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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17:32:50

나스노 요이치

那須 与一
생몰년도 미상

1. 소개2. 생애3. 대중문화 속의 요이치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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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명궁.

한국에서 동명성왕 혹은 이성계를, 중국에서는 양유기 이광을, 영국에서는 로빈 후드를, 몽골 제국에서는 제베를 신궁의 상징으로 쓰는 것처럼 일본에서 명궁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활 잘 쏘는 궁병을 가리켜 일본 게임이나 만화 등에서는 "마치 나스노 요이치 같다"고 칭송할 정도.

2. 생애

요이치(与一)란 '하나가 남는다'는 뜻으로, 요이치가 11번째 자식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야시마 전투에서의 일화로 유명하다. 야시마 전투에서 헤이케의 홍군은 배를 타고 상륙을 시도했지만,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이끄는 백군의 분전으로 인해 홍군은 상륙을 위해 타고 왔던 배까지 후퇴하게 된다. 이후 미나모토의 백군은 해변에 진을 치고, 헤이케의 홍군은 배를 타고 근해에 진을 친 상태에서 양군은 대치하게 된다. 이때 헤이케 측에서 방년의 소녀 한 명을 태운 배가 한 척 접근해 온다. 한껏 치장을 한 소녀는 장대를 하나 달고 있었는데, 그 장대 끝에는 홍군 사령관의 부채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쏴서 맞출 수 있으면 맞춰보라는 듯 백군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요시츠네는 도발에 맞대응하기 위해 용맹으로 유명하던 부장인 하타케야마 시게타다[1]에게 "저 부채를 활로 쏴 맞혀라. 맞히지 못하면 겐지의 망신이다"라고 했는데, 시게타다는 못 하겠다며 부하인 나스노 쥬로에게, 쥬로는 다시 부상을 이유로 자기 동생인 날아가는 새 3마리 중 최소한 2마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맞춘다는 명궁으로 알려진 나스노 요이치를 부른다. 나스노 요이치는 말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 해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바다 위에서 흔들리는 배 위에 있는 소녀가 들고 있는 장대 위의 부채를 8단[2] 거리에서 나무 하치만 대보살(南無八幡大菩薩)[3]을 외치며 쏘았는데 그게 맞았다. 이 광경을 보고 백군 뿐이 아니라 홍군에서도 감탄의 목소리가 터져나왔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서인지 배부터 한명의 노(老)무사가 갑판으로 뛰어 올라와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를 보며 양쪽 군 모두 웃음바다가 되었는데, 이를 본 눈치 없는 새끼 요시츠네는 저 춤꾼도 쏘아 죽이라고 명령했으며 나스노 요이치는 그 명령을 받아 춤을 추고 있던 무사 또한 한 방에 맞춰 죽였다.[4] 문서 상단의 우키요에는 이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5]

야시마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영토까지 하사받지만, 요시츠네의 실각 이후 불도에 입문한다. 이후 24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3. 대중문화 속의 요이치

파일:那須与一.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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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 일러스트


[1] 畠山重忠, 생몰 1164~1205. 특히 괴력으로 유명했다. 《겐페이 성쇠기》에서는 시게타다가 이치노타니의 기습 때 명마를 다치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말을 들어올려 짊어지고 절벽을 뛰어내려갔다는 기록이 있다(우키요에 등에서 흔히 보이는 소재). 훗날 요리토모 사후에 호조 가문과 다투다가 살해당했다. 징기스칸 4 게임에서도 우수한 무장으로 나와 해당 게임을 해본 사람들에게는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2] 1단은 6간, 1간은 6척, 1척은 10촌, 1촌은 3.03㎝다. 즉, 8단은 87.264m의 거리다. [3] 일본에서 전통적으로 무가의 수호신 내지 군신으로 여겨졌던 하치만 신이 불교에 습합되면서 불교의 호칭인 대보살이라는 칭호를 얻어 '하치만 대보살'이라고 불리게 된 것. [4] 이를 보고 홍군의 분위기가 싸해짐은 물론이고 백군에서도 저런 냉정한 짓을 하다니 분명히 후환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고 때문인지 이후 활을 쏜 나스노 요이치도, 그에게 쏠 것을 명령한 요시츠네도 몇 년 못 가 젊은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5] 일본에서는 한국의 주몽 설화급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화인지라 오래 전부터 그림의 소재가 되어왔고 그만큼 그린 사람도 많다. 위 그림은 요슈 치카노부(楊洲周延)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