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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21:57:43

디스코 폭파의 밤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20180719-180445-demolition night.jpg

1. 개요2. 배경3. 사건 전개4. 평가
4.1. 대한민국에서의 유사 현상

1. 개요

Disco Demolition Night

1979년 7월 12일 당시 시카고 화이트삭스 홈구장이었던 코미스키 파크(Comiskey Park)에서 벌어진 이벤트로 촉발된 관중 난동 사건.

2. 배경

1979년 록 음악 디스코의 광풍에 밀려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디스코 붐은 펑크 록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내내 한 번도 왕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는 단순하고 춤추기 좋은 음악으로서의 디스코가 파티 음악으로서 충실했기 때문에 주류 대중문화에서 향락과 소비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데 있다.

또 단순한 만큼 편곡이 엄청나게 쉬웠고 일정한 포메이션에 따라 대량 생산이 가능했으며 그런고로 이를 대체할 다른 댄스뮤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0년대 초반 주류로 올라온 뉴 웨이브의 등장과 이후 일렉트로니카 붐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뉴 웨이브도 디스코와 신시사이저를 받아들인 펑크록이니 디스코의 명맥은 계속 이어진 셈이다.

그리고 당시 시카고 라디오 방송국의 DJ 스티브 달 화이트삭스 구단과 쿵짝을 맞추고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한 이벤트를 기획한다. 마침 스티브 달이 일하던 지역 라디오 방송국이 록음악 방송에서 디스코 방송으로 전환되었고 자연스럽게 록 음악 디제이였던 스티브 달도 짤리게 되었다. 평소에도 디스코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던 스티브 달은 어떻게 하면 디스코라는 음악에 엿을 좀 먹일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1979년은 분명 디스코의 황금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디스코의 몰락이 다가오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디스코라는 음악이 음악 차트를 지나치게 오래 점령하고 있었고[1] 같은 음악을 3~4년씩 듣다 보니 대중들은 점점 디스코에 질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 "디스코는 구려!"(Disco Sucks!)라는 티셔츠가 유행할 정도였다. 다시 말해 대중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디스코에 짜증이 날대로 나 있었다.

이 시점과 맞물려 스티브 달은 '디스코 반대 운동' 비슷한 이벤트를 구단측과 이야기했고 구단측도 "이거 장사 되겠다" 싶어서 허용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역사적인 가장 희귀한 야구경기 구장 난동의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3. 사건 전개

1979년 7월 12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인 코미스키 파크(Comiskey Park I)[2]에서는 그날 더블헤더 일정으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두 경기가 예고되어 있었다. 이 날은 특별히 안 듣는 디스코 음반을 가지고 오면 98센트를 할인해 준다는 이벤트가 있었다. 그리고 많은 관객들이 손에 쥔 디스코 음반을 매표소에 내고 입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레코드가 어떻게 쓰일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첫번째 경기가 끝나고 두번째 경기가 벌어지기 전의 막간에 스티브 달은 군복 방탄모를 착용하고 그라운드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관중들로부터 받은 디스코 레코드들을 외야에 쌓아 놓고 폭약을 설치한 뒤 폭파했다. 그들은 군중들의 가슴에 불을 당겼고 각성한 군중들은 일제히 봉기하여 코미스키 구장을 디스코로부터 해방시켰다.

일단 스티브 달이 관객들로부터 받은 레코드들을 그라운드에서 폭파하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퇴장한 것은 사전에 협의된 것이었다.

하지만 스티브 달이 퇴장하고 나서 갑자기 수천 명의 관중들이 그라운드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라운드에는 이미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당황한 선수들은 벤치로 도망갔고 관중들은 아직 타다 남은 레코드들을 주워서 다시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관객석 난간 쪽에는 이날 행사 분위기를 고취하기 위해 "Disco Sucks!!"등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는데 관중들은 이를 떼어내서 깃발처럼 흔들며 그라운드에 난입했다. 결국 수천 명의 관중들이 그라운드를 점거한 채 사태는 폭동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라운드는 불에 타고 구장 시설들은 박살나기 시작했으며 술취한 관객들이 레코드를 주워서 프리스비처럼 던지고 놀다가 사람을 맞춰서 싸움이 일어나는 등 코미스키 구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결국 헬멧과 곤봉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그라운드에 진입하고 나서야 사태는 진정되었다. 사무국 측에서는 이 상태로는 경기를 치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더블헤더 2차전 경기를 화이트삭스의 몰수패로 처리하여 원정팀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가 1승을 가져갔다.



당시 사건을 다룬 뉴스 영상

이후에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러한 이벤트를 벌이자 야구와 상관 없는 관중들까지 모여들면서 이미 사고가 예고되었다고 한다. 원래 당시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야구장에 모이지 않았고 구장 관계자들은 12,000명 정도가 모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52,000명 정원의 구장에 무려 9만명(!)의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게다가 이벤트가 이벤트인 만큼 야구와 상관없이 그냥 디스코를 공격하러 온 사람들도 부지기수였고 외야석에서 이상한 풀이 타는 냄새를 맡았다는 증언도 있었다.

4. 평가

당시 이러한 광경은 정작 초기 디스코 음악을 주도했던 뮤지션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는지 밴드 시크의 기타리스트 나일 로저스"이건 마치 나치 서적 소각과 같다. 이젠 록 음악 재즈의 고향 미국에서 디스코라는 단어도 말하기 뭐하게 됐군."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사실상 특정한 음악 장르가 싫다고 해서 대규모로 모아놓은 군중들 앞에서 이런 식으로 공개적으로 화형식을 저지르는 행동을 한 것은 전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를 뒤져봐도 없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언급된 나치 독일 시절에도 최소한 억지스러운 명분이라도 대면서 분서갱유를 저질렀지, 저 사건처럼 "그냥 싫다" 같은 이유 하나만으로 저렇게 트롤링을 저지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979년쯤 되면 디스코도 이제 슬슬 끝물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 "디스코 폭파의 밤"은 디스코의 종말을 확실히 앞당긴 사건이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디스코에도 영국식 뉴웨이브와 덥 음악의 요소가 결합하게 되었고 이를 포스트 디스코라고 한다.

시간이 흐른 후에는 1970년대 후반의 주류문화로 부각되기 시작한 흑인, 라틴, 게이, 레즈비언 문화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백인, 노동계층, 남성들이 이러한 사건을 벌인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비판적으로 평가받는 추세다. 예를 들면 롤링 스톤 등에 글을 기고하는 음악 평론가 데이브 마쉬(Dave Marsh)는 "락 음악이 인종청소 당할 것이라는 편집증적인 판타지"가 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분석했고 이스트 런던 대학의 교수인 팀 로렌스(Tim Lawrence)나 일부 역사가들 역시 이 사건의 배후에는 성차별주의자, 인종주의자, 동성애 공포증으로 대변되는 당시의 분위기가 있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래서 백인, 노동계층, 남성들이 상당수 비중을 차지하던 당시 야구장에서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에 전통적인 미국의 기독교적 가치의 복원을 내세운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된 것 또한 이 사건을 돌아보았을 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후대의 평가는 상당히 악화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주도했던 스티브 달은 2009년과 2014년에 두 번이나 당시 이벤트에 그런 의도(성차별, 인종차별, 동성애 공포증)는 없었다고 해명해야만 했으며 15세의 락커로서 폭동에 참여했던 NBC 시카고 기자 마크 앤더슨(Mark W. Anderson)은 당시 폭동은 음악에 대한 선택 문제였고 사람들이 얘기하는 그런 것(성차별, 인종차별 등)은 아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당연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핑계 같은 소리냐?"고 욕을 먹었다.[3]

그리고 이렇게 다인종, 진보 세력의 흑인 음악, 댄스 음악 선호와 백인-보수 세력의 록 음악 선호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왔고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직후 조 바이든 지지층이 당선을 자축하며 힙합, 댄스 음악을 틀자 도널드 트럼프 지지층이 브루스 스프링스틴, 본 조비 등의 록 음악을 틀고 난입해 맞불을 놓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존 본 조비는 모두 골수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대표 노래가 Born in the U.S.A.라는 것을 잘 생각해 보자.

또 화이트삭스 구단주 빌 빅의 아들이자 이 사건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었던 마이크 빅은 2001년에 디스코 밴드인 KC 앤 더 선샤인 밴드의 해리 웨인 케이시에게 이 일에 대해 사과했다고 한다.

디스코의 황제로 군림한 비 지스는 이 사건에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되어 한동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케이트 베킨세일이 주연한 영화 디스코의 마지막 날에 사건 장면이 잠깐 등장한다.

한편 이 사건 이후 록 음악 장르는 헤비메탈, 그런지,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등 여러 하위 장르를 낳으며 2000년대 초반까지 버텼다. 그러나 이미 1990년대부터 R&B, 힙합이 메인스트림 시장을 장악함에 따라 록 음악은 과거 디스코에게 당했던 것처럼 주류에서 밀려나게 되었다.[4][5][6][7] 록과 디스코가 모두 쇠퇴하고 2010년대 중반 이후 힙합과 R&B라는 흑인 음악이 미국 음악계를 점령하고 있으나 이미 힙합과 R&B를 "흑인(만의) 음악"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 상황에 힙합과 R&B를 폭파하는 일이 일어날지는 미지수이다.

단, 미국 대중문화사에서 일어났던 특정 음악장르중 주류의 탄압이 심했던 장르나 가수에 공통적으로 이 들어간다는 점[8]은 미국인들이 가진 보수적 기독교적 세계관에 춤이 맞지 않는 행동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고, 현재 K-POP의 경우는 이런 부분때문에 여전히 보수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점이 후대 이런 사건이 또 일어날 경우 타겟이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2023년 빌보드 Hot 100에서 K-POP, 멕시칸과 푸에르토리칸 중심의 라틴팝 모건 월렌, 루크 콤즈, 제이슨 알딘과 같은 컨트리 뮤직 뮤지션과 대립하는 구도가 펼쳐지기도 했다. 즉, 미국 내에서 다문화 수용 중심의 진보계와 레드넥 중심의 보수계가 양분된다고 간단히 볼 수 있는 구도이다. 하지만, 대중문화를 탄압하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세력은 더 이상 보수주의자도 아니라 그냥 차별주의자나 다름없는 일이며, 디스코 폭파의 밤과 비슷한 사건이 또 다시 벌어지게 된다면 미국은 대중문화를 탄압하는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중국과 똑같은 행동을 저지르는 망신거리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쯤 되면 "미국은 정말로 세계를 대표하는 자유주의 국가가 맞는가?" 라고 화두를 던져볼 일이 된다.

사실, 당시에는 흑인들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디스코를 옹호하고 두둔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당시 디스코 씬의 매너리즘은 흑인 리스너들 사이에서도 문제시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흑인들도 기독교 신자 비율이 백인 못지않았던 탓에 성소수자들이 주도하는 디스코 씬에 대한 경계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던 와중이었다. 디스코 폭파의 밤을 계기로 흑인 리스너들은 '새로운 흑인 음악'인 힙합으로 옮겨갔고 힙합 뮤지션들은 '성소수자들의 음악'인 디스코에 지친 흑인 리스너들을 붙잡기 위해 노골적인 성 소수자 혐오 가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힙합 씬의 성장기부터 시작된 성 소수자 혐오 기조는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

2019년 7월 21일 방영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사건을 소개하였다. 여기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끝맺었고 이후 평가에 대한 부분은 생략했다.

뮤직 차트를 정복한 ㅈ같은 양산형 XXX

4.1. 대한민국에서의 유사 현상

여담으로 당시에는 레코드라는 것을 틀고 싶어도 못 트는 사람들이 상당수인 가난한 나라도 많았다. 일례로 1970년대 대한민국에선 턴테이블이 그야말로 부의 상징이었다. 동시대 한국인들이 이 사건을 알았다면 잘사는 나라의 배부른 작태라고 오히려 비난했을 것이 분명하다.

대한민국에서는 1970~80년대에는 그룹 사운드라고 하여 밴드 음악이 나름 흥했다. 1975년 연예계 대마초 파동으로 락음악이 일대 타격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룹 사운드 자체는 죽지는 않아서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세션맨 중심으로의 그룹 사운드는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다. 1970년대 후반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등을 통해 가요계에 데뷔한 그룹 사운드들도 있었는가 하면, 산울림이나 송골매, 들국화처럼 1975년 대마초 파동과 1980년대 중반 헤비메탈 인기를 이어주던 밴드도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이후부터 나이트 클럽 문화가 발달하면서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댄스 뮤직 전성기가 도래했고 이때 록 매니아들이 댄스뮤직을 극혐하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1970~80년대 한국도 다를 것이 없어서 실제 무도회장의 대세는 디스코였다. “무도”회장이니까 이건 당연한 거 아닌가 단지 록매니아들이 끈질기게 대중음악계 평론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 밴드 음악이 실제보다 과장되게 조명된 것이다. 하지만 저런 파괴 행위가 대한민국에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미화된 록 정신을 운운하는 락꼰대들의 투덜거림 정도로만 끝났다.

2000년대 들어서 문희준에게 백만 안티가 따라붙은 것이 그나마 비슷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 쉽게 나가떨어졌다(...)


[1] 디스코는 원래 흑인들의 펑크(Funk) 음악에서 파생됐고 1970년대 초반 흑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다가 미국 대도시의 디스코텍(디스코가 디스코텍에서 파생된 명사. 디스코텍은 원래 "생음악이 아닌, 레코드를 틀고 춤을 출 수 있는 야간 클럽"을 뜻함.)과 게이 클럽을 중심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이게 1970년대 중반 주류 문화에 편입되었다. [2] 화이트삭스의 현 홈구장인 개런티드 레이트 필드 이전에 사용했던 홈구장. 사실 지금 경기장도 원래 이름은 (New) Comiskey Park였다. [3] 물론 주류 매스컴이 선택의 여지를 없앴다는 문제 의식을 가지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기 때문에 오히려 환경 보호의 관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4] 미국 전역에서의 히트곡 순위를 매기는 차트 빌보드 핫 100에서는 1990년대 동안 컨템퍼러리 R&B 곡들이 강세였고 힙합 음악은 1990년대 초반에는 팝 랩 성향의 곡들이, 1990년대 중반에는 G-funk로 대표되는 서부힙합 곡들이, 1990년대 말에는 퍼프 대디를 필두로 한 동부힙합 곡들이 핫 100의 상위권을 기록했다. 게다가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라틴 팝 열풍과 이후 2000년대 전반을 통틀어 빌보드 핫 100에서 힙합 음악 컨템퍼러리 R&B 곡들이 강세였는데 이는 이전 시대보다 대중들에게 더 확고한 인기를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다. [5] 빌보드 200에서는 80년대부터 마이클 잭슨 Thriller, 휘트니 휴스턴 Whitney Houston, 바비 브라운 Don't Be Cruel, 자넷 잭슨 Janet Jackson's Rhythm Nation 1814 등 연말 차트 1위를 기록하는 히트 앨범들이 나왔고 1990년대 초반으로 가면 MC 해머 Please Hammer, Don't Hurt 'Em을 시작으로 머라이어 캐리 Mariah Carey, Music Box, 마이클 잭슨 Dangerous, 휘트니 휴스턴 The Bodyguard: Original Soundtrack Album, 자넷 잭슨 janet., 스눕 독 Doggystyle과 같은 거대한 성공을 거둔 앨범들을 포함해 빌보드 200 1위를 차지하는 R&B, 힙합 앨범들이 많이 나왔다. 이후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힙합 앨범들이 앨범 차트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하거나 상위권에 오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6] 빌보드 선정 1990년대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는 1위 머라이어 캐리, 2위 자넷 잭슨, 3위 가스 브룩스, 4위 보이즈 투 멘, 5위 셀린 디온, 6위 마돈나, 7위 TLC, 8위 휘트니 휴스턴, 9위 마이클 볼튼, 10위 토니 브랙스턴으로 10명 중 6명이 R&B 아티스트였다. (1 ~ 2위, 4위, 7위 ~ 8위, 10위) 싱글/곡 차트 빌보드 핫 100과 앨범 차트 빌보드 200에서의 차트 성적을 기준으로 선정되었다. https://books.google.com/books/about/Billboard.html?id=9w0EAAAAMBAJ (YD-18 페이지) [7] 빌보드 선정 2000년대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는 1위 에미넴, 2위 어셔, 3위 넬리, 4위 비욘세, 5위 앨리샤 키스, 6위 50 센트, 7위 니클백, 8위 브리트니 스피어스, 9위 데스티니스 차일드, 10위 JAY-Z로 10명 중 8명이 힙합이나 R&B 아티스트였다. (1 ~ 6위, 9 ~ 10위) 앨범 차트 빌보드 200과 싱글/곡 차트 빌보드 핫 100에서의 차트 성적을 기준으로 선정되었다. https://www.billboard.com/music/music-news/artists-of-the-decade-266420/ [8] 영화 풋루즈, 더티 댄싱의 실제 모티브가 춤이었고, 엘비스 프레슬리, 디스코, 마이클 잭슨, EDM, 레이디 가가 등이 이에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