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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00:15:58

신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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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泰嶽
1902년 3월 4일 ~ 1980년 10월 31일 (향년 78세)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

1. 개요

대한민국 법조인,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영월(寧越)[1], 창씨명은 미가와 다이다케(三川泰嶽) 또는 미가와 세이(三川淸)[2], 이명은 신수악(辛秀嶽), 자는 몽서(夢瑞), 아호는 일성(一星)이다.

2. 생애

1902년 3월 4일 함경북도 청진부 동면 사구동[3](現 함경북도 청진시 사구리)에서 아버지 백봉(白峯) 신종혁(辛鍾革, 1868. 6. 12 ~ 1938. 11. 11)[4]과 어머니 연안 차씨(1863. 2. 7 ~ 1940. 7. 22)[5] 사이에서 1남 3녀 중 외아들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경성부 관철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으로 이주했다. 이후 1919년 3월 당시에는 경성부 종로5정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 205번지에 거주했고, 1919년 6월 당시에는 경성부 종로6정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92번지에 거주했다.

14살 되던 1915년까지 한문을 수학했고, 1917년 4월 경성공업전습소(現 서울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3월 5일 경성부 남대문통4정목(現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4가) 숭례문 앞에서 학생대표로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복학하여 그해 졸업했다.

1922년 경성부 오성학교 교사에 부임했다가, 그해 겨울 휴가 중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 하단동 예배당에서 조선청년연합회에서 주최한 순회강연단의 일원으로 '現社會(현사회)의 新趨向(신추향)'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던 중 러시아의 현상을 말하자 당시 배석해 있던 일본 제국 경찰의 주의를 받았고, 이어 '우리 朝鮮(조선)사람은 朝鮮(조선)에서 나는 土産(토산)으로 입고 먹고 쓰고 하자'라는 말을 한 뒤 강연을 중지당했다. 이튿날 아침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돼 신의주경찰서에 송치되었고, "불온한 사상을 선전한다"는 이유로 신의주 경찰에 의해 구속 기소되었다. 그 결과 학교로부터 파면을 당했고, 1923년 2월 1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 1923년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상무위원에 취임했고, 이후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유학하여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서 1년간 수학했다. 그 뒤 와세다대학 주오대학에서 각각 수학하였다. 1927년 작성된 왜정시대인물사료 사회주의자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 이 당시까지만 해도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했을 것으로 보인다.

1931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귀국하여 1932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40년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태평양 전쟁을 지지하고 대동아 공영권 논리를 홍보하는 친일 연설을 하였다.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친일 단체에서도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우익 정치인으로서도 활동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1952년 자유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본부 감찰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국민당 윤치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5월부터 같은 해 9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정일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0년 10월 31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2가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4 제3대 대통령 선거 (서울 중구 갑)

[[무소속(정치)|
무소속
]]
3,475표 (17.61%) 낙선 (3위)
1963 제6대 대통령 선거 (서울 중구)

[[민정당|
파일:민정당 글자.svg
]]
15,307표 (26.5%) 낙선 (2위)


[1] #. 판서공파(判書公派) 36세 태(泰) 항렬. [2] 辛을 파자해서 三川으로 창씨한 것으로 보인다. [3] 구한말 함경북도 청진부 동면 상사구동·하사구동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함경북도 부령군 부거면 사구동 → 1949년 함경북도 나진군 부거면 사구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함경북도 부령군 사구리 → 1960년 함경북도 부령군 사구리 → 1967년 청진직할시 부령구역 사구리 → 1970년 함경북도 부령군 사구리 → 1972년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사구리 → 1977년 청진직할시 청암구역 사구리 → 1985년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사구리 → 현재 함경북도 청진시 사구리. [4] 초명 신재승(辛載昇). 1909년 부령군 향교, 1910년 청진부 향교 등에서 직원으로 근무했다. [5] 차극남(車極南)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