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통일왕조 당나라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외의 국가들에 대한 내용은 당나라(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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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e5b6> 역사 | 수당시대 | 수말당초 |
정치 | 관롱집단 | 개원지치 | 무덕율령 | 황제( 틀:역대 수 황제 | 틀:역대 당 황제( 틀:역대 무주 황제)) | |
사법·치안 | 부병제( 수나라군 | 당나라군) | 3성 6부제 | 추밀원(중국사) | 과거 제도 | 도독부 | 도호부( 틀:당 6도호부) | 번진 | 절도사 | |
외교 | 백제-수나라 관계 | 틀:당나라의 대외관계 | |
행정구역 | 틀:수나라의 행정구역 | 틀:당나라의 행정구역 | |
경제 | 오수전 | 개원통보 | |
교통 | 대운하 | |
인물 | 당나라/인물 | |
문화 | 태극궁 | 자미궁 | 대명궁 | 당삼채 | |
기타 | 수나라의 대외전쟁 | 수말당초 주요 세력 | 수나라의 연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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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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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
大唐 | Tang dynas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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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
6. 18. ~
907.
5. 12. (288년 10개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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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수 | 후량 | ||||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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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년
건국 626년 현무문의 변 640년 당태종이 중앙아시아의 고창국을 정복하고 서주도호부를 설치 644년 ~ 668년 고구려-당 전쟁 646년 당나라가 철륵의 설연타를 정복하고 선우도호부를 설치 647년 당나라가 돌궐 정복하고 연연도호부를 설치 660년 ~ 664년 3월 백제부흥운동 669년 당나라가 튀르크의 철륵을 정복하고 안북도호부로 개칭 669년 ~ 698년 고구려부흥운동 668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복하고 안동도호부 설치 670년 ~ 676년 나당전쟁 679년 당고종이 베트남 하노이를 침략해 안남도호부를 설치 690년 ~ 705년 측천무후의 집권 702년 당나라가 서돌궐을 지배하면서 북정도호부를 설치 721년 ~ 755년 당나라의 유격장군 고선지 장군의 정복전쟁 개시. 토번 제국 (현 티베트) 격파, 소발률국 정복, 749년 호탄 국왕과 토번의 군대를 정복, 고선지 장군의 군대가 탈라스 강까지 진군하여 이슬람 아바스 왕조까지 침략 755년 ~ 763년 안사의 난 발발 765년 당나라의 고구려계 이정기 장군의 제나라 건국 및 군사반란 780년 양세법 시행 805년 영정혁신 808년 ~ 846년 우이당쟁 819년 당나라의 공격으로 제나라 멸망 835년 감로의 변 875년 ~ 884년 황소의 난 발발 907년 애종의 선양, 제국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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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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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48252><colcolor=#ece5b6> 위치 | 중국, 베트남, 중앙아시아 | |||
수도 |
장안(長安, 618~684, 705~904) 낙양(洛陽, 684~705, 904~90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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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약 10,760,000km² (653년 기준) 약 12,370,000km² (668년 기준) 약 5,400,000km² (715년 기준)[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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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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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48252><colcolor=#ece5b6> 인구 (추산) |
<colbgcolor=#a48252><colcolor=#ece5b6> 639년 | 12,371,700명 | ||
701년 | 37,140,000명 | ||||
753년 | 53,701,370명 | ||||
755년 | 52,919,309명 | ||||
9세기 | 약 71,000,000명 | ||||
민족 | 선비족, 한족 | ||||
공용어 | 중세 중국어 | ||||
공용 문자 | 한자 등 | ||||
종교 |
대승 불교,
도교,
유교 네스토리우스교, 마니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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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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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48252><colcolor=#ece5b6>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황제 | ||||
역대 황제 | 20명 | ||||
주요 황제 (황제 연호 년도) |
초대
고조 성황제 ,(618~626), 2대 태종 문황제 ,(626~649), 3대 고종 홍황제 ,(649~683), 6대 현종 명황제 ,(712~762), 11대 헌종 신황제 ,(805~820), 16대 선종 도황제 ,(846~859), 20대 애종 애황제 ,(904~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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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섭정 | 측천황후 | ||||
국성 | 농서 이씨 | }}}}}}}}} | |||
기타 | |||||
<colbgcolor=#a48252><colcolor=#ece5b6> 통화 | 개원통보(開元通寶) | ||||
현재 국가[3] |
|
언어별 명칭 | |
중국어 |
<colbgcolor=#fff,#191919> [ruby(唐, ruby=táng)] [ruby(大唐, ruby=dàtáng)] [ruby(唐朝, ruby=tángcháo)] [ruby(李唐, ruby=lǐtáng)] [ruby(李朝, ruby=lǐcháo)] |
중세 중국어 | 大唐[4] (Da Dang) |
한국어 | 당나라 |
일본어 |
[ruby(唐, ruby=とう)] [ruby(唐, ruby=か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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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나라의 뒤를 이은 중국의 통일 왕조로, 618년에 수의 당국공인 이연이 건국해 907년 애종 때 후량의 주전충에게 멸망하기까지 20대 289년간 유지되었던 왕조이다. 이칭으로는 당조(唐朝), 이당(李唐)이 있다.전조인 수가 단명한 탓인지 국성이 바뀌었다는 점을 제외하고 수나라의 정치체제, 제도, 문화, 집권세력 등을 그대로 계승한 모습을 보인다.[5] 수도는 장안이었으며 고대, 중세 중국 제2의 도시인 낙양이 부수도로 기능했다. 장안은 인구가 100만명이라 식량 부족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관중 지역의 식량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었던 당대 후기에는 거의 대부분의 식량 공급을 강남(중국)의 생산력에 의지하게 된다.
전통 중국 문물을 발전시킨 왕조이자 동시에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 추진했고, 이민족의 문화와 그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등 다민족적이고 국제적인 요소가 가장 짙었던 왕조로 평가받는다. 북쪽으로는 회흘(위구르), 토번(티베트), 남방의 베트남과 교류했다.
한국사에서는 백제의 맹공과 고구려의 협공으로 인해 위기에 빠졌던 신라의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6] 또한 일본이 백제 멸망 이후 견당사를 보내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반도는 위치상 중국에 많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지만, 당나라는 그 중에서도 한반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7], 향후 1,000년 이상 지속되는 동아시아의 중국 중심 세계관을 완성한 나라였다.
후기에는 안록산의 난 이후 이민족들과 중국 민중의 불만이 폭발했고, 당나라 중앙정부 자체의 동요는 물론 사회 및 경제적으로도 불안이 가중되어 쇠락의 길을 밟았다.
2. 출신
당나라 황실의 기원은 수나라 황실과 마찬가지로 한족인지 선비족인지 불분명하다. 후대의 한족 왕조들에 의해 편찬된 기록이나 한국의 사료[8]를 보면 모두 당을 선비족 정권보다는 한족 혹은 한화된 선비족 정권으로 여기고 있다.당나라때 쓰여진 《 구당서》에는 당나라의 이씨 황실이 진나라의 명장 이신, 전한의 명장 이광의 후손을 자칭한 흥성제 이고의 자손임을 밝혔다. 후대인 송대에 쓰여진 《 신당서》에는 《구당서》에 비해 이민족 혈통을 강조했다.
당나라의 멸망 이후, 중국의 후계 왕조들과 주변 국가들은 당나라를 한족 국가로 인식했다. 황족을 포함해 지배층에 선비족 혈통이 많았지만 북위 효문제 이래 선비족을 포함한 5호의 한족화와 한족 사족층의 등용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특히 홍농 양씨, 태원 이씨, 청하 최씨, 박릉 최씨 등 유서깊은 한족 명문가들이 북주 이래 수•당시대의 지배층이 된 관롱집단에 포함되었다. 특이한 시각으로 요미원은 수나라와 당나라 황족들을 튀르크계 철륵에서 기원했다고 보고 있다.
일본의 모리야스 다카오는 탁발 국가설[9]을, 중국의 진인각이나 장경, 요미원 등의 학자는 선비화한족설, 한화선비족설, 호한혼혈설 등을 제기하고 있다. 이미 선비족 왕조는 북위 효문제 이래 적극적인 한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한자로 기록된 당나라 황실의 계보 중 하나에는 농서 이씨의 시조가 춘추전국시대때의 유명한 사상가 노자로 나와 있고, 당 태종이 관롱집단의 지지를 얻고 장안성에 입성한 직후, 노자 사당부터 만들었던 이유가 그가 노자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으나 단순한 치적행사로 혈통을 단정짓기 힘들다.
당 왕조 수립의 주체는 북주 시대 관중 사족+우문씨를 따라 관중으로 이동한 호한 지배층이 융합해 형성된 군벌인 관롱집단이라 불리는 세력으로, 이들은 선비족 왕조인 북주에서 지배층으로 활동하며 집안끼리의 통혼을 통해 인척으로 맺어져 있었다.[10] 북주의 우문씨와 수의 양씨, 당의 이씨 모두 당시 실세인 무천진에서 나왔다. 수 문제는 북주 때만 해도 '보륙여견'(普六茹堅)[11]이라는 선비족 성명을 갖고 있기도 했고(수 왕조 개창 전후에 개명) 당 고조 이연의 어머니도 선비족 성씨인 독고씨에서 나왔다.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계기도 《씨족지》라고 해서 오랜 과거부터 존재하며 타지방 출신들을 차별하던 관롱집단들의 족보를 모아 약화시켜 다수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8주국 가문에서도 한족 여성들은 후궁이 되거나 축첩에 이용되기도 했지만 8주국의 정식 통혼은 선비족끼리만 이루어졌다. 고조 이연의 친인척이 모두 독고씨인 것과 같다.
당나라 황실은 혈통과 관계없이 언어나 관습, 문화를 모두 한족의 것을 따랐기 때문에, 당나라를 정복왕조나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처럼 보는 것은 곤란하다. 당나라는 침투왕조 중 하나였으며, 황실에서 한족과 다른 언어, 관습, 문화를 가지고 이를 더러 한족에게 강요하기도 한 원나라, 청나라와는 성격이 달랐다.
3. 역사
당나라 시대는 전기, 후기가 아니라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의 네 시기로 구분한다. 당나라의 시를 편년할 때 쓰던 용어인데 오늘날에는 역사학에서도 쓰인다.3.1. 연표
<colcolor=#ece5b6> 618년 | 당고조 이연, 수공제 양유로부터 선양받아 당나라 건국 |
626년 | 진왕 겸 천책상장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제와 조카들을 죽이고 고조로부터 양위받아 제2대 태종으로 즉위함 |
626년 | 동돌궐군이 장안 근방까지 침공.(위수의 역) 동돌궐의 힐리가한과 백마의 맹을 맺음 |
627년~649년 | 정관의 치 |
630년 | 이정, 10만 대군을 이끌고 음산 전투에서 돌궐군을 대파한 후 동돌궐를 멸망시킴 |
634년 | 이정, 오해 전투에서 토욕혼군을 대파하고 속국으로 삼음 |
640년 | 후군집, 국씨 고창국을 멸망시킴, 당나라의 서역 패권 장악 |
644년 | 고구려를 침공, 고구려-당 전쟁 발발 |
645년 | 주필산 전투에서 당태종이 고연수의 고구려 대군을 격파 |
645년 | 안시성 전투에서 당태종이 패배함 |
647년 | 울독군산 북쪽에서 설연타족을 격파 |
649년 | 태종이 붕어하고, 이치가 제3대 고종으로 즉위함 |
650년~655년 | 영휘의 치 |
651년 | 노실필부와 당군이 연합하자 서돌궐의 을비돌육가한이 토화라로 도주 |
657년 | 위구르군과 연합한 소정방 휘하의 당군이 예질하 전투에서 서돌궐군 기병 10만명을 격파하고, 서돌궐의 사발라가한을 포로로 잡아 서돌궐을 멸망시킴 |
660년 |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와해, 백제 멸망 |
663년 | 나당연합군이 백강 전투에서 백제부흥군과 왜군을 크게 격파 |
668년 | 글필하력과 이세적이 평양성을 총공격( 평양성 전투), 고구려 멸망 |
670년 | 토번의 가르친링이 대비천 전투에서 당군을 궤멸시키고, 서역의 안서 4진을 점령 |
670년 | 나당전쟁 발발 |
675년 | 신라군이 매소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 |
676년 | 기벌포 해전에서 당군이 패배하여 사실상 한반도 점유에 실패 |
682년 | 왕방익이 이려하[12] 전투에서 서돌궐의 반란군을 섬멸시키고, 열해[13] 전투에서 10만여 명을 격파 |
682년 | 돌궐 제2제국 성립 |
683년 | 고종이 붕어하자 제4대 중종 이현이 즉위 |
684년 | 중종이 폐위되고 제5대 예종 이단이 즉위 |
690년 | 예종이 폐위되고 측천무후가 즉위. 국호를 주로 정하고,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함(무주혁명) |
690년~705년 | 무주의 치 |
696년 | 거란족의 수장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킴(이진충의 난) |
697년 | 대조영과 걸사비우를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유민 및 말갈족 일파가 당나라 영주에서 탈출, 천문령 전투에서 이들을 추격하던 이해고의 당군을 격파 |
698년 | 대조영, 동모산 일대에서 발해를 건국 |
705년 | 측천무후가 퇴위하고 중종이 복위되어 당나라 부활( 신룡정변) |
707년 | 위황후와 안락공주 모녀가 절민태자 이중준이 일으킨 쿠데타를 진압하고, 권력을 장악함( 경룡정변) |
710년 | 임치왕 이융기와 태평공주가 쿠데타를 일으켜 위황후 일파를 제거하고 예종을 복위시킴( 당륭정변) |
712년 | 이융기, 예종으로부터 선위를 받아 제6대 현종으로 즉위 |
713년 | 당현종이 태평공주 일파를 숙청하는 데 성공함( 선천정변), 연호를 '개원'으로 바꿈. 무위지화가 종결됨 |
713년~741년 | 개원성세 |
722년 | 길기트(소발률)가 내전으로 당에 복속 |
727년 | 토번의 명장 실뤄라를 이간계로 제거 |
732년 | 발해의 장수 장문휴가 당의 등주 기습 |
733년 | 마도산 전투에서 발해-거란-돌궐 연합군이 당군 격파, 당의 발해 위상 인정 |
741년 | 고선지가 달해부를 평정 |
742년~756년 | 천보난치 |
744년 | 돌궐 제2제국 멸망, 위구르 제국 성립 |
747년 | 고선지의 1만 군대가 서역 원정 개시, 연운보 전투에서 토번군을 격파하고 소발률을 점령 |
750년 | 고선지가 2차 서역 원정 개시, 사마르칸트와 타쉬켄트(석국) 점령 |
750년~785년 | 남조와의 제1차 전쟁( 천보전쟁), 남조군이 양국충이 임명한 이복 휘하 10만 당군을 대파시킴 |
751년 | 고선지의 당군이 아바스 칼리파조의 군대와 탈라스에서 접전, 카를룩족의 반란으로 탈라스 전투 패배 |
755 ~ 763년 | 안사의 대란, 당나라의 쇠락과 번진 할거 시작 |
756년 | 마외병변으로 양귀비 자살, 양국충 등 양씨 일족 절멸, 태자 이형이 제7대 숙종으로 영무에서 즉위 |
762년 | 숙종이 붕어하고 장황후 일파 숙청(보응정변), 환관 이보국이 태자 이예를 제8대 대종으로 옹립 |
763년 | 토번군의 장안 함락(광덕의 변) |
764년 | 철륵계 번장 복고회은의 난 |
779년 | 대종이 붕어하고 제9대 덕종 이괄이 즉위 |
780 ~784년 | 중흥의 치 |
780년 | 양염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용조제를 폐지하고 양세법을 시행 |
781년 | 토번이 이때부터 농우 지방에 진출하기 시작 |
782년 | 고구려 유민인 이씨 가문의 제나라가 당의 변주를 공략하고 당으로부터 독립 선언, 4진의 난 발발 |
782년 | 토번과 당이 청수의 맹을 결의 |
783년 | 주차의 난으로 장안이 함락, 이씨 황족 학살 |
787년 | 당의 명재상 이필의 노력으로 당과 위구르의 관계가 개선 |
789년 | 토번의 명장 줘치수가 당의 북정도호부에 진출하여 북정도호부가 폐지됨 → 서역 전역 상실 |
793년 | 남조가 당에 사신을 파견해 속국이 되기를 맹세 |
794년 | 당과 남조가 연합해 토번을 침략 |
805년 | 덕종이 붕어하고 제10대 순종이 즉위하나(영정혁신) 병환으로 환관 구문진이 퇴위를 강요. 이에 아들인 제11대 헌종 이순에게 양위(영정내선) |
806 ~ 820년 | 원화중흥 |
808 ~ 849년 | 우승유 일파와 이덕유 일파간의 우이당쟁, 환관들의 개입으로 격화, 당의 쇠락에 영향을 미침 |
815년 | 이씨의 제나라가 하음 전운원의 200만 석을 불태우고 동도 낙양을 습격(이사도의 난) |
816년 | 오원제의 난 |
819년 | 이사도가 유오에게 암살되고 운주가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 제나라 멸망 |
820년 | 단약에 빠져 포악해진 헌종이 환관 진홍지에게 시해당하고(원화정변) 환관 왕수징이 제12대 목종 이항(이유)을 옹립. 중국 역사상 제2차 환관시대가 시작됨 |
824년 | 목종이 붕어하고 환관 왕수징에 의해 이담이 제13대 경종으로 즉위 |
827년 | 경종이 환관들의 권력 쟁탈전으로 시해되고(보력정변) 환관 왕수징에 의해 제14대 문종 이앙(이함)이 즉위 |
829년 | 남조가 당의 검남을 공격하고 성도를 점령 |
835년 | 당의 재상 이훈과 문종이 환관들을 말살시켜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이훈이 피살당함(감로지변) |
840년 | 문종이 붕어하고 환관 구사량에 의해 이염(이전)이 제15대 무종으로 즉위 |
840년 | 키르기스가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킴 |
842년 | 당무종, 회창의 폐불 단행, 토번 제국 붕괴 |
846년 | 무종이 붕어하고 환관 마원지가 제16대 선종 이침(이이)을 옹립 |
847 ~ 859년 | 대중의 치 |
848년 | 토번과 당이 주전파의 토번군을 협공하여 패배시킴 |
848년 | 장의조가 군사를 일으켜 농우 일대의 토번 세력을 침략함 |
859년 | 강남(중국)에서 구보의 난이 일어남 |
859년 | '소태종' 선종이 단약 중독으로 붕어하고, 환관 왕종실이 제17대 의종 이최(이온)를 옹립 |
863년 | 안남도호부를 재건 |
868년 | 방훈의 난 |
873년 | 남조를 침략해 성도를 탈환. 당의종이 붕어하고, 환관 전령자가 제18대 희종 이현(이엄)을 옹립 |
875 ~ 884년 | 황소의 대란, 당나라의 몰락 가속 |
888년 | 희종이 붕어하고 환관 양복공이 제19대 소종 이엽(이걸)을 옹립 |
896년 | 17명의 당나라 황제가 234년 동안 정궁으로 사용했던 대명궁이 전소됨 |
900년 | 황태자 이유가 환관 유계술, 왕중선의 반란으로 즉위(광화정변) |
901년 | 이유가 폐위되고, 소종이 다시 복위(천복정변) |
903년 | 주전충, 최윤. 환관 수백명 전부 몰살, 지방에 사신으로 간 환관들은 그곳에서 주살케함, 품계낮은 어린 환관 30인 남겨 청소케함. 제2차 환관시대 종결 |
904년 | 소종이 주전충에게 시해되고(천우정변), 권신 주온(주전충)이 이축을 제20대 애종으로 옹립 |
905년 | 주전충이 당나라의 충신 38명을 학살한 백마역의 화가 일어남 |
907년 | 주전충이 애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후량을 건국. 당나라, 289년만에 멸망 |
3.2. 초당(初唐)
당국공 이연의 둘째아들인 이세민은 아버지[14]에게 수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 것을 진언하고[15], 여러 곳에서 높은 전공을 세우며 건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에 이연은 이세민을 '천책상장(天策上將)'에 봉하는 등 크게 신임하였다. 이에 불안해진 장남이자 황태자 이건성과 삼남 이원길이 이세민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으로 세민은 위기를 맞게 되었고, 심지어 형제들간의 모임에서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이에 이세민은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궁궐 안에서 형 이건성과 이원길을 살해하고( 현무문의 변), 직접 황태자에 봉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연은 스스로 이세민에게 제위를 물려주게 된다. 일각에선 당태종이 자신이 먼저 쿠데타를 일으키고는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변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태종 이세민은 국가의 제도를 총체적으로 정비하여 후대에 정관지치로 칭송받았다. 대외원정도 활발해서 수나라 때부터 눈엣가시였던 주변 세력을 연달아 격파했지만, 고구려와 벌인 대결에서 ( 고구려-당 전쟁) 연개소문, 안시성주 등의 활약으로 패배한 점이 오점으로 남았다. 뒤를 이은 고종은 측천무후의 진언에 따라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침공하여 승리했다. 내친 김에 신라까지 정복하려고 했으나 신라에게 패배( 나당전쟁)하고 토번 전선의 약화가 겹쳐 실패하고 말았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토번 전선과 한반도 전선에 둘 다 발을 담그고 있었고, 두 전선 모두 무너지자 더 이상의 확장을 포기하게 되었다.
3.3. 무주(武周)
이후 무후의 궁궐내에서의 힘이 점점 커지고, 고종이 늙어 힘이 약해지면서 무후가 사실상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이후 무후는 몇 명의 황태자를 죽이고, 두 명의 황제를 폐위시킨 뒤 국호를 주나라(周)라 칭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전례없는 중국 최초의 여황제 탄생으로 당(唐)은 사라질 뻔 했으나, 이에 반감을 가진 중신들이 그녀가 병든 말년에 신룡정변을 일으켜 무후는 국권을 내놓게 되었고, 무후에 의해 폐위되었던 중종이 복위했다가 다시 제2의 여황제가 되고 싶었던 위황후와 황태녀를 생각하고 있었던 위후의 딸 안락공주에 의해 독살되었다.
3.4. 성당(盛唐)
측천무후와 고종의 딸인 태평공주는 올케 위황후, 조카 안락공주와 대립했으며, 예종[16]의 아들인 이융기가 고모인 태평공주와 손을 잡고 아버지를 복위시켰다( 당륭정변). 이후 정치적으로 큰 힘을 얻은 태평공주와 황태자가 된 이융기가 대립하기 시작했고, 이융기가 황제로 즉위한 후 태평공주가 숙청되면서( 선천정변) 당나라는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현종의 시대는 국가의 재정비와 교류의 발달로 개원성세(713년 ~ 741년)라는 태평성대를 열게 되었다. 황제는 수많은 명재상들의 보필로 내치와 외치를 갈고 닦았다. 내적으로는 "화적법"을 반포해 국내의 조세/군량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에 성공했고, 부병제를 폐지한 후 "모병제"로 완전히 바꾸었다. 다민족 정책으로 선비족 문화의 면모를 보여 외적으로는 돌궐 · 토번 · 거란과 같은 유목세력들과 협력하여 실크로드를 이용했다. 하지만 결국 위구르족에 의해 당나라의 세력은 다시 약해졌다.
또한 치세 말년(742년 ~ 756년, 천보난치)에 하필이면 현종이 며느리(…) 양귀비에 푹 빠지게 되었다. 양귀비에 의해 현종은 아예 정사에서 손을 놓게 되었고, 정국은 재상 이임보 (뒤이어 양국충) 등 몇몇 지도층과 양귀비의 일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게다가 당시 지방의 치안을 담당한 절도사들의 세력이 커지고, 그중 가장 힘이 강했던 안록산이 안사의 난을 일으키면서 장안의 궁궐이 함락당하고, 양귀비가 그녀에게 반감을 품은 군병(軍兵)들의 강요에 의해 자살하는 사태가 일어났다(마외병변)
3.5. 중당(中唐)
이후 당나라는 심하게 막장트리를 타게 된다. 바로 절도사의 난립 + 토번의 흥성 때문이다. 당나라는 건국 당시 균전제와 연계한 군사 제도인 부병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토지 지급량이 줄어들면서 과중한 군역에 못 이겨 군역을 피해 도망치는 도호화가 진행되었고 이는 당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측천무후, 현종 시기부터 심각한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은 번진을 설치했다. 이때까지의 번진은 어디까지나 변경 지역에 국한되었는데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내지에도 번진을 설치하는 내지 번진이 설치되었다. 이로서 당나라는 수도 장안 인근 지방 일부와 당을 지지하는 강남지방의 번진(순지 번진)을 제외하고는 잠재적인 적들에게 둘러 싸인 형국이 되었다. 절도사들의 군사력은 급속히 강해졌고, 절도사들끼리 서로 결탁하여 중앙 정부로 조세를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중앙 정부의 군사력은 규모와 훈련, 사기 모두에서 최악의 막장 군대가 되는 등 당나라는 총체적인 쇠퇴를 겪게 된다. 특히나 번진은 물론 당 황실에서도 부병제를 대신하여 용병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재정 부담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한때는 절도사들을 진압해서 지방 통치를 반짝 복구해(원화중흥) 그럭저럭 120년을 버티지만, 외부적으로는 토번과 회흘의 강성으로 당은 장안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또한 안사의 난에서 위구르는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장안을 침략했는데 이 때 장안 시내가 대단한 피해를 얻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고조 이연의 자손은 남자든 여자들 싸그리 노예로 끌려 가서 후계자 문제로 고통을 받기도 하였고 황폐화된 장안은 한동안 재기 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또 요동과 만주 지방은 거란과 발해의 세력권이 되었다. 또 고구려 유민 출신인 이정기의 치청 번진 등은 사실상 반독립 왕국이 되어 손자 이사도까지 무려 4대를 이었고 결국 당나라는 신라에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17] 국력을 쏟아 간신히 이사도를 토벌했다.이때 활약한 황제가 두 사람 있는데 바로 ( 숙종, 대종 다음인) 덕종과 ( 순종 다음인) 헌종이다. 덕종은 양세법을 실시하여 재정을 충실히 했고, 당조에 적대적인 하북 3진을 치러 나섰지만 전선이 지지부진했던 사이에 장안에서 주차-이회광의 난이 터지고, 그거 진압한 후에도 토번-회흘과 중앙아시아를 두고 계속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화해했다. 덕종의 노력은 헌종에게 이어졌다. 특히 헌종 시기가 되면 친위 부대인 신책군이 설치되고 이를 이용해 적대적인 번진을 모두 진압했다. 이에 번진의 재정과 군사력을 회수하고 감시를 강화하는 등 큰 소득을 거두었다(원화중흥). 그렇지만 헌종은 말년에
3.6. 만당(晩唐)
이후 당은 환관들이 좌지우지하는 나라로 서서히 몰락했다. 최후의 중흥 군주였던 선종 때부터 시작된 연속된 반란 크리는 희종 때 터진 황소의 난을 통해 당나라에게 그야말로 페이탈리티를 먹이고 말았다. 사실 당조가 적대적인 번진에 맞서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에 충성하던 순지였던 강회(강남-회수) 지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강남 개발이 어느 정도 진전되었고 상업이 발달하자 강회 지역은 부유해졌다. 당조는 이 지역에 과중한 세금을 매기고 이를 이용해 신책군을 만들어 당조에 적대적인 번진에 맞섰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지역은 당의 착취에 저항하게 되었다. 이미 구보의 난, 방훈의 난 등이 있었고, 끝내 소금 밀매상 출신인 황소가 나옴에 따라 당은 확실하게 골로 가게 되었다. 농민 반란군에 불과했던 황소군은 막장이었던 중앙군을 격파하면서 유유히 장안에 입성하였고, 주민들의 지지까지 얻으며 다음 왕조를 예고하였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에 포위되고, 심복이었던 주온(=주전충)이 배신하여 관군에 합류하면서 황소의 난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주전충은 자신의 이름을 파자해 '인왕중심(人王中心)'이라고 해석하는 등 이미 천하를 가질 야심을 품고 있었고, 이미 당나라는 막장 크리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결국 주전충은 황소의 잔당군을 자기 세력으로 흡수하는 등 세력을 키운 후 당나라를 멸망시키니, 전충(全忠)이란 이름이 무색해져 버렸다. 이후로 당은 그저 이름만 유지한 채 몇년 더 이끌어지다가[18] 애제를 끝으로 289년 만에 멸망하였다.3.7. 후계국가
오대십국시대에 5대의 하나인 후당과 10국의 하나인 남당은 당나라의 후계 국가를 자칭했으나 보통 명분이 부족한 자칭 후계국으로 보는 편이다. 후당의 이씨 황가는 튀르크계 사타족이었으니 혈통적으로는 아예 연결성이 없고 당 말기에 이국참이 공을 세워 당나라의 국성인 이씨 성을 하사받았고 그 손자 이존욱이 나라를 세워서 이씨인 것이다. 그리고 남당은 남오의 승상 서온의 양자였던 이변이 남오를 찬탈하여 세운 나라였다. 이변은 당 황족인 이각의 후손을 자칭하긴 했다.아무튼 이 두 나라는 당나라 계승을 주장했기 때문에, 당나라 역대 황제와 묘호가 겹치지 않는다.
4. 행정 구역
당나라의 행정구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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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 10도 (627년 ~ 73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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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 15도(733년 ~ 90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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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행정 층위는 3단계이다. 도(道)- 주(州)- 현(縣).
원래 춘추전국시대에 각 나라는 자신의 영토에 군(郡) 또는 현(縣)을 설치하였다. 그 중 진나라에선 군을 최상위 행정구역, 현을 하위 행정구역으로 군-현 2단계 체제였다. 그 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36 군(郡)을 설치하였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행정제도를 거의 계승했고 군의 상위 행정구역으로 주(州)를 설치하고 전국을 13주(州)로 나누었다.[19] 이렇게 원래 주(州)는 《 삼국지》에 나오는 형주나 예주같이 광역 행정 구역이었다. 그러다 시대가 점점 흘러 진(晉)과 남북조시대, 수나라를 거치면서 많은 주(州)가 새로 설치되고[20] 주(州)의 의미는 광역 행정 구역에서 그 치소를 가리키는 지역명[21]으로 의미가 좁아졌다. 당(唐) 태종은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10도(道)를 설치하였고, 광역 행정 구역의 도(道)는 한국과 일본에도 도입되었다.[22]
<rowcolor=#ece5b6> 명칭 | 한자 | 치소 | 현재지명 | 비고 | ||
경기 | 京畿 | 장안(長安) | 섬서성 시안시 | 현종 설치 | ||
도기 | 都畿 | 낙양(洛陽) | 허난성 뤄양시 | |||
관내도 | 關內道 | 장안(長安) | 섬서성 시안시 | |||
하동도 | 河東道 | 포주(蒲州) | 산서성 윈청시 융지시 | |||
하북도 | 河北道 | 위주(魏州) | 허베이성 한단시 웨이현 | |||
하남도 | 河南道 | 변주(汴洲) | 허난성 카이펑시 | |||
회남도 | 淮南道 | 양주(揚州) | 장쑤성 양저우시 | |||
농우도 | 隴右道 | 선주(鄯州) | 칭하이성 하이둥시 러두구 | |||
산남도 | 산남동도 | 山南道 | 山南東道 | 양주(襄州) | 후베이성 샹양시 | 현종 분할 |
산남서도 | 山南西道 | 량주(梁州) | 섬서성 한중시 | |||
검남도 | 劍南道 | 익주(益州) | 쓰촨성 청두시 | |||
강남도 | 강남동도 | 江南道 | 江南東道 | 소주(蘇州) | 장쑤성 쑤저우시 | 현종 분할 |
강남서도 | 江南西道 | 홍주(洪州) | 장시성 난창시 | |||
검중도 | 黔中道 | 검주(黔州) | 충칭시 펑수이 먀오족 투자족 자치현 | |||
영남도 | 嶺南道 | 광주(廣州) | 광둥성 광저우시 |
5. 군사 제도
자세한 내용은 당나라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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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절충부가 전국에 600곳이 존재했는데, 소속 병사는 상•중•하로 나뉘어 초기에는 상 1,000 ・ 중 800 ・ 하 600명, 후에 1200・1,000・800명으로 증원되었다. 10명이 1화(火), 5화가 1대(隊), 4대가 1국(國)을 이루었고, 각각의 지휘관을 화장(火長) ・ 대정(隊正) ・ 교위(校尉) ・ 절충도위(折衝都尉)로 불렀다. 600 × 1,000=60만 명으로 이것이 당제국의 정규 병력이었다. 물론 옛날 국가들이 흔히 그러했던 것처럼 총원이 다 채워지지 않은 곳들도 있어서 장부상 병력에 비해 실제 병력은 더 적어 정규 병사들만으로는 부족할 경우 따로 징병을 하기도 했다.
6. 평가
선비족이 한족을 정복한 이후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북위 효문제때부터 진행된 호한 융합이 완성된 침투 왕조의 전형이자 최종형으로 꼽힌다.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봐도 상당히 중요한 국가 중 하나이다.[23] 우선 한국사에서는 잘 알다시피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시대를 종식시킨 바 있다. 또한 당군은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했는데, 이는 유럽까지 제지술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후한 이후 중국은 삼국시대(중국)를 시작으로 위진남북조시대라는 혼란기를 겪었는데 이 혼란기는 근 370년이나 이어지는 긴 시기였다. 흔히 한나라는 유럽의 고대 로마와 비교되곤 하는데, 로마 또한 고대 통일 제국을 완성하였으나 서로마 멸망 이후 다시는 통일 제국을 등장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혼란을 매듭짓고 대륙을 통일시킨 것은 수나라였다. 수 문제 양견은 당 현종의 개원지치에 맞먹는 수준으로 나라를 번영시켰으나(개황성세), 하필 후임자인 수 양제 양광이 모든 것을 말아먹어 이종사촌인 당 고조 이연에게 제위를 찬탈당했다.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정권을 장악한 문벌귀족은 오대십국시대까지 명맥을 이었고, 송 태조 조광윤에 와서야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당나라도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당 태종 이세민부터 당 고종 이치, 측천무후 무조를 거쳐 장기적인 통일 왕조를 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도중에 중국사 유일의 여자 황제 측천무후가 등장하고 국호가 '주'(周)로 갈리는 사건(무주혁명)이 있기는 했지만, 측천무후가 고용한 북문학사에 의해 그녀가 태상황제로 퇴위하고(신룡정변) 측천무후의 후손이자 당나라의 황족인 이씨가 복귀되면서 국호 또한 당으로 돌아왔다. 측천무후의 치세 또한 역사적으로는 사실상 당나라 치세나 다름없기 때문에 당 태종부터 측천무후의 치세까지 당나라의 장기집권을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북송 이후에 보편화되기는 하지만 과거제의 형태도 이때 완성되었다.
당나라의 존재 의의는 대륙 재통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이에 실패했던 유럽 및 서양 사학계는 당나라를 위진남북조시대와 함께 요주의 연구 대상으로 분류하고 있다.[24]
당나라 황실인 농서 이씨는 관롱집단이라고 해서 오호십육국시대에 중원으로 유입된 선비족이 한족에 동화된 자들이었다. 이러한 기원 때문인지 당나라는 중원 바깥의 이민족들도 인재라면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우리 민족 출신인 이정기, 고선지, 흑치상지, 설계두, 장보고,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도 당나라로 진출해 명성을 떨쳤다. 외국인 유학생들을 적극등용했는데 837년 당시 당나라 국학에서 공부하는 신라인은 총 216명이었고, 이조차 사비 유학생은 제외한 기준이었다. 국비 장학생은 당나라 조정에서 왕복 교통편과 의복이나 식비 같은 체제비에 책값까지 지원했다.
다만 이러한 외국인 고용 기조는 측천무후처럼 관롱집단과 문벌귀족에게 일정 이상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던 일부 권력자들이 이들 외의 인재들을 고용하기 위해 실행한 것이었다. 무천진 관롱집단과 문벌귀족은 역사와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장난이 아니라 차별이 대단했는데, 관롱집단이거나 역사적인 문벌귀족 또는 신라인들처럼 사이좋은 이민족이 아니면 마음대로 다니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원나라 시대까지도 중국은 외국인 유학생들을 받아들였는데, 명나라 이후 극도로 폐쇄적인 사회로 변해서 유학생 응시제도까지 폐지된다.
현대 중국인들에게 중국 역사상 가장 좋아하는 왕조 시기를 꼽으라 하면 대부분 한나라와 더불어 당나라 시기를 꼽을 정도로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영광스러운 과거로 인식되는데 역대 중국 왕조 중 군사, 경제, 문화, 정복 등 다방면에서 밸런스가 좋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역대 왕조 중 가장 활발한 대외 팽창정책과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혼란기를 최종적으로 마무리지었다는 점,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태평성대를 이룩한 당 태종 이세민과 당 현종 이융기가 있었으며, 심지어 당 태종과 위징의 관계는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 중 하나라고 치켜세워진다는 점, 또 중국 역대 왕조들 중 송나라와 더불어 가장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 같은 이유로 인해 가장 인기가 있다고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송이 더 개방적이고 융성했으나 송은 대신 군사력이 약해서 역사 내내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에게 굴욕도 많이 당하고 해서 당에 비하면 평이 높지는 않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당을 좋아하는 마지막 이유는 중국 경내 소수민족을 흡수하려는 정치적인 이유로, 현 중국 당국에서 밀어주는 것과 연계되기도 한다. 당나라가 멸망한지 500여 년이 지난 명나라 치세에도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대명'(大明)이 아닌 '대당'(大唐)인이라고 소개하는 부분이 최부(1453~1504)의 《 표해록》에 나오며, 현대의 차이나타운도 중국인들은 '당인가'(唐人街)라고 부른다. 외국을 대강 부르기로 악명높은 일본[25]이나 류큐에서 '당'(唐/Kara)은 중국을 지칭하는 대명사였고, 그보다는 사정이 나은 한반도에서도 중국 한족풍의 문화를 '당풍'(唐風)이라 일컬었다. '한'(漢)이 한족(漢族)의 어원이 된 민족적인 개념이라면 '당'(唐)은 문화적인 개념의 중국을 상징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당나라와 실크로드로 인한 활발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인식이 좋은 편이다.
사회ㆍ문화적으로 동아시아에 분류되는 통일신라, 발해, 일본, 베트남에서는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여 율령, 불교, 유교를 통해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26] 또한 균전제 - 조용조 - 부병제 - 율령제 - 3성 6부제로 대표되는 당나라 중기까지의 국가체제는 고대 중국 국가체제의 완성으로 여겨지고, 당나라 후기 이후 격변하게 된 국가체제 또한 고대사회에서 동아시아 중세사회로 넘어가는 제도적인 변화로 주목받는다.
'당삼채'로 대표되는 도자기 등은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때 화려하면서도 이국적이고, 자유로운 풍조를 띄게 되었으며, 이러한 문물은 이슬람을 거쳐 유럽에도 일부 영향을 주게 된다. 종이가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이슬람 문명으로 넘어가 전 세계로 퍼지게 된 중요한 사건은 빼놓을 수가 없다. 불교와 도교의 교단이 확립되어 다양한 종파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것도 당나라 시대이며, 문학적으로도 이태백, 두보, 백거이, 한유, 이고 등의 업적이 후에 고문(古文)의 표본이 되었다.
반면 절도사나 환관 등의 문제에서 보이듯이 권력의 통제와 국가 통치의 구조라는 부분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 계속 펼쳐졌으며, 결국 이러한 문제에서 유발된 내전과 국력의 소모는 당나라 멸망의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27] 환관들의 전횡은 후한과 명나라 이상으로 심각해서 헌종 이후 황제들을 환관이 옹립하고 시해하거나 폐위했을 정도였다[28]. 그래도 당나라의 이름값은 사라진게 아니라서 오대십국시대에만 해도 당 황실로부터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이유로 국호를 '당'으로 한 후당, 당나라 황실의 후손을 사칭하며 국호를 '당'으로 한 남당 같은 국가들이 있기도 했다. 심지어 후당의 경우, 장승업은 후당의 이존욱이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하자 당나라 황실의 후손을 황제로 세울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이존욱도 숙적인 주전충을 당나라 황제를 쫓아내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관료제의 발달과 행정력의 정교함으로 유명하다. 당대 일본의 승려 엔닌이 당을 여행하며 집필한 여행기인 《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당나라에서는 입국하는 외국인들을 모두 체계적으로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각 도시마다 외국인이 오고가는 것을 일일이 관료들이 중앙에 보고하고, 일본에서 온 외국인인 엔닌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도착지에서는 엔닌의 정보를 훤히 알고 있었다. 고대에, 그것도 중국처럼 넓디넓은 대륙에서 중앙정부에서 각 지방의 입•출입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름길이지만 출입이 불가능한 지역이라 엔닌은 뇌물을 써서 통과하게 해달라고 일본에서 잘 먹히던 방법으로 고위 관료에게 청탁했더니 당나라에서는 관리가 뇌물을 받지 않는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기록했다. 그것도 이때가 행정력이 슬슬 무너지던 당 말기에 접어들던 9세기 중반 시절이며, 공무원들이 예나 지금이나 봉급문제와 지위문제 때문에 뇌물을 많이도 받아먹는다는 걸 생각한다면 놀랍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해당 관리가 유난히 청백리였을 수도 있지만.
7. 한국사에서
역대 중국 왕조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정복 성향의 국가답게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와 전쟁을 벌였다.신라, 발해, 일본이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교역을 하는 등의 모습도 있었던 한편 몽골 제국, 요나라와 더불어 한반도 국가(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와 가장 치열하게 치고 받은 나라로 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수나라의 의지를 이어 3차례나 고구려와 전쟁을 치러서 비록 마지막 침공 때 신라와 연합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고구려를 없앴고, 유례없는 해상 공격으로 백제멸망전과 백강 전투에서 승리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이후에는 통수를 거하게 쳐버리고 아예 한반도 자체까지 정벌해버린답시고 신라와도 나당전쟁을 벌여 싸웠으나 된통 패퇴한 뒤 다시 화친을 맺었다. 나아가 천문령 전투의 승전으로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가 건국되고 발해 무왕 시기 발해가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해 등주 자사 위준을 죽이는 등 당나라는 이들과 자주 전투를 치렀다.
물론 3세기 동안이나 존속했던 대제국인 만큼 한국사 국가들과 전쟁만 벌인 건 당연히 아니고 활발한 교류 역시 이루어졌는데 8세기 초반에 신라와, 8세기 중반 발해와 관계가 개선된 이후에는 당나라 영토 내에 신라방, 발해방 등 남북국 상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만들어졌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일본 승려 엔닌이 신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당나라에 가는데도 신라어 통역관을 고용해서 같이 다닐 정도로, 당나라 여기저기에서 신라인 사회는 폭넓고 뿌리깊게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4대에 걸쳐 당나라에서 출세한 김씨 부인 가문이 있었다.
당의 장안성 모델 역시 신라의 금성( 서라벌)과 발해의 상경용천부, 그리고 일본의 헤이조쿄, 헤이안쿄 구획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많은 신라와 발해, 일본 유학생들이 당나라에 유학해 빈공과에 급제하기도 하였다.
의외로 후대 왕조인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와 다르게 당은 한반도 출신 공녀들을 거절하기도 했다. 오히려 몇 번은 신라에서 자발적으로 당측과 내통한 일부 부패한 벼슬아치들이 공녀를 바치려고 시도를 했으나 당에서는 푸짐하게 선물까지 보내주면서 공녀들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신라의 끈질긴 시도 끝에 당덕종 때 김정란이라는 신라 여인을 공녀로 받아들인다.[29] 이는 원, 명, 청처럼 강제로 공출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선물 개념[30]이었기 때문에 규모와 스케일도 적고 국력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또한 이 시대 당의 수도 장안의 한자 발음이 현대 한국 한자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 등 #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여러모로 한국사와는 결코 떼놓으려야 떼놓을 수 없는 영향을 주고 받은 왕조임에는 분명하다.
특히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한국어에는 오랜 기간 '당'을 중국 그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많이 사용하였다. 중국 배를 '당선(唐船)'이라고 부르거나, 중국 과자를 '당과(唐菓)'라고 부르거나 오합지졸을 일컫는 비유적 표현으로 당나라 군대라는 표현을 쓰는 식. 또한 당면에서도 그 용법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일본어도 마찬가지다.
8.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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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ce5b6>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고조 | 태종 | 고종 | 중종 | |
<rowcolor=#ece5b6> 제5대 | 무주 | 제4대 복위 | 제5대 복위 | |
예종 | 측천황후 | 중종 | 예종 | |
<rowcolor=#ece5b6>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
현종 | 숙종 | 대종 | 덕종 | |
<rowcolor=#ece5b6>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
순종 | 헌종 | 목종 | 경종 | |
<rowcolor=#ece5b6>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제17대 | |
문종 | 무종 | 선종 | 의종 | |
<rowcolor=#ece5b6>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희종 | 소종 | 애제 | ||
}}}}}}}}} |
<rowcolor=#ece5b6> 대수 | 묘호 | 이름 | 출생 | 사망 | 연호 | 즉위년일 | 퇴위년일 | 재위 기간 | 능호 |
1대 | 고조(高祖) | 이연(李淵) | 566년 12월 21일 | 635년 6월 25일 | 무덕(武德, 618년 5월 ~ 626년) | 618년 6월 18일 | 626년 9월 4일 | 8년 78일 | 헌릉(獻陵) |
2대 | 태종(太宗) |
이세민 (李世民) |
598년 1월 28일 | 649년 7월 10일 | 정관(貞觀, 627년 ~ 649년) | 626년 9월 4일 | 649년 7월 10일 | 22년 309일 | 소릉(昭陵) |
3대 | 고종(高宗) | 이치(李治) | 628년 7월 21일 | 683년 12월 27일 |
영휘(永徽, 650년 ~ 655년) 현경(顯慶, 656년 ~ 661년 2월) 용삭(龍朔, 661년 3월 ~ 663년) 인덕(麟德, 664년 ~ 665년) 건봉(乾封, 666년 1월 ~ 668년 2월) 총장(總章, 668년 2월 ~ 670년 2월) 함형(咸亨, 670년 3월 ~ 674년 8월) 상원(上元, 674년 8월 ~ 676년 11월) 의봉(儀鳳, 676년 11월 ~ 679년 6월) 조로(調露, 679년 6월 ~ 680년 8월) 영륭(永隆, 680년 8월 ~ 681년 9월) 개요(開耀, 681년 9월 ~ 682년 2월) 영순(永淳, 682년 2월 ~ 683년) 홍도(弘道 683년 12월) |
649년 7월 15일 | 683년 12월 27일 | 34년 165일 | 건릉(乾陵) |
4대 | 중종(中宗) | 이현(李顯) | 656년 11월 26일 | 710년 7월 3일 | 사성(嗣聖, 684년 1월 ~ 684년 2월) | 684년 1월 3일 | 684년 2월 26일 | 54일 | 정릉(定陵) |
5대 | 예종(睿宗) | 이단(李旦) | 662년 6월 22일 | 716년 7월 13일 |
문명(文明, 684년 2월 ~ 684년 8월) 광택(光宅, 684년 9월 ~ 684년 12월) 수공(垂拱, 685년 ~ 688년) 영창(永昌, 689년 1월 ~ 689년 11월) 재초(載初, 689년11월 ~ 690년 8월) |
684년 2월 27일 | 690년 10월 8일 | 6년 223일 | 교릉(橋陵) |
당(唐) → 무주(武周) | |||||||||
1대 |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 | 무조(武曌) | 624년 2월 17일 | 705년 12월 16일 |
천수(天授, 690년 9월 ~ 692년 3월) 여의(如意, 692년
4월 ~ 692년 9월)
장수(長壽, 692년 9월 ~ 694년5월) 연재(延載, 694년 5월 ~ 694년12월) 증성(證聖, 695년 1월 ~ 695년 9월) 천책만세(天冊萬歲, 695년 9월 ~ 695년 11월) 만세등봉(萬歲登封, 695년 12월 ~ 696년 3월) 만세통천(萬歲通天, 696년 3월 ~ 697년 9월) 신공(神功, 697년 9월 ~ 697년 12월) 성력(聖曆, 698년 ~ 700년 5월) 구시(久視, 700년 5월 ~ 701년 1월) 대족(大足, 701년 1월 ~ 701년 10월) 장안(長安, 701년 10월 ~ 704년) 신룡(神龍, 705년~ 707년 9월) |
690년 10월 18일 | 705년 2월 22일 | 14년 129일 | 건릉(乾陵) |
무주(武周) → 당(唐) | |||||||||
복위 | 중종(中宗) | 이현(李顯) | 656년 11월 26일 | 710년 7월 3일 | 경룡(景龍, 707년 9월 ~ 710년 6월) | 705년 2월 23일 |
710년 7월
3일
|
5년 130일 | 정릉(定陵) |
임시 | - | 이중무(李重茂) | 695년 | 714년 | 당륭(唐隆) 710년 | 710년 | 710년 | - | |
복위 | 예종(睿宗) | 이단(李旦) | 662년 6월 22일 | 716년 7월 13일 |
경운(景雲, 710년 7월 ~ 712년 1월) 태극(太極, 712년 1월 ~ 712년 4월) 연화(延和, 712년 5월 ~ 712년 8월) |
710년 7월 25일 | 712년 9월 8일 | 2년 45일 | 교릉(橋陵) |
6대 | 현종(玄宗) |
이융기 (李隆基) |
685년 9월 8일 | 762년 5월 3일 |
선천(先天, 712년 8월 ~ 713년 11월) 개원(開元, 713년 12월 ~ 741년) 천보(天寶, 742년 ~ 756년 7월) |
712년 9월 8일 | 756년 8월 12일 | 43년 340일 | 태릉(泰陵) |
7대 | 숙종(肅宗) | 이형(李亨) | 711년 10월 19일 | 762년 5월 16일 |
지덕(至德, 756년 7월 ~ 758년 2월) 건원(乾元, 758년 2월 ~ 760년 윤4월) 상원(上元, 760년 윤4월 ~ 761년 9월) 보응(寶應, 762년 4월 ~ 763년 6월) |
756년 8월 12일 | 762년 5월 16일 | 5년 278일 | 건릉(建陵) |
8대 | 대종(代宗) | 이예(李豫) | 726년 11월 11일 | 779년 6월 10일 |
광덕(廣德, 763년 7월 ~ 764년) 영태(永泰, 765년 ~ 766년 11월) 대력(大曆, 766년 11월 ~ 779년) |
762년 5월 18일 | 779년 5월 23일 | 17년 5일 | 원릉(元陵) |
임시 | - | 이승굉(李承宏) | ? | ? | 대룡(大龍) | 763년 | 763년 | - | |
9대 | 덕종(德宗) | 이괄(李适) | 742년 5월 27일 | 805년 2월 25일 |
건중(建中, 780년 ~ 783년) 흥원(興元, 784년) 정원(貞元, 785년 ~ 805년 5월) |
779년 6월 12일 | 805년 2월 25일 | 25년 265일 | 숭릉(崇陵) |
10대 | 순종(順宗) | 이송(李誦) | 761년 2월 21일 | 806년 2월 11일 | 영정(永貞, 805년 5월 ~ 805년 12월) | 805년 2월 28일 | 805년 8월 5일 | 184일 | 풍릉(豊陵) |
11대 | 헌종(憲宗) | 이순(李純) | 778년 3월 17일 | 820년 2월 14일 | 원화(元和, 806년 ~ 820년) | 805년 8월 9일 | 820년 2월 14일 | 14년 165일 | 경릉(景陵) |
12대 | 목종(穆宗) | 이항(李恒) | 795년 7월 26일 | 824년 2월 25일 | 장경(長慶, 821년 ~ 824년) | 820년 2월 20일 | 824년 2월 25일 | 4년 5일 | 광릉(光陵) |
13대 | 경종(敬宗) | 이심(李湛) | 809년 7월 22일 | 827년 1월 2일 | 보력(寶曆, 825년 ~ 827월 2월) | 824년 2월 29일 | 827년 1월 2일 | 2년 308일 | 장릉(莊陵) |
임시 | - | 이오(李悟) | ? | 827년 | - | 826년 | 826년 | - | |
14대 | 문종(文宗) | 이앙(李昂) | 809년 11월 20일 | 840년 2월 10일 |
대화(大和, 827년 2월 ~ 835년) 개성(開成, 836년 ~ 840년) |
827년 1월 13일 | 840년 2월 10일 | 13년 28일 | 장릉(章陵) |
15대 | 무종(武宗) | 이염(李瀍) | 814년 7월 1일 | 846년 4월 22일 | 회창(會昌, 841년 ~ 846년) | 840년 2월 20일 | 846년 4월 22일 | 6년 63일 | 단릉(端陵) |
16대 | 선종(宣宗) | 이침(李忱) | 810년 7월 27일 | 859년 9월 10일 | 대중(大中, 847년 ~ 860년 10월) | 846년 4월 24일 | 859년 9월 10일 | 13년 142일 | 정릉(貞陵) |
17대 | 의종(懿宗) | 이최(李漼) | 833년 12월 28일 | 873년 8월 15일 | 함통(咸通, 860년 11월 ~ 874년 11월) | 859년 9월 13일 | 873년8월 15일 | 13년 340일 | 간릉(簡陵) |
18대 | 희종(僖宗) | 이현(李儇) | 862년 6월 8일 | 888년 4월 20일 |
건부(乾符, 874년 11월 ~ 879년) 광명(廣明, 880년 ~ 881년 7월) 중화(中和, 881년 7월 ~ 885년 3월) 광계(光啓, 885년 3월 ~ 888년 1월) 문덕(文德, 888년 2월 ~ 888년 4월) |
873년 8월 16일 |
888년
4월 20일
|
14년 251일 | 정릉(靖陵) |
임시 | - | 이온(李熅) | 건정(建貞, 886년) | 886년 | 886년 | - | |||
19대 | 소종(昭宗) | 이엽(李曄) | 867년 3월 31일 | 904년 9월 22일 |
문덕(文德, 888년 4월 ~ 888년 12월) 용기(龍紀, 889년) 대순(大順, 890년 ~ 891년) 경복(景福, 892년 ~ 893년) 건녕(乾寧, 894년 ~ 898년 8월) 광화(光化, 898년 8월 ~ 901년 3월) |
888년 4월 20일 | 900년 11월 | 16년 159일 | 화릉(和陵) |
임시 | - | 이유(李裕) | - | 900년 | 901년 | 3달 | - | ||
복위 | 소종(昭宗) | 이엽(李曄) | 867년 3월 31일 | 904년 9월 22일 |
천복(天復, 901년 4월 ~ 904년 윤4월) 천우(天祐, 904년 윤4월
~ 907월)
|
901년 1월 | 904년 9월 22일 | 16년 159일 | 화릉(和陵) |
20대 | -[31] | 이축(李柷) | 892년 9월 27일 | 908년 3월 26일 | 천우(天祐, 904년 ~ 907년)[32] | 904년 9월 26일 | 907년 5월 12일 | 2년 228일 | 온릉(溫陵) |
9. 계보
제곡 | |||||||||||
⋮ | |||||||||||
업조 | |||||||||||
고요 | |||||||||||
⋮ | |||||||||||
이경 | |||||||||||
이이 | |||||||||||
이종 | |||||||||||
⋮ | |||||||||||
이광 | |||||||||||
⋮ | |||||||||||
이엄 | |||||||||||
이창 | |||||||||||
凉. 이고 | |||||||||||
이흠 | |||||||||||
이중이 | |||||||||||
이희 | |||||||||||
이천석 | |||||||||||
이호 | |||||||||||
이병 | |||||||||||
1. 이연 | 원정황후 독고씨 | ||||||||||
2. 이세민 | |||||||||||
3. 이치 | |||||||||||
이홍 | 4. 이현 | 5. 이단 | 이현(李賢) | ||||||||
이중무 | 6. 이융기 | 이수례 | |||||||||
이종 | 7. 이형 | 이승굉 | |||||||||
8. 이예 | |||||||||||
9. 이괄 | |||||||||||
10. 이송 | |||||||||||
11. 이순 | 이온[33] | ||||||||||
12. 이항 | 16. 이침 | 이오 | |||||||||
13. 이담 | 14. 이앙 | 15. 이염 | 17. 이최 | ||||||||
18. 이현 | 19. 이엽 | ||||||||||
이유 | 20. 이축 |
10. 추존 황제
<rowcolor=#ece5b6> 묘호 | 시호 | 이름 | 연호 | 재위 기간 | 비고 | 능호 |
- |
덕명황제 (德明皇帝) |
고요(皋陶) | - | ? ~ ? | 고조 추숭 | - |
- | 선천태상황제(先天太上皇帝) | 이경(李敬) | - | - | 현종 추숭, 노자의 부친 | - |
대성조 (大聖祖) |
고상대광도금궐현원태상천황대제 (高上大廣道金闕玄元太上天皇大帝) |
이이(李耳) | - | - | 현종 추숭, 노자 | - |
서량 태조 (西涼太祖) |
흥성황제(興聖皇帝) | 이고(李暠) |
경자[34] 건초[35] |
400년 ~ 417년 | 고조 추숭, 서량의 시조 | 건세릉(建世陵) |
- | 홍농부군(弘農府君) | 이중이(李重耳) | - | - | 고조 추숭, 고조의 현조부 | - |
헌조(獻祖) | 선황제(宣皇帝) | 이희(李熙) | - | - | 고조 추숭, 고조의 고조부 | 건초릉(建初陵) |
의조(懿祖) | 광황제(光皇帝) | 이천석(李天錫) | - | - | 고조 추숭, 고조의 증조부 | 계운릉(啓運陵) |
태조(太祖) | 경황제(景皇帝) | 이호(李虎) | - | - | 고조 추숭, 고조의 조부 | 영강릉(永康陵) |
세조(世祖) | 원황제(元皇帝) | 이병(李昞) | - | - | 고조 추숭, 고조의 부친 | 흥녕릉(興寧陵) |
의종(義宗) | 효경황제(孝敬皇帝) | 이홍(李弘) | - | - | 중종 추숭, 고종의 5자 | 공릉(恭陵) |
- | 양황제(讓皇帝) | 이헌(李憲) | - | - | 현종 추숭, 예종의 장자 | 혜릉(惠陵) |
- | 봉천황제(奉天皇帝) | 이종(李琮) | - | - | 숙종 추숭, 현종의 장자 | - |
- | 승천황제(承天皇帝) | 이담(李倓) | - | - | 대종 추숭, 숙종의 3자 | 순릉(順陵) |
11. 임시(비정통) 황제
<rowcolor=#ece5b6> 시호 | 이름 | 연호 | 재위 기간 | 비고 |
상황제(殤皇帝) 소황제(少皇帝) |
이중무(李重茂) | 당륭(唐隆) 710년 | 710년 | 위황후에 의해 즉위, 17일 만에 폐위 |
광무왕(廣武王) | 이승굉(李承宏) | - | 762년 | 토번에 의해 즉위 |
강왕(絳王) | 이오(李悟) | - | 826년 | 환관 이극명에 의해 즉위, 헌종의 6자 |
폐황제(廢皇帝) 양왕(襄王) |
이온(李熅) | 건정(建貞) 886년 ~ 887년 | 886년 ~ 887년 | 주매에 의해 즉위, 숙종의 현손 |
성황제(成皇帝) 덕왕(德王) |
이유(李裕) | - | 900년 ~ 901년 | 소종의 장자, 유계술에 의해 즉위 |
12. 관련인물, 항목
- 가서한
- 견당사
- 곽자의
- 고구려-당 전쟁
- 고선지
- 김춘추
- 김법민
- 고문간
- 개원통보
- 능연각훈신(능연각 공신)
- 당나라군
- 대명궁 - 당나라의 황궁
- 당나라 군대
- 당삼채
- 당-남조 전쟁
- 두보
- 무미랑전기
- 백거이
- 복고회은
- 삼국통일전쟁· 나당전쟁
- 상관완아
- 소정방
- 소고구려
- 설인귀
- 신라방
- 안락공주
- 안정공주
- 안진경
- 양귀비
- 양염(당나라)
- 연헌충, 연헌성 ( 연남생의 아들)
- 왕사례
- 위징
- 위황후
- 유종원
- 이광필
- 이극용
- 이태백(이백)
- 이하
- 장보고
- 장손무기
- 적인걸
- 최치원
- 측천무후
- 태평공주
- 현장
- 화번공주
- 황소의 난
13. 여담
- 사극 드라마, 영화에서 고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시청자들이 있는데 그 부분에서 애로사항이 있는 게 당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다. 당나라 여성 의상의 노출도가 너무 높았던 것이 그 이유. # 그래서 남성시청자들이 당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실제로 김춘추가 당나라에 갔을 때 여성들의 노출이 심한 의상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
장안이 수도일때도
배도(陪都)로써 기능했다.
[2]
Turchin, Peter; Adams, Jonathan M.; Hall, Thomas D (December 2006). "East-West Orientation of Historical Empires". Journal of World-Systems Research. 12 (2): 222.
#
[3]
전성기 기준. 790년
토번에 의해 중국과 베트남 북부를 제외하고 전부 상실한다.
[4]
636년에 저술된 수서(隋書) 등 다수의 고문헌에 대(大)자가 붙어 언급된다. 대당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현장의 순례 여행기인 대당서역기. 물론 이전 왕조에서도 대(大)자가 붙는 용례는 있다. 삼국지의 대위(大魏)나 진서의 대진(大晉), 그리고 앞서 언급한 수서에서도 대수라는 용례가 나온다.
[5]
비슷한 예로 영씨의 진과 유씨의 한이 묶여서 때때로
진한시대로 불리는 것처럼, 양씨의 수와 이씨의 당을 묶어서
수당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게다가
진시황과
한 고조 유방이 아무 혈연관계가 없었던 것과는 달리,
수 양제와
당 고조는 서로
이종사촌이므로 수와 당은 혈연관계로 묶이기도 한다.
[6]
물론 이 과정에서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해서 이를 저지하려는
신라나
발해와 군사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7]
역대 중국 왕조 중 한반도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왕조를 꼽자면 당나라가
원나라와 더불어 양대산맥이다.
[8]
조선 시대 필수 교재였던 《
동몽선습》같은 것.
[9]
모리야스 다카오(森安孝夫)
오사카대학 동양사학과 명예교수의
발언
[10]
옛부터
관롱집단의 무천진 8주국 가문은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무천진 출신의 선비족 장수 집안하고만 혼인을 했다.
[11]
'보륙여'가 성이고, '견'이 이름이다.
[12]
일리 강
[13]
이식쿨 호수
[14]
이연은 수 양제 양광과 이종사촌 관계였다. 해서 이세민은 양제의 이종조카가 된다.
[15]
당시
수나라는
대운하 건설과 고구려 원정 실패 등으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16]
중종의 동생으로 무후에 의해 폐위되었다.
[17]
다만
김웅원이 이끄는 3만 신라 지원군이 이사도 토벌전에 참여하기 전에 이사도가 망해서 전투는 없었다.
[18]
이 과정에서 한반도의 나라들에도
SOS를 청하기도 했지만, 이들도 하나같이
본인들 코가 석 자여서 도저히 그들을 도와줄 처지가 되지 못해서 전부 거절했다.
[19]
항상 13주였던 것은 아니고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했다.
[20]
서진 시기에만 평주, 영주, 양주(梁州), 진주, 영주, 광주, 상주, 강주를 설치했다(상주, 강주는 설치했다 폐지했다). 심지어 남북조시대 북위의 주의 개수가 영토가 더 넓은 진(秦)나라의 군(郡)의 개수보다 많아졌다!
[21]
예를 들어 《삼국지》를 보면 종종 강릉성과 형주성을 혼용해 적곤 한다. 이름만 혼용해서 적으면 괜찮은데 형주성과 강릉성이 별도의 성으로 나오는 자아분열(?)을 보여줘서 독자를 혼돈에 빠트리기까지 한다.
[22]
한국은
고려
성종때
10도를 설치하여
현종대에
5도 양계가 되었고,
조선 때
8도가 되어 현재
대한민국과
북한의 도제도에 이르렀다.
일본은 율령국을 제도화할 때 5기 7도로 도입되었고,
메이지시대에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어
홋카이도를 제외하고 사라지게 되었다.
[23]
물론 전근대 중국 통일 왕조들 중에서 세계사적으로 안 중요한 나라는 없다.
[24]
유럽과 중국 모두 로마와 한나라라는 강력한 통일 제국에 의한 통치 경험이 있었으나, 전자는 서로마 붕괴 이후 유럽의 통일 국가가 더는 등장하지 않게 되면서 관념상의 세계관으로만 남은 반면, 후자는 한나라 멸망 이후 400여 년에 걸친 긴 분열기 끝에 수나라와 당나라의 등장으로 재통일을 이루어 중국이 로마와 달리 단일 정치체가 통치하는 국가의 개념으로써 재확인되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25]
정작 자신들을 '왜인'이라 대충 칭하면 발끈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통신사들을 '당인'(唐人)이라 부르기에 통신사 측이 이들을 '왜인'이라 부르자, "우리의 국호가 일본이 된지 오래되었는데 왜 왜인이라 부르는 것이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26]
특히 일본의 경우
헤이안 시대 중후기로 가면서 대외 교류가 줄고, 국풍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당나라 이후의 중국과는 교류가 제한적이었다. 그러므로 당 문화의 원형을 오히려 가장 잘 보존한다는 평가가 있다. 가령 한•중•일 3국의 전통 복식을 봐도 일본의
기모노가 가장 당나라 복식과 비슷하며, 일본 건축도 당나라의 흔적이 크다.
[27]
이런 절도사 문제는
오대십국시대를 일으키게 되었으며 결국
송 태조가 절도사의 병권을 빼앗는 것으로 정리된다.
[28]
후한과
명나라는 적어도 환관에 의해 시해된 황제는 없었다.
후한은
십상시의 난 이전만해도 외척과 환관 세력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었고,
명나라는
아무리 강력한 환관이라도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제거가 가능했다.
[29]
반면
신라의 공녀를 거절한 당 황제로는
당태종,
당고종,
당현종이 있다.
[30]
현대와 달리 여성의 권리가 낮았던 중세 사회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31]
원래 묘호는
후당의
명종
이사원이 추증한
경종(景宗)인데, 그리고 이 애종이라는 묘호는
후량의
주전충이
선양 받고 올린 시호는 애황제(哀皇帝)인데, 이는 이사원이 경종이라는 묘호를 채택하다가 중간에 취소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주전충이 올린 시호인 애자를 따서 묘호를 애종으로도 호칭되었다.
[32]
부황
소종의
연호를 그대로 습용
[33]
이형의 현손/玄孫
[34]
庚子, 400년 ~ 404년
[35]
建初, 405년 ~ 4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