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니 풀리테(mani pulite)는 이탈리아어로 '깨끗한 손'이라는 뜻으로, 199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 벌어졌던 검찰의 부정부패 척결 작업을 말한다.2. 상세
1980년대 후반 이탈리아 사회의 큰 화제였던 막시 재판으로 마피아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이탈리아 정계와 마피아 사이의 유착관계가 의심받는 등 이탈리아 정계는 부정부패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1992년 2월 17일 검찰이 사회당 경리국장의 집을 수색해 700만 리라의 현금을 압수하면서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1992년부터 1994년에 이르기까지 5000명에 육박하는 수많은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수사 대상에 올랐고 그중 3000명[1]의 부패가 확증된 후 1000여명이 구속되었으며, 400개 이상의 시의회와 마을 의회가 부패 혐의로 해산되었다.[2] 당시 이탈리아 언론은 이에 대해 탄젠토폴리(Tangentopoli, 뇌물 마을)로 불렀으며, 이들 정치인들이 받은 뇌물은 무려 6.5조 리라, 달러로 환산하면 40억 달러였다고 한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총리를 지낸 베티노 크락시[3]는 튀니지로 망명해 이탈리아 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고, 줄리오 안드레오티 전 총리도 비리 혐의가 드러났으며 총리가 되었던 줄리아노 아마토도 본인은 비리 혐의가 없었지만[4]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결국 사임했을 정도였다.
사실 마니 풀리테 수사 초기에 기민당과 사회당 연정이던 의회는 뜬금없이 부패 사건 수사권을 검찰에서 (정부가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찰로 이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지만, 당연히 오스카르 루이지 스칼파로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고 이탈리아 국민들도 부패 수사 받는 게 무서워서 저러는 게 아니냐고 비야냥거리며 대규모 반정부 시위까지 벌이게 되었다. 또 1993년 3월 5일에는 불법 정치자금 조달을 비범죄화하려는 법령[5]을 통과시키려 했지만 이 역시 부패 혐의에 대한 사면법 아니냐며 비난하는 여론이 돈 것과 동시에[6]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를 주도한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Antonio Di Pietro, 1950~) 검사는 전성기에 지지율이 80%에 달했을 정도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가치의 이탈리아당(IDV: Italia dei Valori)을 창당해 상원의원, 유럽 의회 의원, 로마노 프로디 연립내각의 공공사업 및 인프라 장관을 지냈다. 이후 그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도 수사하려 했다가 베를루스코니가 장악한 언론의 중상모략 캠페인과 정치적 외압으로 사법부에서 반강제적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3. 영향
수사의 표적이 된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당은 1994년에 자진 해산할 정도로 몰락했다. 그러나 1994년 총선 결과 유권자들이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되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북부동맹 같은 포퓰리스트들이 빈 자리를 채우면서, 이탈리아의 정치가 그전보다 나아졌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게 되었다.[7]베를루스코니는 숱한 비리 의혹에도 버텨내는 데 성공했으며 검사들을 좌파라고 비난하는 선전도 했는데 이것도 먹혔다. 결국 마니 풀리테가 이탈리아의 개혁을 이뤄낼 것이라는 희망은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채 베를루스코니가 판칠 수 있는 환경만을 만들어 주었을 뿐이라는 점에서 뒷맛이 씁쓸한 결과를 낳았다.
마니 풀리테와 더불어서 1992년 5월과 7월 주요 판사 2명이 시칠리아에서 마피아들에게 폭탄테러로 살해당한 것은 당시 이탈리아인들에게 큰 충격을 줬고[8], 때문에 1992년은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있어서 '이탈리아 현대사에서 최악의 해'로 꼽히고 있다.[9] #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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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에서 이름을 따 온
현대미술 작품도 존재하는데 다름 아니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체지방으로 만든
인체 비누다. 베를루스코니가
지방흡입 수술을 받으면서 팔린 체지방을 입수해서 비누를 만든 것으로, "자체가 더러운 인간이니 이걸로라도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라"는 식의 조롱을 담았다고 한다.
5. 관련 문서
[1]
국회의원 400명 포함. 어느 정도냐면 한국 국회의원 정원이 300명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구속된 사람들이 22명이다. 또 이탈리아 국회의원 정원이 600명(상원 200석 + 하원 400석)이란 것을 감안하면, 한국으로 치면 국회의원 200명이 비리 혐의로 한꺼번에 구속된 격이다.(...)
[2]
사실 조사를 받은 주요 정치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부하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게 되자 그 부하들이 배신감을 느끼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비리를 폭로하고, 그 사람들이 다시 다른 사람들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무수한 정치인들이 부패로 걸려들게 되었다.
[3]
여담으로 크락시 전 총리는 검찰 수사 과정에서 마니 풀리테는 모두 날조된 스캔들이며 디 피에트로 검사가 여당 정치인만 표적 수사하고 있고 야당 정치인은 수사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4]
2000~2001년 다시 총리를 역임했을 정도.
[5]
당시 법무장관이던 조반니 콘소(Giovanni Conso, 1922~2015)의 이름을 따 '콘소 법안'이라고 불렸다. 그나마 콘소는 비리 혐의는 전무했기에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 설립 법령을 승인한 유엔 전권위원회의 의장을 1개월간 맡으며 2015년까지 천수를 누렸다.
[6]
이는 취소할 수 없는 유죄 판결이 이미 발생했더라도 형법 제2조 2항에서 비범죄화는 항상 소급 효과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범죄 혐의에 대한 무죄를 소급 처리하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7]
대규모 부정부패 스캔들로 대중들에게 기성 기득권 정치인에 대한 환멸을 심어준 점에서 마니 풀리테와 유사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조차
자유한국당이 해산까지 가지는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마니 풀리테가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이쪽도 이탈리아로 치환하면 마피아와 연계된 정체불명의 인물이 총리를
가스라이팅하고 국정 운영까지 전담했다는 마니 풀리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스캔들이긴 하다.(...)
[8]
심지어 훗날 폭로된 바에 따르면 마피아들이
북한 정치인들과 결탁해 디 피에트로 검사까지 폭살시키려 했다고 한다.(!!!)
[9]
정작 외적으로는
소련 붕괴 +
영국의 침체에 힘입어 GDP 순위 5위까지 기록한(마니 풀리테가 정점이던 1992~1993년 이랬다) 최고의 황금기(속칭
일 소르파소(il Sorpasso))였던 것이 킬포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