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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7 09:50:24

루이지 알레만디

루이지 알레만디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클럽
파일:SS 라치오 로고.svg

17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아틸리오 페라리스
(1934~1935)
루이지 알레만디
(1935~1936)
주세페 메아차
(1937~1939)
}}} ||
루이지 알레만디의 수상 이력
{{{#!folding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이탈리아의 前 축구인
파일:external/img1.qq.com/5134917.jpg
이름 루이지 알레만디
Luigi Allemandi
출생 1903년 11월 8일
이탈리아 왕국 산 다미아노 마크라
사망 1978년 9월 25일 (향년 74세)
이탈리아 피에트라 리 구레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82cm | 체중 75kg
직업 축구선수( 레프트백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레그나네시 (1919~1921)
AC 레냐노 (1921~1925)
유벤투스 FC (1925~1927)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27~1928)
암브로지아나 인테르 (1928~1935)
AS 로마 (1935~1937)
베네치아 FC (1937~1938)
SS 라치오 (1938~1939)
감독 SS 라치오 (1939)
국가대표 24경기 ( 이탈리아 / 1925~1936)

1. 개요2. 선수 경력3. 감독 경력4. 은퇴 이후5. 플레이 스타일 & 평가6.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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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39년 SS 라치오 감독을 맡았다.

2. 선수 경력[1]

2.1. 클럽 경력

쿠네오현의 산다미아노마크라에서 태어난 알레만디는 어린 시절에 가족들을 따라 레그나노로 이사하였다. 그 곳의 레그나네시라는 클럽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였고,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경험을 쌓아나갔다. 그러다 알레만디는 레그나노를 거쳐 1925년부터는 유벤투스 FC에서 뛰게 되었고 비르지니오 로세타와 강력한 풀백라인을 구축하였다. 그 활약을 바탕으로 알레만디는 이탈리아 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그는 알레만디 스캔들[2]이라는 이탈리아 축구 역사에 남은 논란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와중에 알레만디는 계속 결백을 주장했고, 1928년에 사면되었다. 결국 인테르나치오날레로 팀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네라주리 유니폼을 입고 한 차례의 스쿠데토를 따낸 알레만디는 1935-36 시즌을 앞두고 몸집을 불리던 AS 로마로 팀을 옮겼다. 하지만 팀은 전년도 득점왕 과이타 야반도주로 인한 타격을 메우지 못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 2년간의 로마 생활을 마친 후에는 베네치아와 SS 라치오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2.2. 국가대표 경력

알레만디는 볼로냐 안젤로 스키아비오와 함께 1925년 11월 4일,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상대로 A매치에 데뷔하였다. 1930년에는 중유럽 컵에서 우승하면서 처음으로 대표팀에서 트로피를 들기도 했다.

토리노에서의 충격적인 패배를 딛고 새로운 피로 채워진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서는 처음으로 주장 완장을 차기도 했다. 월드컵에서는 5경기에 모두 출전한 5인 중 1인으로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에 큰 공을 세웠다.

1935년 10월부터는 대표팀의 정식 주장이 되었고, 1936년 12월 13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대표팀 유니폼을 벗었다. 총 24경기에 출전했으며 득점은 없다.

3. 감독 경력

1938-39 시즌 SS 라치오에서의 마지막 시즌에는 주로 백업 선수로 활약했는데 12경기는 감독으로 팀을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1955-56 시즌에는 알레산드리아의 기술 코치를 맡기도 했다.

4. 은퇴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잠시의 코치 생활을 빼면 작은 가게에서 일했다고 전해진다.

5.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이탈리아를 대표하던 강력한 풀백. 빠른 스피드로 유명했다.
그는 자연의 억제되지 않은 힘이었다. 그는 곱슬머리였는데 악마처럼 보였다. 그의 빠른 달리기는 곡예 점프만큼이나 인상적이었고, 그 스피드로 그의 경쟁자들보다 항상 공에 먼저 닿곤 했다.
잔니 브레라

6. 수상



[1] 출처: 위키백과 [2] 알레만디가 지역 라이벌 토리노 뇌물을 받았다는 스캔들이다. 이탈리아 축구 협회의 조사 결과는 토리노의 우승 박탈이었고 이로 인해 토리노는 첫 스쿠데토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