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31 14:24:21

성냥팔이 소녀


파일:the-little-match-girl.jpg

1. 개요2. 줄거리3. 의의
3.1. 현실을 비판한 동화?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5. 혈다의 인터넷 애니메이션

[clearfix]

1. 개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단편 동화.

2. 줄거리

19세기 어느 12월의 마지막 날 밤[1]. 찬바람이 몰아치는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성냥을 팔던 누더기 차림의 한 성냥팔이 소녀는 아무도 성냥을 사 주지 않아 돈을 벌지 못했고, 그 상태로 귀가했다간 주정뱅이인 삼촌[2]에게 매를 맞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도 못했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신발들까지 한 짝은 마차를 피하는 과정에서 그만 눈에 파묻혀져서 잃어버렸고, 또다른 한 짝마저 동네 말썽꾸러기 소년들한테 빼앗기고 만다.

결국 추위를 피해 인적 드문 골목길에 앉은 소녀는 손이라도 녹이려고 성냥불을 켰다. 그런데 성냥 하나를 켤 때마다 신기하게도 소녀가 마음 속으로 늘 바라던 따뜻한 난로, 화려한 만찬[3], 크리스마스 트리 등의 환영이 차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녀는 그것들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도중에 성냥불이 꺼지자 그 풍경도 곧 사라져 버렸다.[4] 이윽고 하늘에서 별똥별이 하나 떨어졌는데, 소녀는 그 별을 보고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소녀가 세 번째로 성냥을 켜자 생전에 소녀를 무척 아껴주고 사랑해주셨던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나타났다.[5] 소녀는 행여나 할머니마저 사라져 버릴까 봐 필사적으로 남아있는 모든 성냥을 다 꺼내서 불을 붙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마저도 불이 꺼지자 소녀는 점점 흐려지는 할머니의 환영을 붙들려고 애쓰면서 울부짖었다.

그러자 할머니의 환영이 따뜻하게 웃으며 소녀를 자신의 품으로 이끌었고, 소녀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 천국으로 가서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와도 행복한 재회를 했다. 이제 소녀는 더 이상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온몸에 눈이 쌓인 채 쓰러져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주변에는 소녀가 몸을 녹이려고 켰던 성냥이 다 탄 채로 흩어져 있어 모두들 안타까워했고, 어제 저녁 성냥을 사지 않고 소녀를 무시한 자신들의 과거를 후회했지만 이미 어쩔 수 없었으며, 그러면서도 그녀가 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3. 의의

유명한 동화이긴 한데 한국적 정서에서는 당최 어린이들이 보라고 만든 게 맞는지를 알 수 없고 어린이들을 위한 교훈이나 권선징악적 요소가 거의 없고 비참하기만 하다. 꿈도 희망도 없는 잔혹 동화이자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준다.[6] 주인공인 소녀의 상황을 보면 집에는 폭력을 휘두르는 알코올 의존증 삼촌 내지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 이미 독립을 했지만 방세가 밀려서 쫓아내려고 기다리는 방주인이 있는 판본도 있다. 눈이 내리는데 그나마 신고 있던 신발의 한 짝은 마차를 피하다가 눈 속에 파묻히면서 분실했고 또다른 한 짝은 지나가던 어느 양아치 소년들이 훔쳐갔으니 웬만한 성인조차도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

판본에 따라서는 동사한 소녀의 시신을 보고 소년들이 뉘우치고 울면서 신발을 돌려줬다는 것도 있다. 아이들을 위한 버전 중에는 성냥팔이 소녀의 아버지가 폭력 가장으로 행패부렸던 걸 참회하는 버전도 있다.

소녀가 성냥을 켤 때마다 본 난로, 만찬, 트리는 소녀가 너무나도 간절히 원했던 나머지 환상을 본 것이고, 그 와중에 떨어졌던 별똥별은 소녀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복선이다. 자신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누가 죽은 걸까?"하고 어리둥절해하는 소녀의 모습은 참으로 가슴 아픈 장면이다. 그렇다 보니 성냥팔이 소녀는 동화가 아니라,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사회고발 소설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다지 길지 않은 동화지만 그 임팩트가 너무 강렬하여 안데르센의 동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을 어레인지해서 소녀가 불을 지른 다음 온기를 쬐다가 숨을 거두었다는 식으로 각색하는 일도 많다.

소녀가 환상을 보는 순서가 정신의학적으로 분석해봐도 완벽하다는 평가가 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소녀의 이름은 안나(Anna)이며 성은 그룬트이다. 원작의 가족관계로는, 갓난아기 시절에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셔서 삼촌한테 맡겨진 이후 세월이 흐를수록 학대와 구박이 심해져서 길거리로 내몰려 성냥을 파는 신세로 전락한 것. 2000년대 프랑스에서는 배경을 보스니아 내전 중의 사라예보로 바꾼 버전이 출간되었다. 대한민국에서도 보스니아의 성냥팔이 소녀라는 제목으로 정발되었다.

그 외에도 각박하게 메마른 사람들의 인심에 대한 질타, 인어공주에서와 같이 영혼 불멸에 대한 안데르센의 철학도 담겨 있다.

안데르센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 삼아 이 이야기를 썼다고 하며, 워낙 유명한 이야기다 보니 단편 애니메이션으로도 많이 나왔으며,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는 가족관계가 부각되는 바리에이션도 있고, 동사했다는 표현을 하기 위해 큼직한 얼음에 꽁꽁 둘러싸여 숨을 거두어 있는 표현도 있었다. 인어공주와 달리 아예 행복한 결말로 바꾸는 판본은 적다.[7]

3.1. 현실을 비판한 동화?

일부에선 성냥팔이 소녀는 실화를 모티브로 만든 즉, 일종의 사회고발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 시대에는 백린의 위험성이 알려져 있지 않아 백린성냥을 주로 사용했는데, 성냥팔이 소녀가 그 백린성냥을 한꺼번에 켠 상태에서 흡입했기 때문에 환각을 보다가 서서히 숨을 거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 그 성냥팔이 소녀는 원래 백린 공장에서 성냥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던 아동노동의 말단 노동자로 이미 오랫동안 백린에 노출되어 턱뼈가 점점 무너져내리는 백린 중독(Phossy Jaw)으로 망가지고, 공장은 당연하지만 이런 아이들을 쓰고 버렸다. 버리는 조건으로 던져주는 것이 돈이 되던 성냥 몇 갑인데, 그걸 팔아서 간신히 먹을걸 구하다가 끝내는 객사하는 산업혁명시대 아동노동의 비참함이 동화의 형태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냥 관련 노동자들의 백린 중독은 1839년에 빈의 의사 Lorinser에 의해 최초로 진단되었으며 유사 사례를 모은 보고서가 1844년에 발표되었다. 이후 1888년에는 성냥 업계의 여러 산업보건 문제에 대해 여성과 아동 노동자들에 의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8] 다만 소설이 발표될 당시인 1845년에는 백린 등에 관한 위험성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안데르센이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소설을 집필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당시의 열악한 노동 환경 자체가 어느 정도 모티브가 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위의 영상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영상의 서미에서 동화가 출판되기 2년 전에 발표되었다는 '런던 노동자와 빈곤층- 성냥팔이 소녀' 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실화의 근거로 언급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보고서가 아니라 신문 기사다. 그리고 그 기사에서는 성냥팔이 소녀의 일상만을 언급할 뿐 백린 중독 등에 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해당 기사를 제외하고도 현대에 쓰여진 글이나 백린과는 관계가 없는 글을 당시의 보고서인것처럼 내세우고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5. 혈다의 인터넷 애니메이션


2008년 대만의 개인 애니메이션 제작자 혈다가 제작한 인터넷 애니메이션으로 유튜브에 올라왔으며 총 18화 + 기타 외전으로 완결했다.

내용은 대략 1번 문단과 같은 것 같지만 뭔가 아스트랄하게 꼬여있다. 성냥팔이 소녀는 성냥을 전부 쓰면 반드시 숨을 거두며 매번 죽고 매번 살아날 때마다 엔젤하이로가 하나씩 늘어난다.

온갖 패러디들이 나오며 드래곤볼부터 시작해서 나루토, 죠죠의 기묘한 모험까지... 특히 14화의 광고는 건생중의의 패러디다.

막장 병맛 전개지만... 결말은 상상 이상으로 충격적이니 한번 정주행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13화는 그림체가 그로테스크하게 바뀌고 공포 테마의 스토리가 나오니 시청에 주의해야 한다.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대만만화월간 창간호에 이 애니의 만화판이 실렸으며 물론 지금은 흑역사다.
[1] 장편을 따라 크리스마스 시즌 밤이나 크리스마스 이브 날도 있는 버젼도 있다. [2] 장편에 따라 아버지나 집주인으로 바뀐 장면도 있다. [3] 구워진 거위 또는 칠면조가 소녀를 향해 걸어나오는 대목이 추가되기도 한다. [4]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려 있던 초들은 별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5] 소녀의 돌아가신 어머니나 아버지, 천사들이 나타났다는 버전도 있다. [6] 이렇게 동화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비극만 있는 작품의 대표적인 예시가 플랜더스의 개이다. 서양 전통에서는 오래전부터 마더 구스처럼 권선징악의 요소가 없기도 한 작품이 많이 나왔는데, 개인주의적 정서에서는 아이들에게 삶이 얼마나 다양하고 현실이 무엇인지를 알려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아이들에게 사회성 대신 글공부를 힘들게 시키는 것에 오히려 반응이 좋지 않다. [7] 2차 창작 역시 비극적 결말을 계승하거나 비뚤어진 재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지, 상쾌한 해피엔딩은 적은 편이다.(후술할 실질객관동화 버전은 본편은 비극적 결말이고, 그 이후에 "작가의 말"이라는 일종의 쿠키에 해피엔딩이 나온다.) [8] 이러한 시위들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된 영화가 에놀라 홈즈 2. [9] 사실은 나무하러 가다가 실수로 국경지대를 넘어가는 바람에 잡혔다. [10] 그리고 여기서 주인공은, 성냥팔이 소녀가 본 것을 "단순한 먹거리 따위"가 아닌 구체적인 행복을 위한 방법론으로 규정한다. 성냥은 수명이 짧아서 소녀가 결말에 도달할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는 가스불이 있으니 결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실제로 결말에 도달했으나... [11] 방금 전 처럼 과메기를 무한 리필 가능한데 왜 하나 남는지 의문. 굽는 불이 꺼져서 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