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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9 19:05:06

백마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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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투 전 상황3. 전투4. 결과5. 명칭 유래6. 기타7.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의 백마고지 전투 참가 오보8. 이 이름을 딴 것

1. 개요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제9보병사단 중공군 38군 소속 3개 사단을 격파한 전투로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벌인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전투는 백마고지 서쪽 인근의 1차 화살머리고지 전투와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2. 전투 전 상황

1952년 당시 강원도 철원군은 인근의 평강군, 김화군와 함께 철의 삼각지대 중 하나로서 자유와 공산 진영이 틈틈히 충돌하는 지역이었다. 이 와중에 중공군은 이 교착 상황을 타개하고자 점령하기 쉬운 곳을 탐색했고, 그 결과 철원 서쪽의 395고지(백마고지)와 281고지(화살머리고지)를 선정하였다.

당시 유엔군 철원평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는데, 철원 북방에 있는 395고지는 남동쪽으로 펼쳐진 철원평야를 훤히 감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즉 395고지 하나만 차지해도 철원 일대의 국군과 유엔군 기지와 보급선을 전부 위협할 수 있었던 것. 남쪽 평야에서 보면 여긴 고지가 맞지만 주변, 특히 북쪽이 해발고도가 1,000 m가 넘는 산들이라 그 산들과 함께 보면 동네 야산 수준이라 감제당할 수밖에 없는 형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펼쳐진 중공군 38군의 공세를 맞이한 세력이 395고지 일대에 주둔한 한국군 9사단이었고, 그렇게 해서 후일 백마고지라 불리는 395고지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3. 전투

백마고지
파일:attachment/whitehorse.jpg
백마고지의 지형과 전투 전 9사단 30연대의 방어선 구축

52년 10월 6일 새벽 395(백마)고지와 281(화살머리)고지 일대에 공격준비사격이 시작된 뒤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됐다. 중공군은 병력을 교대해가며 가며 파상 공세를 지속했지만 395고지의 9사단 30연대는 쉽게 내줄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395고지 능선은 y자를 왼쪽으로 기울인 형상이었는데, 북서쪽 방면이 얕긴 하지만 > 모양이라 이 방면으로 들어오는 중공군들은 양쪽 능선에서 십자포화를 맞고 수없이 피를 흘렸고, 결국 반듯한 북동쪽으로 반복공격을 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 백마고지는 남쪽에서 방어하기가 정말 어려운 지형이고, 9사단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이에 9사단장인 김종오는 방어병력이 나가떨어지기 전 빠르게 대대~연대 단위로 밀어내기식 교대를 해가며 고지를 고수했고, 빠른 교대를 위해 (연대본부, 연대장을 거치지 않고) 휘하 대대에 직접 명령을 내려 이동시키는 월권을 행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이 덕에 백마고지 일대의 9사단 병력은 전투력이 완전 소진되지 않은 채 서로 교대해 가며 손실분을 보충할 수 있었다.

한편 9사단 예하 포병뿐만이 아니라 인근 미군의 포병부대가 총동원되어 지원에 나섰고, 미 공군의 지원까지 계속되었다. 거기다 백마고지의 동쪽 평야지대에는 한국군 53전차중대가 배치되었고, 이들은 전투 내내 중공군의 측면에 정확한 직사포를 퍼부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중공군은 395고지 정상을 수차례 피탈하는 데 성공했지만, 방어하던 한국군을 395고지 일대에서 완전히 축출하는 데는 실패했다. 고지가 뺏긴 와중에도 한국군은 능선 일대에서 재차 반격해 탈환했다가 중공군의 반격으로 다시 빼앗기는 등 이 고지를 손에 넣고자 열흘 동안 국군과 중공군의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 반복되었다.

이렇게 전투가 계속된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무려 12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

그렇게 계속되던 고지점령전에서 9사단은 휘하 병력을 총동원해 반격, 중공군이 공격의 교두보로 삼았던 백마고지의 북쪽 능선을 또다시 탈환해 중공군 전체를 백마고지 일대에서 격퇴함으로써 비로소 끝이 났다.

4. 결과

백마고지 전투에서 사상자 숫자는 중공군이 1만 4천여 명, 한국군이 3,396명이었다.

현리 전투를 비롯해 그동안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번번이 실망스러운 졸전을 거듭했던 한국군은 1951년 후반부터 부대 전체의 재교육 등 내실을 다지기 위해 힘썼는데, 백마고지 전투에서 사단 단위 병력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 이후 9사단 병력들은 고지 동쪽 2사단이 있는 저격능선 전선으로 이동했고, 2사단은 11월 24일에 임무교대한 뒤 백마고지로 이동했다. 이후 백마고지는 일대는 아군의 확고한 영역이 되었고 MDL 이남에 위치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이 옛 북한령 연천군(련천군), 철원군의 영유권(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5. 명칭 유래

6. 기타


* 2021년 4월 5일 담당 사단인 제5보병사단 DMZ 유해발굴 출정식에서 2019년부터 진행한 화살머리고지 전투가 벌어진 화살머리고지 발굴을 전반기에 마무리하고 백마고지를 발굴하겠다고 해 이곳에서도 상당수의 유해 및 군 장비들이 발굴되리라 예상된다.

파일:DSC_2406.jpg

7.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의 백마고지 전투 참가 오보


위와 같이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가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했다는 오보가 간간히 나오는데 이는 정확한 한국전쟁 전사를 정확히 몰라서 나오는 실수이다.

지금 이 문서에서 다루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의 백마고지 전투 이외에도 395고지(1952년 10월 전투에서 백마고지로 호칭)에서 여러 전투가 벌어진 것은 사실이나 모든 전투를 통틀어도 결론적으로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395고지(통칭 백마고지)에서 전투를 한 적이 한번도 없다.

즉 백마고지 전투 기간(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에는 미 제9군단의 예비대로 부대정비와 훈련을 하고 있었고, 미 제3사단 제7연대에 배속된 후 1952년 10월 25일부터 11월 13일까지 395고지 인접 지역인 중마산 진지의 방어 그리고 1952년 11월 24일부터 12월 29일까지는 395고지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였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전사에는 "그런데 이곳(395고지)에서의 전황 역시 조용하여 접전없이 지내다가 대대진지를 12월 29일에 국군 제2사단 제32연대 제1대대에게 인계하고" 떠났다고 기술되어 있어서 정말 고지에서 경계임무만 수행하다가 떠난 것이 전부이다.(관련근거: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韓國戰爭史) 제10권 - 유엔군 참전편』 (1979), 225P.)

따라서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가 백마고지 전투 참가 혹은 벨기에-룩셈부르크 참전용사를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등으로 언론에서 기술하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395고지(통칭 백마고지)에서 벌어진 전투 목록

(1) 1951년 10월 3일부터 19일까지 美 제1군단이 서부전선의 방어선을 개선하기 위해 벌인 공세작전인 ‘코만도 작전(Operation Commando)’ 기간 중 美 제3사단에 의한 395고지 확보 작전(관련근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제9권』(2012), pp. 518-521.)

2) 1951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국군 제9사단 제29연대에 의해 이뤄진 281고지 및 395고지 방어 전투(관련근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제9권』(2012), pp. 559-568.)

3) 1952년 6월 카운터 작전

4) 휴전 직전에 1953년 6월 12일에서 7월 10일 사이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

4.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상기 전투들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美 제3사단 제7연대에 배속되어 1952년 10월 25일부터 11월 13일까지 395고지 인접 지역인 중마산 진지의 방어를 담당하였습니다. 또한 1952년 11월 24일부터 12월 29일까지는 395고지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였습니다.

8. 이 이름을 딴 것

8.1. 제9보병사단

이 전투를 계기로 백마부대로 명명되었다.

8.2. 백마고지역

2012년 11월 20일 개통한 경원선의 역.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8.3. 스타크래프트 맵

백마고지(스타크래프트) 참고.


[1] 그런데 당시 전투 상황에 대한 말들을 보면 정작 백마고지의 중앙 능선은 백마는커녕 낙타능선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2] 발수로는 4배 좀 안될지 몰라도 구경의 차이를 감안하면 4배 이상으로 컸다. 중공군이 동원한 포격은 대부분 82mm 박격포나 76mm 사단포 정도였지만, 국군과 미군이 퍼부은 포격은 물론 81mm 박격포도 많았지만 105mm와 155mm 곡사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