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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07:36:27

뤼크 위르뱅 드 부엑식

기솅 백작에서 넘어옴


1. 개요2. 군경력3. 평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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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 Urbain de Bouëxic, comte de Guichen (1712년 6월 21일 ~ 1790년 1월 13일)

18세기 프랑스 해군에서 복무한 제독으로 프랑스 해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제독 중 한 명이다. 일반적으로 기솅 백작으로 알려져있다. 기솅 백작과 버금가는 유명세를 보유한 제독으로는 쉬프랑 제독과 데스탱 후작 정도가 있는데, 쉬프랑은 프랑스 제독답지않은 공격적인 전술로 이름이 높은 제독이었고 데스탱 후작은 그 자신의 용병술 자체가 크게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반면 기솅 백작은 방어전의 귀재로 평가받았으나, 그 특성상 극적인 승리는 보여주지 못했다.

2. 군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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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에 해군에 입대한 이래로 승진은 빠른편이 아니었으나 서인도제도 등지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으며 내부 평가는 좋은편에 속하여 승진 자체에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대표적인 해전으로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우샨트 해전과 마르트니크 해전이 있다. 우샨트 해전에서는 90문함 라 빌 드 파리 (La Ville de Paris) 를 타고 참전하여 기함의 후방을 방어해내었고 마르트니크 해전에서는 함대의 제독으로써 영국 왕립해군의 조지 로드니 경을 상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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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니크 근해에서 4월 17일, 5월 15, 19일에 걸쳐 세번의 교전이 벌어졌으며 이것을 통틀어 프랑스 전사에서는 ‘기솅 백작 세번의 전투’ [1] 라고 부른다. 4월 17일에 벌어진 첫번째 교전에서는 풍하의 위치에서 교전하며 로드니의 전술 돌파전술에 효율적으로 대응했으나 그당시에 전열을 자주 변경하며 대응하는 상황에다 파도가 높고 거친 날씨 때문에 숙련된 프랑스 해군의 함대운용에도 불가항력으로 전열에 빈틈이 생겼고 이것을 발견한 로드니 제독에 의해 전열이 돌파당할뻔 했으나 프랑수아-조세프 뽈 함장의 재빠른 상황 판단력과 기동 덕분에 돌파하려던 로드니 제독의 기함인 98문함 샌드위치호를 프랑수아 함장의 전열함이 스스로의 판단력으로 선체로 막으면서 전열돌파를 막는데 성공하고 다른 함장들도 능동적으로 전열함을 움직여 전열의 간격을 막으면서 전열돌파를 막는 동시에 전열을 완벽히 복구하는데 성공하여 패배로 이어지는것을 막을수 있었으며 이후에도 조금더 교전하다 영국함대에서 돌파에 계속 실패하고 물러났다. 이로 인해 기솅 함대의 본래 목적이던 자메이카 점령은 사실상 실패하게 되었지만 영국해군은 전열함들의 피해가 심해서 수리를 해야해서 교전을 더 못하고 물나난 것이다. 프랑스 함대는 당시에 배의 손상은 괜찮았지만 수병의 피해가 더 많았다고 한다. 드 기솅 백작은 로드디 제독의 영국함대와 마주치자 보통 교전을 회피하는 대부분의 프랑스 해군제독들과 다르게 이러한 전투는 피한다고 피할수 있는게 아니어서 차라리 함대의 전열을 견고하게 구성하고 방어해서 적을 격퇴시키는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방어전 전문가 였지만 전투를 쉽게 피하는 성격은 아닌 지휘관이었다.
당시 드 기셍백작이 승리한 이유는 당시의 프랑스 수병들이 훈련경험이 많아 능력이 우수한데다 적 함대의 전열돌파 시도에 따른 대응 지침서를 모든 함장들에게 주고 날마다 확실히 인식하게 철저히 교육시킨것이 이유였다. 프랑스 전열함의 배의 크기의 우세함이야 당연했고. 참고로 프랑스의 80문급 2단층 전열함과 영국의 98문 전열함의 크기는 길이나 무게를 비교하면 실제로 비슷했다고 한다. 화력은 영국제 98문 함이 앞서지만 거친 바다의 항행성능이나 배의 내구력과 거주공간은 프랑스의 80문급 전열함이 앞섰으며 18파운드 이상의 대형함포 탑재 비율은 프랑스가 60여문 정도로 약간 앞섰고 실제 탑승가능한 최대병력도 비슷했다. (영국 98문함 18파운드 포와 32파운드포를 합쳐 50문 중후반대 탑재, 프랑스 80문함 24파운드와 36파운드포를 합쳐서 60문 초반대 탑재.)

뒤이은 5월 15, 19일의 교전에서는 드 기솅백작이 아예 풍상을 점유하고 완벽에 가까운 방어기동을 선보여 로드니가 어떠한 제대로 된 공격 기회도 잡을수 없게 만들었는데 이때의 기동은 전열 전술에서의 방어적인 운용의 정수를 보여주었다고 할수 있다. 7월부터 시작되는 허리케인 시즌이 시작되자 유럽으로 귀환하여 서인도제도에서의 작전은 끝을 맺게 된다. 유럽에서는 스페인 무적함대와 프랑스 해군의 연합 함대를 지휘하여 지브롤터 봉쇄와 다시 한번 서인도제도로의 증원 임무를 받았으나 둘 모두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군사 경력을 끝마치게 된다.

3. 평가

이렇게 성과만을 놓고 본다면 왜 고평가를 받는지 의아할수도 있는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기솅 백작 부분의 저자 데이비드 해네이 (David Hannay) 에 따르면 큰 성과가 없어보일지라도 기솅 백작이 서인도제도에서 활동할 동안 영국해군이 프랑스령 식민지에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군재를 알수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프랑스 해군과 영국 해군의 교전사를 보면 승리는 고사하고 이렇게 기솅 백작처럼 완벽하게 영국 해군을 방어해내는 경우가 아주 찾기 힘들다는 점을 볼때 그의 능력은 아주 뛰어나다고 볼수 있다.

특히 당시는 전열 파괴 전술의 태동기라고도 볼수가 있는데 기솅 백작이 그런 놀라운 성과를 올린 상대는 평범한 제독도 아닌 그러한 전술의 선구자격이며 그 자체로도 뛰어난 제독이었던 로드니였다. 참고로 로드니는 개인적으로 낭비벽이 심했던 인물인데 영국해군에서는 그당시 절정에 달해있던 프랑스 해군의 역량을 상대하기위해 로드니의 빛을 탕감해가면서까지 제독으로 서인도제도로 파견했던 것이다. 로드니의 후배이자 전열파괴전술을 사실상 완성시킨 넬슨이 이끈 영국해군과 빌뇌브 제독이 이끈 프랑스해군의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기솅 백작의 고평가는 쉽게 이해가 된다. 기솅 백작의 이러한 활약은 전열파괴전술이 제대로 훈련된 해군 함대를 상대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특이한점으로 동시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솅 백작은 과학적 지식이 굉장히 풍부했다고 하며 실제로 퇴역후에 벤저민 프랭클린이 설립한 미국 철학 협회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의 정회원으로 인정받았다.[2] 그야말로 귀족적인 해군 장교의 정점이라고 볼수 있는 인물이다.
[1] 직역은 기솅씨의 3번의 전투이다. [2] 당시에는 철학과 과학 사이의 구분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보기에 과학적인 학문을 그 당시에는 '자연철학'이라고 불렀다. 철학의 분과학문인 셈. 현대적 의미에서의 과학은 뉴튼 이후에 발달한 것으로 보며 뉴턴 그 자신도 스스로를 과학자로 생각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