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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6:29:42

알베르트 케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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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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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원수
Reichsmarsc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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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Luftwaffe
1940
헤르만 괴링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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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c0><colcolor=#000> 나치 독일 제2대 공군참모총장
알베르트 케셀링
FM Albert Kesselring
파일:Bundesarchiv_Bild_183-R93434,_Albert_Kesselring.jpg
출생 1885년 11월 30일
바이에른 왕국 마르크슈테프트
(現 독일 바이에른 운터프랑켄 현 마르크슈테프트)
사망 1960년 7월 16일 (향년 74세)
서독 헤센 주 바트나우하임
묘소 베르그프리트호프 묘지
재임기간 제2대 공군참모총장
1936년 6월 3일 ~ 1937년 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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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c0><colcolor=#000> 신체 179cm
복무 독일 제국 육군
1904년 ~ 1918년
국가방위군
1918년 ~ 1933년
나치 독일 공군
1933년 ~ 1944년
최종 계급 원수 (나치 독일 공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 전역
주요 서훈 금강석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전간기2.3. 루프트바페로 전속2.4. 제2차 세계 대전 초기2.5. 제2차 세계대전 중기2.6. 제2차 세계대전 후기2.7. 네로 명령 방치 논란2.8. 전후
3. 평가4. 보직 내역5. 진급 내역6. 서훈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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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236c686fbec26bb61905879ab978409b.jpg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 국방군 루프트바페 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육군 포병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했으나, 루프트바페가 창설되자 전속되었다. 그러나, 말기 육군도 지휘했으며 이탈리아 전선에서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시키는 공을 세웠다. 전후 이탈리아 빨치산 사살을 명령한 전범으로 체포되어 이탈리아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감형되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5년 11월 30일 바이에른 마르크슈테프트의 학교 선생겸 시의원의 아들로 출생했다. 1904년 육군 사관후보생으로 제2 바이에른 포병 연대에 입대하였다. 소위 임관한 후에는 뮌헨 소재의 공병학교를 수료했다.

그러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다. 이때 공을 세워 철십자 훈장 1, 2급을 받았다.

1917년 참모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나, 참모직으로 전임되었고, 제1바이에른 사단을 따라 동부전선으로 전출되었다. 그리고 1918년 서부전선으로 다시 돌아왔고, 얼마안가 종전을 맞는다. 이때 계급은 대위였다.

2.2. 전간기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은 제정이 폐지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지만, 정국은 혼란 상태에 빠졌다. 좌익 세력은 러시아를 모방한 소비에트를 만들어서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기로 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우익 세력과 군부는 " 자유군단"(Freikops)을 만들어 좌익 세력과 싸웠다. 케셀링도 여기에 가담하여 좌익 세력과 싸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반란 주동 혐의를 받고 잠시 구속되기도 했다.

정국이 안정된 후 케셀링은 다시 육군 포병장교로 근무했고, 이후 베를린의 국방부에서 훈련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 동안 그는 국방부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제한을 교묘히 회피하는 군의 조직 경량화를 책임졌다. 또한 소련과의 비밀 군사 협력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1929년 다시 바이에른으로 돌아와 7군관구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다시 야전으로 돌아가 중령으로 진급했다.

2.3. 루프트바페로 전속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 국방군은 비밀리에 공군을 재건하려 했다. 케셀링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가 비행국의 책임자가 되기 위해 대령으로 진급한 뒤 형식적으로 군에서 예편, 민간 항공부의 책임자가 된다. 이것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규정된 공군 보유 금지를 회피하기 위해 쓴 꼼수이다.

케셀링은 민간 항공 산업의 방향을 틀어 전투기 제조 기술을 재건하는 데 힘을 썼다. 이 때문에 공군에 사용될 신형 전투기들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후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자, 이제는 민간 항공부로 가장할 필요 없이, 이 조직은 바로 루프트바페(Luftwaffe, 공군)가 되었고, 케셀링은 다시 군인이 되어 소장으로 진급, 장군이 되었다. 1936년에는 중장이 되었다.

케셀링은 공군으로 전속되자 48세의 나이에 스스로 항공술을 배워 조종사 자격증을 땄고, 공군 전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1주일에 3-4일은 꼭 비행기를 스스로 몰았다고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1936년 1차 대전 때부터 활약하던 베테랑 장교인 공군참모총장 발터 베버가 사고로 사망하자 케셀링은 그의 후임이 되었다. 케셀링 장군은 이 자리에서 나치 독일의 실력자였던 헤르만 괴링의 비호를 받아 독일 공군의 확장에 정력적으로 힘을 기울였으며, 비행기뿐만 아니라 공수부대의 창설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그러나 케셀링은 원래 육군, 그것도 전선에서 화력 지원을 맡는 병과인 포병 장교 출신이라서 공군의 역할을 지상군을 지원하는 전술적 운용에만 신경을 썼고, 당시 개념이 싹트고 있던 전략 폭격 같은 것은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이때문에 독일 공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 독소전쟁에서 한창 제공권을 잡았을 때 적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전략 폭격 같은 것은 전혀 생각도 못했다.

한국 밀덕후들은 독일 공군이 전술 공군으로만 특화된 것을 괴링의 책임만으로 돌리고 있으나, 학계에선 케셀링과 같이 육군 비 항공병과 출신의 공군 장교들에게 더욱 책임이 있다고 본다. 오히려 괴링은1차 대전 때부터 육군 항공대 에이스 조종사로 직접 전쟁을 치렀고 실제로 격추도 기록했기 때문에 공군이 육군의 보조역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작전하여야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고, 케셀링 등이 제창한 "육군의 대포 격인 전술 공군"의 개념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괴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셀링이 하던 대로 놔두었다. 참고로 케셀링은 정통 공군 출신인 공군총사령관 에르하르트 밀히 공군 원수와도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독일 공군은 스페인 내전에 " 콘도르 군단"을 파병하여 공군의 활용 가능성을 테스트했고, 케셀링 장군은 이들의 작전을 지휘하였다.

2.4.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이 발발하자 케셀링 장군이 사령관으로 있는 제1항공 함대(Luftflotte I)는 개전 첫날 폴란드 공군을 섬멸하고 제공권을 장악했다. 케셀링 장군의 제1항공함대는 페도어 폰 보크 육군원수가 지휘하는 북부집단군의 하급 부대가 아니기 때문에 케셀링 장군은 보크 장군의 명령을 듣지 않아도 되었으나, 자진해서 보크 장군의 지휘를 받았고, 북부집단군의 공중 지원에 충실했다.

케셀링 본인도 전투기를 몰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폴란드 공군기에 격추되었다. 운 좋게도 케셀링은 살아남았고, 이후에도 이런 식으로 참전했다가 2차 대전 내내 5번이나 격추되었다. 케셀링은 이때 공적으로 기사 십자장을 받았다.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는 제2항공함대를 맡았다. 케셀링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저지대 국가들의 복잡한 수로망과 요새를 돌파하기 위해 공습뿐만 아니라 공수부대 강하같은 복잡한 작전안을 세우고 검토했다. 케셀링은 호흡이 잘 맞는 보크 장군의 B 집단군을 다시 지원하게 되었으며, 네덜란드과 벨기에 정복에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영국군 프랑스군 됭케르크에 못 박혀 있어서 쉽게 섬멸할 수 있었으나, A집단군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가 정지 명령을 내려서 진격을 멈추게 된다. 케셀링 장군은 이것이 치명적 실수라고 생각했다. 육군이 진격을 멈췄기 때문에 독일군은 공군만으로 프랑스-영국군의 철군을 막아야 했으나, 영국 전투기들이 몰려와서 영프 지상군의 공습에만 집중할 수 없고 공중전을 치러야 했다. 슈투카 부대들이 공중전에 취약했으므로, 제2항공함대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철수를 엄호하는 과정에서 영국 공군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어쨌든 영프군의 철군은 막을 수 없었다.

케셀링 장군은 프랑스 작전의 성공으로 드디어 원수로 진급하였다.

프랑스 침공이 독일의 승리로 일단락된 직후, 케셀링의 제2항공함대는 곧 영국 공습을 맡게 되었다. 케셀링의 부대는 주간 폭격을 맡게 되었으나 영국 공군을 무력화시키려던 작전 목표는 실패했다. 케셀링은 초기부터 런던을 공습하면 영국은 손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상당한 기강동안 괴링에 의해서 거부되었고 한참 뒤에나 수용되게 된다.

2.5. 제2차 세계대전 중기

2.5.1. 독소전쟁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케셀링 장군이 지휘하는 제2항공함대는 또다시 보크가 지휘하는 중앙집단군의 보조를 맞추게 되었다. 워낙 소련 공군의 준비 태세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개전 첫날 소련군은 제2항공함대에 2천여 대의 전투기를 잃었다. 물론 대부분의 전투기는 출격도 못 해 보고 지상에서 파괴당했다. 전과가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에, 헤르만 괴링조차도 이를 믿지 못해서 여러 번 확인 명령을 내렸고, 육군이 전진하면서 이를 확인한 결과 이 전과를 확인했다. 이렇게 대량으로 전투기를 잃어버리자 소련군은 1942년까지 말까지 제공권을 독일에 내주었다.

이렇게 제공권을 장악하자 제2항공함대는 지상 작전의 지원 임무를 맡게 되었다. 11월에 독일군은 모스크바 점령을 위해 태풍 작전을 실시하였다. 케셀링의 제2항공함대는 지상군 지원뿐만 아니라 모스크바를 폭격했으나, 이미 모스크바는 런던처럼 촘촘한 방공망이 갖춰져 있었고 소련군 전투기들도 대규모로 출격하여 케셀링의 전투기 부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지상군도 소련 육군의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지휘한 반격에 패퇴하였다.

그러나 전선이 붕괴된 육군보다는 공군의 전력은 사용 가능했고, 독일 공군은 제공권을 이용하여 몰려오는 소련군을 공습하여 1월에 겨우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다만 케셀링 장군은 전투가 한창인 11월에 이탈리아를 맡는 남부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참모들과 이탈리아로 갔다. 이는 공군 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의 육군 및 해군, SS 부대까지 지휘할 수 있는 자리였고, 동부전선에 남겨졌던 제2항공함대도 모스크바 공방전이 소강상태가 이르자 이곳으로 옮겨왔다.

2.5.2. 지중해 아프리카

케셀링 장군의 임무는 이탈리아 방어 외에 에르빈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 군단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제2항공함대는 몰타를 공습하여 영국 공군 기지를 무력화시켰고 지중해의 제공권을 장악했다. 케셀링의 제2항공함대는 이 제공권을 바탕으로 롬멜 장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지원했고, 롬멜은 연전 연승을 거두었다. 이 공적으로 케셀링은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게 된다.

케셀링은 좀 더 효율적으로 아프리카 군단을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몰타 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앞선 크레타 섬을 영국으로 부터 빼았은 공수부대를 투입하는 작전을 펴려고 했다.(헤라클레스 작전) 하지만 클로드 오킨렉과 버나드 몽고메리의 강력한 소모전과 고질적인 보급 문제로 고통받던 롬멜은 몰타 점령보다는 신속하게 영국군의 이집트 왕국방어선을 분쇄하기 위한 공세작전에 이 공수부대를 사용하겠다고 했다. 히틀러는 앞선 크레타 섬 전투에서 공수부대가 엄청난 피해를 본 것 때문에 공수작전을 불신했고 결국 케셀링보다는 롬멜의 손을 들어줬다, 롬멜의 공세는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군의 강력한 방어선에 저지되며 큰 피해를 본다. 히틀러의 공수작전 불신과 독일 공군의 역량이 토브룩, 엘 알라메인 전선에 집중 되어 있는 동안 작전 공백을 이탈리아 해군과 공군이 전혀 메꾸어주지 못하면서 영국군은 몰타 기지를 재건하는데 성공하였고 크레타 섬에서의 패전 이후 일시적으로 독일쪽으로 넘어갔던 제공권과 제해권을 되찾아왔다.[1] 이에 대해 케셀링이 옳았다고 평가하는 시각도 있지만 크레타 전투에서 공수부대의 주축이었던 7항공사단은 전멸판정을 받고 재편 중에 있었고 무엇보다 공수작전을 도와줄 수송기 조종사들의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는 엘 알라메인 전투 패배 이후 11월 독일군 제 5낙하산 연대가 튀니지에 실시한 공수작전에서 조종사들이 엉뚱한 위치로 날아가는 바람에 작전을 말아먹은 것으로 반증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히틀러가 케셀링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들 직전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보며 재편성이 시급했던 독일군 공수부대들이 영국이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방어시설을 떡칠해놓고 있던 헤라클레스 작전을 정말로 성공시킬 수 있었는지는 미지수 이다. 독일군 공수부대가 전장에서 낙하산을 매고 그나마 제대로 활동하기까지는 1943년 10월까지 기다려야 했다.[2] 결국 아프리카 작전은 결국 독일- 이탈리아군 포로 27만 5천명을 남기고 참패로 끝난다.

2.6. 제2차 세계대전 후기

1943년 케셀링 장군은 이탈리아 방어를 위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계속된 참패에 베니토 무솔리니조차 전쟁에 흥미를 잃고 있었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주도로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연합군과 강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무솔리니가 실각했다는 소식을 들은 케셀링 장군은 단숨에 휘하의 기갑사단과 공수사단을 이용하여 이탈리아군 5개 사단이 지키고 있는 로마를 무혈 점령하였다. 이탈리아군은 무장 해제되어 장병들은 모두 귀가 조치되었고, 자원자만 받아들여 독일군의 보조 부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무장 해제를 거부한 이탈리아군 포로들은 모두 사살되었다.

케셀링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군은 알프스를 통해 병력을 증원했고, 이탈리아 반도를 종단하는 아펜니노산맥을 끼고 여러 개의 방어선을 겹겹히 구축해 영미군을 종전 때까지 잘 막아 내었다. 특히 제공권이 없으면서도 공군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연합군의 보급선들을 기습하여 많은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케셀링은 1944년 10월 교통사고를 당해 1월까지 요양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 육군의 뷔히팅호프 장군이 이탈리아 전역의 사령관 자리를 이어받아 끝까지 방어전을 펼친다. 어쨌든 그동안에도 이탈리아의 독일군은 연합국의 공세를 잘 막아 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역은 동부전선이나 서부전선처럼 전쟁 전체의 승패를 결정하는 전역이 아니었다.

1945년 3월 연합국의 공세를 막지 못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육군원수가 서부전선 총사령관(OB WEST)에서 파면당하고, 여기에 케셀링 장군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케셀링 장군이 대단한들 패색이 짙은 전선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했고, 어쩔 수 없이 독일군은 밀리기만 했다.

결국 독일은 항복했고, 케셀링 장군도 미 육군 제101공수사단에 항복, 포로가 되었다. 케셀링 장군은 끝까지 히틀러의 신임을 받은 몇 안 되는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2.7. 네로 명령 방치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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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의 항복이 얼마 남지 않았던 1945년 3월, 히틀러는 네로 명령을 통해 독일의 모든 산업과 통신, 교통 시설을 파괴하여 폐허만을 연합국에 넘겨 주라는 명령을 반복해서 내린다. 이는 패배자인 독일 국민 또한 살아갈 자격이 없기 때문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군수부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는 부하인 군수부 관계자와 민간 단체, 국방군 장성을 극비리에 만나 "만일 우리가 지난 몇 년 동안 발휘했던 것과 같은 의지를 보여 준다면, 독일 국민들은 더 이상의 타격을 입지 않고 살아날 것이다. 지도부는 국민의 생존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말을 전하며 어떻게든 히틀러의 명령을 현장에서 백지화할 것을 노력하였다. 군부에서는 당시 독일 산업의 7할을 책임지고 있던 루르 공업 지대를 방어하는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 바익셀 집단군(비스툴라 집단군) 사령관으로 베를린 방위전의 임무를 맡은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상급대장, 광산 지대에 주둔한 G집단군 사령관 파울 하우서 친위대 상급대장은 처음부터 슈페어와 협력하였고 이들은 민간 사업가들과도 꾸준히 대화를 나누며 어떻게든 산업시설과 교량을 파괴하지 않으려 애썼으며, 심지어 전투 손실마저 최소화하려고 최적의 요새나 포병 기지가 될 수 있는 공장 시설을 연합군에 그 위치를 통보하고 양자 합의를 통해 비전투 지대로 선언하는 등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면 즉결 사형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독일 산업 시설을 사수하였다.

그럼에도 모델, 하우서의 상관인 서부전선 총사령관 케셀링은 아예 히틀러의 네로 명령에 대해 슈페어나 군수부 관계자들과 논의하려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았고, 작전 회의에서 히틀러에게 주민들의 비협조적인 모습[3]을 그대로 보고하여 노약자들마저 항복이 허락되지 않고 거주지에서 강제로 소개당하는 '강제 소개 명령'을 내리는 데 일조하였다. 오히려 그의 참모진 가운데 나치당 관계자가 히틀러에게 주민들의 비협조적인 모습을 어떻게든 자제해서 보고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더욱 큰 문제는 위의 네로 명령이 국방군 총사령관 빌헬름 카이텔에 의해 재차 독일 전역에 통보되었을 때 케셀링은 자신의 메모를 덧붙여서 모든 군 사령관들의 참여를 위해라는 내용을 문서화시켰는데 이러한 강조 명령은 네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책임은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G집단군 사령관 파울 하우서가 떠맡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고 한다. 네로 명령을 막으려고 노력하기는커녕 히틀러의 눈치만 살피며 그대로 강행하면서 정작 불이행 책임은 자신이 회피하여 휘하 지휘관인 모델과 하우서에게 떠맡긴다는, 그야말로 총사령관으로서 이중적인 행보 그 자체였던 것.

결과적으로 루르의 산업 시설은 '전투 중 손실은 있었으나 파괴되지 않았고', 소련군과의 전투도 치열했고 히틀러의 직접 명령을 받은 무장친위대가 마지막까지 폭파 명령을 이행하려 한 베를린의 다리들은 10분의 1만이 파괴되어 800개가 넘는 교량이 안전했으며 파울 하우서 친위대 상급대장이 주둔하고 있던 산악 지대의 철도와 교량도 대부분 온건히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여기에 서부전선 총사령관 케셀링의 공로는 전혀 없었다.

2.8. 전후

케셀링은 포로 수용소에 있다가 이탈리아 법정의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케셀링의 혐의는 두가지였는데 이탈리아 민간인 300여명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고, 빨치산 용의자들을 무조건 처형하라는 명령이었다. 케셀링은 이 혐의들을 부인하는 대신 이것이 정당한 명령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편으로 케셀링은 이탈리아 고대 문화재나 유적지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연합국 장성들도 케셀링의 군사적 업적도 대단하지만, 매우 신사적으로 전투를 벌인 것을 참작해 달라는 탄원서를 냈다. 영국에서는 윈스턴 처칠과 알렉산더 원수까지 여기에 동참했다. 결국 케셀링의 사형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이때 프란츠 할더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전사 정리를 도와주었다. 이후 목에 종양이 발견되어 건강이 악화, 1952년 석방되었다.

이후 케셀링은 여러 참전자 단체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는 극우 단체였다. 게다가 회고록이나 인터뷰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학살이 정당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독일 공군은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 (즉 패배는 독일 육군 탓이라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애초에 회고록을 펴낸 독일 장성 중 자신이 벌인 전쟁범죄나 독일의 침략 전쟁에 대해 반성을 한 경우는 거의 없다. 문제는 정계로 가면 독일에는 이런 사람이 없는데, 군부에는 이런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4]

3. 평가

공군에서나 육군에서나 지휘관으로서 능력이 경지에 다다른 인물이다. 초기 독일군의 대승리에 기여하고 다른 전역에서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북이탈리아에서 2년 간 연합국의 공세를 막아낸 것은 그의 지휘력을 증명한다.[5] 부하로부터 평판도 좋아서, "알베르트 아저씨"나 "웃는 알베르트"라고 불렸다.

하지만 만렙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평가와는 별개로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히틀러에게 런던을 폭격하면 영국이 항복할 것이라며 런던 폭격을 주장하다가 히틀러로부터 '자넨 베를린이 폭격당하면 항복하겠나?'라는 망신을 당한 바 있듯이 실책도 많았는데 그 외에도 아프리카 군단을 구원하기 위해 스탈린그라드에서 괴링이 주장한 것과 같은 대규모 수송 작전을 미군이 제공권을 장악한 하늘에서 전개했다가 432대의 각종 항공기를 잃는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수송기 부대와 호위 전투기들의 피해가 어마어마함에도 케셀링이 계속 수송 작전을 지속하자 손실에 깜짝 놀란 괴링(그 괴링이) 작전 중지를 명령했을 정도로 케셀링이 말아먹은 파일럿들과 비행기들의 숫자는 엄청났다.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전투는 신사적으로 치러서 연합국의 평판도 좋았으며,[6] 이 때문에 사형을 면했다고 하나 단지 이 사실만이 승자인 연합군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위의 네로 명령 방치 사태에도 볼 수 있듯이 정작 최고 지휘관으로서 독일의 산업 • 교통 • 통신 시설의 파괴는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며 방치하였다. 또한 히틀러에게 민간인들의 비협조 상황을 고스란히 보고하여 독일 서부 주민들에 대한 강제 소개 명령을 내리는 데 일조하였으며, 총통 벙커에서의 군사 회의에서도 정확한 보고를 올리지 않고 히틀러의 망상에 그대로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서부전선 총사령관인 아첨꾼 카이텔과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 마치 한 편의 괴상한 연극과도 같았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의 전쟁범죄를 반성한 적은 한 번도 없으며, 수용소에서 슈페어가 '어째서 히틀러의 명령이 두절된 뒤에도 다리 폭파 작업을 계속했는지' 질문하자 '전투가 진행되는 한 다리는 폭파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석방된 이후에도 여러 참전자 단체에서 독일의 침락 전쟁을 미화한 흑역사 때문에 독일 연방군 내에서도 없는 사람 취급당한다.

4. 보직 내역

5. 진급 내역

6. 서훈 내역


[1] 다만 그렇다고 영국 해군이 완전히 재해권을 넘겨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영국은 독일의 에니그마를 해독하여 롬멜의 보급계획을 매일 아침 처칠의 책상 앞에 놓여지고 있었기 때문. 크레타 섬에서의 패배 이후 영국 지중해 해군이 한시적으로 독일 공군과 이탈리아 해군의 협동 공격에 크게 고생을 한 정도 이다. [2] 이후 전황이 급해지자 공수부대는 그냥 정예 알보병 부대로 투입되었고 팔레즈 포켓에서 크레타-북아프리카-이탈리아 전선에서 경험을 쌓은 베테랑 공수부대원들이 전멸하면서 아르덴 대공세때 실시한 대규모 공수작전을 완전히 말아먹었다. [3] 당시 점령지 근처의 주민들은 주둔 독일군에게 자신들은 이대로 영미 연합군에 항복할 테니 물러나 줄 수 없느냐고 통사정하거나 백기를 창에 걸고 독일군의 주둔을 바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4] 사실 이런 장성들의 회고록은 어느정도 자기변명이 들어가는건 드문 일은 아니다. 홀시도 레이테 해전에서 자신의 황소의 질주라는 삽질을 킨게이드에게 있다는식으로 슬쩍 떠넘기려고 했다가 사이가 틀어졌다는 일화가 있고 니미츠도 이런 문제점 때문에 장성들이 회고록을 쓰는걸 싫어했다. 그렇다고 저렇게 안쓰면 비판자들의 좋은 먹이감이 되는게 '그 당사자 조차도 이런건 인정했다.'는 근거로 쓰이기 때문. 이 사례가 영국의 존 젤리코 제독이다. 물론 독일 장성들의 회고록은 그 경향이 심한건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구데리안의 회고록은 자신의 상관이었던 클라이스트를 비판했는데 사실 클라이스트는 기병 병과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구데리안과 만슈타인을 대표로한 기갑혁신파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로 대표되는 보수파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안을 제시하며 프랑스 침공을 승리로 이끌었다. 만슈타인은 겨울폭풍 작전의 실패를 파울루스에게 떠넘기지만 당시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의 제6군은 기동력을 상실한 알보병으로 파울루스가 만슈타인의 정예군조차 뚫지 못한 소련군 포위망을 극복하기에 무리라고 판단한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쿠르스크 전역또한 히틀러가 공격을 미루어서 패배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소련군은 독일군이 해당 지역을 노린다는 사실을 캐치하고 대비하고 있었고 오히려 기갑전력이 보충이 안된 상태에서 만슈타인 뜻대로 갔다간 소련군의 방어선에 더 쉽게 무너졌을것이다. [5] 다만 노르망디 상륙 이후로는 연합군의 주 공세가 프랑스로 이동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래도 그 이전까지 연합군의 공세를 지연시킨 점에서 실력이 있는건 분명하다. [6] 이는 알베르트 케셀링뿐만 아니라 서부 연합군을 상대로한 전선에서는 독일군은 전투 중 신사 협정을 자주 이행하였다. 롬멜의 경우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과 포로 교환, 의약품 교환, 야간 전투 중지 등 신사적으로 전투를 임했고 이는 후임 폰 아르님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