가문이 앙리 3세의 왕권을 노골조로 무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시 앙리 3세는 모후 카트린의 설득으로 위그노들의 자유권을 폐기하는 느무르 조약을 체결했으나 선포 이후 군중들의 환희에 답하지 않고 떠났기에 가톨릭의 경멸을 받기 시작했으며 쿠트라 전투에서의 대패 이후에도 사치를 전혀 줄이지 않아 수도 파리의 시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1588년 5월 12일 파리에서 앙리 드 기즈의 농간으로 보이는 시민 봉기(일명 바리케이드 사건)가 일어나자 모후인 카트린이 앙리 드 기즈와 협상을 하는 동안 측근들을 데리고 파리를 탈출해 샤르트르로 피신했고 같은 해 7월 19일에는 앙리 3세가 루앙에서 기즈 가문을 위시한 가톨릭 동맹에 유리한 11개의 조항으로 된 연맹조약을 발표했는데 부르주, 오를레앙 등 4개의 도시를 가톨릭 동맹에게 제공하는 불합리한 내용이었다.

결국 1589년 1월 5일 앙리 3세의 정치적 충고자이면서 후원자였던 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사망하면서 암살당한 기즈 공작 앙리와 루이 드 기즈의 동생이었던 마옌느 공작 샤를를 비롯한 가톨릭 동맹에 의해 앙리 3세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프랑스의 대도시 대부분이 공개적으로 앙리 3세에게 적대감을 표했으며 삼부회마저 등을 돌렸고, 표면적으로나마 충성을 하던 파리의 대법원도 1월 16일 16인 위원회에 의해 해산되고, 가톨릭 동맹을 대변하는 새 대법원이 세워지면서 프랑스 전역의 고등법원마저 가톨릭 동맹편에 서는 등 모든 권력과 명예가 실추되자 앙리 3세에게는 그나마 손을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위그노의 수장인 나바르 왕 헨리케 3세 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앙리 3세는 헨리케 3세와 손을 잡게 되었고 1589년 4월 3일 두 사람의 앙리는 1년 기한의 공식적인 조약을 체결한 후 같은해 4월 29일에 각자 조약을 발표했다. 5월 8일 가톨릭 동맹군이 투르로 쳐들어왔으나 헨리케 3세가 이끌던 위그노군에 의해 앙리 3세가 구원을 받았다.

이후 두 왕은 함께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2개월 동안 준비를 했고 같은 해 7월말에 42,000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파리 성벽에 도달한 후 파리 서쪽 생-클루에 위치한 레츠 백작의 저택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허나 8월 1일 파리가 포위되는 와중에 브레앙 백작이 보낸 자라고 말한 가톨릭 도미니코회 수도자인 자크 클레맹이 앙리 3세에게 편지를 건내 그가 편지에 정신을 팔리는 사이 자크 클레맹에게 치명상을 입게 되었고 병상에서 문병을 온 헨리케 3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권하며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로써 필리프 6세에 의해 개창된 지 261년만에 파란만장했던 발루아 왕조가 단절되었다.

2.4. 제9차 위그노 전쟁(1589~1598)과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치세

앙리 3세의 암살 이후 발루아 왕조의 맥이 사실상 끊기자 나바르 왕 헨리케 3세가 사실상의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되었고 이 때 프랑스와 나바르 동군연합이 되었다.[16] 한편 연합군 내에서 앙리 3세를 따르던 가톨릭 교도들이 위그노였던 앙리 4세를 져버리고 탈영하면서 앙리 4세도 잠시 뒤로 물러나야 했고 몇 주일 뒤 노르망디의 아르크 성이 보이는 곳에서 마옌 공작 샤를 드 기즈와 싸웠으며, 1590년 3월 14일에는 이브리 전투에서 마옌 공작을 패퇴시켰다.

그 사이에 앙리 4세의 경쟁자이기도 했던 숙부 샤를[17]이 죽으면서 왕의 정통성은 견고해졌고 가톨릭 동맹은 죽은 앙리 3세의 큰 누이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딸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를 내세우는 등 살리카법을 무시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앙리 4세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1591년 4월 10일에 샤르트르가 앙리 4세에 의해 함락되면서 앙리 4세는 차츰 가톨릭 세력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1593~1594년쯤 되면 앙리 4세의 군대는 파리를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샤르트르에 이어 누아용까지 점령했으나 루앙만큼은 점령되지 못하자 앙리 4세는 1593년 7월 25일 프랑스 국왕들이 묻히는 생 드니 대성당에서
"파리는 미사를 드려서라도 가질 가치가 충분하다"(Paris vaut bien une messe)
는 명언을 남기고 가톨릭으로 원복[18]했다.

앙리 4세의 개종은 그의 재정적 후원자이기도 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를 경악시킬 정도로 국외의 신교도들에게 파격적이었으나 장기간의 종교 내전으로 고난을 겪은 프랑스인들은 환영한 조치였다. 이후 오를레앙과 리옹이 복종했고 1594년 2월 27일 샤르트르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른 후 3월 22일에 파리에 무혈입성했다.[19]

이후 가톨릭 동맹 치하에 있던 여러 도시들이 앙리 4세에게 복종했고 은 포위공격 끝에야 겨우 복종했으나 브르타뉴만큼은 앙리 4세에게 복종하지 않고 스페인의 지원을 받으며 계속 저항했다. 결국 1595년 1월에 앙리 4세는 스페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6월 5일 부르고뉴의 풍텐프랑세즈 전투에서 스페인 기병대를 격퇴했으나 그 보복으로 스페인군은 캉브레칼레, 아르드르를 점령했다.

1595년 9월 17일에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앙리 4세의 파문을 취소하고 프랑스 왕위 계승을 인정했으나 여전히 스페인군은 프랑스령에서 떠나지 않았고 앙리 4세는 6개월 동안 라페르를 포위 공격해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1597년 3월에 스페인의 기습 공격으로 아미앵이 점령되면서 3월 11~12일 동안 스페인군에 의해 수도 파리가 공격받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앙리 4세는 기적적으로 병력을 재편성한 후 9월 19일에 아미앵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자신의 서자와의 결혼을 미끼로 브르타뉴 총독인 매르쿼르 공작 필리프 에마뉘엘 드 로렌[20]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21] 1598년 4월 13일 앙리 4세는 낭트에서 역사적인 < 낭트 칙령>[22]을 통해 위그노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5월 2일 스페인과 베르벵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기나긴 전쟁을 끝냈다.[23]

2.5. 암살

이후 위그노 전쟁으로 황폐해진 프랑스의 복구에 힘쓴 뒤 회복된 국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맹주 자리를 두고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항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1610년 5월 14일 가톨릭 광신도였던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 1578~1610)에게 암살당했다.

이때 앙리 4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논의하려고 재상인 쉴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전날인 5월 13일에 아내인 마리 드 메디시스가 정식으로 왕비 대관식을 치렀으며[24] 그 다음날에는 대관식과 관련된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파리 시내에는 교통체증이 발생한 상태였다.[25][26] 그래서 국왕의 마차가 가지 못하자 근위병들이 길을 트게 만든다고 국왕의 마차에서 떨어졌는데 그때를 노렸던 라바이약이 국왕의 마차 문을 열고 들어가 앙리 4세를 칼로 2번이나 찔러 죽였다.

앙리 4세의 유언
"으윽! 칼에 찔렸다!"
였다.

이때 마차에 같이 타고 있었던 몽바존 공작 허큘레가 암살을 저지하려고 라바이약에게 덤볐으나 실패했다. 라바이약은 허큘레도 죽이려고 칼을 휘둘렀으나 비명을 듣고 달려온 근위병들에게 제압당하면서 허큘레까지 죽이는 것은 실패했다. 그렇게 허큘레는 치명상을 면했고 치료를 받아 살아남았다.[27] 라바이약은 바로 근위병들에게 얻어맞고 체포되었다.

앙리 4세의 암살은 당시 프랑스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신하들은 공범자를 알아내기 위해 체포된 라바이약한테 고문했지만[28] 그는 끝까지 배후는 없고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했으며 결국 그의 주장을 반박할 근거는 나오지 않았다. 라바이약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약 2주 후인 5월 27일 파리의 그레브 광장에서[29] 거열형에 처해졌다.

거열형으로 조각난 라바이약의 시신은 불태워져 파괴되었고 무덤도 만들어지지 못했다. 다만 서양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연좌제가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에 가족들에게는 형사처벌이 없었다. 대신 라바이약의 부모는 프랑스에서 강제추방을 당했고 남은 가족들은 '라바이약'이라는 성을 쓰지 않는 조건으로 프랑스 거주가 허락되었다.

앙리 4세는 죽은 후에 방부처리되어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지만 프랑스 혁명 때 혁명군들이 생 드니 대성당을 약탈하고 훼손하면서 역대 국왕, 왕비, 왕족들의 시신과 함께 앙리 4세의 시신도 훼손되었다. 훼손된 앙리 4세의 시신은 2개의 구덩이에 일단 파묻고 생석회로 막아 놓았는데 왕정 복고 후 루이 18세가 이를 수습하고 복구했다. 더불어 이 약탈 때 시신의 머리는 잘려나가 민간에 넘겨졌는데 200여년 동안 떠돌던 앙리 4세의 머리는 한참이 지난 2010년에 신원이 겨우 밝혀져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흔히 서양사에 관심이 있다면 자주 듣게 되는 별명인 유럽 중국을 만들어낸 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프랑스는 언제나 유럽을 대표하는 강대국이었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앙리 4세 이전에는 플랜태저넷 왕조 잉글랜드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제국 등 분명 프랑스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높은 국력을 가진 상대가 존재했다. 그러다가 앙리 4세가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 1589년부터 프랑스는 전 유럽이 한 편을 먹어야 겨우 상대가 되는 수준으로 그 위상이 올라갔고 그 위상은 손자인 루이 14세 때까지 약 150년간 유지되었다.

앙리 4세는 정치와 군사 양면에서 모두 능란한 수완을 발휘했고 그 수완에 걸맞은 업적을 세웠다. 이 항목에서는 주로 정치만 다뤄지는데 그는 불리해 보이는 여러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었고 당대 최고의 명장인 스페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도 한 번 물 먹였을 만큼 군사쪽으로도 재능이 뛰어났다.[30] 오죽하면 그 평가에 인색한 프랑스인들로부터 대왕의 칭호를 받았을까.[31]

3.1.1. 쉴리 공작과 재정 강화

재상으로 쉴리 공작을 뽑았다는 것도 업적 중 하나인데 앙리 4세 대에 프랑스의 국고를 채우고 농업과 상공업을 진흥시킨 것은 쉴리 공작의 치정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정세를 주도한 기간이 그리 길지 않긴 하다. 쉴리는 앙리 4세보다 한참 어렸고 그 때문에 프랑스 왕국의 정책에 있어 앙리 4세가 연륜에 기반하여 좀더 선견지명을 발휘한 부분도 없지 않다. 그래서 앙리 4세와 쉴리의 관계는 본문에서 연상되는 루이 13세와 리슐리외의 관계보다는 루이 14세와 콜베르의 관계에 가깝다. 앙리 4세가 최종적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데는 놀랍게도 위그노였던 쉴리의 충고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다만 이 때문에 쉴리는 다른 위그노들에게 경멸을 받았고 위그노였기 때문에 가톨릭들에게도 증오의 대상이었기에 앙리 4세가 암살되면서 실각되고 말았다. 다만 귀족들의 세금 부담을 늘리게 되자 귀족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어 앙리 4세가 죽은 뒤에 폭동을 일으키게 되었다.[32]

3.1.2. 1주일에 1닭

''이 프랑스의 상징이자 국조가 되었던 것도[33] 앙리4세 치정의 상징인데 앙리 4세가
"반드시 모든 백성들이 일요일마다 닭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

고 맹세했기 때문이다.[34] 위정자의 애민정신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앙리 4세 치세 말기와 루이 13세의 치세를 거치며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고, 그랬으니 국민들로부터 선하신 왕 앙리, 앙리 대왕의 칭호를 받았으리라. 코코뱅이라는 프랑스의 닭고기 스튜 요리가 생겨난 때를 이 시점으로 잡는 설도 있으니 그 위상은 알 법하다. 당장 전국민이 매주의 하루 정도는 '고기'를 섭취하는 게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16세기가 아니라 21세기에도 어렵다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실현 불가능한 곳이[35] 꽤나 많다. 그런데 앙리 대왕은 이미 16세기에 이걸 이뤄냈다.

3.1.3. <낭트 칙령> 반포

1598년 유럽 역사상 최초로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 낭트 칙령>(Edit de Nantes)이 반포된 것도 바로 이 시기다.[36]
모든 이에게 믿고 싶은 종교를 믿을 자유를 부여한다. 누구도 종교를 이유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아니된다.

3.2. 부정적 평가

앙리 4세는 전술한 것과 같이 부정할 수 없는 업적들을 남겼지만 완전한 암군이 없듯이 완전한 현군도 존재하지 않는다. 앙리 4세의 오늘날 알려진 명성은 후대에 쓰여진 신화라고 볼 수 있다. 우선 앙리 4세는 가장 처음 인쇄술을 개인숭배에 사용한 군주 중 한 명이었다. 필립 모르네를 포함한 다수의 재상들의 권유에 따라 앙리 4세는 자신의 초상이 담긴 전단지를 돌렸고 옆모습이 새겨진 금화[37]를 유통시켰다.

3.2.1. 세무 정책과 매관매직

쉴리 재상의 경제 정책도 통상적으로 상상하는 명재상이 행할 정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쉴리의 세무 정책은 놀랍도록 효율적이었다. 1610년에 왕이 서거할 무렵 바스티유의 국고에 1,100만 리브르에 육박하는 돈이 보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거액의 돈은 도시계획, 인프라, 매립공사, 궁전을 건설하거나 북아메리카 퀘벡 지방 식민지화에 쓰일 선박을 설계하는 데 쓰였다. 하지만 쉴리의 정책의 핵심은 직접세를 경감하고 간접세를 가중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창설한 간접세 중 하나가 바로 매관매직이었다. 물론 공직 매매는 쉴리의 발명품이 아니라 선대 왕조부터 행해지고 있었지만 쉴리는 왕의 인가를 받아 이 행위를 관습화하고 체계화했다. 관직을 그저 파는 것이 아니라 관직을 판 뒤 세습권도 간접적으로 판매했는데 이것이 바로 폴렛(폴레트)이었다. 도입할 무렵에는 이런 즉각적인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았지만 18세기부터 왕에 대한 충성심과 업무처리 능력이 뛰어나야 할 고위 관료[38]들이 가문에 의존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루이 15세, 루이 16세의 몰락은 부분적으로나마 쉴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쉴리만의 책임은 아니다. 차라리 쉴리의 정책대로 매관매직만을 꿋꿋이 밀고 나갔다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시간은 조금 더 뒤로 미뤄졌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유는 시간이 흐르면서 기존에 매관매직으로 작위나 직위를 산 부르주아들, 즉 법복귀족들이 자신들이 얻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부르주아들의 유입을 막기 위한 이런저런 조치를 취해서 이른바 사다리 걷어차기를 시전한 것이 큰 문제였다. 매관매직이 문제가 많았어도 그래도 매관매직은 부르주아들에게 귀족이 되는 길을 열어주었고 부르주아들이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을 보면 비록 앙시앵 레짐이 문제가 많아 언젠가는 한 번 터질 일이었겠지만[39] 적어도 부르주아들에게 계속 매관매직을 통한 기회라도 주었다면 폭발하는 시간만은 늦췄을 것이다.

동양에서 이런 걸 했다가는 나라 망칠 짓 취급받을 것이고 실제로 이를 공식적으로 시행한 후한 영제는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허나 이는 동•서양의 차이를 감안해야 하는데 동양에는 무려 한나라 시절부터 공식적인 인재 등용 제도가 있었고 당연히 영제 시기에도 그 제도대로 인재를 뽑는게 원칙이었다. 즉, 영제는 멀쩡히 제도와 원칙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관매직이라는 방법을 썼기 때문에 욕을 먹는 것이며 매관매직한 결과도 좋지 못해서 더 욕을 먹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는 마땅한 인재 등용 제도가 없었고 기껏해야 추천이나 세습 정도가 전부였다. 즉, 세습이나 천거 같은 동양에서는 빠르면 7세기, 늦어도 10세기에는 벗어난 방식을 이 때는 물론 그 이후에도 쓰고 있었다. 유럽에서 시험으로 인재를 뽑는다는 발상은 중국의 과거제도를 보고 떠올린 발상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매관매직은 나름대로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습은 혈통이 중시되고 추천도 어쨌든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루어지므로 소위 고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매관매직은? 돈이 있으면 직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기존 신분 외의 사람들도 등용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매관매직으로 돈이 뽑혀나간 사람들이 백성을 수탈하거나 할 수 있겠지만 수탈하는 데는 귀족도 왕도 피장파장이었다. 그래서 사실 진짜 순수 매관매직만 했다면야 나름대로 그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계속 돈 들고 도전해 와서 나름대로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되는 등 문제가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진짜 문제는 세습권의 판매였다. 세습권까지 나오니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세습이 가능해졌고 결국 세습제가 실상 그대로 유지된 꼴이 되었다. 차라리 순수 매관매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문제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40]

3.2.2. 호색한

유명한 사실이지만 여색을 무진장 밝혔다. 이명 "Le vert galant"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엄연한 정실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생을 통들어 거쳤던 여인의 수가 50여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덕분에 그의 또다른 별명은 팔팔한 오입쟁이였다.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 국민들이 오히려 이 때문에 앙리 4세를 더 좋아했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가 남녀를 불문하고 성적으로 굉장히 개방적이고 문란한 편이긴 했다.[41] 오히려 정부를 한 명도 두지 않는 장남 루이 13세[42]와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만 충실했던 루이 16세는 성 불구 루머에 시달리면서 심각하게 바보 취급을 받았으니 그야말로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진담으로 통용되던 시절의 일이라고 해야 할까. 다만 말년에 15세 소녀에게 빠져 자신의 봉신과 위장결혼시키려고 했으나 봉신이 이를 눈치채고 소녀를 자기 영지로 데려가 버리자 그 소녀를 되찾겠다고 전쟁까지 벌이려고 한 것은 당대에도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전쟁 준비 중이었던 앙리 4세가 암살당하면서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그 중 가장 충격적인 일화는 앙리 4세보다 무려 41세나 어렸던 샤를로트 드 몽모랑시와의 러브스토리다. 당시 55세이자 금사빠이던 앙리 4세는 14세의 명문가 소녀 샤를로트와 사랑에 빠졌다. 한창 꽃다운 나이의 이 소녀를 외간 남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앙리 4세는 실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는데 바로 샤를로트를 자신의 당질이자 게이였던 콩데 대공 앙리(당시 20세)와[43]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콩데 대공 앙리 2세는 남자를 좋아한 거지 부인을 공유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샤를로트와 함께 네덜란드로 도주했다. 현 시점에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앙리 4세의 파란만장한 러브라이프는 프랑스 사회에 엄청난 파급력을 몰고 왔다. 2번이나 개종한 이력이 있는 데다[44] 항시 종교적 문제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보였던 앙리 4세는 개신교와 가톨릭 두 진영 모두에게 버림받고 말았다.

다만 앙리 4세는 정략이나 계산 때문에 호색한으로 알려진 역사상의 다른 군주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정부들이 단순히 즐기기 위해 잠시 만났던 정도였다. 심지어 그렇게 만난 정부들의 나이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 또 어떤 의미로든 대단하다. 다만 정부 중 하나였던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엄청나게 아껴서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이혼한 후에는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려고 했는데 문제는 가브리엘이 결혼식 직전에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색을 밝혔으니 가정생활도 당연히 막장이었다. 심지어 첫 번째 아내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앙리 4세와 서로 거침없이 맞바람을 피우고 다녔다.[45] 하지만 이와 무관하게 마르그리트는 앙리 4세와의 합의로 이혼한 후에도 '프랑스의 공주이자 왕비' 지위를 유지했고 앙리 4세와 그의 2번째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는 물론 그녀가 낳은 앙리 4세의 자식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이러한 호색적인 기질로 인해서 2번째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와도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한술 더 떠 앙리 4세는 마리에게 자신의 사생아들과 마리 소생의 왕자녀들이 함께 교육을 받도록 강요했고 사생아들에게 '내 아들'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했다. 앙리 4세가 쉴리 공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부부의 불화를 하루 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마누라는 5일이나 삐져있다"며 불평했을 정도다. 허구헌날 부부싸움을 벌이는 두 부부를 말리러 쉴리 공작이 항상 호출받았다고 한다.

첫 번째 왕비와 이혼하고 두 번째 왕비를 맞아들이는 바람에 아들 루이 13세[46]를 늦게 본 것이 약점이었다.

당대 군주들 치고 정부가 없는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없는 사람이 비정상이라고 손가락질를 받던 시대였으며 여자에 관심이 없음에도 왕가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정부를 만들어 잠자리에 든 군주들도 많았기 때문에 호색한인 점이 실책으로 볼 수는 없다.

3.3. 총평

종합해서 볼 때 앙리 4세는 강화된 왕권으로 부국강병에 힘썼고, 특정 종교를 편애하지 않은 덕에 가톨릭/위그노로 두쪽났던 프랑스의 국론을 봉합했으며, 세금을 인상해 내전으로 파탄났던 국고를 다시 충당했고 매관매직으로 부르주아 같은 신진 세력을 중앙 정계로 진출시켜 시민 의식을 성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거기에 극적인 죽음을 맞아 앙리 4세는 단숨에 미움받는 왕에서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예수회 극렬 추종자 프랑수아 라바이약의 암살로 인하여 국민의 증오는 앙리 4세에서 예수회와 암살의 배후로 추정되는 스페인 왕국으로 옮겨갔다.[47] 하지만 왕권 강화에 힘써 귀족 반대파의 미움을 사고, 종교적 신실함에 대한 의심으로 종교인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문란한 생활과 세금 인상, 매관매직을 일삼아 여론에게 지탄받았다.

결론적으로 보면 앙리 4세에 대한 평가가 미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대의 평가일 뿐이다. 당대 종교인들에게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귀족들에게는 권력 강화에 힘쓰며 국민들에게는 사생활은 문란하고 세금을 많이 걷으며 매관매직에 열을 올렸으니 어느 누구도 좋게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앙리 4세가 즉위하기 전 프랑스는 40년 가까이 종교적인 이유로 위그노 전쟁이라는 참혹한 내전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 위그노들의 파워가 루이 14세때가 되어서야 겨우 사라지는 걸 감안하면 앙리 4세로서는 어느 한쪽 편에만 설 수 없는 노릇이었고, 왕으로서 권력을 강화하는 것과 그에 따라 귀족이 불만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으며 매관매직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또 어떻게 보면 새로운 인재 등용법인 만큼 부르주아처럼 돈은 있지만 귀족과의 혈연도 없고, 인맥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을만한 면도 있었으며, 사생활은 앙리 4세가 좀 심한 면이 있지만 다른 왕들이라고 사생활이 깨끗한 건 아니었다. 그나마 세금 인상 정도가 욕을 먹을 수 있겠지만 주구장창 헛된 전쟁만 하느라 세금을 과중하게 물린 후대의 왕들에 비하면 낫다. 실제로도 앙리 4세 시기는 위그노 전쟁을 거친 만큼 후대의 왕들보다야 세금을 거두어 재정을 충당해야 하는 필요성은 있었다. 결국 당대 입장에서는 앙리 4세는 미움받기 딱 좋은 왕이었지만 후대의 입장에서 본다면야 위그노 전쟁의 혼란을 종식하고 수습한 명군으로 보일 수 밖에 없고 가장 중요한건 후대에 내려진 대왕이라는 평가로 함축된다.

4.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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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마르고', 영어로는 '마고')
첫 번째 왕비. 1599년에 앙리 4세에게 이혼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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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 드 메디시스
두 번째 왕비. 루이 13세를 포함해 3남 3녀를 낳았다. 뤽상부르 궁전은 이 사람을 위해 증축되었다. 마리 드 메디시스와의 결혼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우선 프랑스가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빌린 차관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외손녀와 결혼함으로써 부르봉 왕가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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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브리엘 데스트레
앙리 4세가 가장 사랑한 여인. 계비 마리 드 메디시스 이전에 3남 1녀를 낳았으며 결혼하기 직전에 사산아를 낳고 1599년 4월 10일에 죽었다.

4.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마리 드 메디시스
(Marie de Medici)
1남 루이 13세
(Louis XIII)
1601년 9월 27일 1643년 5월 14일 오스트리아의 아나[48]
슬하 2남[49]
1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비 이사벨
(Elisabeth, Queen of Spain and Portugal)
1602년 11월 22일 1644년 10월 6일 펠리페 4세
슬하 1남 1녀[50]
2녀 사보이아 공작부인 크리스티나
(Christine, Duchess of Savoy)
1606년 2월 10일 1663년 12월 27일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
슬하 2남 4녀[51]
2남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
(Gaston, Duke of Orléans)
1608년 4월 24일 1660년 2월 2일 몽팡시에 여공작 마리 드 부르봉
슬하 1녀
로렌의 마르그리트
슬하 1남 4녀
3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
(Henrietta Maria, Queen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1609년 11월 25일 1669년 9월 10일 찰스 1세
슬하 3남 4녀[52]
가브리엘 데스트레 (사생아)
(Gabrielle d'Estrées)
1남 방돔 공작 세자르
(César, Duke of Vendôme)
1594년 6월 3일 1665년 10월 22일 로렌의 프랑수아즈
슬하 2남 1녀
1녀 엘뵈프 공작부인 카트린 앙리에트
(Catherine Henriette, Duchess of Elbeuf)
1596년 11월 11일 1663년 6월 20일 엘뵈프 공작 샤를 2세
슬하 3남
2남 슈발리에 드 방돔 알렉상드르
(Alexandre, Chevalier de Vendôme)
1598년 4월 19일 1629년 2월 28일

정부 가브리엘 데스트레에게서 낳은 사생아들부터 두번째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에게서 낳은 적자녀들을 모두 늦은 나이에 가졌다. 당장 적자 서자 통틀어 모든 자식들 중에서 맏이인 세자르도 41세에 얻었고 적장자이자 후계자인 루이 13세는 무려 48세에 얻었다.[53] 때문에 향년 56세라는 당시 평균으로는 그닥 적지 않은 나이에 죽었지만, 뒤를 이어 즉위한 루이 13세는 아버지의 사망 당시 고작 9살에 불과했고 그 아래의 자녀들은 더 어렸다.

5. 기타

발루아 왕조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매우 증오했다. 프랑스의 왕위를 두고 치열하게 다툰 일생 일대의 적이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하다. 거기에 카트린이 죽을 때 유언장에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은 것에 대해 앙금을 가졌다. 덕분에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죽은 이후에도 제대로 장례조차 치러지지 못하고 시신마저 어딘가의 성당 바닥에 묘비도 없이 묻혀 지내야만 했다. 그래도 통치자로서의 카트린은 긍정적으로 본 모양인지 그녀에 대해서 이런 평을 남겼다.
남편의 죽음으로 졸지에 어린 자식들을 품에 안고서 왕위를 빼앗을 생각만 하는 두 가문, 즉 우리 가문(부르봉 가문)과 기즈 가문에 맞서야만 했던 그 불행한 여인이 도대체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로서는 자기 자식들이 계속 왕국을 통치할 수 있도록 두 가문을 속여가면서 기이한 사람의 흉내를 내야만 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그녀가 그만큼이라도 해낼 수 있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그나마 이게 긍정적인 평가라고 하니 카트린에 대한 앙리 4세의 증오를 알 수 있다. 희한하게도 첫 번째 왕비가 바로 그토록 증오한 카트린의 딸 마르그리트였는데 증오하던 여인의 사위가 된 셈이다. 게다가 마르그리트와의 혼인을 무효화한 뒤 결혼한 두 번째 왕비인 마리 드 메디시스도 똑같이 카트린의 친척이었다. 마리와의 결혼은 토스카나 대공가였던 메디치 가문의 지참금을 노린 정략적인 결혼이었다.

6. 대중매체


[1] 한국에서는 "하느님은 프랑스 국민이 적어도 매주 일요일에는 닭고기를 먹기 원한다.", "프랑스의 국민이라면 적어도 매주 일요일에는 닭고기를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등으로 알려져 있다. [2] 프랑스 왕국의 비공식 국가 <앙리 4세 행진곡>(Marche Henri IV) 중. 왕을 술고래, 싸움광에 호색한이라고 욕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남자답다고 칭찬하는 것이다. 2절은 더 웃긴데 자기는 예쁜 여자와 좋은 포도주가 좋다고 뜬금없이 취향고백을 하는 내용이다. [3] 엄밀히 말하면 직계는 아니다. 부르봉 공작의 직계는 피에르 2세의 딸인 쉬잔느 드 부르봉이 자식을 얻지 못한채 죽으면서 끊겼고 쉬잔느와 결혼했던 몽팡시에 백작 샤를 드 부르봉이 부르봉 공작 샤를 3세가 되었으나 이탈리아 전쟁에서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초대 왕 프랑수아 1세를 배반하면서 부르봉 공작위가 박탈되었다. 이후 샤를 드 부르봉이 사코 디 로마 와중에 죽으면서 부르봉 가문은 부르봉 공작 1세의 방계인 방돔 공작 가문이 이었다. 초대 부르봉 공작 루이 1세는 카페 왕조의 제9대 왕이자 중세 최고의 명군인 '성왕' 루이 9세의 막내 아들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와 부르고뉴의 베아트리스(부르봉 영지의 상속녀) 사이의 장남이었다. [4] 나바라 넘버링으로는 ' 호아나 3세'로 저 멀리로는 카페 왕조의 제12대 왕 루이 10세의 먼 후손이다. 따라서 앙리 4세는 부모 양쪽으로부터 성왕 루이 9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5] 앙리 4세가 처음부터 개신교 신자였다는 건 잘못 알려진 사실이며 태어났을 때 세례는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았다. 아버지 방돔 공작 앙투안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머니 잔 달브레는 아주 신실한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부부간에 종교가 달라서 말 그대로 박터지게 싸웠을 것 같지만 사실 앙리의 아버지 앙투안은 정치적 야심도 없었고 종교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거기에 앙투안은 상당한 공처가였던지라 아내인 잔의 종교도 존중했다. [6] 잔 달브레의 어머니 마르그리트 당굴렘이 개신교도였다. [7] 자르냐크 전투에서 전사한 숙부 콩데 공 루이의 아들이었다. [8] 가톨릭이라면 치를 떨던 잔 달브레로서도 내치기는 아까운 제안이었는데 앙리를 카트린의 아들들 다음 순위의 왕위계승자로 인정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으며 앙리 드 나바르가 프랑스 궁전에 있을 때 고려된 적이 있었다. [9] 앙리의 외할머니 마르그리트 당굴렘과 마르그리트의 친할아버지 프랑수아 1세가 남매이기 때문에 둘은 육촌이기도 했다. [10] 당시 부르봉 가문과 위그노 전쟁에서 자웅을 겨뤘던 기즈 가문의 살생부에 의하면 헨리케 3세는 부르봉 가문의 당주였기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었으나 차마 사위이자 남편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한 카트린과 마르그리트의 비호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신 심복들을 붙여놓고 밤낮으로 감시했다. [11] 나바르 왕국이 위그노에 동정적이었던 것은 헨리케 3세의 외조부 나바르 왕 앙리 2세(바스크어로는 '헨리케 2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바르와 가톨릭의 악연은 그보다 좀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교황 율리오 2세가 주도하여 프랑스의 루이 12세에 대항한 신성동맹에서 나바르 왕국은 중립을 선언했다가 이전부터 나바르를 노리던 페르난도 2세에게 탈탈 털리고 왕가는 파문당한 적이 있었다(…). [12] 앙리 3세의 친할아버지 프랑수아 1세와 헨리케 3세의 외할머니 마르그리트 당굴렘이 남매였다. [13] 프랑스는 이미 필리프 5세 시절부터 여성의 왕위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법이 정착됐다. [14] 앙리 3세와 헨리케 3세의 공통 조상인 '성왕' 루이 9세 드 카페를 기준으로 하면 헨리케 3세로부터 10세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루이 9세가 나오고 앙리 3세로부터 11세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루이 9세가 나온다. [15] 내전에 관여하던 세 세력의 지도자의 이름이 모두 앙리[54]였기에 이를 세 앙리의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6] 덤으로 나바르 왕이 겸하던 안도라 공동 공( 프린스)의 지위도 이때부터 프랑스 국왕이 겸하게 되었으며 루이 13세 때 이르러 프랑스와 나바르는 아예 한 나라로 통일되었다. [17] 놀랍게도 추기경이었다. [18] '원복'은 원래 가톨릭이었다가 타 종교로 개종한 사람이 가톨릭으로 다시 돌아와 개종함을 말한다. 전술했지만 앙리 4세는 위그노로 자라긴 했어도 어릴 적에 태어나면서 가톨릭 유아세례를 받았으므로 원복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다. [19] 이때 또 다른 유명한 명언으로 "짐은 공동묘지를 통치하고 싶지 않다."가 있다. 이 발언을 통해 가톨릭과 위그노 양대 세력이 저지른 병크에 지쳐 있던 민중의 인심이 위그노가 아니라 앙리 4세에게 쏠리게 된다. [20]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마지막 왕 앙리 3세의 처남으로 이복누나였던 로렌의 루이즈의 결혼과 함께 프랑스로 와서 브르타뉴 총독이 되었지만 종교전쟁 당시 6촌 형인 로렌 드 기즈 공작 편에 섰다. 이 사람의 진외증손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 오스트리아의 명장 사부아 공자 외젠을 칼치니토 전투에서 패배시킨 프랑스의 명장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이었다. [21] 앙리 4세는 필리프 에마뉘엘 드 로렌의 딸과 자신의 서자인 세자르 드 부르봉-방돔을 결혼시켰다. 그 결과 매르쿼르 공작 작위는 방돔 가문에서 소유하게 되었다. 방돔 가문이 1727년에 단절되자 이 작위도 단절되었다. 이후 콩티 가로 넘어가지만 1770년 콩티 공이 작위를 부르봉 왕실에 팔았고 샤를 10세의 작위로 만들어졌다. 1830년부터는 오를레앙 왕실로 가서 간간히 만들어지는 듯 하다. [22] 후에 손자 루이 14세가 이를 무시하고 탄압을 재개하여 대부분의 위그노들이 국외로 망명하거나 개종했으며 결국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을 폐기해 버린다. 다만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과는 달리 <낭트 칙령>의 폐기는 프랑스 국내에서 위그노의 씨를 말려버 렸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23] 다만 프랑수아 1세의 외손자로 프랑스 왕위를 노렸던 사보이아 공국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와의 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1601년 리옹 조약으로 사보이아 공국의 살루초 합병을 인정하는 대신 오늘날 앵 데파르트망에 해당하는 브레스(Bresse)와 뷔제(Bugey) 지역을 양도받았다. [24] 앙리 4세는 이런저런 정치적 이유로 마리 드 메디시스의 정식 대관식을 미뤄 왔다. 물론 1600년 12월 17일 리옹에서 결혼식은 올렸다. [25] 암살 장소는 파리의 시장이었던 레알 부근의 페로느리 가(Rue de la Ferronnerie)였으며 페로느리 가와 생트오포튠 가(Rue Sainte-Opportune)의 교차 지점에 그곳이 앙리 4세의 암살 장소임을 알려주는 석판이 현재 존재한다. [26] 제1차 세계 대전의 서막이 된 사라예보 사건 때도 교통체증 상태를 이용한 암살이 행해졌다. 이렇게 비슷한 사례들이 빈번해지자 오늘날에는 전현직 국가원수가 움직일 때 일부러 신호등을 조작하며 미리 도로를 비워놓는 방법을 쓰고 있다. [27] 허큘레 공작은 앙리 4세의 최측근이자 충신인 터라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 앙리 4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본인이 지원하여 장례식을 주관했다. [28] 종교에 미쳐서 국왕을 살해하고 고위급 귀족도 죽이려고 한 대역죄인이었다는 것도 극심한 고문을 당한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라바이약이 심문당할 때부터 자신의 범행을 전혀 반성하지 않고 "앙리 4세는 죽어 마땅하며 나는 죽는 게 안 무섭다."는 망언을 하며 도발을 한 것도 고문을 당한 이유가 되었다. 이에 앙리 4세의 신하들이 제대로 분노하여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기 때문에 라바이약의 몸은 고문 후 거열형에 처해질 때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29] 오늘날의 파리 시청 앞 광장으로서 19세기까지 주요 사형 집행이 행해지던 곳이다. 미셸 푸코의 저작인 《감시와 처벌》의 맨 처음에 나오는 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앵에 대한 사형 집행 장면의 무대도 이 곳이다. [30] 물론 파르네세는 그 전에 앙리 4세를 전략적으로 완전히 물 먹이고 파리를 수복한 바 있었다. 문제는 가톨릭의 삽질로 다시 전황이 앙리 4세측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파르네세는 다시 한 번 프랑스로 투입되었는데 이번에는 단단히 대비하던 앙리 4세에 막혀 큰 성과 없이 철수했으며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31] 참고로 부르봉 왕조에서 앙리 4세와 함께 대왕의 칭호를 받은 루이 14세는 그의 능력이 아니라 절대권력 덕택에 대왕의 칭호를 받았다. 앙리 4세가 그 능력에 대한 찬사의 의미로 대왕 칭호를 받은 것과는 그 느낌이 많이 다르다. [32] 리슐리외, 마자랭 등 재상의 과중한 업무는 부르봉 왕조의 특징이기도 하다. [33] 물론 프랑스인의 조상인 켈트족은 원래부터 닭은 신성하게 여겼다고 한다. 차이점은 이후의 다른 켈트계 국가들은 닭이 그 의미를 잃었지만 프랑스에서만은 앙리 4세의 영향으로 나라의 상징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34] 먼 훗날 미국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앙리 4세의 선언을 손봐 '모든 냄비에 닭고기를, 모든 차고에 자동차를'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하필 세계 대공황이 오는 바람에 대차게 망해버렸다. [35] 당장 북한만 해도 김일성이 1962년에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내세웠지만 40년 넘게 하지 못하고 있어 토끼 기르기 운동을 장려하고 있지만 현실은... [36] 1685년 루이 14세에 의해 폐지되었다. 당시 루이 14세는 "더 이상 프랑스에는 위그노가 없습니다"라는 신하들의 아첨을 듣고 할아버지가 반포한 <낭트 칙령>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37] 전단지와는 달리 금화에 왕의 얼굴을 그려넣는 것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비롯된 긴 전통이다. [38] 특히 사법부 [39] 법복귀족들의 횡포는 대검귀족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았다. 예시로 이 시기에 이르면 봉건제적 관습들이 사문화되어 있었는데 경제적 압박 등 여러 요소로 이런 관습들을 캐내어 부활시켜 평민들의 증오를 미치도록 받았다. 농민들이 프랑스 혁명 당시 귀족들을 학살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40] 비슷한 시기 영국의 군대는 계급을 매관매직으로 구매해야 승진이 가능했다. 영국은 순수 매관매직으로만 승진이 가능했고 가격도 귀족이 지불하기에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 장교들은 나름 열심히 싸웠다. 몇 번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을 획득할 경우 한몫 단단히 잡고 그걸 바탕으로 승진값도 벌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영국의 매관매직 제도는 크림 전쟁에서 문제점을 노출했고 폐지하게 되었다. [41] 현대의 프랑스도 크게 다르진 않다. 전임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도 그렇고, 니콜라 사르코지도 그랬고, 현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도 여자문제가 굉장하다. 나폴레옹 3세도 도시마다 정부를 둘 정도로 여색이 대단했고 대통령궁에서 오입질을 하다가 복상사 펠릭스 포르도 있다. 아내, 가족들에게만 충실했고 여자문제, 사생활 추문이 일절 없는 대통령은 샤를 드골이 유일하다. [42] 루이 13세의 경우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에게 훈육 같은 학대를 받아 여자를 싫어하는 왕이 되었고 정략결혼한 아내 안 도트리슈와 사이가 가장 나빴다고 한다. [43] 앙리 4세의 사촌인 콩데 대공 앙리 1세 드 부르봉의 아들인 앙리 2세이며 훗날 '대 콩데'로 불리는 콩데 대공 루이 2세의 아버지다. [44] 당시 가톨릭 교회는 한 번의 개종은 '실수'로 받아들이며 허용하고 있었다. [45] 사실 마르그리트가 후사를 낳지 못해서 그랬다는 설도 있다. [46] 장남인 루이 13세와는 무려 48세 차이가 났다. 한술 더 떠 손자인 루이 14세와는 85세나 차이가 났다. [47] 사실 정치적 성공과는 무관하게 암살된 리더들을 보면 대부분 존경받거나 적어도 의견이 갈리는 인물들이다.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쓸 정도의 인물이라면 탄핵이나 선동 같이 일반적인 정치적 술수를 동원해도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지지층이 탄탄하거나 정적을 벼랑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 정도로 정치력이 뛰어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48] 펠리페 3세의 장녀이다. [49] 루이 14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50] 프랑스 왕비 마리 테레즈 [51] 프란체스코 자친토,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 [52] 찰스 2세, 오라녀 공비 마리아, 제임스 2세 & 7세, 오를레앙 공작부인 앙리에트 [53] 세자르와 루이 13세를 얻은 나이 모두 당대는 물론 현대에도 노산이며 지금보다 결혼과 출산이 훨씬 빠른 당대에는 손주를 봐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