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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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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RAI 2에서 이탈리아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인’ 명단이다. 고대 로마 제국 시기의 인물들이 완전히 배제되고 투표율도 6%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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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부터는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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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파일:Leonardo da Vinci.jpg
본명 레오나르도 디세르 피에로 다빈치[1]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출생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공화국 빈치
사망 1519년 5월 2일 (향년 67세)
프랑스 왕국 앙부아즈
묘소 앙부아즈 성
직업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공학자, 문학가, 해부학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역사가,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집필가, 기술자, 요리사, 수학자, 의사
사조 르네상스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레오나르도 다빈치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작업4. 일화5. 주요 작품6. 대중매체에서
6.1. 목록6.2. 기타
7. 기타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상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공학자, 문학가, 해부학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역사가,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집필가, 기술자, 요리사, 수학자, 의사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다재다능한 천재이며, 다방면에서 두루 활약했다. 심지어 키도 매우 크고 외모, 목소리도 매우 빼어났다고 한다.[2]

특히 걸출한 회화 작품들을 남겼으며, 대표작 < 모나리자>, < 최후의 만찬>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흔히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과 같이 비교가 된다.

흔히 다 빈치라고 줄여 부르는 경우가 많아 '다 빈치'를 성 씨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다 빈치'는 성씨가 아니라 그냥 빈치 (Vinci) 출신이라고 해서 붙은 칭호이다. 이탈리아가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성 씨가 늦게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와 같은 성씨+이름 개념이 아직 확립되지 않던 당시에는 다른 사람 (특히 동명 이인)과 구별하기 위한 기호로써 자신의 출신 지역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한 동네에 레오나르도가 세 명 산다면 그 셋을 구별하기 위해 각각 '방앗간 집 레오나르도' 와 '앞골짜기 레오나르도', '빈치 사람 레오나르도' 식으로 불렀다.[3] 이 점에서 보면 현대의 성처럼 '다 빈치 씨'라고 부르기에는 적절치 않지만, 기본적으로 성씨와 비슷한 구실을 한다. 로망스어 이름에서 흔히 발견되는 de 뭐시기와 독일어의 von 뭐시기들이 이런 풍습의 흔적이다.[4] 1563년에 열린 제3차 트리엔트(트렌토)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교회에서 모든 이의 성명을 포함한 본적 기록부를 의무화했다. 그래서 1563년 이후 세대에서는 이탈리아에서도 모든 이들이 성씨를 가지게 되어 일반인도 보통 성씨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 1563년 이전에는 이탈리아에서 아직 성씨를 쓰지 않는 이들이 많아서 이름으로만 부르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다. 그 예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름인 갈릴레오로 불렸거나, 레오나르도 피에로 다 빈치가 레오나르도로 불렸던 것을 들 수 있다. 한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Petrarca)나, 조반니 보카치오 (Boccaccio)처럼 성 씨로 불리는 이들도 있었다.

따라서 '다 빈치'의 의미가 더 잘 전달되는 서양권에서 그를 언급할 때는 주로 이를 생략하고 레오나르도라고 부른다. 비슷한 예로 빈센트 반 고흐는 국내에서는 주로 '고흐'라고 하지만 서양에서는 주로 빈센트라고 부르고, 잔 다르크도 국내에선 풀네임으로 '잔 다르크'라고 많이 호칭하지만 서양권에서는 '잔 (Jeanne)', '조안 (Joan)' 같은 식으로 짧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5]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한국어 영상 영어 영상의 코멘트를 보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한국인들은 '다빈치는', '다빈치가' 같이 언급하는 반면 해외에서는 '다 빈치'라고 부르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레오나르도는', '레오나르도가' 같이 언급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생애

레오나르도 "피에로"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밤 3시경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의 ' 빈치(Vinci)' 마을에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부모인 변호사 아버지 안토니오 피에로와 농민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아들이었다. 처음 태어나서는 어머니의 집에 살다 대여섯이 돼서 아버지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레오나르도를 돌봐준 것은 아버지보다는 숙부였고 숙부는 어린 레오나르도에게 자연과 세상을 조금씩 가르쳐주었다.

아버지가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인식한 뒤, 레오나르도는 14살쯤 피렌체로 이사를 가 안토니오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공방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20살이 되어 베로키오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수로 참여해 꼬마 천사 두명을 맡았는데, 당시에 일반적이던 템페라 기법에 새로 알려지기 시작한 유화를 같이 실험해서 그렸다. 세간에는 베로키오가 그걸 보고 현타가 찾아와 화가를 은퇴했다는 야사가 전해지지만, 그 뒤에도 잘만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이 그림 뒤로 베로키오는 다빈치를 정식으로 화가 길드였던 성 루카 조합에 가입시켜주게 했다.

30살이 된 1482년 다빈치는 밀라노 공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밀라노 공이었던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다빈치를 지원하면서, 다빈치는 여러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암굴의 성모>나 <기마상> 등이 이때 만들어졌고[6], 그 중 가장 유명한 건 < 최후의 만찬>이다.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나면서 1499년에 프랑스 왕국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점령하고 루도비코는 프랑스에 투옥되며 밀라노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다빈치는 잠시 베네치아에서 일을 하다가 1500년 피렌체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1501년 <성 모자와 성 안나> 제단화를 그린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연구 스케치와 관찰을 남겼다. 헬리콥터나 인체비례도 등 잘 알려진 다 빈치의 과학자/기술자적 면모는 이 때의 스케치로 알게 된 것. 1503년에 피렌체 시청에 벽화작업을 의뢰받아 <앙기아리 전투> 작업을 시작했는데, 재밌는 건 옆편 벽에서 라이벌인 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를 작업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1503년에는 그 유명한 모나리자 작업을 시작해 죽을 때까지 그림을 손에 놓지 않는다.

1506년에는 루이 12세의 요청을 받고 다시 밀라노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밀라노를 떠나는 1513년까지 다빈치는 다양한 작업과 연구를 하면서 지냈는데, 제3차 이탈리아 전쟁으로 1512년 교황이 밀라노를 공격하고 프랑스는 물러난다. 그렇게 프랑스가 떠나면서 다빈치는 교황령의 로마로 가서 교황청 작업을 주로 하게 되었지만 완성작 없이 취소되었고,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 루아르 강의 앙부아즈 궁에 기거하게 되고, 여기서 <모나리자>가 완성된다.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직감한 그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1519년 5월 2일 자신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3. 작업

그의 기록은 공학, 식물학, 조경 분야 등 다방면에 이름이 남아 있다.[7] 그러나 다빈치가 관심을 가졌던 방대한 분야에 비하면 남아있는 작품의 숫자는 적은 편이다. 게다가 본인이 작품에 서명하지 않았던 탓에 다빈치의 작품인지 아닌지 이견이 갈리며 불확실한 작품들이 많다. 거기다가 워낙 본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보니 아무데나 다빈치가 관여했다는 소문이 붙어버리는 상황이다. 예를 들면 근거가 불확실함에도 일반적으로 스파게티 면이나 포크까지 발명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8][9]
파일:1374px-Mona_Lisa,_by_Leonardo_da_Vinci,_from_C2RMF_retouched.jpg
그의 유명한 작품인 모나리자
파일:Peter_Paul_Ruben's_copy_of_the_lost_Battle_of_Anghiari.jpg
안기아리 전투 그림의 페테르 파울 루벤스 모사본. ( 밀라노 공국 vs 베네치아 공화국)
파일:attachment/leonardodacecilia.png
흰 담비를 안은 귀부인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자기소개서에선 대부분을 군사용 공격병기를 구상해 이야기하였고, 그림의 재능을 마지막에 소개했지만 오늘날 다빈치의 그림 실력은 그의 능력 중 높게 평가되는 부분이다. 그가 남긴 그림은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한 것들이다. 그는 그림 실력 그 자체로써도 출중했지만, 새로운 화법의 실험이라는 면에서 높게 평가할 만한 인물로, 자신의 그림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 최초로 기름을 사용한 유화를 시도한 화가들 중 하나였다.[10] 그 결과로 모나리자에서 공기 원근법을 처음으로 구사해내는 등 좋은 결과도 여러 차례 얻어냈다. <암굴의 성모>나 < 에르마인을 안고 있는 숙녀>는 르네상스 최고의 초상화로 손꼽히는 명작들이다. 반대로 지나치게 실험정신이 투철했던 나머지 프레스코 그림에 프레스코와는 상극인 유화 기법[11]을 써서 그림이 그대로 녹아내리는 바람에 망치는 일도 있었다(<앙기아리 전투>). 그리는 도중에 그림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그림을 빨리 말리기 위해 화로까지 동원했지만, 결국 아랫부분 일부를 제외한 작업분이 전부 녹아내리는 바람에 그대로 버려졌다고 한다. 문제는 이 작품이 미켈란젤로와의 대결작이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라는 작품을 그려내지만, <앙기아리 전투>는 현재 라파엘로 등 다른 화가들의 스케치 모사 밖에 남아있지 않다. 본 문서의 앙기아리 전투 그림도 루벤스가 그린 모사본이다.
파일:attachment/davincilastsupper.jpg
최후의 만찬

<앙기아리 전투>를 너무 대차게 말아먹어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지만 실험 정신이 지나쳐 망가진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심지어 유명한 <최후의 만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최후의 만찬은 완벽주의적인 그의 성격으로 당시 유행하던 프레스코 벽화 기법[12]이 아닌 템페라로 그려져 바로 퇴색이 시작되는 등[13] 그의 도전이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대에 확립된 그의 천재 미술가적 이미지는 사실 그의 작품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실제로 그가 서양사에 오래토록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금기로 여겨지던 해부를 행하는 등 여러 시도를 통해 인체의 많은 부분들을 실질적으로 관찰해냈다는 것 때문이다. 인간의 태아를 최초로 그린 사람이기도 하고 많은 해부 스케치를 남긴 바 있다. 다빈치의 스케치인 <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인체 비례에 대한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로 유명하다. 다만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에서는 인체 해부를 공식적으로 금지한 적도 없고, 실제로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 해부쇼가 유행할 정도였으며 당시 다른 유명한 화가들도 다들 해부를 했다. 흔한 레오나르도 과대 평가 떡밥 중 하나이다. 무슨 사회적 터부를 어기면서까지 진리 탐구에 몰두하고 시대를 앞서가고 그런 건 아니란 소리. 오히려 다빈치의 해부가 불법이었던 건 다빈치가 정규 의대생이 아니었던 탓이 크다.

그렇게 생전에 완성한 그림이 얼마 되지 않고, 성격이 괴팍하기는 했지만 그 그림 실력 하나만큼은 천재적으로, 그의 스승 안드레오 델 베로키오는 그 당시에 유명한 화가였으나, 자신이 그리던 <그리스도의 세례>를 레오나르도가 몇 가지를 덧붙였는데, 스승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도의 솜씨를 보고는 '다시는 물감에 손대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기록이 있다. 이 당시의 나이가 스무 살. 하지만 실은 베로키오가 재능넘치는 도제에게 더 많은 그림을 위임하고 자기는 수익성이 높은 조각상 제작에 전념하겠다는 사업상의 결정을 내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밀라노의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동상을 수년간 연구만 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일도 있으며, 오스만 제국에는 젊은 시절의 그가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메흐메트 2세가 그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제작기간에 질려서 돌려보냈다는 식의 설화도 있을 정도였다.[14] 이외에도 오스만 제국 보스포루스 해협에 다리를 디자인했는데 당시 기술로서는 도무지 이게 만들 수 있냐고 오스만 제국 황실에서 부정적이라 끝내 이뤄지지 못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냥 평범하게 나무로 길쭉한 다리로 만들어진다. 요즘에는 한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그림에 손을 대었던 것이 성인ADHD의 증상이 아니었나 하는 해석도 있다. 물론 모두 본인의 잘못은 아니었는데, 예를 들면 체사레 보르자에게 인정받아 도시 계획의 총책임자급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지만 체사레가 몰락한 탓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훌륭한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 비해 다빈치는 건축 분야에서 뚜렷한 결과물을 남기지 못했다. 건축면에서 큰 발전이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인 만큼 레오나르도 역시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에서 건축 자문으로 활동하며 건축에 관련된 스케치를 다수 남겼지만, 레오나르도 본인이 독자적인 건축가로 활동하지는 못했다.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의 샹보르 성의 이중 계단에 대한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남겼고, 이 성의 건축가였던 도메니코 다 코르토나가 그것에 따라 설계했다는 설이 유명하지만 레오나르도가 그에게 그림을 넘겼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2010년 6월 20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Surprise Secret에서는 그가 요리사 활동한 적이 있다고 한다.[15]
198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발견된 코덱스 로마노프가 레오나르도가 남긴 요리에 관련된 문서이다. [16] 이 내용은 EBS 지식채널e 에서도 다뤘다. 상당히 개그스러운 에피소드.

4. 일화

5. 주요 작품

제목 시기 소장처 비고
수태고지 1472~1475년경
[[이탈리아|
이탈리아
]] 우피치 미술관
동방박사들의 경배 1481년
[[이탈리아|
이탈리아
]] 우피치 미술관
암굴의 성모 1483년~1485년
1495년~1508년

[[프랑스|
프랑스
]] 루브르 박물관

[[영국|
영국
]] 내셔널 갤러리
[20]
최후의 만찬 1490년
[[이탈리아|
이탈리아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흰 담비를 안은 귀부인 1490년
[[폴란드|
폴란드
]] 차르토리스키 미술관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1490년
[[이탈리아|
이탈리아
]] 아카데미아 미술관
[21]
모나리자 1503년~1506년경(추정)
[[프랑스|
프랑스
]] 루브르 박물관
살바토르 문디 1505년~1515년경(추정)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 무함마드 빈 살만
[22][23]

6. 대중매체에서

상당히 유명한 예술가인데다 시대를 앞서간 여러모로 기이한 면이 많아서 다양한 미디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하거나 본인을 등장시키곤 한다. 기이한 천재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먹고 들어가고 예술가의 모습보다는 주로 과학자나 발명가의 모습에 비중을 둬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6.1.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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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기타

7. 기타

파일:external/www.museoscienza.org/balistalanciasassi_180.jpg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고안한 투석기.

[1] 로망스어 게르만어권의 인명이나 지명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 [2] 194cm의 장신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구글 프로필에는 175cm로 나와 있는데 만약 실제 키가 175cm라고 해도 당시에는 장신이었다. [3] 그래서 디스크월드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패러디 캐릭터인 레오나르도 드 퀌은 퀌에서 온 레오나르도라는 뜻이 된다. [4] 네덜란드어권은 양쪽의 영향을 모두 받아서 de 뭐시기와 van(독일어의 von과 같은 어원) 뭐시기가 공존한다. [5] 한국 관점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김두한이 '종로의 두한'이라고 알려져 있다고 해보자. 이 경우 한국인들은 보통 앞의 수식어를 떼고 '두한'이라고 부를 것이다. 반면 '다 빈치', '고흐' 같은 호칭은 사람을 단순히 '종로'라고 부르는 셈이다. [6] 다만 이 기마상은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프랑스 군사들이 활쏘기 과녁으로 삼아서 마구 석궁의 화살을 쏘아대는 바람에 커다란 고슴도치로 변해버려, 결국 기마상은 완성되지 못하고 버려졌다. [7] Fritjof Capra, '다빈치처럼 과학하라', 강주헌 옮김, 김영사, 2011 [8] 그러나 실제로 포크는 고대 이집트 시절 유물에서도 확인이 가능한, 인류가 사용한 오래된 식기류 중 하나이고, 동로마 제국에서 처음 상용화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태어나기 100여 년 전의 인물인 샤를 5세 또한 금과 은으로 만든 포크를 가지고 있음이 확인 되는 만큼 포크 자체를 발명한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포크가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전파 된 데에는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국가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유명한 발명가인 다 빈치가 발명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듯하다. [9] 스파게티면도 마찬가지로 로마시대의 유물 중에 스파게티틀이 발굴되어 다 빈치의 발명품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10] 단 그는 유화보다는 템페라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11] 유화는 습기와 열에 극도로 취약한데, 프레스코화는 회칠을 한 벽면에 그리는 그림이다.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려야 하기 때문에 벽면이 당연히 습기로 축축하며, 회반죽이 굳으며 화학반응이 일어나 이 발생한다. [12] 프레스코 기법은 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완성해야 하고 수정하기도 매우 힘들기 때문에 완벽주의적인 다 빈치는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때문에 템페라로 그린 최후의 만찬은 역사상 가장 불행한 그림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13] 템페라는 광물을 곱게 갈아서 달걀 노른자와 섞어 만든 물감으로 전통적으로 이콘을 그리는 데 많이 쓰였다. 다만 이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템페라 물감은 변색이 쉽게 되고, 특히 성당같은 경우 항상 초와 향을 쓰기 때문에 그을음이 달라붙어 시간이 지날 수록 새까맣게 변하게 된다. 때문에 아직도 템페라 물감으로 그리는 이콘은 70-80년마다 한 번씩 덧칠을 해준다. [14] 어린이용 교육책에 종종 올라오는 일화 중에 어느 장수의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은 화가가 활 하나만 그리는데 그리고 버리고 그리고 버리고를 반복하다 십년 넘게 걸렸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꼬려고 만든 일화라는 주장도 있다. [15] 밀라노 대공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궁정에 있을 때 일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요리를 만들어 평판은 그저 그랬다. 이탈리아 요리는 풍성하면서도 화려한 것을 기대하는데, 레오나르도의 요리는 엔초비 한 마리와 곁들이는 채소 정도로 소박했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었던 것. [16] 대한민국에는 2002년 책이있는 마을에서 '한 천재의 은밀한 취미' 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항목 아래쪽에는 동물을 사랑해서 고기를 먹지 않겠다 라고 했다는데 그 문서에 따르면 글쎄...? [17] 이로 인하여 문학작품에서 양손잡이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다른손잡이였다. [18] 원래는 레오나르도가 그림을 가르쳐줄 제자로 쓰기 위해서 고용했으나, 살라이가 그림에 대해 소질이 없자 할 수 없이 그를 곁에 두고 자신이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도와주는 조수로 삼았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죽기 전에 자신이 가진 유산인 포도밭을 살라이한테 넘겨주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할 만큼, 살라이를 아꼈다. [19] 당시 밀라노의 대표인 스포르차 가문을 의미한다. [20] 같은 작품이 두 점 존재한다. [21] 인체 비례도(Canon of Proportions)라고도 한다. [22] 다빈치의 작품 중 유일한 개인 소장품. [23] 다빈치의 작품이 맞는 가에 대한 진위 논란이 현재진행형이다. [24] 심지어 관련 퀘스트의 대부분이 유저들을 전국일주하게 만들 정도로 경로도 그렇고 과정도 복잡해 상당한 원성을 듣고 있다. [25] 레오나르도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어머니가 이탈리아에 갈 당시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림을 보고 반응한다고 해서 붙인 것이다. [26] 당근 조각을 곁들인 생선이나 꽃으로 장식한 음식 등. 꽤나 예술적인 음식이었지만 많은 양의 고기 요리에 익숙한 손님들은 불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27] 미술사학자 노성두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건 왕구라라고 한다. 웃으라고 써놓은 글을 진짜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고로 완전 거짓임. [28] 1690년 ~ 1730년, 오페라 <Artaserse>가 대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