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Black Sox Scandal191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신시내티 레즈간의 월드 시리즈에 있었던 승부조작 사건을 일컫는 말로 메이저리그 최초의 승부조작 사태이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최대, 최악의 흑역사이기도 하다. 이 사건에 연루된 화이트삭스의 선수 8명은 전부 영구제명 당했다.
2. 배경
당시 화이트삭스의 구단주였던 찰스 코미스키[1]는 투수인 에디 시콧에게 30승 달성시 1,000달러란 거액의 인센티브를 걸어 놓은 상태였고,[2][3] 이 보너스를 노린 시콧은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며[4] 팀의 에이스로서 시즌 끝까지 매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정작 시콧이 29승을 기록하자 해당 인센티브를 지불하기 아까워진 코미스키 구단주가 감독 키드 글레슨에게 잔여 경기에서 시콧을 기용하지 말도록 사주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러한 구단측의 추태로 시콧은 29승에서 승리 행진을 멈추게 되었다. 당연히 시콧은 구단주에 대해 깊은 앙심을 품게 되었는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917년에도 코미스키는 이와 똑같은 짓을 한 바 있다.사실 구단주에게 앙심을 품은 것은 에디 시콧 뿐만이 아니었다. 선수단 전부가 인색한 구단주에게 큰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오죽하면 세탁비조차 제대로 지불해 주지 않았던 탓에 선수들은 항상 더러운 유니폼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5]
그러던 차에 구단주인 코미스키는 1915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서, 1914년도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던[6] 2루수 에디 콜린스를 트레이드해왔다. 콜린스는 당시로선 매우 드물었던 대학을 졸업한[7] 인물로, 야구선수 치고는 정도가 아니라 일반적인 기준으로도 매우 똑똑한 그에게 사기를 칠 만한 방도가 없었던 터라 결국 코미스키는 콜린스에게만 거액의 연봉을 지불하기로 결정했고, 이 일로 인해 선수단의 불만은 그야말로 극에 달하게 된다.
3. 발단
1919년 월드 시리즈 당시, 내셔널 리그 챔피언 신시내티 레즈는 고르게 좋은 성적을 갖고 있는 4선발진을 갖춘 강팀(96승 44패)이긴 했으나, 3루수 하이니 그로와 외야수 에드 러시를 제외하면 믿을 만한 타자가 없던 상태였다. 그에 비해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도합 52승을 따내며 팀 승리의 2/3 이상을 거둬들이는 대활약을 펼친 에디 시콧과 레프티 윌리엄스라는 강력한 원투 펀치는 물론, 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인 "맨발의 사나이"(shoeless) 조 잭슨을 중심으로 4년 전 트레이드로 영입한 수준급 교타자 에디 콜린스까지 있는 강력한 타선까지 보유하고 있던 터라 야구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화이트삭스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다.이에 도박사들은 당시 최고의 1루수로 평가받던 화이트삭스의 칙 갠딜에게 접근하여 승부조작을 의뢰하였고,[8] 코미스키의 행각에 매우 큰 불만을 품고 있던 칙 갠딜은 이를 수락한다. 이후 그는 친우인 스위드 리스버그를 필두로 코미스키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에디 시콧과 레프티 윌리엄스, 외야수 해피 펠시, 팀의 중심타자 조 잭슨 등 자신의 팀내 파벌에 속한 거의 모든 선수들을 포섭하여 월드 시리즈에서의 승부조작을 모의한다. 단, 이때 같은 파벌에 속한 3루수 벅 위버 만은 승부조작 제안을 거부했다.
4. 1919년 월드 시리즈
월드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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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월드 시리즈 우승팀 |
신시내티 레즈 |
이 시절의 월드 시리즈는 현재와 같은 7전 4선승제가 아닌, 9전 5선승제였다.
로스터
신시내티 레즈: 제이크 도버트, 팻 던칸, 호드 엘러, 레이 피셔, 하이니 그로, 래리 코프, 돌프 루케, 셰리 마기, 그레이시 네일, 빌 라리덴, 모리 래스, 지미 링, 에드 루시, 더치 루더, 슬림 샐리, 지미 스미스, 아이비 윙고, 닉 앨런, 루브 브레슬러, 행크 슈리버, 찰리 시, 에드 거너, 로이 미첼
시카고 화이트삭스: 에디 시콧, 에디 콜린스, 샤노 콜린스, 해피 펠시, 칙 갠딜, 조 잭슨, 빌 제임스, 디키 커, 니모 레이볼드, 그로버 로더밀크, 버드 린, 어스킨 메이어, 프레드 맥멀린, 에디 머피, 스위드 리스버그, 레이 샬크, 벅 위버, 로이 윌킨슨, 레프티 윌리엄스, 조 젠킨스, 허비 맥클레란, 레드 페이버, 존 설리반
4.1. 1차전: 화이트삭스 패
1919년 10월 1일 레드랜드 필드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CHW | 에디 시콧 | 0 | 1 | 0 | 0 | 0 | 0 | 0 | 0 | 0 | <colbgcolor=#dcdcdc><colcolor=#000> 1 | 6 | 1 |
CIN | 더치 루더 | 1 | 0 | 0 | 5 | 0 | 0 | 2 | 1 | - | 9 | 14 | 1 |
패: 에디 시콧(1패)
1차전에 앞서 칙 갠딜은 약속했던 금액 중 일부인 1만 달러를 전달받는데, 갠딜은 이 1만 달러를 얼마 전에 아이를 낳아 돈을 쓸 곳이 많았던 에이스 에디 시콧에게 모두 다 줬다. 이때 전액이 전달되지 않은 것은 도박사들조차 약속한 금액을 전부 다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1차전 화이트삭스의 선발은 에이스 에디 시콧이다. 시콧은 선두 타자 모리 래스를 사구로 출루시킨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승부조작에 들어갔으나 시콧의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이트삭스 수비진의 계속된 호수비 덕분에 승부는 1:1로 팽팽하게 유지되었다. 이에 답답해진 시콧은 아예 배팅볼 투수 모드가 돼서 마치 제구난조가 일어난 것처럼 노골적으로 공을 던지기 시작했고 결국 4회에만 5실점을 하는 빅 이닝을 만들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당시 선발이었던 신시내티의 에이스 더치 뤼더는 시카고 타선을 1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4.2. 2차전: 화이트삭스 패
1919년 10월 2일 레드랜드 필드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CHW | 레프티 윌리엄스 | 0 | 0 | 0 | 0 | 0 | 0 | 2 | 0 | 0 | <colbgcolor=#dcdcdc><colcolor=#000> 2 | 10 | 1 |
CIN | 슬림 샐리 | 0 | 0 | 0 | 3 | 0 | 1 | 0 | 0 | - | 4 | 4 | 2 |
패: 레프티 윌리엄스(1패)
1차전이 끝나고 에디 시콧에게 바로 현금이 입금되었으나 다른 선수들에게는 아직 지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레프티 윌리엄스가 선발로 예정되어 있었다.
화이트삭스는 이 경기에서 10안타를 몰아쳤으나 찬스에서 일부러 삽질을 한 칙 갠딜 덕분에 무난하게 패배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승부조작 선수들에게 모든 현금이 입금되었다.
4.3. 3차전: 화이트삭스 승
1919년 10월 3일 코미스키 파크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CIN | 레이 피셔 | 0 | 0 | 0 | 0 | 0 | 0 | 0 | 0 | 0 | <colbgcolor=#dcdcdc><colcolor=#000> 0 | 3 | 1 |
CHW | 디키 커 | 0 | 2 | 0 | 1 | 0 | 0 | 0 | 0 | - | 3 | 7 | 0 |
패: 레이 피셔(1패)
화이트삭스는 깜짝 선발로 신인이었던 디키 커를 기용했다. 커는 1차전에서 구원으로 등판한 베테랑 글로버 로더밀크를 대신하여 선발로 자주 기용된 바 있었다.
본래는 이 날도 시카고가 패배하도록 예정되어 있었으나, 팀내에 승부조작판이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던 디키 커는 쉽게 무너질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3피안타 완봉이라는 혼신의 역투를 펼쳐 조작범들의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4.4. 4차전: 화이트삭스 패
1919년 10월 4일 코미스키 파크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CIN | 지미 링 | 0 | 0 | 0 | 0 | 2 | 0 | 0 | 0 | 0 | <colbgcolor=#dcdcdc><colcolor=#000> 2 | 5 | 2 |
CHW | 에디 시콧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3 | 2 |
패: 에디 시콧(2패)
선발은 에디 시콧이다. 1차전에서 너무 노골적으로 안타를 맞았다는 것을 염두에 뒀던 시콧은 5회에 에러 동반 2실점을 기록한 뒤 더 이상 점수를 내주지 않으며 게임을 마무리지었고, 타자들은 그런 시콧의 활약에 단 3안타로 화답하였다. 상대 투수 지미 링은 완봉승을 기록하였다.
4.5. 5차전: 화이트삭스 패
1919년 10월 6일 코미스키 파크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CIN | 호드 엘러 | 0 | 0 | 0 | 0 | 0 | 4 | 0 | 0 | 1 | <colbgcolor=#dcdcdc><colcolor=#000> 5 | 4 | 0 |
CHW | 레프티 윌리엄스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3 | 3 |
패: 레프티 윌리엄스(2패)
레프티 윌리엄스가 선발로 나선 이 경기에서 타자들은 역시 식물타선 모드가 되어 또다시 3안타로 화답했다. 이날 신시내티의 첫 안타는 선발 투수 호드 엘러에게서 나왔으며, 해피 펠시는 결정적인 송구 에러를 기록하며 엘러를 3루까지 진루시켜주며 신시내티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4.6. 6차전: 화이트삭스 승
1919년 10월 7일 레드랜드 필드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R | H | E |
CHW | 디키 커 | 0 | 0 | 0 | 0 | 1 | 3 | 0 | 0 | 0 | 1 | <colbgcolor=#dcdcdc><colcolor=#000> 5 | 10 | 3 |
CIN | 더치 루더 | 0 | 0 | 2 | 2 | 0 | 0 | 0 | 0 | 0 | 0 | 4 | 11 | 0 |
패: 지미 링(1승 1패)
페이스를 조절한 날이다. 선발 투수는 3차전 선발이었던 디키 커였다. 커는 초반에 4실점을 하며 무너지는 듯 보였으나 제 실력을 발휘한 시카고 타선은 5회까지 4점을 내며 신시내티를 따라잡았고, 선발 더치 뤼더를 내리고 다음 선발로 예정됐던 지미 링을 끌어내는 데까지 성공했다. 이날 디키 커는 10회까지 완투하고 승리투수가 되었으며, 시즌 내내 부진했던 칙 갠딜은 역전타를 기록하며 영웅이 됐다.
4.7. 7차전: 화이트삭스 승
1919년 10월 8일 레드랜드 필드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CHW | 에디 시콧 | 1 | 0 | 1 | 0 | 2 | 0 | 0 | 0 | 0 | <colbgcolor=#dcdcdc><colcolor=#000> 4 | 10 | 1 |
CIN | 슬림 샐리 | 0 | 0 | 0 | 0 | 0 | 1 | 0 | 0 | 0 | 1 | 7 | 4 |
패: 슬림 샐리(1승 1패)
선발은 다시 에디 시콧. 다만 리그를 지배하던 에이스가 예상 외로 지나치게 맞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페이스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고, 시콧 역시 자신이 의심 받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력 발휘를 하여 7피안타 1실점 완투승을 거둔다. 화이트삭스의 타선 역시 전날 경기와 마찬가지로 본래의 힘을 다 발휘하여 10안타를 몰아쳤고 상대 선발을 끌어내리며 무난하게 승리를 거뒀다.
4.8. 8차전: 화이트삭스 패
1919년 10월 9일 코미스키 파크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CIN | 호드 엘러 | 4 | 1 | 0 | 0 | 1 | 3 | 0 | 1 | 0 | <colbgcolor=#dcdcdc><colcolor=#000> 10 | 16 | 2 |
CHW | 레프티 윌리엄스 | 0 | 0 | 1 | 0 | 0 | 0 | 0 | 4 | 0 | 5 | 10 | 1 |
패: 레프티 윌리엄스(3패)
승부조작단은 이날을 최종 승부일로 잡았다. 일당은 갱스터를 동원하여 레프티 윌리엄스의 집으로 처들어가 그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패배할 것을 강요했고, 이에 윌리엄스는 시작부터 무기력하게 배팅볼 직구를 던져대며 1회에 바로 강판당했으며, 뒤이어 마운드에 오른 구원투수인 빌 제임스와 로이 윌킨슨은 승부조작과는 관계없이 마구 두들겨 맞았다. 승부조작을 하던 타자진도 10:1로 승부가 완전히 기울던 8회말 4점을 뽑아 추격하는 시늉만 했을 뿐 거기까지였다. 결국 시리즈는 신시내티의 우승으로 막을 내린다.
5. 결말
5.1. 허술했던 계획
매수 단계에서 벅 위버가 승부 조작을 거부한 것부터 계획의 허술함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가담자 외의 다른 선수들도 해당 계획을 어느 정도 눈치챈 탓에 당시 화이트삭스의 유틸리티 내야수 프레드 맥멀린 같은 경우엔 아예 입막음 비용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키드 글래슨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심지어는 에디 시콧이 안 던지면 어차피 패배할 경기들이기 때문에 승부조작이란 걸 알면서도 계속 기용한 것뿐이었다는 설까지 있다. 구단 외부로도 승부조작이 일어날 거란 루머 아닌 루머까지 흘러나갔으니 말 다했다.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작 승부조작에 참가한 도박사가 죄다 돈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는 시리즈 3차전 디키 커의 예상 외의 깜짝 호투와 7차전 에디 시콧의 승리 탓인데 결국 승패에 돈을 걸었던 도박사들은 경기마다 승패를 정해놓고 걸었으나 이를 어긴 블랙삭스 선수들 때문에 거액을 날렸고, 시리즈 우승 향방에만 돈을 걸었던 도박사 1명만이 돈을 땄다고 한다.
5.2. 언론의 추적
승부조작에 대한 루머가 흘러나오자 시카고 해럴드의 기자였던 휴 퓰러튼은 1900년대 초 최고의 투수였던 크리스티 매튜슨[9]과 함께 경기를 관찰하며 이에 대하여 사실 여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매튜슨은 레프티 윌리엄스와 포수 레이 샬크가 싸우는 모습, 감독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선수들이 일으킨 말다툼을 보면서 심증을 굳히며 고의적인 수비 실수에 의한 안타와 득점에 대하여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기록들은 다음 해에 벌어진 블랙삭스 스캔들 재판의 중요한 자료가 됐다.5.3. 발각
1920년 9월, 결국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단은 전년도 월드 시리즈에 있었던 승부조작에 대한 경찰의 조사를 받는다. 경찰의 조사 결과 위의 승부조작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전미를 들썩이게 하는 초대형 스캔들로 번지게 되었으며, 전례가 없던 수준의 승부조작 사건이었던 만큼 이에 대한 여론 역시 극단적으로 나빠졌다. 이후 법원 측은 이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으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구단주 협의체의 리더에 해당하는 커미셔너인 케네소 랜디스는 이들 8명에 대해 영구 제명 조치를 취했으며, 이들은 두 번 다시 야구계로 돌아올 수 없었다.당시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아메리칸 리그 1위를 놓고 경쟁하는 중이었으나 승부조작 사실에 분노한 구단주 코미스키가 가담자들의 리그 경기 참가 불허 방침을 정함에 따라 당시 리그 약체였던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게 전패하며 2위로 시즌을 마감한다.
5.4. 8인의 추방자
8인의 추방자 | |||||||
에디 시콧 | 해피 펠시 | 칙 갠딜 | 슈리스 조 잭슨 | 프레드 맥멀린 | 스위드 리스버그 | 벅 위버 | 레프티 윌리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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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너클스' 시콧(투수)
당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에이스로 너클볼을 주로 사용하는 투수였다. 1920년까지 209승을 거두고, 통산 방어율이 2.38인 대투수였다. 화이트삭스에서의 기록만 따지면 평균 자책점만 2.30, 157승을 거두었으며, bWAR로 따져도 화이트삭스 역사상 통산 8위에 달하는 엄청난 선수. 더불어 당시 조사에서 가장 먼저 혐의를 인정한 선수 중 하나였다. 추방당한 뒤 그는 주유소를 운영하거나 포드에 입사하는 등 다른 직업을 전전하다가 1944년에 은퇴하고 1969년에 평범한 딸기 농부로 생을 마쳤다. 그의 조카손자 알 시콧이 그의 뒤를 이어 야구 선수가 되었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
조지 '벅' 위버(3루수)
4:55부터 그의 현역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다. 승부조작 제의를 거부하고 가담도 하지 않았으며, 월드 시리즈에서는 조 잭슨 다음으로 좋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승부조작 사실을 알고도 이를 감추고 있었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과 함께 제명 조치를 당했다. 1920년에 3할 3푼을 치며 전성기를 맞이하는 중이었던 터라 안타까운 일이었다. 심지어 제명 당한 뒤 당시 야구의 볼모지였던 서부의 세미프로 리그에서 칙 갠딜, 조 기디언, 스위드 리스버그, 조 잭슨, 프레드 맥멀린 등과 함께 활동하려 했으나 승부조작에 비협조적이였다는 이유로 갠딜에 의해 리그에서 추방당하기까지 했다. 매우 억울해하며 케네소 랜디스 커미셔너에게 계속해서 항의를 했지만 철저히 무시당했는데, 이후 죽을 때까지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하며, 현재도 영구제명은 지나쳤다는 동정 여론이 우세한 편이다.
수비 실력이 엄청났던 선수로, 타이 콥이 이 사건에서 조 잭슨과 함께 일찍 강제은퇴 당한걸 가장 안타까워한 인물이다. 타이 콥은 은퇴하고 한참 지난 1941년 7월에 뉴욕 타임스와 마지막 특별 인터뷰를 할 때 "내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40여년간 내가 직접 본 모든 선수들을 전성기 모습대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드림팀 감독이 된다면, 1루수는 루 게릭, 2루수는 에디 콜린스, 3루수는 벅 위버, 유격수는 호너스 와그너, 포수는 미키 코크런을 쓰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조 잭슨은 좌익수로, 베이브 루스를 우익수로, 트리스 스피커를 중견수로 쓰겠다고 했다. 투수는 에드 월시, 에디 플랭크, 월터 존슨, 피트 알렉산더, 크리스티 매튜슨, 밥 펠러까지 6명을 꼽았다. 이중 같이 잘린 잭슨 빼고 다들 명예의 전당 선수인데, 그만큼 위버도 저 사건 없었으면 명전에 갔을 대단한 선수였다는 뜻.
-
프레드 맥멀린(3루수)
승부조작에 직접 가담하진 않았으나 승부조작에 가담한 선수들을 공갈협박 하여 상당한 금액의 돈을 받아냈다. 승부조작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알리지 않고, 도리어 금품을 갈취했다는 이유로 영구 제명되었다. 다른 설에 따르면 맥멀린이 돈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에디 콜린스 파벌(클린삭스)의 스파이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냥 무시했다고 영구제명당한 벅 위버와 달리 처음부터 돈을 받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동정여론은 없다.
-
아놀드 '칙' 갠딜(1루수)
당시 팀 주장이었다. 가장 적극적으로 승부조작에 참여한 멤버였다. 승부조작을 제의한 도박사와 친분 관계가 있었고, 그를 통하여 승부조작이 일어났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구단주 찰리 코미스키였다. 갠딜은 팀 주장이면서도 일 년에 고작 4000 달러밖에 받지 못했다. 심지어 1920년에는 연봉을 6500달러로 인상해달라고 했다가 그대로 팀에서 짤렸다. 반면 에디 콜린스는 2만 달러를 받고 있었다. 갠딜은 차라리 세미프로 팀에서 일주일에 두 번 야구해주면 일주일에 150 달러를 준다면서 어이없어했다고 한다. 짤린 이후에 같이 짤린 조 기디언, 스위드 리스버그, 조 잭슨, 프레드 맥멀린과 함께 야구의 불모지였던 서부에서 세미프로 활동[10]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 리그에서는 벅 위버를 추방했는데 이유는 승부조작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 야구계에서 물러난 뒤에는 배관공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1970년에 천수를 다 누리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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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스위드' 리스버그(유격수)
준수한 수비 능력과 유격수 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수준의 타격 실력도 지니고 있던 선수. 칙 갠딜의 조수 역할을 하였다. 또한 블랙삭스 스캔들 외에도 몇 건의 승부조작 경력이 더 있다. 197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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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스' 조 잭슨(외야수)
당시 시카고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자신의 방망이에 여동생의 이름인 벳시를 붙여 블랙 벳시라 불렀으며 은퇴할 때까지 그 방망이만 썼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지금도 가담 여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잭슨은 가장 먼저 가담 사실을 인정한 멤버였지만 어째선지 이후에 해당 진술을 번복했다. 야구는 잘 했지만 사람은 어리숙했으며, 무엇보다도 글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조 잭슨의 그런 성품 때문에 승부조작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변호했지만, 케네소 랜디스 커미셔너는 이를 무시했다.
가장 큰 결백의 증거는 월드 시리즈 당시 가장 좋은 타격을 한 것이 조 잭슨이었다는 것이다. 12개의 안타를 쳤으며 타율 0.375에 OPS가 0.956이었다. 승부조작을 하는데 이렇게 잘 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 잭슨을 옹호하는 측의 주장이다. 한편 반대 측은 이미 승부가 결정된 상황에서의 타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잭슨이 가담한 것은 분명하다고 반론한다. 또한 승부조작의 대가로 받았다고 알려진 5천 달러의 경우 레프티 윌리엄스가 단지 그의 호텔방에 두고온 것 뿐이라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술을 좋아하던 잭슨이 5천 달러를 술값으로 다 써버려서 증거가 남지 않은 것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조 잭슨은 이 사건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이다. 잭슨은 메이저리그 역대 타율 3위를 비롯해 타격왕 3년 연속 2위란 진기록을 가지고 있는 등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들 만한 실력과 성적을 거뒀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명예의 전당에 끝내 오르지 못했다.[11] 추방된 이후 조 잭슨은 주변 사람들의 심한 냉대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주식으로 큰 부자가 된 타이 콥이 골프를 치러 가다가 술집 안에 있던 잭슨을 알아보고 아는 척을 하자 '당신만은 나를 알아봐줄 줄 알았습니다.'라며 크게 감격했다는 일화가 이를 잘 방증해 준다.[12]
조 잭슨은 끝끝내 복권되지 못한 채 1951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1990년대에 커미셔너 버드 셀릭이 해당 사건을 재조사했으나 역시 복권되지 못하여 많은 팬들이 아쉬움의 탄성을 자아냈다. 잭슨에 대한 팬들의 애정과 안타까움을 집약한 영화가 바로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1991년 작 《 꿈의 구장》. 여기서 등장하는 잭슨은 정말 행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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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해피' 펠시(외야수)
준수한 수비를 자랑하는 호타준족의 외야수였다. 추방당하던 1920년, 타격 포텐셜이 터지며 장타가 늘어났고 이 시즌 동안 자신의 커리어하이를 기록했으나 결국 그것이 최후가 됐다. 빠른 다리에 비해서는 유독 도루사가 많았던 선수이기도 하다.[13] 추방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며 아마추어 팀이나 세미프로 팀에서 야구를 가르쳤다. 은퇴한 뒤 식료품점을 차렸고, 1964년에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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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레프티' 윌리엄스(투수)
시리즈 패배의 일등 공신으로 3경기 방어율이 자그마치 6점대다. 1920년 시즌 중에는 20승을 올리며 리그를 대표하는 좌완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6. 여파
1920년 이 사건이 알려지며 MLB의 인기가 대폭락하였다. 이 때 떨어진 인기를 회복할 수 없을 거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브 루스의 홈런 쇼 덕에 해당 사건은 빠르게 잊혀졌고 미국에서 야구의 인기는 도리어 공고해졌다. 또한 코미스키는 사건 이후 조작에 가담하지 않은 나머지 선수단과[14] 감독에게 1인당 1500달러를 돌렸다. 그렇다고 조작에 관련된 선수들도 신경 안쓴 건 아닌데 재판기간 내내 선수들을 빼내려고 미국 최고급 변호사들을 고액을 써가며 모셔오는 등의 노력은 했다. 물론 이 모든게 선수들의 연봉만 제대로 줬으면 없었을 지출이니 결국 자업자득이다.한편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주축 선수 8명이 빠져나가며 성적이 급락했으며, 승부조작 구단이라는 오명으로 인해 팬 대다수가 당시 성적이 좋던 시카고 컵스 쪽으로 이탈해 버렸다.[15] 그런 분위기는 이후로도 쭉 이어졌고, 1917년 이후 88년동안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다. 플레이오프만 해도 1919년 이후 40년이 걸렸다. 그나마 잘 알려진 유명 시카고 화이트삭스 팬은 버락 오바마 정도밖에 없다.
훗날 이 사건은 메이저리그 5대 스캔들[16] 중 하나로 불리게 됐으며, 이것을 배경으로 한 《8인의 추방자》(Eight Men Out)라는 소설이 지어지기도 했다.[17] 그러나 사실 소설 제목처럼 추방자의 수가 8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조 게던이라는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의 2루수도 함께 추방되었기 때문인데, 친구였던 스위드 리스버그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게던은 신시내티에 거액을 베팅을 했고 1920년에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른 이들과 함께 추방당한 바 있다. 일명 9번째 추방자.
워낙 유명한 야구 승부조작이라 한국에서도 종목은 다른 프로 스포츠 승부조작 때 야구도 있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야구계와 야구팬들은 미국이랑 다르다며 무턱대고 부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이 드러났고 김성현, 박현준이 구속되고 이후에도 이태양과 문우람, 유창식의 승부조작 사건이 다시 적발되면서 한국 야구계에서도 더러운 승부조작 역사가 남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보다 프로야구 역사가 오래된 일본이나 아예 승부조작이 매번 터져서 리그가 망하기 직전까지 갔던 대만의 사례를 보면 승부조작 사건은 보다 공정하고 깨끗한 프로스포츠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미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카더라 가운데 하나는 당시 9살 소년이자 조 잭슨의 팬이었던 롤랜드 개리(Roland Gehre)[18]가 당시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출두한 잭슨을 향해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요, 조. 제발 아니라고 말해주세요.(Say it ain't so, Joe. Say it ain't so.)"라고 애절하게 호소했다는 설화가 많은 야구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자신의 우상인 야구선수가 한 순간에 범법자로 전락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한 소년의 사연이 많은 미국의 야구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물론 여기에 대한 확정적인 물증이 없는 관계로 베이브 루스의 예고홈런처럼 그저 하나의 '썰'로 치부하는 정도.
CSI : NY 7기 16화가 이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영화 꿈의 구장은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화이트삭스의 선수들이 옥수수밭에 만들어진 야구장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신시내티 레즈도 2022년에 이 꿈의 구장에 입성을 하며 경기를 하였다.
그리고 이와 매우 비슷한 속임수 사건이 100년만에 일어난다. 다만 이 당시는 승리를 위한 사기극이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
7. 관련 문서
[1]
1859~1931. 그 역시 선수 출신이였는데 1루 베이스에서 붙어있지 않고 떨어져서 수비한 최초의 1루수로서 1루 수비에 혁신을 불러온 인물이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의 예전 이름이었던 코미스키 파크는 이 사람 이름을 딴 것이다. 지금은 명명권 계약으로 U.S. 셀룰러 필드를 거쳐
개런티드 레이트 필드가 됐다.
[2]
지금으로 부터 100년 전 일이다. 이때의 1달러는 물가상승률을 고려했을 때 2021년의 16달러와 비슷한 가치이며, 한화로 약 1,900만 원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3]
1,900만 원 역시 큰 돈이긴 하지만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에게는 사소한 금액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으나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평균 연봉은 90년대~00년대 이후 크게 오른 거고 그 전에는 생각보다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다. 당장 이 에디 시콧의 연봉부터가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의하면 1917년~1918년엔 각각 5,000달러였고 1919년엔 9,075달러였으니 코미스키가 제시한 1,000달러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액수였다. 장명부처럼 남은 선수 인생을 모두 갈아먹을 정도로 큰 돈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소보다 더 힘을 내서 1919년 시즌을 치를 수 있을 만큼의 동기부여는 되는 액수였다.
[4]
사이 영 포인트에 따른 분석에 따르면, 당시 사이 영 상이 있었다면 1919년 아메리칸 리그의 사이 영 상 수상자는
에디 시콧일 것으로 나타났다.
[5]
'블랙'삭스 스캔들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선수들의 유니폼이 항상 더러웠기 때문에 붙은 별칭이다. 게다가 '블랙'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인상까지 생각한다면 참으로 적절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6]
참고로 메이저리그는 MVP 제도가 원래 없다가, 1911년부터 1914년까지 단 4년간 MVP를 주고 그 다음부터 수년간 없애버렸다. 아메리칸 리그 1911년 수상자는
타이 콥, 1912년 수상자는
트리스 스피커, 1913년 수상자가
월터 존슨이다. 이 사람들이 야구사에서 어떤 위치인지 안다면(그 전설의 명예의 전당 최초의 5인이 2명, 바로 다음해 입성자 1명이다. 사실
에디 콜린스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이 블랙삭스 스캔들로 의심받은 기록으로 이미지가 훼손되어 나중에야 낮은 득표율로 겨우 들어간다.) 1914년 수상자
에디 콜린스의 당시 위치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아메리칸 리그는 1922년에, 내셔널 리그는 1924년에 MVP 제도를 부활시켰다.
[7]
그것도
아이비 리그 소속인
컬럼비아 대학교 졸업자인데다 거기서 학업성적도 꽤 좋았던 엄친아였다(단 명문대 문무겸비 모범생 이미지와 달리 흙수저 집안이라 엄친아보다는 자수성가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단순히 대학만 다닌 머리 좋은 사람일 뿐 아니라 상술한 대로 MVP를 받았을만큼 실력 역시 최고였으며 은퇴 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오른 메이저리그의 전설이기도 하다. 통산 3,314안타로 메이저리그 전체 안타 10위에, 통산 타율도 0.333으로 메이저리그 통산 19위의 어마어마한 기록을 가진 교타자였던 그는 당시에도 트레이드되기 전까지 애슬레틱스에서 6년 연속 3할을 치고 3번이나 월드 시리즈 우승경험이 있던 데다가 도루나 출루율 1위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대활약을 했기에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엄청난 인기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팀이건 구단주 입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인물.
에디 시콧 같은 다른 잘하는 선수들을 속이고 이용한 게 문제지,
에디 콜린스를 대우해 준 게 문제는 아니다.
[8]
참고로
칙 갠딜은 이미 과거에
스위드 리스버그와 함께 1917년에 지구 라이벌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있었던 승부에서 상대 투수에게 돈을 주고 일부러 자신에게 맞아주도록 사주한 전적이 있었다.
[9]
참고로
크리스티 매튜슨은 저 시절 1차 세계대전 당시 화학가스 흡입 후유증으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고, 결국 몇 년 뒤에 사망했다.
[10]
유명한 사실이지만, 서부의 프로야구는
브루클린 다저스와
뉴욕 자이언츠가 이로부터 수십년 뒤 서부의 유명도시인 LA와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면서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11]
잭슨의 결백을 믿은 기자들은 후보 명단에도 없던 잭슨의 이름을 꾸준히 적어냈지만
케네소 랜디스 커미셔너는 전부 받아들이지 않았다.
[12]
근데
타이 콥이 서명을 해달라고 했는데
조 잭슨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서 서명을 할 줄 몰랐고, 도장으로 서명을 대신하려고 술집 사무실에 자기 도장을 찾으러 갔는데, 그 사이 콥은 골프칠 시간이 다 되어 가 버렸다고 한다.
[13]
다만 이 당시 리그 전체적으로 도루 성공율이 낮았고 도루사가 잦았다.
[14]
포수
레이 샬크, 2루수
에디 콜린스, 3선발
레드 페이버 등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스타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15]
컵스는 1940년까지만 해도 월드 시리즈에 꽤 자주 진출했으며, 자이언츠, 카디널스와 함께 내셔널 리그의 3대 강호였다. 염소 사건 이후로 승률을 어마어마하게 깎아먹었는데도 아직도 구단 통산 승리가 패배보다 꽤 많은 걸 보면 그 이전에는 꽤 강한 팀이었다.
[16]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흔히
칼 메이스의
레이 채프먼 빈볼 사망 사건, 블랙삭스 스캔들,
피트 로즈 승부조작 스캔들,
1994년 총파업,
미첼 리포트를 든다. 간혹 칼 메이스 사건 대신
1970~80년대에 성행했던 마약 스캔들을 들기도 한다.
[17]
1988년에 미국 인디 영화계의 거장인 존 세일즈가 감독하고 찰리 쉰, 존 쿠삭 등이 출연한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한국에서도 과거 MBC 주말의 명화에서 '메이저리그의 이단자들'이란 제목으로 더빙 방영되었다.
[18]
1989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