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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01:13:12

엘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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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lisha-Eliseus.jpg
<colbgcolor=#ddd><colcolor=#000> 정보
이름 엘리사
직업 선지자
생몰 년도 ?~?
아버지 사밧
자녀 미상
종교 유대교
출생지 아벨므홀라
국적 이스라엘 왕국

1. 개요2. 행적
2.1. 엘리야를 만나기 전의 삶2.2. 엘리야를 계승하다2.3. 모압 정벌2.4. 서민적인 선지자2.5.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료하다2.6. 아람과의 전쟁2.7. 예후의 역성혁명2.8. 역성혁명 그 뒤2.9. 엘리사의 죽음
3. 대머리야 꺼져라 구절
3.1. 아이들이 아니라는 의견3.2. '올라가라'라면 신성 모독3.3. 시대적 한계3.4. 기타
4. 언어별 명칭

[clearfix]

1. 개요

구약 성경 열왕기 하권에 등장하는 예언자. BC 9세기경이 생몰연대로 추정된다. 엘리야의 제자이자 후계자로 많은 기적을 벌였으며, 엘리야에게 그의 능력의 2배를 달라고 해서 받았다고 한다.[1] 가톨릭에서는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으며 축일은 6월 14일이다.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은 구원'이라는 의미다. 디스베 사람으로만 기록된 엘리야와는 달리, 아벨므홀라 출신 사밧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엘리사의 행동은 다른 예언자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잘 따르면 복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엘리사는 엘리야가 배교자라고 미워한 아합 왕가를 전복하기 위한 예후 장군의 쿠데타에 직접 가담하였고, 예후와 그 뒤를 이은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느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며 불순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민족들의 침입을 여러 번 막아주기도 하고, 죽기 전에는 영토를 늘린다고 축복해주기까지 한다.[2] 거기다 적국 아람의 대장군 나아만의 한센병도 고쳐주었다.[3] 나아만이 "저는 지금부터 하느님을 믿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직책 상 시리아 신 림몬에게 바치는 의식에 참석하여 예를 표해야 하는데 하느님께서 노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걱정하자 엘리사는 "평안히 가시오." 라며 격려해 주었다.

구약의 다른 예언자들과 비교했을 때 물에 빠뜨린 도끼를 건져내 주거나 야생에서 캐온 재료로 끓인 국에 잘못 들어간 독성 식물을 해독하는 등의 기적들을 많이 베풀었으며, 보리빵과 이삭으로 100명을 먹이는 오병이어와 비슷한 기적도 행하였다. 시리아와의 전쟁에서는 구체적으로 시장 생필품의 시세가 얼마까지 떨어지는지 이야기하며 시리아가 물러날 것을 예언했고, 현대의 신학교라고 볼 수 있는 선지자 학원[4]을 그의 스승인 엘리야의 말년에 함께 운영했다. 그러나 동시에 북이스라엘 왕국 아람의 여러 고위 인사들과 자주 접촉했으며, 북이스라엘의 왕조 교체에도 관여하는 등, 생각보다 정치권과 상당히 밀접하기도 했던 예언자이기도 했으며, 동시대의 요르단 강 주변 지역사의 흑막이라고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던 선지자였다.

여러모로 영성이 대단해서, 죽은 뒤에 뼈만 남았는데 엘리사의 뼈에 다른 주검이 닿자 되살아났다고 한다.

AD 1세기경의 이스라엘에서도 구약시대의 예언자 중 엘리사는 많은 존경을 받는 네임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는 나자렛의 회당에서 엘리사가 나아만의 문둥병을 낫게 한 이야기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를 도운 이야기와 함께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의 정당성을 설명하였다( 루카 복음서 4:27).

2. 행적

2.1. 엘리야를 만나기 전의 삶

엘리사는 사밧의 아들로서 엘리야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평범한 농부에 불과했다고 한다.
엘리야는 그 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그는 황소 열 두 쌍에 겨리를 지워 밭을 갈고 있었는데 자신은 열 두째 겨리를 부리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옆을 지나가면서 자기의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 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한 후에 당신을 따라 가겠습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어서 가 보게. 내가 어찌 작별인사를 금하겠는가?"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집으로 돌아 가서 황소 두 마리를 잡고 쟁기를 부수어 그 고기를 구워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그리고 나서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나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열왕기상 19:19~21(공동번역)
엘리야를 만난 이후, 그를 따르며 수제자로 들어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2.2. 엘리야를 계승하다

그리고는 엘리야가 떨어뜨린 겉옷을 집어 들고 되돌아와 요르단 강 가에 서서 엘리야의 겉옷으로 물을 쳤으나 물이 갈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야의 하느님 야훼여, 어디 계십니까?" 하면서 물을 치자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엘리사가 강을 건너는데 예리고에서 온 예언자 수련생들이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말했다.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에게 내렸구나." 그러면서 엘리사 앞으로 나와 땅에 엎드려 절하였다.
열왕기하 2:13~15(공동번역)
엘리야의 승천을 바로 코앞에서 목격했던 그는 엘리야가 떨구고 간 겉옷을 주운 후,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그대로 겉옷으로 요르단강을 치자,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강이 눈 앞에서 갈라졌다. 엘리사가 갈라진 강을 건너오자 엘리야를 따르던 생도들이 엎드려 절하면서 엘리사를 엘리야의 진정한 계승자로 인정했다.

다만 엘리야의 승천에 대해선 믿기 어려웠던 모양인지, 생도들 중 몇이 엘리사에게 '하느님께서 스승님 데려가시다가 중간에 어느 산이나 골짜기에 떨구셨을 수도 있으니 사람들 풀어서 좀 찾아보면 안될깝셔?' 라고 하였다. 엘리사는 '뻘짓하지 마셔.' 했지만 생도들은 바득바득 우기면서 50명 정도가 엘리야를 찾아 나섰다가 사흘 동안 헛고생만 하다 돌아왔다.

생도들이 헛고생하고 돌아오는 동안 엘리사는 예리코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그가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어디서 들었는지 예리코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다른 건 다 좋은데 물이 시원찮아서 열매가 익다 말고 떨어짐' 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엘리사는 그릇에 소금을 담아 수원지에다 뿌리며 '하느님이 그러는데 이제 그런 일 없을 거래요'라 말하였고 그 뒤 정말로 농사가 망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잘 모르는 몇몇은 이미 여호수아 생존 당시에 무너졌던 예리코 성이 왜 열왕기하에서 다시 튀어나오느냐며 의구심을 갖는데, 예리코 성은 아합 왕 재위 당시에 이미 재건되어 있었다. 단, 여호수아 6장 26절에서 언급된 저주[5]가 계속 남아 있었던 탓에 재건자인 벧엘 사람 히엘의 첫 아들 아비람과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열왕기상 16장 34절에 언급되어 있다.[6]

이후 엘리사가 예리코를 떠나 베델로 가는 길에 아이들이 몰려나와 엘리사를 둘러싸고 하느님과 엘리사를 욕보이는 사건이 벌어졌고, 후에 성경을 볼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모욕하면 어떻게 되는지 깨닫게 하기 위해 암곰 2마리를 불러다 아이들 42명을 모조리 찢어죽였다. 이 사건에 관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항목 참고. 이후 그는 갈멜 산[7]을 들렀다가 사마리아로 돌아왔다.

2.3. 모압 정벌

북이스라엘 왕 아합이 전사한 후 왕위를 계승한 큰아들 아하시야는 즉위 직후 옥상에서 추락하는 바람에 한 것도 없이 세상을 뜨고 그 뒤를 이어 아하시야의 동생인 여호람(요람)이 왕위를 계승했다. 당시 모압은 북이스라엘의 속국으로 매년 양털을 이스라엘에 조공으로 바치고 있었는데, 아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당시 모압 왕이었던 메사가 여호람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자 여호람은 수도인 사마리아의 모든 병력을 점고함과 동시에 부왕인 아합 시절부터 동맹 관계였던 남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사절을 보내 '같이 모압 조지러 갈래?' 콜을 때렸고, 이에 호응한 여호사밧은 유다의 속국이었던 에돔 왕과 함께 모압 정벌에 참전하였다.[8]

그렇게 기세 좋게 3명의 왕이 이끄는 군대가 모압으로 진군한 건 좋았는데…물이 없었다.[9]

진군 7일 만에 연합군은 식수 부족으로 전부 퍼져버렸고[10] 하도 갈증이 심각한 나머지 여호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압한데 넘기시려는 갑다.' 소리까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여호사밧이 여호람에게 물어볼 만한 예언자가 어디 없냐고 말하자, 여호람의 신하 중 한 사람이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를 추천했다. 그 말을 들은 세 왕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엘리사를 찾아갔다.

엘리사는 여호람을 보자마자 '니네 엄마아빠 말 잘 듣던 예언자들한테나 가봐!'[11][12] 라고 축객령을 내렸지만, 여호람이 사정사정하면서 엘리사의 비위를 맞추자 '(그나마 경건한 왕인) 여호사밧의 얼굴을 봐서 특별히 들어준다'며 그들을 받아들였다.

엘리사는 악사를 불러와 거문고를 켜게 하여 하느님을 감동케 한 뒤 기도를 올린 후,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고 왕들에게 전달한다.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거라는 예언은 덤. 세 왕이 병사들을 전부 동원해 골짜기에 개천을 파도록 지시를 내리자 엘리사의 말대로 하룻밤 만에 에돔 방면에서 물이 흘러왔고, 비로소 식수 문제가 해결된 연합군은 사기를 회복했다.

한편 모압 왕 메사는 자기를 조지려고 여호람이 연합군을 몰고 온다는 말에 모압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딸딸 긁어모아 방어에 나섰는데, 어떤 정찰병이 노을빛 때문에 개천물이 붉게 비춰진 것을 피로 착각[13]해 그대로 보고해버렸고, 이에 '쟤네들 내분 나서 자멸했네 ㅋㅋ 우리 털러 가볼까?' 했다가 마침 기력 회복한 연합군의 밥이 되어 왕창 깨졌다. 그 기세에 밀려 연합군에 의해 모압 전역이 초토화되자 메사는 궁여지책으로 자기 맏아들을 잡아다 성 위에서 모압의 신 그모스에게 번제를 드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에 이른다.[14] 이 광경을 본 연합군은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냐면서 각자 고국으로 철군해버렸다.[15][16]

해석에 관하여 한가지 유력한 설을 덧붙이자면 유대인 전통 상의 해석인데, 메사가 번제로 바친 왕자가 메사의 아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유다와 함께 출병한 에돔의 태자였다는 것이다. 즉, 왕하 3:27의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라는 구절이 '왕자를 눈 앞에서 잃은 에돔군이 이성을 잃었다'라는 의미이며 이스라엘이 에돔군의 분노를 통제할 수 없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철군했다는 것이다. 암 2:1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모압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음이라"라는 구절이 이를 뒷받침한다.

모압 왕 메사가 자기들이 결국 승리했다고 주장하며 세운 메사 석비는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4. 서민적인 선지자

엘리사는 북이스라엘에 머무르며 종교세력의 중추로 활동하는 한편 자신을 따르는 생도들에게 많은 기적을 베풀었는데, 그 기적들은 다음과 같다.
마르지 않는 기름(왕하 4:1~7)

엘리사의 생도로 일하다 죽은 남자의 아내가 엘리사를 찾아왔는데, 큰 빚을 지게 되어 두 아이가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엘리사가 집에 가진게 뭐가 있냐고 묻자 미망인은 기름 한 병 뿐이라고 밝혔고, 엘리사는 이웃에게 그릇이란 그릇은 모조리 다 빌린 후에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고 모든 그릇에 기름을 채우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정말로 기름이 마르지 않고 빌려온 모든 그릇에 기름이 차자 여인은 그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남은 걸로 두 아들과 생활하게 되었다는 훈훈한 이야기.
수넴 여인 이야기(왕하 4:8~37)

엘리사가 자신의 사환 게하시와 함께 수넴에 머무를 무렵, 어느 부잣집 여인의 집에서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이 수넴 여인에게 잘 대접받은 엘리사는 그녀를 불러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으나 여인은 괜찮다면서 엘리사의 호의를 거절했다. 이에 게하시는 엘리사에게 '다른 건 다 좋은데 아이가 없고 남편은 늙었습니다.' 라는 사실을 밝혔고, 엘리사는 다시 그 여인을 불러다 '당신 얼마 뒤면 아들을 얻을 것이오.' 라고 말했다. 여인은 놀리지 말라 했지만 얼마 뒤 정말로 아들을 얻었다.

아이가 자란 후, 하루는 아이가 종과 함께 추수를 하던 아버지를 찾아오자, 아버지는 흐뭇한 아빠미소를 지으며 종을 불러다 아이를 어머니에게 데려다주라고 했고, 아이는 어머니 곁에서 낮 동안 어머니와 함께 잘 놀았는데…갑자기 아이가 픽 쓰러져 죽어버렸다.[17]

여인은 남편에게 엘리사를 만나러 가려고 종과 나귀를 달라고 요청했고, 남편은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왜 예언자를 만나러 그곳까지 가냐고 만류했지만 그녀는 끝끝내 나귀를 타고 엘리사를 만나러 그가 있는 갈멜 산으로 향했다. 수넴 여인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본 엘리사는 '오랜만입니다. 집은 평안하시나요?' 했다가 상황을 전해 듣고는 게하시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준 후, 누구랑 마주쳐도 아는 체조차 하지 말고 곧장 수넴까지 달려가 그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고 지시했다. 그 이후, 엘리사가 뒤따라 와서 상황을 확인했지만 아이가 깨어나지 않자, 엘리사는 방문을 닫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자기 입을 아이의 입에, 자기 눈을 아이의 감긴 눈에, 자기 손을 그 아이의 손에 대고 그 아이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이가 살아 돌아오자 여인은 엘리사의 발 앞에서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갔다.
독이 든 국(왕하 4:38~41)

엘리사가 길갈에 머무를 무렵 그 땅에 흉년이 들어 생도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엘리사는 사환을 불러다 솥에 물을 부어 국이라도 끓이라고 지시했다.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서 들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서 국 끓이는 솥에 넣고 무리에게 가져다 주었는데, 무리가 국을 먹다가 솥에 죽음의 독이 있다고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러자 엘리사는 가루를 가져와 그걸 국에 뿌리게 하였는데, 가루를 뿌리고 나니 독이 사라진 것은 물론 매우 맛있는 국이 되어 생도들은 굶주림을 해결했다.
보리떡과 채소로 100명을 먹이다(왕하 4:42~44)

바알 살리사에서 온 한 농부가 엘리사에게 보리떡 스무 덩이와 채소 한 자루를 보냈는데, 엘리사는 자기 사환에게 이르러 이걸 생도들에게 먹이라고 내어줬다. 그러자 사환은 '에이 농담 마시죠. 생도가 100명인데 어떻게 줄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자, 엘리사는 하느님이 먹고 남을 것이니 주라고 말했고 정말로 100명이 다 먹었는데도 보리떡과 채소는 남아 있었다.
도끼 자루가 떠오르다(열하 6:1~7)

엘리사와 그의 생도들이 머물 장소가 너무 좁자 엘리사는 생도들과 함께 요단에서 나무를 베어 새로 거점을 마련하기로 했다. 생도들이 새 거점 마련을 위해 나무를 베던 중 도끼날이 자루에서 이탈, 물 속에 풍덩 빠져버렸다. 그 생도가 '아잇 저 도끼 빌려온 건데' 라고 외치니 엘리사는 나무가지를 꺾어 물웅덩이에 던졌고, 그러자 도끼날이 물 위로 떠올랐다.

2.5.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료하다

엘리사의 기적은 북이스라엘인 뿐만 아니라 적국인 아람(시리아)인에게도 행해졌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이야기이다.

나아만은 아람 왕 벤하닷의 총신으로 한때 아람을 구원한 전적이 있는 전쟁 영웅[18]이었지만 어쩌다 문둥병에 걸려버렸다. 당시 신의 저주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답이 없던 이 병에 걸리자 나아만 본인은 물론 그의 아내까지 큰 근심이었는데, 마침 북이스라엘과의 전쟁 중 포로로 끌려와 나아만의 종이 되어 수종을 들던 이스라엘 소녀가 엘리사의 이야기를 꺼냈고, 이를 들은 나아만은 아람 왕 벤하닷 2세에게 이러이러하니 자신을 이스라엘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아람 왕은 북이스라엘 왕 여호람에게 '이스라엘의 신이 그렇게 신통하다지? 우리 장군 하나가 문둥병 걸렸는데 니가 좀 고쳐봐.' 라는 내용의 서신을 썼고, 나아만은 은 10탈렌트와 금덩이 6천 개, 의복 10벌,[19] 예복 10벌과 아람 왕의 서신을 지참하고 북이스라엘 왕 여호람에게 향했다.

하지만 여호람 입장에선 아닌 밤 중에 날벼락이었는데, 앞서 말했듯이 신의 저주라는 말이 붙을 정도의 불치병인 문둥병을 고치는 건 말 그대로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으므로 아람 왕이 북이스라엘을 침공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되도 않는 억지를 쓰는 것이라고 판단,[20] 자기 옷을 찢으면서 통곡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는 여호람에게 사람을 보내 '거 괜히 오바하지 말고 그 양반이나 나한테 보내슈'라고 하며 왕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나아만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엘리사의 집 앞에 당도하자 엘리사는 그를 만나보지도 않은 채 사자를 보내 요르단 강에 7회 입수하라는 지시를 전했는데, 나아만은 "아니 나는 엘리사라는 위대한 선지자가 나한테 손을 얹고 그 위대한 야훼라는 신께 기도하며 내 병을 고쳐줄 줄 알았는데, 다른 깨끗한 강들 냅두고 그딴 요르단 강 흙탕물 속으로 들어가라니? 내가 어디 몸 씻을 물이 없어서 여기까지 왔는줄 알아!?"라고 성을 내며 떠나려 했으나,[21]그의 부하들이 '문둥병이 낫는다면 더 어려운 지시도 따를거 아닙니까? 몸에 뻘흙 좀 묻는게 뭐 그리 대순가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엘리사의 말대로 요르단 강에 몸을 7번 담그자 문둥병이 말끔히 나았다.[22]

이에 나아만은 자신의 모든 부하들과 함께 다시 엘리사를 만나 크게 감사를 표하고 하느님만을 믿겠다며 신앙고백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전 아람 왕의 신하인지라 국법 상 왕과 함께 림몬 신의 제단에 참배해야 하는데 그거 괜찮을까요?'라는 말을 하는데 엘리사는 걱정 말고 평안히 가라고 축복까지 해주었다. 나아만은 자신이 들고 온 예물을 전부 엘리사에게 바치려 했지만 엘리사는 끝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그러자 나아만은 예물을 거두고 엘리사에게 나귀 2마리에 실을 만한 분량의 이스라엘 땅의 흙을 요청했는데, 종신토록 야훼만 섬기겠다는 맹세의 표시였다.

이 때, 이를 지켜보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 나머지 나아만을 뒤따라 가서 엘리사의 이름을 팔아 나아만에게 은 2탈렌트와 옷 2벌을 챙긴 다음[23] 이걸 감추고 엘리사에게 돌아왔다. 이에 엘리사는 게하시가 나아만에게 자기 이름을 팔아 삥을 뜯은 걸 눈치채고 '지금이 재물이나 긁어 모을 때냐? 나아만의 문둥병이 너랑 네 자손에게 영원히 이를 것이야!' 라고 저주했더니, 그 즉시 게하시의 피부에 문둥병이 눈처럼 발하였다고 한다.

2.6. 아람과의 전쟁

여호람의 예상대로 아람 왕 벤하닷 2세는 북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는데, 진군하는 곳마다 이스라엘군의 요격에 걸려들자 처음엔 첩자의 소행이라고 판단하여 신하들을 윽박질렀다. 그러자 신하들은 '이게 다 엘리사가 우리 작전 계획을 죄다 알아채고 이스라엘 왕에게 불어서 그래요.' 라고 대답. 엘리사가 마침 멀지 않은 도단 성에 있는 걸 안 벤하닷 2세는 곧장 도단 성을 공략하기로 결정한다.

이윽고 아람군이 도단 성을 물샐틈 없이 포위하자 엘리사의 종이 벌벌 떨면서 우리 이제 어떻게 하냐고 엘리사에게 고하였는데, 엘리사가 '걱정 마라. 우리 편이 더 많다.' 며 종의 눈을 열어 수많은 불타는 말과 불병거를 보여주다. 그리고 엘리사가 기도를 올리자 마침 공성을 시작하려던 아람군의 눈이 전부 멀어버렸다. 갑작스레 눈이 멀어버지라 아람군은 혼란에 빠졌는데 그 사이에 엘리사가 그들에게 나아가 내가 길을 안내해줄 테니 따라오라고 지시를 하자 마침 정신이 없던 아람군은 엘리사의 말을 덜컥 믿고 그대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람군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새 자신들은 적국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 한복판에 제 발로 들어가 있었다. 여호람 왕이 엘리사에게 "이 녀석들 전부 다 죽일까요?" 라고 묻자 엘리사는 오히려 떡과 물을 줘서 그들을 먹이고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했고, 당연히 이들은 다시는 이스라엘 땅을 밟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엘리사에게 제대로 엿을 먹은 아람 왕 벤하닷 2세는 얼마 후 다시 군대를 일으켰는데, 이번에는 사마리아 성을 겹겹이 에워싸 보급로를 모두 끊어서 사마리아 성을 말려 죽이기로 한다. 벤하닷의 계획은 성공적이었고 어느새 사마리아 성의 물가는 미칠 듯이 폭등하기 시작했다.[24][25] 오죽하면 두 여인이 굶주리다 못해 자기 자식을 서로 잡아먹기로 하다가 싸움이 난 걸 여호람 왕 앞에서 호소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 사태에 대해 여호람은 극도로 분노하여 이게 다 엘리사 탓이라며 "오늘 내가 엘리사를 못 죽이면, 하느님이 날 죽여주십시오!" 라고 소리치면서 자신의 군대 장관을 보내 엘리사를 잡아다 죽이라고 명령했는데, 마침 장로들을 모아 회의를 하고 있던 엘리사는 여호람이 지시를 딱 내리던 시기에 '이 살인자의 자식이 누가 누굴 잡아다 죽이겠다고?' 빈정거리며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이윽고 그 군대 장관이 엘리사를 죽이려고 찾아와 문을 두드리니, 엘리사는 창문을 열어 그를 내려다보면서 24시간쯤 지나면 고운 가루 1스아에 1셰켈, 보리 2스아에 1셰켈[26]이라고 예언을 하자, 그 신하는 '하느님이 하늘에 창문을 내도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라고 외쳤다. 이에 짜증이 난 엘리사가 다시 예언하길 '네놈이 그걸 눈으로 보겠지만 먹지는 못할 줄 알아라.'

그리고 그날 밤 아람 군대 진영에 병거 소리와 말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벤하닷 2세는 '아, 얘네들이 봉쇄를 어떻게 뚫고 헷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을 용병으로 불러왔나 보다!' 지레짐작하고 모든 물자를 버린 채 그대로 도주해버렸지만 그걸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는데, 마침 성 밖으로 쫓겨나 쫄쫄 굶주리고 있던 문둥병자 넷이 '야, 이대로 굶주리지 말고 그냥 아람군에 가담해서 배불리 먹고 죽자'는 마음에 아람군의 진영으로 갔다가 사람은 없고 물자만 남은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잘 먹고 잘 챙긴(?) 뒤 누군가가 "그래도 적군이 물러난 건 얘기해줘야지" 해서 여호람 왕에게 이 사실이 들어갔는데, 조심스레 정탐을 보냈다[27]가 이게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되자 성내의 굶주린 백성들이 일제히 성문 밖으로 몰려나갔다. 그 난리통에 성문을 지키던 자가 짓밟혀 죽었는데, 그는 전날 엘리사와 대거리를 하던 그 장수였다. 엘리사의 말대로 정말 곡식 값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으나 그걸 먹지는 못하게 된 셈이다.

2.7. 예후의 역성혁명

벤하닷 2세와의 전쟁 이후, 북이스라엘 왕 여호람과의 사이가 벌어진 엘리사는 본격적으로 여호람을 비롯한 오므리 왕조의 일가들을 모조리 숙청할 계획에 돌입하게 되는데, 먼저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머물던 도중 아람 왕 벤하닷 2세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마침 엘리사가 다마스쿠스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벤하닷 2세의 신하 하사엘이 예물을 들고 찾아와 왕의 병이 나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엘리사의 반응은 이러했는데, 먼저 한 대답은 '병은 낫겠지만 걔 죽음'이었다.
열왕기하 8장 11-13절(공동번역성서)
그리고 나서 하느님의 사람은 하자엘이 어리둥절해 할 정도로 얼굴을 굳히며 탄식하다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 어찌하여 우십니까?" 하고 하자엘이 묻자 엘리사가 대답하였다. "나는 그대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장차 어떤 악한 일을 할지 그것을 알고 이렇게 우는 것이오. 그대는 이스라엘 요새에 불을 지르고, 젊은이들은 칼로 쳐죽이고, 어린아이들은 메어쳐 죽이며,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가를 것이오." 하자엘이 "소인은 개보다도 나을 것이 없는 몸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고 하십니까?" 하고 말하자 엘리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 야훼께서 보여주신 환상 가운데서, 그대가 아람의 왕임을 보았소."
이 말을 들은 하사엘은 벤하닷 2세에게 돌아가 '곧 나을 거래요' 한 뒤, 이튿날 이불을 물에 적신 후 왕의 얼굴에 덮어서 벤하닷 2세를 질식사시켜 암살하고 스스로 아람 왕에 등극한다.

새로이 왕위에 오른 하사엘은 아람의 세력을 크게 키우면서 북이스라엘 침공에 더욱 박차를 가했는데,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의 계속된 공세를 막던 여호람(요람)은 부상을 입게 되었고, 장군 예후에게 전권을 위임한 채 이스르엘로 물러났다. 이 당시 남유다의 왕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북이스라엘 왕 여호람과는 동명이인)[28]의 아들이자,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의 아들 아하시야로 여호람에겐 조카였다. 그는 삼촌인 여호람이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 차 이스르엘로 찾아왔는데, 엘리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길르앗 라못에 주둔하고 있던 예후에게 자신의 시동을 보냈다.

시동은 예후를 은밀히 만난 뒤 그에게 기름을 부으며 이렇게 말한다.
열왕기하 9장 7-10절(공동번역성서)
내가 이세벨의 손에 죽은 예언자들뿐 아니라 나의 모든 종들의 원수를 갚으리라. 그러니 너는 네가 섬기던 아합의 가문을 쳐부수어라. 내가 아합 가문에 속한 사내 녀석들은 종이든 자유인이든 씨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리라. 그리하면 아합의 온 가문이 망하리라. 나는 아합의 가문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가문이나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가문처럼 만들리라.[29] 이세벨의 시체는 묻어주는 사람이 없어, 이즈르엘에 있는 제 땅에 버려져 개들이 뜯어먹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젊은이는 문을 열고 도망하였다.
즉 엘리사는 예후를 새 왕으로 지명하고, 그에게 오므리 왕가를 멸하라 지시한 것이다.

예후가 이 사실을 모여있던 자신의 측근들에게 밝히자 그 즉시 측근들은 자신의 옷을 벗어서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면서 예후를 왕으로 모시며 오므리 왕조 토벌을 적극 지지한다. 예후는 즉시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있던 이스르엘로 회군하였는데 하필 이스르엘은 아람 원정에서 대패하여 요양 중인 여호람 왕과 문병 온 아하시야가 있는 곳이었고, 예후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두 왕이 직접 병거를 타고 그를 맞이하러 나갔다.

하지만 이미 혁명을 결심한 예후는 두 왕이 나타난 것을 보고 '앗싸 1+1이요' 를 외쳤고 여호람이 "좋은 소식 좀 있수?" 라고 묻자 "님 엄마가 끌어온 우상들 때문에 온 나라가 무당집이 됐는데 무슨 놈의 좋은 소식?" 이라고 되받아쳤고, 응 니 애미 드립에 낌새를 눈치챈 여호람이 마차를 돌려 도망치자 활을 쏴서 여호람을 쏘아 등을 꿰뚫었다. 여호람을 관통한 화살은 그의 염통을 뚫고 나왔으며 그는 병거 위에서 그대로 즉사했다.[30] 거기에 멋모르고 숙부 따라 나온 남유다 왕 아하시야는 식겁하여 도망쳤지만 역시 므깃도에서 발각되어 예후에 손에 척살당했다.[31]

한편 그 당시까지 살아있던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예후가 반란을 일으켜 여호람과 아하시야를 죽였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차분히 창 아래에서 예후를 내려다보며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느냐'고 쏘아붙였는데 이는 오므리 왕조의 창건자이자 아합의 부왕인 오므리의 손에 의해 7일 만에 권좌에서 내쳐진 반란자, 시므리에 빗대어 예후를 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후가 "내 편이 될 자 누구냐!" 라고 외치자 이세벨의 곁에 있던 내시 두 세명이 이세벨을 붙들어 그대로 창문 바깥으로 집어 던져버렸고, 그 피가 담벼락과 말에게 튈 정도였다. 예후는 이세벨의 시체를 말로 짓밟아 훼손한 후 이스르엘 땅에 매장했는데, 매장될 때 이미 이세벨의 두개골과 손바닥 외엔 남는 게 없었으며, 매장된 시체마저 개들에 의해 뜯어먹히는 바람에 그 시체가 이세벨이라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32]

예후의 숙청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예후는 아합의 아들 70인을 모시던 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이 모시던 왕자 70인의 목을 바치게 하였고, 남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 42인 또한 하나 하나 찾아내서 참살함으로써 오므리 왕가 일족을 모조리 청소했다. 그리고 이세벨이 추진하고 있던 페니키아 계의 바알 사제 집단 역시 모조리 잡아 숙청함으로써 오므리 왕조의 흔적 역시 말끔하게 지우는 데 성공했다.[33]

이 모든 일을 기획한 사람이 바로 엘리사였다.

2.8. 역성혁명 그 뒤

예후는 오므리 왕조를 척결하고 엘리사를 비롯한 예언자 집단의 지지를 받아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예후의 신앙은 과거 여로보암이 추진했던 금송아지 신앙의 회귀였고, 이는 엘리사의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그와는 별개로 예후의 집권은 불안정했는데, 마찬가지로 엘리사가 세운 아람 왕 하자엘이 여전히 세력을 확장하면서 시시각각 북이스라엘의 존망을 위협하고 있었고,[34] 남유다 역시 살아남은 아합 왕의 딸 아달리야가 여왕이 되면서 북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적대관계로 돌아서 버렸다.

결국 위아래로 고립되어 버린 예후는 시리아 북방의 강국인 아시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는데, 과거 아합과 벤하닷 2세가 공동전선을 펼쳐서 막아낸 적이 있던 아시리아 왕 살만누아사리두는 예후의 SOS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에 예후는 아시리아를 상국으로 섬기며 조공을 바치게 되었는데,[35] 이는 후일 북이스라엘과 아람 양국이 아시리아에게 먹히는 날을 앞당기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이리하여 예후의 북이스라엘과 아람은 또 다시 오랜 세월동안 전쟁 상태에 들어갔으며, 이는 예후 뿐만 아니라 예후의 아들인 여호아하스, 그리고 손자인 요아스(여호아스) 대까지 이르렀다.

2.9. 엘리사의 죽음

예후의 손자 요아스(여호아스)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요아스가 직접 엘리사를 만나 눈물을 흘리면서 안쓰러워하는데, 엘리사는 왕에게 활과 화살을 취해 동편 창문 너머로 활을 쏘라고 지시한다. 요아스가 화살을 쏘자 "그건 왕이 아람을 아벡에서 크게 무찌를 거라는 뜻이다." 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다시 요아스에게 화살을 잡고 땅을 치라고 지시하자, 요아스는 화살을 잡고 가볍게 툭툭툭 치고 '됐습니까?' 한다. 이 광경을 본 엘리사는 어이가 퇴갤해 "잘 좀 칠 것이지! 대여섯 번만 쳤어도 아람을 쪽낼 수 있었는데, 세 번만 쳤으니 세 번의 승리만 얻고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아람 왕 하사엘이 죽고 그의 아들 벤하닷 3세가 왕위에 오를 무렵, 아시리아의 살만누아사리두(살만에셀)가 죽고 잠시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나 BC. 805년 아다드니라리 3세가 권좌에 오르면서 아람의 수도 다마스쿠스에 대대적인 공세를 퍼붓는다. 그 공세는 매우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힘을 너무 소모한 탓에 아시리아는 아람 정복을 완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공세로 인해 아람 왕 벤하닷 3세는 거의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고 휘청거리고 있었는데, 이 틈을 타 북이스라엘의 요아스 왕이 거병하여 3번의 승리를 거두고, 과거 하사엘이 빼앗은 땅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 사이 엘리사는 세상을 떠났다. 시: 죽음을 앞둔 엘리사의 노래 유해는 묘지에 묻혔는데, 이후 해가 바뀌고 아람군에 의해 사망한 어떤 한 사람을 장의사들이 수습해 엘리사의 묘에 합장했다. 그러자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마자 곧바로 회생하여 일어서는 일이 있었다.

엘리사 사후 그에 비견되는 예언자 집단의 수장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이후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은 급격히 쇠퇴하면서 북이스라엘 왕국이 망할 때까지 이렇다 할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36][37]

3. 대머리야 꺼져라 구절

다음 구절이 논란이 된다.
23 엘리사는 그 곳을 떠나 베델로 올라갔다. 그가 베델로 가는 도중에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 하며 놀려대었다.
24 엘리사는 돌아서서 아이들을 보며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암곰 두 마리가 숲에서 나와 아이들 42명을 찢어 죽였다.
열왕기하 2장 23-24절(공동번역성서)

베델로 가는 도중 성에서 나온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여 꺼져라 대머리여 꺼져라"라며 조롱했다.[38]

그들의 말을 듣고 엘리사는 아이들에게 저주를 내렸고, 인근 수풀에서 암곰 둘이 튀어나와서 그들 중에 42명을 찢어죽였다.

인터넷에서 대머리 놀리기 중 하나로 유명하다.

3.1. 아이들이 아니라는 의견

'아이들'이 어린 아이가 아니라 청년일 수 있다는 소수 의견이 있다.

당시 유대교의 성년식은 13세였다. 심지어 여자아이들은 성장이 빨라 12세에 성년식을 했다. 즉, 당대는 12~13세면 성인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의 결혼 적령기는 13~18세였다. # 물론 비교적 성장이 빠른 여자들은 12~17세 때 결혼 적령기였다. 즉,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8세~13세 정도의 무리들로 이루어졌을 것이고, 어린이라는 수식어를 신경쓰지 않는다면 최대 18세까지 넓혀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시대상 전부 같은 학급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테고, 단지 이들이 리더로서 이끄는 대규모 각양각색의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하지만 이 구절의 아이들은 실제로 어린 아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들'로 번역된 23절의 "וּנְעָרִ֤ים קְטַנִּים֙"에서 קטן은 "작은" 혹은 "어린"이라는 뜻이고, נער는 "유아기~결혼하기 전"의 연령대를 두루 이르는 말로서, 20살 무렵의 솔로몬이나 17살 시절의 요셉처럼 건장한 청년들을 지칭할때도 사용됐다. # 그리고 마찬가지로 '아이들'로 번역된 24절의 "יְלָדִֽים"에서 ילד은 그냥 "어린이"라는 뜻이다.

일단 "וּנְעָרִ֤ים קְטַנִּים֙"가 영어 성경에서 어떻게 번역되는가를 살펴보면, 라며 주로 '아이들'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즉, 히브리어 판본 Westminster Leningrad Codex로 봐도 23절 נְעָרִ֤ים קְטַנִּים(느아림 크타니임)은 간혹 어린 젊은이들로도 번역될 수도 있겠지만, 24절의 יְלָדִֽים(열라딤)은 거의 그냥 어린이들로 번역된다. 참고로 ים(임)은 복수형이다.

23절의 히브리어 단어, נַעַר (Strongs H5288) 구약성경에 238번 나타나며 위에 언급된 KJV에서는 그 중 young man 으로 76번, servant 으로 54 번, child 로 44번, lad 로는 33번…young (15x), children (7x), youth (6x), babe (1x), boys (1x), young (1x) 번역되었다.

24절의 יֶלֶד (Strongs H3206)는 89 번 나타나며 그 중 child는 72번 번역되지만, 상황에 따라서 young man은 7번 young ones (3x), sons (3x), boy (2x), fruit (1x), apostate Israelite(히브리인 배교자) 등 다양한 번역이 있다. 하지만 다수의 해석은 "어린이"다.

נַעַר(나아르)는 오히려 옛날엔 아동~청소년을 두루 지칭했는데 현대에는 청소년만을 지칭하는 단어로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קטן(카탄)이란 수식어가 붙으면 청년을 제외한 소년만을 지칭하게 된다.

יֶלֶד(옐레드)는 예나 지금이나 그냥 아이만을 지칭하는 단어이나, 몇몇 특수한 상황에서 청소년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대게 부모가 당신의 아이를 지칭할때, 혹은 미성숙한 애같다고 조롱할때, 또래 집단에서 서로를 지칭할때 등등이다.[39]

3.2. '올라가라'라면 신성 모독

이 구절은 판본에 따라 '꺼져라'와 '올라가라' 두 가지로 적혀있다. 공동번역성경, 개신교 새번역 성경, NIV 성경 등은 '꺼져라'를 선택했다. 개신교 개역개정 성경, 가톨릭 성경은 '올라가라'를 선택했다.

만약 성경 원본에 '올라가라'라고 적혀 있다면 엘리야의 승천을 비꼬는 말로 추측할 수 있다. "네가 정말 하느님의 예언자면 너도 스승처럼 하늘로 올라가 봐라" 또는 "죽어라"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3.3. 시대적 한계

고대 히브리인들의 인권 의식을 보여주는 시대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야훼의 윤리성을 비판할 때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원주민 학살과 함께 자주 인용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보더라도, 알레고리를 모조리 무시하고 구약 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윤리관념을 무작정 당대에 적용하려던 건 중세 때도 하지 않던 짓이다. 중세 신학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당연히 알레고리로 해석하고 넘어갔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신학자들과 평신도·일반 성직자들 간에는 괴리가 컸고 근본주의적인 해석이 언제나 존재해왔음[40]은 기억해야 한다.

게다가 해당 구절은 시퀀스가 매우 단순한 편이라 해석의 여지도 적다. 유대인의 가나안 정복은 스케일도 크고 중간중간 논리상의 공백도 있으니 옹호론을 통해 서사를 완성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존재했지만, 엘리사가 조롱에 대한 대응으로 곰을 소환해 애들을 찢어죽였다는 내용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이상하지 않으니 무리하게 해석하려는 시도도 없었다.

구약을 읽지 말자는 주장은 초기 기독교에서 마르키온이 이단 판정을 받으며 끝난 이야기이다. 구약에 있는 여러 난제는 많은 신학자가 해석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야이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구약 난제를 현대 관점에서 다 말이 되게 해석하다보면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기 쉽다.

3.4. 기타

더욱이 해당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성경에 남은 기록상으론 별다른 설명이 없고 역사서들의 기록의 전후 맥락을 파악해야 알 수 있는 점이지만, 엘리야·엘리사 사제라인이 활약하던 시절 남북 이스라엘은 야훼 신앙과 이교신앙의 종교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아 상대방에 대한 공격도 왕왕 일어나던 더더욱 험악한 시절이었다. 당장 스승인 엘리야만 봐도 야훼 신앙을 가진 사제들이 몰살당하자 몸을 피해 광야로 도망가기도 했고, 아합 왕 앞에서 바알을 모시는 사제들을 역관광보내면서 몰살시키기도 했다. 이런 험악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엘리사도 단순히 젊은이들이 자기를 놀렸다고 그런게 아니라 바알 추종자인 젊은이들이 수십명씩 우르르 몰려나와서 자기를 집단 린치할 분위기가 되니까 그런 게 아니냐…정도의 짐작이 있긴 하다. 그리고 엘리사는 적국인 아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줬다거나 이교 신앙을 받아들여 속을 썩이던 왕들에게 몇 번씩이나 기적을 내리거나 축복을 해줬다고 하는 기록을 보면 단순히 이교 신앙을 가졌다고 덮어두고 배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더욱이 해당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일찍이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면서 우상신앙의 근거지가 되어버린 두 장소 중 하나인 베델이었다. 즉 금송아지 우상신앙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들 중 42명을 찢어죽였다는 말로 추측컨대, 이들은 최소 42명 이상으로 이루어진, 어쩌면 3자리 수의 집단이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이들이 최연장자에게 선동당해 광신도처럼 엘리사를 둘러싸고 조롱하고 있다면, 아무리 어리더라도 충분히 위협적인 상황임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41] 게다가 엘리사는 대머리였던 것으로 보아 젊지는 않았다.[42][43]

4. 언어별 명칭

<colcolor=#000000> 언어별 명칭
히브리어 אלישע(elisha', 엘리샤)
아랍어 أليشع(alyasaʿ, 알야사)
그리스어 Ελισαίος(Elisaíos, 엘리세오스)[44]
라틴어 Eliseus(엘리세우스)[45]
러시아어 Елисе́й(Jeliséj, 옐리세이)
영어 Elisha(일라이샤)
프랑스어 Élisée( 엘리제)


[1] 당시 유태인 율법에서 장자는 상속분이 곱절인 것을 지칭한 것으로, 그냥 후계자로 인정해 달라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런데 엘리사가 일으킨 기적을 보면, 정말 전임자(?)인 엘리야의 기적의 2배로 보이기도 한다. 참고로 구·신약을 통틀어 기적을 여러 번 직접 행한 개인은 모세, 엘리야, 엘리사, 예수, 바울 정도이다. [2] 화살로 땅바닥을 치라고 북이스라엘의 왕 여호아스에게 시키는데, 여호아스가 성의없이 3번만 치고 그만두자 "왕께서 열심히 쳤으면 아람(시리아)을 멸망시켰을 텐데 3번만 쳤기 때문에 3번만 승리할 것이오." 라고 말했다(열왕 하 13:18, 19). [3] 이때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치료비로 많은 재물을 주었으나 엘리사는 끝내 받지 않았는데 그 재물을 탐내던 게하시라는 종이 몰래 나아만을 찾아가 엘리사가 지시한 것으로 꾸며 재물을 받아오는 일이 있었다. 이에 엘리사는 게하시를 불러 어디 갔다왔느냐고 물었지만 그가 대충 둘러대자, 분노하여 "네가 나아만에게 갔다온 것을 내가 모를줄 알았더냐!" 라며 그를 꾸짖었다. 그리고 그에게 "나아만의 병이 너에게 옮겨갈 것이다!" 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게하시가 바로 나아만이 걸렸던 한센병이 발병했다(정작 게하시는 이 일 이후 더욱 성심성의껏 엘리사의 종으로서 그를 섬겼다). 이 일화는 여호수아서에서 여리고 성의 재물을 몰래 가져와 자신의 집에 숨긴 아간의 이야기와 유사한데 다른 점은 아간은 재물을 모두 없애버리라는 야훼의 지시를 어긴 것이기 때문에 다음 전투인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이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기에 그 책임이 매우 커 결국 처형을 당했다는 것이었고, 게하시는 나아만의 재물을 가지지 말라는 야훼의 지시는 딱히 없었으나, 재물에 눈이 멀어 엘리사에게 거짓말을 해서 벌을 받은 경우다. [4] 기독교 내에서 이를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다. 선지 학원, 선지자의 일행들 등등 [5] 그 때 여호수아가 맹세하였다. "이 성을 다시 짓겠다고 나서는 자는 야훼께 저주를 받으리라. 맏아들을 죽이지 않고는 기초를 놓지 못하고 막내아들을 죽이지 않고는 성문을 달지 못하리라." (여호 6:26) [6] 아합이 다스리는 동안 베델 사람 히엘이 예리고 성을 재건하였다. 히엘은 성의 기초를 놓다가 큰 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성문을 닫다가 막내아들 세굽을 잃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시켜 하신 야훼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열왕상 16:34) [7] 과거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맞짱을 떴던 곳이기도 하다. [8] 여호사밧이 속국이었던 에돔의 군대를 동원한 것은 과거 아합이 전사한 길르앗 라못에서 군사력을 크게 말아먹은 것도 있었지만, 북이스라엘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모압 북부가 아닌 에돔과 마주한 모압 남쪽 방면으로 군사를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9] 실제로 모압 측에서 이 전쟁을 기록한 메사 석비에서도 모압 측이 물 공급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했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10] 연합군이 선택한 에돔 방면은 수원 공급이 쉽지 않은 광야 지대인데다, 뭣보다 그나마 근처에 있는 수원이 다름 아닌 사해. [11] 여호람의 아버지는 아합 왕,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이세벨로 둘 다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와는 앙숙 중의 앙숙이었다. [12] 참고로 아합은 자기에게 아부하던 예언자들의 말만 믿고 전쟁했다가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했다. [13] 다소 황당해 보이는 상황처럼 들릴 수 있지만 해당 지역인 에돔은 사암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노을이 아니라도 사암의 붉은 색이 물에 비춰졌을 수 있기 때문에 나름 타당성이 있는 사건이다. [14] 여기서 번제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제물을 태워서 하는 제례'다. 그러니깐 메사는 연합군이 보는 가운데 자기 맏아들을 자기 손으로 태워 제물로 바친 것이다. [15]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신에게 번제를 바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민족간의 전쟁은 곧 그 민족이 믿고 있던 신들 간의 경쟁이었기에, 신에게 번제를 드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던 연합군 역시 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철군했다는 설이 있다. [16] 사실, 왕위계승자까지 직접 희생시킬 정도로 수성측의 결사항전 태세가 강고하다면 어차피 이기기도 힘들고, 이겨도 손해가 막심할 것이기에 철수해도 이상할 건 없다. [17] 수넴 여인이 농사를 짓고 살던 점을 근거로 열사병이 사인으로 추정된다. [18] 유다 전승 중에는 과거 길르앗 라못 전에서 북이스라엘 왕 아합을 쏘아 맞춘 인물이 바로 이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그게 진실인지는 불명이지만. [19] 은 340㎏, 금 34㎏. 현 시가로 30억 원 어치. [20] 외교 사절이 외국에서 앓다 죽어도 외교문제가 되는데 강대국에서 아예 처음부터 죽을 병 걸린 군 고위직을 예물을 듬뿍 쥐어서 사절로 보냈으니 여호람 입장에선 그 의미가 뻔하다 여겼을 것이다. [21] 요즘으로 치면 중국이나 일본의 국방장관 정도 되는 고위급 인사가 말기암에 걸려서, 이웃나라 능력 있는 목사 한테 안수기도 받으러 왔는데 만나주지도 않고 새파랗게 젊은 교회직원 하나 시켜서 대신 문 앞에 내보낸 셈이다. 게다가 어디 허름한 산골 기도원 가서 몇시간 기도하면 완치될거란 얘기를 대충 전해준거나 다를 바 없다. [22] 단순히 나은 정도가 아닌 마치 어린아이의 피부같이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23] 원래는 은 1탈렌트와 예복 2벌을 요구했는데, 나아만이 '난 또 뭐라고…은 2탈렌트를 챙겨드리지요' 했다. [24] 어느 정도였냐면 나귀 머리 하나에 은 80셰켈, 합분태 ¼갑에 은 5셰켈로, 오늘날로 치면 고기 중 가장 쓸모없어서 소세지나 만들 부위가 최고급 스테이크 가격으로 훌쩍 뛰어오른 셈이다! [25] 여기서 합분태는 바로 비둘기 똥이다. 물론 진짜 비둘기 똥이 아니라 당시 천민들만 산에서 캐먹던 작은 콩(히르요님)인데, 이걸 모아 300g에 은 다섯 셰켈, 즉 일반 노동자 하루 임금의 20배로 사고팔았던 것이다. [26] 당시 은 1셰켈은 일반 노동자의 4일치 임금, 1스아는 지금의 7.3㎏ 정도 된다. 예를 들자면 1,500원짜리 포카칩 1봉지가 300원 정도로 뚝 떨어진다고 보면 된다! [27] 그 때만 해도 왕실에 있던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다가 누가 '저기 말 5마리 굶어 뒤지게 생겼던데, 어차피 뒤질 거 밖에다 미끼로 던져줘봐요' 해서 어거지로 2마리만 보낸 것이다. [28] 참고로 여호사밧이 죽고 이 사람이 등극하자마자 에돔이 반기를 들었다. 이후 에돔은 이 양반의 증손자인 아마샤 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남유다에 복속된다. [29] 두 집안 다 왕위를 빼앗기고 멸족당했다. [30] 아이러니하게도 여호람이 죽은 곳은 다름 아닌 그의 부친인 아합이 나봇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포도원이 있던 곳이었다. 죽은 여호람의 시체는 본보기로 그 포도원에 던져졌다.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아합에게 했던 예언의 앞구절이 적중한 것. [31] 부상을 입고 도망가다가 죽었다고도 한다. [32] 이것이 엘리야가 했던 예언 뒷구절의 적중이었다. [33] 그러나 오므리 왕조의 잔재는 끝내 없어지지 않았는데 남유다로 시집간 아합의 딸 아달리야는 이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남유다 여왕이 된 후 다윗 왕조의 씨를 말려버리려 하다가 끝내 요아스를 옹립한 세력에게 죽임을 당한다. 요아스가 아달리야의 외손자였으므로, 결국 오므리 왕조의 혈통은 다윗 왕조에 계속 남아있게 된다. [34] 길르앗 라못에서 회군한 탓에 갓 지파, 르우벤 지파, 므낫세 지파의 땅인 아로엘과 길르앗, 바산 일대가 모조리 아람에게 넘어가 버렸다. [35] 이 내용은 아시리아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으며 성서에서는 나와 있지 않은 사실이다. 예후 항목 참조. [36] 전대인 엘리야 시대와는 다른 점으로 엘리야 시대에는 극악하다고 평가받는 아합 시대인데도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에서 그의 추종자들이 바알 숭배자들을 죽이기도 했고 또 엘리야가 현실에 비관하여 자신을 죽여달라 하자 야훼가 바알을 따르지 않는 이 7천명이 있다고 말한다. 즉 약간은 세가 남아있다는 의미다. 허나 그런 한편으로 단 7천명이라는 점에서 이미 엘리야 때부터 야훼 신앙은 쇠락하고 있었다. [37] 그나마 이후에 요나 같은 선지자가 나오기는 하는데 이들은 개별 단위로 활동했다.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지지자들이 있던게 아니었던 것. [38] 판본이 두 가지이다. 공동번역성경, 개신교 새번역 성경, NIV 성경 등은 '꺼져라'를 선택했다. 개신교 개역개정 성경, 가톨릭 성경은 '올라가라'를 선택했다. [39] 위의 번역관련해서 보면 현대에 쓰이는 Boy와 호환될 가능성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어린이들이 아니라 단순한 패거리로 해석되게 된다. [40] 400년대의 아우구스티누스도 문자주의적 해석을 경계했을 정도로 오래된 떡밥이다. [41] 아이들의 숫자가 3자리수가 아니라 2자리수, 42명에서 겨우 1명만 보탠 43명이라고 쳐도 혼자서 상대하기엔 너무나 많은 숫자다. 실제로 현대 한국에서도 초중생 양아치 무리가 성인을 집단폭행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걸 보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 [42] 다만 반대로 젊어서 탈모가 왔을 수도 있다(현대의 대한민국에서 탈모로 병원 찾는 환자의 절반 가까이가 20·30대라는걸 감안하면 가능성이 낮지는 않다). 엘리사는 요아스(예후의 손자)가 즉위하고 얼마 안 가 죽었는데 엘리야가 사망한 시기는 아직 아합 왕조 시절이었고 여호람 시기에 엘리사 이름이 나오고 그것도 초기인데 그럼 여호람 즉위시기인 BC 852년에서 요아스 즉위 시기인 798년까지 활약한 셈이다. 활동기간만 50년을 넘어가는데, 젊을 때 다 보내고 늙어서야 활동을 시작했다고 보기는 좀 무리. [43] 다만 성경에서 나오는 예언자의 경우에는 100세를 넘는 경우가 많긴 한다. 엘리사와 동시대에 살았던 예언자 여호야다도 130세까지 살았다고 나온다. 엘리사도 이 정도 살았다고 하면 가능하다. [44] Ελισσαίος / Elissaíos로 표기하기도 하며 칠십인역에서는 Ἐλισαιέ(Elisaié, 엘리세에)라는 표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45] 많은 라틴어 이름이 그러하듯이, 탈격으로 '엘리세오'라고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