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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3-25 08:52:31

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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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전통 건축의 전형인 구도심의 옛 건물군

1. 개요2. 역사
2.1. 자이디 이맘국의 수도2.2. 현대
2.2.1. 예멘 내전
3. 갤러리
3.1. 구도심 사진들

1. 개요

아랍어 صَعْدَة
영어 Ṣaʿda

예멘 북부의 도시. 사다하, 사아다 등으로도 표기된다. 수도 사나에서 북쪽으로 120km 떨어진 분지에 위치한다. 예멘 주요 도시들 중 최북단에 자리하며,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국경과 불과 30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약 10만명으로, 예멘에서 10번째로 큰 도시이다. 역사적으로 자이디 이맘국의 첫 수도였고, 이후로도 그 핵심 거점이자 사나 정복을 위한 교두보였다. 순니 술탄들에게 나머지 지역을 상실한 후에도 이맘들은 거의 항상 사다를 거점으로 재기하였다. 그외에 북예멘과 히자즈 간의 교역 중심지로 번영하였으나 20세기 국경이 그어지고 전쟁이 벌어지며 그러한 역할은 중단되고 말았다. 또한 사다에는 19세기 초만 해도 1천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는데, 20세기 중반 이스라엘 건국 후 대부분 그곳으로 이주하여 소수만이 남아있다.[1]

현대까지도 사다는 예멘 시아파 (자이디야)의 중심지이며, 2004년 결성된 후티 반군의 발상지이다. 그 창건자인 후세인 바드르 앗 딘 알 후티 역시 사다의 서쪽 산지 출신이다 2011년 사다를 장악한 후티 군은 이곳을 거점으로 세력을 넓혀 마침내 2014년 사나를 함락, 예멘 내전을 촉발시켰다. 내전 이전에 사다는 시밤과 함께 구도심이 완벽히 보존된 예멘 도시들 중 하나였다. 온전히 남은 성벽과 알 하디 모스크, 시타델 등이 대표적인 유적이었다. 하지만 2015년부터 수차례 사우디의 공습을 받아 구시가지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고, 노약자 등 민간인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시가지 서북쪽 외곽에는 사다 공항이 있다. 해발 18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덕에 기후는 1년 내내 영상 5도 ~ 35도 정도로 적절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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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의 첫 국가인 마인 왕국을 거쳐 사바, 힘야르, 악숨, 사산 왕조 등의 지배를 거쳐 이슬람 제국에 속하였다. 8세기 들어 예멘 북부와 하드라마우트 지역은 종종 반란을 일으켰고, 9세기부터는 독자적인 왕조들이 세워졌다. 그러던 893년, 하산 빈 알리의 7대손이자 자이드파를 정립한 알 카심의 손자인 셰이크 야흐야 빈 후세인 알 카심 알 라시가 예멘에 당도하여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그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메디나로 돌아갔으나, 896년 북부 고원의 양대 부족인 하쉬드와 바킬 부족이 대립 끝에 그에게 분쟁 조정을 부탁하며 초청하자 이듬해에 추종자들과 함께 귀환하였다. 중재자로 나서 메다나를 장악한 선조 무함마드의 선례를 연상시키듯 성공적으로 분쟁을 조정한 야흐야는 해다 부족들의 지지를 받아 이맘 알 하디로 즉위하였고, 수도로 사다를 세웠다. 알 하디는 901년, 906년, 910년 3차례나 사나를 점령했으나 유지하지 못하였고 911년 사다에서 숨을 거두었다.

2.1. 자이디 이맘국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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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과 이맘 하디 모스크

그후로도 자이디 이맘들은 사나 점령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1067년 술라이히 조에게 대패한 후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사다는 북부 예멘과 히자즈 지역과의 항료 무역을 기반으로 점차 성장하였다. 1140년경 자이디 이맘국은 재건되었으나 사나의 함단 왕조에게 사다를 일시 점령당하는 등 취약하였다. 다만 양측의 대립은 1174년 아이유브 왕조의 예멘 정복으로 풀어졌고, 함단 부족 출신의 자이디 이맘 알 만수르 알리는 1197년 사나를 점령하며 이맘국의 귀환을 알렸다. 비록 10년도 안되어 사나를 잃긴 했지만 사다의 자이디 이맘국은 예멘에서 유일하게 아이유브 조에 복속하지 않은 세력이었고, 1250년에는 재차 일시적으로 사나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라술 왕조의 반격으로 1264년에는 재차 사다를 일시 점령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사다에서 세력을 재정비한 자이디 이맘국은 1323년 알 마흐디 무함마드의 지휘 하에 사나를 점령, 이번에는 (분열을 겪긴 했지만) 한세기 이상 통치하였다. 다만 그러면서 이맘국의 중심지는 점차 사나로 옮겨졌고, 1391년에는 사나와 사다에서 동시에 이맘이 선출되어 대립한 끝에 사다의 알 만수르 알리가 승리하여 단일 군주로 즉위하기도 하였다. 1436년 그가 사망한 후 세 아들들은 내전을 벌였고, 1461년 사나는 타히르 왕조에게 점령되었다. 1464년 사나는 이맘 알 무아야드 무함마드가 수복하나, 사다에서는 대립 이맘 알 만수르 무함마드가 추대되어 다시 분열되었다. 1504년 알 후자는 전사하고 타히르 조는 재차 사나를 점령했으나, 1517년 맘루크 조의 공격에 철수하였다.

그러자 알 무타와킬 야흐야는 사나를 수복하고, 공식적으로 그곳을 수도로 선포하였다. 1547년 이번에는 오스만 제국군이 사나를 점령하였고, 밀고 밀리는 전투 끝에 1583년에는 사다와 나즈란마저 함락되었다. 이렇게 멸망한듯 보였던 이맘국은 1597년 알 만수르 카심의 지휘 하에 재결집하였고, 기나긴 투쟁 끝에 34년만인 1617년에 마침내 사다를 수복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은 1629년 사나, 1635년 자비드, 1645년 아덴, 1654년 하드라마우트까지 예멘 전역을 통일하였다. 14-16세기에 조짐이 보이던 대로 이맘국의 수도는 이제 사나로 확정되었고, 사다는 19세기 이맘국이 재차 쇠퇴할 무렵에야 다시 중시되었다. 1849년 오스만 군이 사나를 일시 점령한 후 도시는 혼란에 휩쌓였고, 부패한 이맘 알 만수르 알리 2세에 분노한 자이디 지도부는 사다로 향하여 비카심 계열인 알 만수르 아흐마드를 이맘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사나에는 자치 정부가 세워져 4세기만에 이맘국은 분열되었다.

거듭된 내분으로 쇠약해지던 이맘국은 1872년 재차 오스만 군이 진주하며 또다시 멸망하였다. 그러나 자이디 세력은 다시 비카심 계열의 알 하디 샤라프 앗 딘을 이맘으로 선출하였고, 1884년 그는 사다 부근에 앗 사마 성채를 세우고 반란에 나섰다. 비록 사다 외에는 농촌 지역만 점령하긴 했지만 재건의 불씨를 되살린 그는 1890년 사망하였고, 카심 왕가의 방계인 무함마드 이븐 야흐야 하미드 앗 딘이 사다에서 이맘 알 만수르로 추대되었다. 그는 1904년 사망 시까지 북부 지역 대부분을 석권하였고, 아들이자 후임 이맘인 알 무타와킬 야흐야는 1905년과 1911년 사나를 점령하였다. 비록 오스만 군이 수복하긴 했으나, 지속적인 전투 끝에 1913년에 오스만 조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으며 후일 북예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6세기 이후 다시 수도가 되었던 사다는 38년만인 1918년, 오스만 제국의 패망으로 사나가 수복되며 다시 지방 도시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상징성은 오늘날까지 여전하다.

2.2.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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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무렵 이맘 하디 모스크

1962년 9월, 타이즈에서 북예멘의 공화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카심 왕가는 타이즈를 떠나 옛 이맘들의 거점인 사다로 피신하였다. 이후 이집트가 공화파, 사우디가 왕당파를 도우며 벌어진 북예멘 내전에서 사다는 주요 격전지 중 하나였다. 결과적으로 1963년 2월 18일, 이집트 부통령이자 국방장관인 아메르가 이끄는 공화군이 사다를 점령하였다. 그후 왕당파는 수차례 사다 수복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이는 1970년 전쟁이 공화파의 승리로 귀결되고 이맘 일가가 사우디로 피신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만 이후에도 사다는 왕당파와 자이드파의 거점으로 남았고, 1990년 통일 후에도 제대로 개발이 되지 않은 외지로 남아 중앙 정부의 손길이 거의 미치지 않았다.

그러한 와중에 압둘라 살레 정부가 남부 분리주의 세력 진압에 순니 맹주국인 사우디의 손을 빌리자 급진 자이드파 세력은 반정부 기류를 지니게 되었고, 그 중심 인물인 후세인 바드르 앗 딘 알 후티는 1992년 사다에서 '믿음의 청년들'이란 의미인 샤바브 알 무미닌 (شباب المؤمنین)이란 청년 조직을 세웠다. 알 후티와 그가 속했던 알 학크 당은 자이드파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부 분리주의 세력을 지지하였고, 이에 살레 정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2004년 알 후티는 무장 반란을 준비하였으나 정부군의 빠른 조치로 인해 그해 9월 교전 중 전사하였다. 그후 지지자들은 단체명을 '신의 조력자'란 의미인 안사룰라 (أَنْصَار ٱللَّٰه)로 바꾸고 후세인 알 후티의 동생 압둘 말리크 알 후티의 지휘 하에 산발적인 저항을 이어갔고, 2010년에야 휴전에 합의하였다.

2.2.1. 예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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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폭격당한 이맘 하디 모스크

이로써 20년간 이어지던 사다 일대의 혼란이 잦아드나 싶었지만, 2011년 아랍의 봄과 함께 살레 퇴진 시위가 일자 압둘 말리크는 반정부 시위에 대한 지지를 표하였다. (2월 27일) 그후 매주 수천의 시위대가 구도심의 성문에서 정부군 병영까지 행진하였고, 3월 18일 사나에서 정부군이 시위대에 발포하는 사건이 터지자 압둘 말리크는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 다음날 게릴라 전으로 단련된 후티 군대가 사다에 입성하여 친정부 성향의 셰이크 우스만 무잘리의 민병대와 전투를 벌였고, 격전 끝에 3월 24일에 사다를 장악하였다. 이틀 후 후티 군부는 사다를 자유 도시로 선포하며 별개 정부의 수립을 선언하였고, 이로써 예멘 내전이 발발하였다. 2015년 후티 군은 사나를 점령하였고, 사우디 등의 순니 동맹군이 개입하여 종종 사다에 공습하고 있다.

3.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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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구도심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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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의 옛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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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m 두께로 3km 가량 이어진 성벽에는 예멘 문, 나즈란 문을 비롯한 16개의 성문과 52개의 성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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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 중동부에 위치한 언덕 위의 성채는 16 ~ 18세기에 세워졌다. 한때 언덕은 철광석 광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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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는 10 ~ 16세기에 지어진 14개의 모스크가 있고, 여성용 모스크 역시 있다. 이맘 하디 모스크는 예멘에 3번째로 세워진 모스크이자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쉬아 모스크이고, 이맘 알 하디와 그의 후계자 11명의 매장되어 있다. 하지만 2015년 이맘 하디 모스크는 후티 군의 사기를 꺾기 위한 사우디 공군의 의도적인 폭격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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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최고, 최대의 공동묘지인 사다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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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들은 대부분 장인, 그 중에서도 은 장인으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