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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9 09:21:10

박종규(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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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규
朴琮圭 | Park Jong-Gyu
출생 1944년
충청남도 대전부 (現 대전광역시)
사망 2010년 12월 7일 (향년 66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학력 대전고등학교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임관 육군사관학교 (23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67년 ~ 1993년
최종 계급 소장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제3공수특전여단 15 대대장
제30보병사단 91연대장
제56보병사단
병과 보병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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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육군 예비역 소장이며 12.12 당시 김오랑 비서실장을 살해한 주범이다. 대통령 경호실장을 역임한 피스톨 박과 동명이인이다.

2. 생애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 육군사관학교(23기)를 졸업했다. 동기 중 유일한 미국 특수전교육 수료자라고 한다. 1979년 12월 12일 자정 육군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 15대대장으로서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는 최세창 여단장의 지시를 받고 본인과 사적으로 친했던[1] 특전사령관 부관 김오랑 소령을 살해한 후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했다.

1980년 5.17 내란 때 3공수여단은 서울 국립묘지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신군부는 항쟁 3일째인 5월 20일에 3공수여단을 광주로 내려보낸다.[2] 12.12 군사반란 때부터 3공수여단 15대대장이었던 그는 5.18 강제 진압에도 참여하여 유혈진압을 하였다. 본인 말로도 시위대가 무장하기 전인 20일 밤[3] 광주역에서 시위대를 향해 본인이 직접 권총을 발사했다고 시인했다.[4]

1993년 제56보병사단장( 소장)으로 있다가 김영삼 하나회 숙청으로 강제 전역했다. 물론 하나회 항목의 '하나회 회원 명단'에도 나와 있지만, 그는 하나회 회원은 아니었다. 허나 직속상관 명이라 상명하복이라 주장했지만 직속상관보다 서열이 높은 특전사령관의 명령을 어기고 특전사령관까지 체포한 이상 군사반란 행동대장에 가까운 인물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그 역시 신군부 내란죄 등의 혐의 관련해서 이희성, 주영복, 신윤희, 이원조와 함께 불구속 수사를 받고, 1997년 4월 17일 대법원 최종심에서 징역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사면되었다.

재판에서 실형 선고로 군인연금을 포함한 모든 예우를 박탈당해 민간인이 된 이후 경제적으로는 부인이 동대문시장에서 옷가게를 운영한 수입으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풍문에 의하면 이때 전두환이 징역을 마치고 나온 박종규를 불렀다고 하는데, 그 부름을 거절했다고 한다. 전두환 성격상 갔으면 꽤 큰 보상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을텐데[5] 본인은 군인으로 명령을 따랐을 뿐 전두환을 위해 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걸 지키고 싶었던 듯 하다.

2009년 12월 9일, 김오랑추모사업회에 전화를 걸어 '나에게도 지난 30년은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자신이 지금 식도암 4기 등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하늘의 벌'이라면서 12.12에 참여했던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을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 자업자득인 면도 있다만. 2005년 MBC PD수첩과의 인터뷰에서도 "김오랑 생각하면 내가 오래 살면 안되지. 내가 오래 안 사는 게 걔에 대한 보답이야"라는 등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6]

2010년 12월 7일 식도암으로 투병 중 66세로 사망했다.

3. 대중매체

최세창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절친 김오랑을 사살하기는 했지만 이후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았다는 증언들을 반영해 박종규가 김오랑의 시신 앞에서 멘탈이 붕괴되는 묘사가 필수요소로 들어간다.


[1]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적도 있으며, 이후에도 같은 군인아파트 위아랫층에 살아서, 부인끼리도 알고 지내며 밥도 같이 먹는 사이였다고 하며 군사반란 이전까지는 주위에서도 피가 이어지지 않은 형제라고 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김오랑 소령의 아내 백영옥 씨가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박종규에게 "군인이 반란 일으키라는 걸 명령대로 하나 보죠?"라고 일갈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당연히 12.12 군사반란 이후 김오랑 소령의 아내 백영옥씨에게 절연당했고, 김오랑 소령 유족들은 "제압하면 될 것을 그것을 총을 발포해서 죽일 필요까지 있었냐"며 분노를 표출하였다. [2] 3공수여단은 이미 전날 19일 새벽에 광주에 투입하기로 결정한 상황이었고 20일 새벽에 광주로 기차를 통해 이동했던 것이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3공수여단은 11, 12, 13, 15, 16대대였다. [3] 시위대가 최초로 무장한 시점과 장소는 다음날인 21일 오후 1시 30분경, 나주 남평지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전남지방경찰청 2017) [4] 조갑제 "조갑제의 광주사태", 조갑제닷컴 2013. [5] 근데 이 말 자체가 웃긴 게 당시 전두환은 추징금도 제대로 납부가 안된 상태였다. 즉, 이때 불러서 갔는데 돈 따위를 줬다면 그것도 추징 대상인 불법축재자금이다. [6] 당시 인터뷰에는 3공수여단 모 중령이라고 나왔다. [7] 사실 백무현 화백이 군사정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사람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더군다나 책이 나올 당시에 박종규는 용서를 빌지도 않았고, 인터뷰 역시 모 중령이라고만 소개되었으니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묘사를 넣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오랑 부인과의 이야기는 그저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니 그걸로 좋게 평가할 이유는 더더욱 없고. [8] 근데 정작 박종규와 김오랑 소령의 실제 나이는 1944년으로 동갑이다. 다만 박종규가 육사 2기수 선배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