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9-21 21:56:42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라틴어: Servius Sulpicius Galba
생몰년도 기원전 94년 ~ 기원전 43년 이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미상
지위 파트리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조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아버지)
포스투미아(아내)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아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아들)
참전 갈리아 전쟁
직업 로마 공화국 법무관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갈리아 전쟁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으로서 활약했으나 카이사르와 마찰을 벌이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의 카이사르 암살에 동참했다.

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술키피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 가문은 기원전 500년에 최초의 집정관을 배출한 이래 클라우디우스, 파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등 유력 씨족들과 함께 고위직을 정기적으로 차지했다. 증조부 세르비우스 술키피우스 갈바는 기원전 144년 집정관을 역임하며 뛰어난 웅변가이자 가장 부유한 로마인 중 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조부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저명한 변호사였고, 아버지 세르비우스 술키피우스 갈바는 기원전 80년대에 총독의 부관으로 활동했던 것만 알려졌다.

학자들은 로마의 최고 행정관직을 획득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을 규정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법에 의거해 그의 출생년도를 기원전 94년으로 추정한다. 그는 기원전 61년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총독 가이우스 폼프티누스의 부관으로서, 폼프티누스를 대신해 알로브로게스 족을 상대로 선전했다. 다만 최종적인 승리는 중간에 지휘권을 인수한 폼프티누스에게 돌아갔다. 기원전 58년부터 갈리아 전쟁을 시작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으로 들어갔다.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에 따르면, 그와 카이사르는 친구였다고 한다.

기원전 57년 가을, 카이사르로부터 알프스 산맥에 거주하는 부족들을 평정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제12 군단을 이끌고 세두네스, 나투나테스, 바랑가스 족을 물리치고 복종시켰다. 이후 그곳에서 겨울 숙영에 들어갔지만 세두네스 족과 바랑가스 족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3만의 갈리아인에게 포위되었다. 진지에 쳐들어가려는 갈리아족을 상대로 6시간 동안 항전했지만, 숙영지가 함락 직전에 이르자 군단병 전원과 함께 필사적으로 돌격해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패주시켰다. 하지만 로마군 역시 피해가 컸기에 숙영지를 불태우고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로 철수했다.( 옥토두루스 전투)

기원전 56년 로마로 돌아온 그는 기원전 54년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기원전 52년 초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라는 이름의 인터렉스 폼페이우스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하는 선거를 조직했다고 한다.[1] 이 인물이 이 사람이 아니냐는 설이 제기되었지만, 학계에서는 그의 친척인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기원전 50년, 그는 카이사르의 추천을 받고 집정관 선거에 도전했지만, 폼페이우스 옵티마테스 파의 지원을 받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에 밀려 낙선했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생했는데, 이 당시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기원전 49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 키케로의 편지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이에 따르면, 그는 사제단의 일원으로, 집정관에 선출된 카이사르가 발칸 반도로 출진할 때 로마를 맡을 법무관 선거를 조직했다고 한다.

그는 카이사르와 친구 사이였으나 내전 시기엔 이렇다할 활약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심한 갈등을 빚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와 갈바는 빚 문제로 줄곧 논쟁을 벌였으며, 카이사르가 갈바의 아내 포스투미아와 불륜을 맺자 갈바가 분노했다고 한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 밑에서 집정관에 선출될 기회조차 받지 못하고 홀대받은 건 분명하다. 결국 그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과 함께 원로원 회의 때 카이사르를 암살했다.

기원전 43년, 갈리리아 키살피나 속주 현지 총독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무티나에서 포위 공격하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토벌하고자 출진한 현직 집정관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의 부관을 맡았다.( 무티나 내전) 히르티우스는 나중에 그를 동료 집정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에게 보내 안토니우스와의 대결에 협력하게 했다. 안토니우스는 판사를 공격하여 그에게 중상을 입히며 격퇴했지만, 며칠 후 현장에 도착한 히르티우스에게 패배했다. 이 당시 갈바는 판사의 군대의 우익에서 8개 대대를 지휘했다. 그 후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에 의해 숙청대상으로 선정되었으나,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아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총독을 역임했으며, 로마 역사에 관한 방대한 저작을 저술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또다른 아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비문으로만 전한다. 증손자 갈바는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이었으며, 네로 황제 사후 황제로 즉위했으나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에게 암살당했다.


[1] 당시 로마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패거리와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 패거리간의 격렬한 시가전으로 혼란에 휩싸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선거가 불가능했다. 원로원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에 선출하려 했지만, 소 카토 등이 "독재관이 아니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하라"라고 요구하여 관철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