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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14:25:02

기리영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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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영 전투
崎離營戰鬪
시기 246년 8월 이후[1]
장소 대방군 기리영[2]
원인 낙랑군의 분할 통치에 대한 신분활국의 반발
교전국
마한[3]
주요 인물
부종사 오림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
신분활국 신지
병력 불명 불명
피해규모 불명 불명
결과 신분활국 멸망, 마한의 임진강·북한강 상류 영향력 소멸
낙랑군의 약화
영향 백제의 급성장

1. 개요2. 배경3. 주체는 어디인가4. 경과5. 결과6. 영향7. 관련 기록

[clearfix]

1. 개요

246년, 위나라에서 보낸 부종사 오림이 진한 8국의 땅을 떼어내어 낙랑군에 속하게 했으나, 통역하는 자가 이를 잘못 전하자[4] 마한의 어느 소국에서 반발해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위나라에서는 대방군, 낙랑군이 연합해 마한을 공격했다.

2. 배경

삼국시대의 혼란으로 중국 본국의 한사군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자 237~239년 명제 조예는 태수들을 파견해서 과거 공손씨 동연의 영토였던 낙랑군 대방군을 평정하고, 주변 한(韓) 세력에 회유책을 펼쳤다.

246년 8월, 위나라의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과 함께 고구려 공격에 나선 사이에 낙랑군의 관리였던 부종사 오림은 그때까지 마한을 거쳐 무역해오던 진한 8국을 따로 떼어 낙랑군과 직교역하게 하려고 했다. 이는 진한의 환심을 사고 마한도 견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위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통역에 차질이 생겨서[5] 임진강 유역 마한 소국들을 격분하게 하였다. 사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통역을 제대로 했어도 마한에서 분노할 이유는 많았다. 그때까지 독점 무역 창구로 기능하던 마한의 권위와 영향력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진한을 마한과 동급으로 대우하겠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중국계 유민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마한이었기에 마한보다 문화 수준이 발달했으며 중국에 더 우호적이었던 진한[6]에게 이와 같은 대우하는 것은 위나라에게는 적합한 조치일지 모르나, 경제적인 기득권을 침해당하는 마한 소국들에겐 화가 나는 처사였다.

3. 주체는 어디인가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한 그 한(韓)이 한의 소국 중 어느 나라인지는 다소 논란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이왕 낙랑군을 공격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전통적으로 기리영 전투를 해당 기사와 연관지어 백제의 고이왕을 전투의 주체로 비정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근대 사학자들은 백제가 온조왕 시절부터 마한을 병합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3세기 당시 목지국 진왕이 한(韓) 연맹체를 주도했다는 《 삼국지》의 기록이나 고고학적 연구 결과와 상충하는 점에 주목하여, 백제의 낙랑군 공격과 기리영 전투를 분리해서 보기 시작했다. 특히 《삼국사기》의 낙랑군 공격은 큰 무력 충돌 없이 무마된 반면, 《삼국지》의 기리영 전투는 교전 끝에 한(韓)을 '멸하는' 것으로 끝났기에 분명한 차이가 있기도 하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당시 삼한 연맹체를 주도한 목지국의 진왕을 기리영 전투의 주체인 것으로 지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삼국지》의 기리영 전투 기사 중 "신지가 격분하고 한인들이 분노하여(臣智激韓忿)"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실은 명나라 이후의 판본에서 잘못 교감된 것이며, 《통지(通志)》에 인용된 보다 오래된 판본에서는 "신분고한이 분노하여(臣濆沽韓憤)"로 기록됐다는 점이 지적되면서 기리영 전투의 주체를 신분활국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명나라 이후의 판본에서 교감된 구절이 문맥과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신분활국은 백제국이 있는 서울보다도 북쪽에 자리하여[7] 황해도 지방의 대방군과 교전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신분활국이 삼한 일부를 주도할 만한 세력이었다고 볼 근거가 마땅치 않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이에 신분활국을 기리영 전투의 주체로 보는 측에서는 《삼국지》에서 삼한의 신지(臣智)[8]에게 주어진 특별한 칭호의 예시인 "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 대목에서 '분신(濆臣)'은 '신분(臣濆)'의 잘못된 도치라는 논거를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신분활국의 신지는 '이아불례(離兒不例) 신지' 혹은 '아불례 신지'로 목지국의 진왕과 함께 삼한 연맹체를 주도하는 유력자였으며, 신분활국이 마한 북부에서 위나라 낙랑군 대방군 연합군에 맞설 만한 세력을 이끌 수 있었던 이유가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하지만 신분활국 주체설을 지지하는 견해임에도 해당 대목을 '신분(臣濆)'의 도치로 확정지을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9] 도치설에 기반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그럼에도 판본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유효한 반론이 제기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기리영 전투의 주체를 목지국이나 백제로 보는 최근의 견해들도 기리영 전투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신분활국의 상당한 역할이 있었음을 대체로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4. 경과

부종사 오림의 조치에 격분한 어느 한(韓)의 신지 또는 신분활국이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이 전투는 일개 소국이 혼자서 대방군에게 도전했다기보다는, 마한 전체를 끌어들여 결전을 벌인 것일 가능성이 높다. 고고학적으로 이 시기에 마한 전역의 무기 생산량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대방태수 궁준은 낙랑태수 유무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이에 대응했다. 그 결과 궁준이 전사했으나,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韓)을 격퇴했다. 《삼국지》에는 2군(郡)이 한을 멸했다고 나오기에, 이를 단순히 적군을 격퇴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기리영 전투를 주도하던 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246년 당시에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는 옥저 방면으로 진군하여 고구려를 공격 중이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고이왕이 이 해 음력 8월에 두 태수가 임지를 비운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경을 습격했다고 전한다. 앞서 살펴봤듯 기리영 전투의 주체를 고이왕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기리영 전투가 고이왕의 낙랑군 공격과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던 것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어쨌든 당시 백제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침공을 두려워하여 낙랑군에서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내 낙랑군과 화친했다고 하므로 침공을 당하진 않았다.

5. 결과

이 전투로 인해 신분활국은 멸망하거나 그 세력이 크게 꺾이게 되었고, 위나라의 국력을 체감한 임진강 및 북한강 상류 일대의 마한 구성국들이 모두 한군현에게 복속하는 바람에[10] 마한 맹주국인 목지국의 영향력은 임진강과 북한강 일대에서 완전히 없어졌다. 종전에는 마한의 영향력이 황해도 남부까지 미쳐 대방군과 갈등을 빚었고 강원도 서부와 경기도 동부도 마한의 영역이었으나, 이 전투로 인해 이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모두 잃은 것은 물론 백제국을 포함한 나머지 경기도 지역 소국들 앞에서도 얼굴을 들 수 없게 된 것이다.[11]

그러나 승전국인 위나라도 마침 계속되는 전쟁으로 요동 지역의 역량이 쇠락하고 있던 터라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12], 대방태수 궁준이 전사한 것은 물론이요, 이후 위나라 한군현에 충성을 맹세했던 마한 북부의 소국들이 백제국의 영토 확장에 휩쓸리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아주지 못하게 되었다.[13] 오히려 제대로 된 고대 국가로 성장한 백제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던 정황이 나타난다.

그러나 어쨌든 위나라는 마한과 다투던 외교적 쟁점을 전부 위나라 입장에만 유리하도록 일방적으로 관철시키긴 하였으며, 이때 대등해진 진한과 마한 사이 처우는 훗날 신라보다 먼저 강성해진 백제조차 결코 뒤집지는 못했다. 고로 소위 말하는 '피로스의 승리'로는 보기 어렵다. 피로스의 경우 전투에서 이기긴 이겼으돼 당대 로마와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계 도시국가들 현안에서 결국 로마측 입장만 관철되게 하였으니 피로스의 승리인 반면, 이 경우는 위나라가 전쟁에서 일단 이겨서 한동안은 원하는 걸 모두 이뤘기에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물론 위나라가 비류수 전투에서처럼 깔끔한 완승을 거두지는 못하고 상당한 소모를 거친 승리를 하였기에 훗날 백제의 위나라 및 목지국 모두에 대한 어부지리를 초래하게 되지만, 그건 한세대에 걸쳐 진행되는 긴 얘긴지라 기리영 전투의 의의를 저평가하는 데까지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6. 영향

신분고국의 멸망으로 한강 이북을 차지하게 된 백제국은 이때를 기점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여, 반 세기도 지나지 않아 기존 마한보다 응집력 있는 고대 국가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과정에서 한군현에게 복속한 옛 마한 소국들은 대부분 백제국의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목지국 또한 옛 제후에게 하극상을 당하면서 마한의 맹주 자격을 부정당하게 된다. 일종의 어부지리인 셈이다.

한편 한군현이 마한을 거치지 않고 진한과 직접 교역하게 되면서 진한의 성장에도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후 3세기 중후반 한반도 정치체와의 교섭에서 진한이 직접 서진에 조공하는 기사가 《 진서》에 자주 등장한다. 백제가 마한의 주도권을 차지했다지만, 종전의 목지국과 달리 중국과의 외교에 있어 진한보다 우위에 서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14]

7. 관련 기록

경초 연간(237~239)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해서 바다를 건너가 2군을 평정하도록 했으며, 여러 한국의 신지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했고, 그 다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그 풍속에 옷 입고 책(幘) 쓰기를 좋아하여, 하호들도 군에 이르러 조알하면서 옷과 책을 빌려서, 스스로 인수와 옷과 책을 갖춰 입은 자가 1,000여 명이었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본래 낙랑이 한국을 통치해왔다며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고 했는데, 통역사가 말을 다르게 전하자 신지가 격분하고 한인들이 분노하여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벌했는데, 궁준이 전사했으나 2군은 마침내 한을 멸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

정시 6년(245년)에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領) 동쪽의 예(濊)가 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했는데, 불내후(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예조

고이왕 13년(246년) 가을 8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貫丘儉)이 낙랑태수 유무, 삭방태수 왕준[15]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오게 했다.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했다. 왕이 침공을 받을까 걱정하여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정시 7년(246년)에 유주자사 관구검 고구려를 토벌했다. 여름 5월에 예맥을 토벌하여 모두 격파했다. 한나해(韓那奚) 등 수십 국이 각기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삼국지》 〈위지〉 제왕기

《삼국지》와 《 삼국사기》의 기록 모두 낙랑태수 유무를 언급한다. 또한 대방태수 궁준과 삭방태수 왕준은 동일인으로 추정되며, 삭방태수 왕준 쪽이 오기로 여겨진다. 낙랑태수 유무의 공통된 등장으로 인하여 네 기록은 크게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1] 정확히 언제 있었던 일인지는 기록에 없으나, 대방태수 궁준이 245년 동예 공격(《삼국지》 기록) 및 246년 고구려 공격(《삼국사기》 기록) 때는 살아 있었고, 현도태수를 맡고 있던 왕기(王頎)가 247년 시점에 대방태수로 등장하기에 궁준의 후임자로 여겨진다. 따라서 기리영 전투의 발생 연도는 대체로 《삼국사기》에서 고이왕이 낙랑군을 공격한 시점인 246년 8월 무렵으로 본다. [2] 위치는 지금의 황해도 평산군 인산면 기린리 일대로 추정된다. ( 이병도, 「三韓問題의 新考察 4-辰國及三韓考」, 『震檀學報』 5, 1936, p.116.) [3] 정확히 어떤 소국이 위나라를 먼저 공격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적으로는 신분활국이었을 것으로 비정되는 추세이다. [4] 진한과의 외교를 대방군(마한, 진한, 변한, 왜) 대신 낙랑군(동예, 진한)이 담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정까지 간섭해, 아예 삼한에서 진한을 분리해 동예와 함께 통치한다고 전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5] 직교역이 아닌, 그동안 마한을 상국으로 대접하던 진한을 낙랑군한테 넘기라는 식으로 전했을 수도 있겠다. [6] 목지국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고고학적으로 무덤의 철제 부장품류가 동시대 마한보다 더 많이 출토된다. 《 삼국지》와 《 후한서》 기록 상으로는 진한이 일찍이 중국과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마치 중국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7] 신분활국은 《삼국지》 동이전의 마한 소국 목록에서 백제국보다도 앞서 언급되는데, 이 소국들의 위치는 대체로 뒤로 갈수록 남쪽으로 비정된다. [8] 《삼국지》에 따르면 진왕(辰王) 예하의 거수(渠帥)들 가운데 세력이 큰 자를 '신지'로 불렀다고 한다. [9] 尹龍九, 1999, 「三韓의 對中交涉과 그 性格」, 『國史館論叢』 第85輯. [10] 한국군사사 1권 참조. 이후 경기도의 남은 마한 소국들을 모두 병합하고 충청도 일대까지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입한 백제에게 4세기 초반까지 끝까지 항거하게 되는 ' 말갈'이 바로 이들이다. [11]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 중 온조왕이 대놓고 마한왕을 업신여기기 시작하는 부분은 기리영 전투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12] 요동군의 쇠퇴는 과거 위나라의 사마의가 요동에 있던 공손씨 동연을 멸망시킨 뒤 그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주시키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관구검 고구려 원정에서 위나라가 요동이 아닌 낙랑과 대방의 군사를 동원했던 것이 이 때문이다. 후일 사마의의 후예인 진무제가 옛 동연이 있던 곳을 유주에서 나누어서 평주와 동이교위를 설치하고,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부여를 지원하며 동방을 부흥시키려는 정책을 펼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13] 그러나 한군현 측이 이 사태를 아예 방관하고만 있던 것은 아니다. 한군현은 간혹 임진강과 강원도 서부의 마한 및 동예계 세력( 위말갈)을 지원하며 백제를 공격하도록 부추겼고, 이로 인해 298년에 책계왕이 전사하기도 했다. 기리영 전투 때처럼 대대적인 군사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14] 이 시기에는 한반도 남부의 신미국 역시 백제의 마한 맹주 자격을 부정하면서 독자적으로 마한왕 행세를 한 데다가, 충북 일대의 목지국 지지 세력이 백제에 저항하고 있었으니 애초에 백제의 마한왕 위치도 견고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사료가 부족하여 확실하지는 않으나 진한 사로국의 왕 또한 백제국 거수를 마한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 백제의 마한 맹주 자격에 대해서는 적어도 369년 근초고왕 침미다례 정벌 전까지는 마한 내부에서도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15] 대방태수 궁준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