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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8 17:14:38

나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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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시즌 프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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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나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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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승현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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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66.media.tumblr.com/tumblr_o72v3jpgxR1sqk8veo8_r2_500.png 2005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9번
김휘곤
(2005)
<colbgcolor=#000> 나승현
(2006~2008)
하준호
(2009~2011)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51번
코르테스
(2008.8.13.~2008)
나승현
(2009)
김휘곤
(2010)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2번
이용훈
(2009)
나승현
(2010)
장성우
(2011)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9번
김유신
(2012)
나승현
(2013~2015)
이경우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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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1e42><colcolor=#ffffff> 롯데 자이언츠 매니저
나승현
羅承賢 | Na Seunghyun
출생 1987년 4월 6일 ([age(1987-04-06)]세)
광주광역시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학력 송정동초 - 충장중 - 광주제일고 - ( 영남사이버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사우타
프로 입단 2006년 2차 1라운드 (전체 1번,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2006~2015)
프런트 롯데 자이언츠 스카우트 (2017~2023)
롯데 자이언츠 1군 매니저 (2024~)
병역 경찰 야구단 (2011~2012)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롯데 자이언츠 시절
2.2.1. 2006 시즌2.2.2. 2007~2008 시즌2.2.3. 2009 시즌2.2.4. 2010 시즌2.2.5. 경찰 야구단 시절2.2.6. 2013~2015 시즌
3. 프런트 경력4. 연도별 주요 성적5. 여담
5.1. 성씨5.2. 별명
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롯데 자이언츠 소속 우완 사이드암 투수이자, 現 롯데 자이언츠 1군 매니저.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광주일고 시절 뱀직구로 극찬을 받았던 초고교급 선수였다. 무등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2003, 2004),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2005)[1],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준우승(2004, 2005)을 경험했다.[2] 광주일고의 전성기를 이끌던 당시 최상위티어의 유망주로 평가 받았다.[3] 근데 이런 선수가 2차지명으로 흘러나온 건 같은 지역(광주), 같은 년도에 바로 한기주[4]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류현진도 연고 구단인 SK 와이번스 1차 지명을 받지 못한 상태였는데, 롯데 자이언츠 류현진과 나승현 사이에서 고민하다 수술전력이 있는데다 2차 지명 직전 봉황대기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인 류현진 대신 나승현을 지명했다.[5][6]

2.2. 롯데 자이언츠 시절

2.2.1. 2006 시즌

파일:external/lh6.googleusercontent.com/2006.gif
2006년 첫 세이브 때 던진 뱀직구. 프로 데뷔 첫 세이브 동영상

개막 후 두 달여 동안 고작 8⅔이닝만 소화할 정도로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롯데 팬들이 한화에서 포텐셜이 터진 류현진을 생각하며 뒷목을 잡게 만들었으나, 프로 데뷔 첫 세이브가 상당히 임팩트가 있었다. 2006년 5월 24일 KIA전 2:1로 앞선 9회초 무사1,2루에서 강병철 감독이 나승현을 등판시켰고, 선두타자인 김경언을 볼넷으로 출루시켜 무사만루를 만든 이후, 세 타자를 모두 범타로 요리하며 세이브를 따냈다. 그 다음날 경기에서도 9회초 아웃카운트 3개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며 이틀 연속 세이브.

그 이후 마무리로 고정되어 파죽지세로 세이브를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이 잠깐의 임팩트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당시 롯데 구단에서 팬들을 대상으로 나승현의 별명을 공모했고, 그 중에서 뽑힌 별명이 철벽 갈매기 # 그런데 이 별명을 달자마자 하락세를 타고 난타를 당하며 숯불 갈매기라고 까였다. 특히나 whip이 높았으며 삼진율이 낮아 세이브 상황에서 주자를 쌓고 불안불안하게 막는 경우가 대부분이 였다. [7] 고졸 신인이 마무리로 계속되는 등판을 하다가 체력이 바닥나 버린 탓.

물론 류현진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그래도 최종적으로 3패 16세이브, 평균자책점 3.48, WHIP 1.56의 성적을 거두면서 두 자릿수 세이브라는 성적을 올렸다.

그리고 이 성적은 나승현의 커리어 하이가 되었다.

2.2.2. 2007~2008 시즌

2년차인 2007년 시즌부터 마무리로 활약할 듯했으나, 2007 시즌은 카브레라, 2008 시즌은 임경완 최향남→코르테스, 2009 시즌은 존 애킨스가 마무리 투수를 맡으면서 나승현은 마무리 투수 자리에서 멀어졌다. 나승현 본인도 신인 시절의 좋았던 공을 던지지 못하며 1군에 안착하는 것조차 실패. 2008년에는 직구만으로 프로무대에서 버틴다는 뉘앙스의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게다가 몸 쪽 제구가 전혀 안 되었다.

사이드암 투수를 가르칠 수 있는 코치가 아무도 없는 롯데[8]에서 빨리 나와야지 포텐셜이 터질 거라는 신빙성 높은 이야기가 돌았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인 것이, 롯데를 나간 뒤 잠재력이 폭발한 선수들이 은근히 있기 때문. 대표적인 케이스가 이원석. 이재곤 역시 포텐이 터졌던 때는 경찰청 복무 시절이었다.[9]

2.2.3. 2009 시즌

2009 시즌에도 1군에는 포함되었지만, 이정민과 함께 중간계투의 추격조(패전처리조)로만 나왔다. 입단 동기이자 같은 사이드암 투수인 배장호한테도 완전히 밀렸다.[10] 팬들은 언젠간 포텐셜을 폭발시키리라 정처도 없이 그저 믿으면서 한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2009 시즌 8월 15일 경기에서 선발인 손민한이 야수진의 꼴데야구와, 본인 구위의 급격한 하락으로 내려가자,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이후 8회까지 1실점하면서 틀어막는 대단한 저력을 보여줬다. 130km/h 중후반에 머물던 구속도 평균 140km/h 초반대에서 잘 나오면 최고 147km/h 까지 나오는 등 보는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드디어 포텐셜 폭발인가' 싶었지만 현실은 유일한 변화구인 슬라이더는 거의 다 제구가 영 불펜 투수라도 최소 2피치는 있어야 프로에서 살아남을까 말까 하는데...

2009 시즌은 22경기 30⅔이닝 4패 , 평균자책점 5.28, WHIP 1.60을 기록했다.

2.2.4. 2010 시즌

2군 감독에서 투수코치로 올라온 양상문이 투구폼에 손을 대면서 더욱 안 좋아졌다. 스트라이드 폭을 줄이면서 하체를 거의 활용하지 않는 상체 위주의 투구로 바뀌었는데[11], 어깨는 제대로 안 돌아나오고 턱이 들리며 공이 완전히 붕 떠서 맞아 나갔다.

2009 시즌에는 패전처리로나마 경기에 출장하였으나, 2010 시즌에서는 아예 2군에서도 올라오지 못하였다.

2010 시즌 4월 10일 경기에서 20.25라는 아름다운 평균자책점을 찍고 그 이후에는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9월 5일 1점차이로 삼성에게 끌려가던 경기에서 뜬금없이 등판해 1이닝 7자책점을 기록하며 미친듯이 난타당했다.

팬들은 욕하면서도, 2006년 뒷문을 잠깐이라도 지켰던 시절의 모습을 그리워했다.

2010년 7월 20일 황재균 김민성+ 김수화 트레이드 때 넥갤에서 김수화 대신 나승현을 달라고 했었고, 실제 종종 트레이드 카드로 거론되기도 했던 걸 보면, 이 때까지만 해도 나승현의 고교 시절 성적을 떠올리며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많았던 듯하다.[12]

2010 시즌 정규시즌 기록은 2경기 2⅓이닝 0승 0패 ERA 38.57 WHIP 6.00. 결국 시즌 종료 후 경찰청에 입대했다.

2.2.5. 경찰 야구단 시절

2011년 초반에 경찰청 2군 경기에 잠깐 나왔다가 7.5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버로우, 8월 말경부터 다시 출전하였다.

2011년 9월 6일 기준으로 2군 10경기 1세이브 1홀드 11⅓이닝 1볼넷 9탈삼진 WHIP 1.24 피안타율 .283. 여기까지 보면 뭔가 그럴싸해 보였지만, 평균자책점이 무려 6.35에 달했다.

2012년에도 주로 마무리 투수로 나왔다.

2012 시즌 퓨처스리그 최종 성적은 44경기 3승 5패 17세이브 3홀드 35사사구 61탈삼진 그리고 평균자책점 5.26을 기록하였다. 세이브는 북부리그 1위이자 NC 다이노스 김진성에 이어서 2군 전체 2위지만, 역시 평균자책점이 문제였는데, 시즌 중반부터 대량 실점하는 경기가 많아진 것이 평균자책점 상승 원인으로 보였다.

2.2.6. 2013~2015 시즌

2012년 9월에 제대하고 롯데 자이언츠 2군 훈련에 합류하였다.

2013년에 1군으로 올라온 적이 없다 보니, 문서 수정이 2014년 1월에 됐다.

2014년 7월 9일 기준으로 2군에서 20경기 동안 20이닝을 소화해 1패 2홀드 평균자책점 7.65를 기록하고 있다. 탈삼진이 16개인데 사사구가 11개인 걸로 봐서 여전히 문제는 제구인 듯.

5년 간 사귀었던 연인과 2014년 12월 결혼했다. 팬들은 결혼했으니 이제 잘 좀 하라며, 문규현과 같이 긍정적인 반등을 하기를 조심스레 기대하고 있다.

2015년 7월 23일 기준으로 2군 17경기에 나와 23⅓이닝을 소화해서 1승 2패 1홀드 평균자책점 8.87을 기록하고 있다. 탈삼진이 14개인데, 사사구가 15개로 2군에서조차 사사구가 탈삼진을 넘어서면서 제구가 나아지기는 커녕 더욱 안 좋아지고 있다. 피안타도 33개로 매우 많은 편. 결국 평균자책점 9.91을 찍고 6월 7일 두산 2군과의 경기를 끝으로 3군으로 내려갔으며, 2군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결국 2015 시즌 후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어 롯데에서 방출당했다. 2군에서조차도 버티기 힘들 정도의 성적도 있지만, 내년에 30세가 되면서 더 이상 기다리기 어렵다는 판단인 듯하다.

국제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잦은 투구 폼 변경으로 인해 부진이 길어졌다고 한다. 후에 2017년 1월달에 진행한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 #에서 잦은 투구폼 변경이 몰락의 원인이었다고 다시 한 번 인증했다. 이리저리 투구폼을 바꿔가면서 본인의 좋았던 시절의 폼마저 잃어버린 일을 크게 후회한다고.

3. 프런트 경력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롯데 자이언츠의 티볼 순회코치[13]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고 가끔 GIANTS TV에 객원해설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2017년 2월 육성팀 스카우트로 합류했다.

류거나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프로 입단 후 부산에서 계속 살다보니 광주광역시 출신임에도 동남 방언이 짙게 배어있다. #

이후 2022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롯데 스카우터로 오랜만에 팬들에게 얼굴을 비췄다.

2023년 11월에 부임한 박준혁 신임 단장 선임에 맞춘 인사이동에서 1군 매니저로 영전한 것이 알려졌다. 나중에 기사에 의하면 역량 강화라는 명목으로 주요 부서에 선수 출신 직원들을 배치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한다. #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출장 이닝 ERA ERA+ FIP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WHIP sWAR
2006 롯데 51 54⅓ 0 3 16 0 3.48 100.8 3.46 55 2 34 33 1.56 1.17
2007 26 42 1 2 0 0 4.07 94.0 4.57 37 3 32 31 1.48 0.48
2008 33 42 0 3 0 0 4.93 81.7 4.08 41 2 21 25 1.36 0.50
2009 22 30⅔ 0 4 0 0 5.28 90.7 3.61 38 2 14 23 1.60 0.49
2010 2 2⅓ 0 0 0 0 38.57 12.0 16.57 12 2 3 2 6.00 -0.29
2011 군 복무( 경찰 야구단)
2012
2013 1군 기록 없음
2014
2015
<rowcolor=#373a3c> KBO 통산
(5시즌)
134 171⅓ 1 12 16 0 4.78 86.5 4.09 183 11 104 114 1.56 2.35

5. 여담

5.1. 성씨

참고로 실제 성은 ' 라씨'라고 한다. 그래서 원래는 라씨로 하는게 맞지만 우리나라 행정상 공문서에 라씨를 나씨로 기록하던 관례로 학교 다닐 때부터 성인된 이후까지 나씨로 계속 등록되어 와서 본인도 그냥 나씨로 살았다고 한다. 2007년 법이 개정되어 대법원이 호적예규 변경을 통해 두음법칙을 적용하는 성씨(姓)에 예외를 둠에 따라 '라'씨로 정정신청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신청한 사람들이 있지만, 행정상 복잡한 부분도 있고 하기에 대부분의 라씨들이 안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이걸 한 사람이 류현진 류지현으로 류현진의 경우 데뷔 직후에는 "유현진"[14]이라고 언론에 보도되었었는데, 신인때 정정신청을 해 류현진이 된 케이스고 류지현의 경우 현역시절부터 코치시절까지만 해도 유지현으로 살았으나 정정신청으로 2020년 7월자로 류지현이 된 케이스이다.

5.2. 별명

류현진 대신 뽑았다고 해서 "류거나"라는 별칭이 있다. 그 전에 1차 지명에서 SK 와이번스도 류현진을 걸렀지만, 그나마 어쨌든 1군에서 오랫동안 활약한 이재원에 비해서도 나승현의 커리어는 압도적으로 부실하기 때문에 류거이보단 류거나가 훨씬 유명하다.[15] 자세한 내용이나 비슷한 케이스에 대해서는 김거김 항목 참조.

6. 관련 문서



[1] 결승전 맞대결팀은 임치영, 이범준, 김혁민, 빡코 등이 있던 성남서고였다. [2] 당시 나승현의 동료가 강정호였다. 강정호는 투수로도 51이닝 평균자책점 1.06의 성적을 찍었지만, 팀 내에 나승현의 140km/h대 강속구를 받을 선수가 없다는 이유로 주로 포수로 활약했다. 이 때문에 신인 지명도 포수로 받았다. [3] 2005년 그가 고3때 광주일고는 투수였던 그와 포수 강정호, 유격수 김성현까지 3명 모두를 청소년 국가대표로 배출하는 명예로운 기록을 세웠다. 대부분 한 학교에 한명이 들어가면 명예로 여기며, 2명도 극히 드물다. 물론 광주일고가 천안북일고와 함께 고교야구를 양분하던 2002년 당시 아시아 청소년대표팀에 광주일고생이 5명(김대우, 고우석, 이창석, 서정, 김주호)이 선발되기도 했다. [4] 당시 한기주는 바로 프로로 뛰어도 10승은 충분하다고 평가받았다. 메이저리그 구단들도 엄청나게 달라붙었고 결국 KBO 역사상 최고액이라는 10억 원의 계약금을 받고 1차 지명으로 입단한다. 여담으로 한기주는 저 평가가 그대로 적중해 너덜너덜한 팔꿈치 상태를 안고 프로 입단 첫해에 3점대 방어율과 10승을 기록한다. [5] 사실 결과론적으로 망픽 소리를 들어서 그렇지 고등학교 3학년 성적도 류현진(51.2이닝, ERA 2.25)보다 나승현(98이닝, ERA 0.83)이 더욱 좋았다. 특히나 드래프트 지명직전 봉황대기에서 방어율 1.04, 26.1이닝 동안 탈삼진 32개 WHIP 0.62의 모습을 보여 류현진으로 지명이 유력했으나 당시 스카우터 윤동배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선회하게 되었다. [6] 2006 드래프트는 류현진, 강정호, 차우찬, 이재원, 황재균, 양의지, 민병헌 등이 쏟아진 그야말로 역대급 연도였다. 또한 지명되지는 못했지만 김현수가 신고선수로 입단한 연도이기도 하다. [7] 다행히 피홈런이 적어 방어율은 폭등하지 않았다. [8] 2007년 기준 1군 투수코치는 박동수 성준, 2군 투수코치는 초임이었던 윤형배였다. 2008시즌은 박동수가 나가고 페르난도 아로요가 부임한다. [9] 경찰청에 복무하던 같은 사이드암 투수 신용운의 권유로 싱커를 배우기로 작심하고 신용운, 손승락의 투구를 보고 연구와 노력을 거듭한 끝에 체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0년 이재곤의 싱커는 리그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품이었다. 일개 현역 투수가 아무리 지도에 자질이 있더라도 전문적인 코치들만큼 해주기는 힘든 법일 텐데, 이런 자원을 1년 동안 알아보지도 못한 롯데 코치진은 까여야 마땅하다. [10] 심지어 배장호보다 지명 순위도 더 높았다. [11] 양상문이 투수코치 시절에 주로 이런 유형의 투구폼 수정을 많이 단행했다. 또한 포심과 슬라이더를 주력으로 삼는다. 이 스타일의 정점을 찍은 투수는 정작 양상문과 큰 연관이 없는 박명환. [12] 사실 김수화 쪽의 상태가 더 안 좋았다. 고교시절 혹사로 인해 제대로 된 공을 던질 수 없었고, 계약금만 5억 3천만원 + @를 받았음에도 프로에서는 미미한 활약을 했는데, 상무 시절을 빼고 6년간 23경기 나와서 7점대 평균자책점을 올린 것이 전부. 김수화가 6시즌간 1군에서 보여준 성적이 나승현의 2006년 1시즌 성적 보다도 못 하다. [13] 지역 초등학교 순회를 다니면서 티볼( 이광환 감독이 말한 그것) 교육을 주로 담당한다고 한다. 김민호와 함께 활동한다고 한다. [14] 심지어 그의 싸이월드도 유현진이라고 되어 있었다. [15] 사실 SK나 롯데의 선택이 나쁜 건 아니었다. SK는 당시 35살로 당시 기준으로는 길어야 5년이었던 박경완의 후임자 문제가 절실했기 때문에 포수 최대어를 놓칠 수 없는 처지였고, 롯데 입장에서도 2차 랭킹 1위를 거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롯데는 이왕기가 전년도 나름 활약했기 때문에 사이드암에 대한 매력이 컸던 상황도 봐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