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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7:30:23

관도대전

관도 전투에서 넘어옴
삼국지의 3대 대전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

파일:Battle of Guandu.jpg
<colcolor=#000> 관도 전투
官渡之戰
시기 200년 2월 ~ 200년 10월
장소 허난성 정저우시 중무현
원인 조조의 협천자(挾天子) 이후, 원소와의 관계 악화
교전 원소군 조조군
황제 황제 유협
지휘관 대장군 원소 사공 조조
장수 고람
곽도
문추
수원진
순우경
안량
여위황
왕마
원담
유비[1]
장합
저수
조예
하무
한거자
한순
가후
곽가
관우[2]
사환
서황
선우보
순욱
순유
악진
우금
유연
장료
장수
조인
조홍
허저
하후연[3]
병력 약 10만 명 약 4~5만 명
피해 약 7~8만 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조조군의 승리 및 원소군의 대남 공세 약화
영향 원소 병사(病死) 및 원소세력 분열

1. 개요2. 배경
2.1. 개전 당시 원소군과 조조군의 투입 병력
3. 199년의 상황
3.1. 수고 격파3.2. 유비의 배반
4. 원소의 남하
4.1. 우금의 활약4.2. 백마 전투4.3. 연진 전투4.4. 관도 전투4.5. 오소 습격4.6. 원소의 패주
5. 관도대전 이후6. 평가
6.1. 원소는 왜 패배했나6.2. 원소는 왜 관도대전을 일으켰나6.3. 전풍과 저수를 무시해 진 전투인가?6.4. 오로지 허유의 배신 때문에 진 것인가?6.5. 천하의 대세가 완전히 판가름 났는가?6.6. 원소는 책임이 없는가?
7. 삼국지연의에서8.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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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기 중원의 거대 군벌 조조 원소의 전쟁이다.

관도대전은 조조가 숙적이던 원소를 격파하고 삼국시대 최강의 세력으로 자리잡게 된 결전이었다. 관도대전의 패배로 원소가 바로 망하진 않았지만 조조가 대세를 굳히는데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후한 말 숨어지내던 전국의 인재들이 허창으로 모여들면서 조조의 패권이 시작됐다.

관도대전은 오소 습격으로 대표되는 관도전투 전후로 크고 굵직굵직한 전투가 여럿 배치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일부 호사가들은 이 전투를 관도대전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관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역이라는 의미의 관도 전역 또는 연주 전역이라고 부르는게 맞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관도대전 이후부터 적벽대전 직전까지를 조조의 최전성기로 보는 경우가 대다수일 정도로 삼국지 초반 판도를 형성한 전역이다.

2. 배경

199년, 원소는 마침내 역경루에서 농성중이던 공손찬을 섬멸하고 후방의 북방을 평정하며 유주를 차지했고 남쪽으로 내려올 준비를 마친다. 그한편 조조는 196년부터 198년까지 3년간 원술을 재기불능으로 만들고 여포 세력을 섬멸한다.

조조 세력과 맞닿아 있는 세력은 원소 외에도 강동의 손책과 형주의 유표, 유표에게 위탁하고 있는 신야의 유비, 한중의 장로, 서량의 마등, 익주의 유장이 있었으나 당장의 위협은 아니었다.

당시 원소 세력은 공손찬을 평정한 후로 기주, 유주, 병주, 청주의 4개 주를 차지하고 있게 되었다. 조조 세력은 연주와 서주, 예주, 사례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하북 4주에 세력을 갖고 있었던 원소의 경우엔 훗날 조조의 아들 조비가 원소에 대해 인정할 정도로 매우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전국의 4개 주를 차지했으며 원씨 가문이 삼공대신의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대업을 이루기 위해 남진을 위해서는 조조가 있는 연,서,예주, 사례를 지나야 되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원소가 하북 4주를 얻었다고 한들, 과연 관도대전 직전 당시 조조보다 세력비로 압살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유주 역경루의 공손찬을 제압한 후라 군사 조직에 관해 훈련 능력에 대한 의문점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 보통 병합을 한 주의 군사들은 통합 훈련성에 약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원소가 동쪽으로는 청주, 서쪽으로는 병주의 지배권을 주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거기에 유주까지 손에 넣어 3년 동안 역경루에 포위당하며 지배력을 잃은 공손찬을 격파해서 하북 평원의 명목상의 지배권을 장악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유주의 원소 세력권은 탁, 광양, 어양, 우북평에만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 대부분은 지방 세력가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유주의 동쪽 지역은 동연이 장악하고 있었고 선우보 염유 같은 이들 역시 조조 측에 기울기 시작했다. 병주의 상황도 마찬가지여서, 병주의 경우 조조와 직접적인 연관은 별로 없지만 애당초 인구가 매우 적은 변경 지역이기도 했고, 원소가 태행산의 흑산적 집단들 다수를 격파하고 조카 고간을 병주자사로 임명하긴 했지만 병주 전역을 평정한 것은 아니었다. 흑산적의 지도자이자 공손찬의 동맹 장연은 살아남아 상산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청주 또한 원담이 전해와 공융을 축출했으나 지배 영역이 해안가로 한정된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조조 측 군벌인 장패가 공세를 취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조의 세력에 비하면 원소 세력은 확실한 군사조직이 아니었다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당시는 중앙 정부를 장악한 조조와 개부의동삼사로 별도의 막부 자격을 얻은 원소 사이에 청주의 지방군벌에 대한 경쟁적인 회유전이 벌어지던 상황이었는데 장광태수 하기에 의해 관승이 회유되는 상황이 원소에겐 결코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반면 조조는 연주 지역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으며, 예주와 사례 지역은 후한의 중심지로 상당한 성세를 과시했다. 게다가 예전에 황제를 끼고 권력을 장악했던 이각, 곽사, 장양이 부하들의 배신들로 피살되거나 잔당들이 토벌되어서 세력권에 들어갔으며, 서주까지 여포 세력을 정벌하면서 자신에게 위협적인 세력을 중원의 핵심 지역에서 모두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4] 즉, 원소의 기주를 제외한 하북이나 조조의 중원이나 전쟁으로 황폐해진 것은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조조는 협천자의 이점을 끼고 원소를 압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만 조조가 차지한 중원지역 땅들은 원소가 차지한 하북 이상으로 심각하게 전란의 피해를 겪은 지역이었다. 특히 장안 근처 삼보 지역은 이각과 곽사가 벌인 삼보의 난으로 초토화되었고, 낙양 또한 동탁이 파괴한 이후 재건되지 않았으며, 서주는 조조가 193~194년에 초토화하면서 큰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잠재력은 충분했으나 관도대전 기준으로는 회복하는데 시간이 상당히 필요했던 것. 예주의 경우 원씨의 고향인 여남군에서 원소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조조 역시 완벽히 장악한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결론을 종합해 보면 관도대전 당시 원소의 세력은 관도대전 전후의 기록에 명시된 것에 비해서는 압도적으로 조조의 세력을 압도하던 상황은 아니었다. 원소의 세력은 기주를 확실히 지배하는 것 이상으로 크게 확장되지는 못했고, 북중국의 패권을 원소가 확실히 잡았다고 보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던 상황이었다.이런 상황에서 조조는 협천자의 이점을 이용해 그를 향해 직접적, 간접적 양면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원소 입장에서도 이런 상황을 보고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원소의 동맹이었던 형주 자사 유표는 형주 남부 4군인 형남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사태수 장선을 몇 년째 상대하고 있었고, 그의 장수 황조는 동쪽에서 유강구를 비롯한 강하성 일대에서 강동 장강 하류의 손책과 싸우고 있었으며 유표의 끄나풀인 장수 누규는 조조에게 귀부하는 등 유표는 조조의 협천자 여파로 세력이 쪼개져서 이를 수습하고 평정하는데도 바빴다. 물론 유표가 이걸 수습하고 다시 광대한 세력을 구축하긴 했지만, 그땐 이미 관도대전이 끝난 이후였다. 즉, 후방 교란의 임무는 유표가 아니라 오로지 유비에게만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원소의 관도대전 개시는 약한 적을 상대로 한 공세라기보다는 자신과 대적할 만한 만만치 않은 적을 상대로 한 적극적인 공세였고, 협천자의 이점을 낀 조조가 충분히 세력을 불리고 안정화 하기 이전에 적의 심장부를 치려는 시도로 봐야 한다. 이를 위해 원소는 조조가 당장 상대하기 힘든 거대한 군대를 모았는데, 애초에 청주를 맡고 있어야야 할 원담이 그와 동행했다는 것 자체가 원소가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다 모았음을 시사한다. 자신의 옛 본거지인 예주와 여남군, 천자가 있는 허현을 공격하기 위해 위해 사용된 패가 그의 장수들이 아니라 독립적인 세력인 유비와 유벽이라는 것은 조조를 상대하는 주 공세에서 병력을 많이 빼낼 여유가 없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당연히 관도대전 개시 당시 기준으로 조조가 원소에 비해 유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후방의 유표와 손책의 위협이 있었고, 근본적으로 사방이 잠재적인 적으로 에워쌓인 상태여서 전력을 동원할수 없었다. 장수와 마등을 포섭해서 그나마 관서과 형주 방면의 위협을 줄이긴 했지만 병력 배치는 분산 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조의 세력권이 후한의 중심지이긴 했지만 상당수의 영토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상태여서 군사동원력, 보급 면에서 원소에게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에 비해 원소는 북방의 이민족들을 포섭하여 배후의 위협을 줄이고, 오히려 오환족 등의 기마민족을 자신의 군사력으로까지 활용하고 있었다. 천자로 인해 명분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조조 측의 이점이긴 했지만, 원소가 격문을 돌려 조조를 "황실을 능멸하는 역적"으로 규정한 시점과 조조에 의한 동승 이하 700명의 대숙청사건이 절묘히 겹쳤다. 이 동승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유비를 원소가 영입했기 때문에 오히려 원소의 명분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한 마디로 원소나 조조나 관도대전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상황임에는 매한가지였다.

2.1. 개전 당시 원소군과 조조군의 투입 병력

직접적인 투입 병력은 사서상으로는 10만 대 1만으로 조조군은 원소군과 10배 이상의 병력차가 있었다. 하지만 배송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에 대해 길게 반박했는데, 아무리 봐도 1만은 구라라는 게 정설이다. 배송지의 지적으로는 조조가 처음 군을 일으켰을 때 이미 군사 5천이 있었고 청주의 황건적을 100만을 얻고 항복해 온 병졸만 30여만이었다고 지적한다.

물론 최근의 연구결과론 이 황건적으로 구성된 청주병의 숫자는 그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숫자였음에는 분명하지만 그래도 수만 명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배송지는 그 외에도 조조가 수없이 적과의 싸움에서 이겨나가면서 병탄한 것은 일일이 기재하지 못할 정도라고 지적한다. 비록 정벌전에서 손상된 군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처럼 적은 숫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둔영을 연결해 대치하는 것은 적의 예봉을 꺾고 결전하는 것과는 다른 것인데 원소가 수십 리에 걸쳐 영채를 구축하며 조조군을 둘러싸려 하자 똑같은 방법으로 맞섰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주 압도적인 열세는 아니었고 그런 군사가 심히 적을 수 없다는 것을 첫 번째 이유로 제시한다. 또한 원소에게 만약 10배의 군사가 있었다면 이치상 조조는 전력을 기울여 수비하며 출입을 단절해야 했겠지만, 조조는 서황 등을 보내 원소군의 군량운반 수레를 공격케 했고 조조 역시 또한 친히 출전하여 순우경 등을 공격하고 돌아오는데 원소의 역량으로 이를 저지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런 군사가 심히 적을 수 없다는 것을 두 번째 이유로 제시한다. 거기에 여러 책에서 이르길 조조에게 죽은 원소의 군사가 8만 또는 7만이라고 하는데. 8만 명이나 흩어져 달아나는데, 이들을 수천 명으로 능히 포박할 수는 없는데 원소의 대군이 모두 순순히 죽임을 당했으니 어떤 역량으로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단 말이냐며 그런 군사가 심히 적을 수 없다는 것을 세 번째 이유로 제시한다.

배송지의 결론은 원소와 조조의 병력차는 과장되었으며 조조의 병력은 적은 숫자를 적어 조조의 성과를 과장한 것이지 실제에 부합하는 기록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원소군이 10만이었다면 조조군은 4~5만 정도 되었다는 추측이 많다. 그리고 무제기에 나온 1만 명의 병사들과 3할에 가까운 부상병들의 기록은 조조가 동원한 병력 전체가 아니라 일단 진영을 늘여 대치하다가 회전의 패배로 관도로 밀렸을 때 당시의 전황을 얘기하는 것으로 관도에 고립되어 농성 중인 병사들만을 칭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배송지의 지적은 확실히 타당하지만 일단 병력이 축소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열에 두셋의 부상병이라는 비율은 전투의 패배와 같은 큰 타격을 받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수치인 만큼 그만큼 조조군이 극단에 몰렸단 묘사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삼국지 만화에서는 70만 대 40만으로 조조군까지 대폭 뻥튀기시키기도 한다.

원소군의 병력 수에 대한 소수 의견으로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위진세어에서는 당시 원소군이 보병 5만에 기병 8천으로 도합 5만 8천이었다고 비교적 적은 규모로 기록하고 있는데[5], 손성은 이를 반박했고 주를 단 배송지는 손성의 반박 내용까지 같이 실으면서 개인적인 의견은 피했는데, 조조군 1만설과 마찬가지로 아주 신빙성있게 본 것 같진 않다. 여하간 조조군보다 원소군의 숫자가 많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고, 게다가 조조로서는 그 상대가 황건적같은 오합지졸이 아니라 자기가 항상 경계했던 원소였기에 심리적으로 더더욱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3. 199년의 상황

4년(199년) 봄 2월, 공(公)이 환군해 창읍(昌邑-연주 산양군 창읍현)에 이르렀다. 장양(張楊)의 장수 양추(楊醜)가 장양을 죽이자 수고(眭固)가 양추를 죽이고는 그 무리들을 이끌고 원소에 붙어 사견(射犬-하내군 야왕현 일대)에 주둔했다.

여름 4월, 진군하여 황하에 임하고, 사환(史渙), 조인(曹仁)에게 황하를 건너 이를 공격하도록 했다. 수고는 장양의 옛 장사(長史) 설홍(薛洪), 하내태수 무상(繆尙)을 남겨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원소를 영접하며 구원을 청하려 했다. 사환, 조인과 견성(犬城)에서 서로 조우해 교전하니 수고군을 대파하고 수고를 참수했다. 마침내 공(公)이 황하를 건너 사견(射犬)을 포위했다. 설홍, 무상이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자 열후에 봉하고 오창(敖倉)으로 환군했다. 위충(魏种)을 하내태수로 삼아 하북(河北)의 일을 맡겼다.

이때 원소는 공손찬을 병합하여 4개 주를 차지하고 군사는 10여 만으로, 장차 진군하여 허도를 공격하려 했다. 제장들이 원소를 대적할 수 없다고 하자 공이 말했다,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소. 뜻은 크나 지략이 부족하고 겉으로 사나운 척 하나 담력이 약하오. 질투심이 많고 각박해 위엄이 적고, 병사는 많으나 분획(分畫-부서와 임무의 구분)이 불분명하고, 장수들은 교만하여 정령(政令)이 통일되어 있지 않소. 비록 토지가 광대하고 양식이 풍족하나 오히려 우리에게 바치게 될 것이오.”

가을 8월, 공이 여양(黎陽)으로 진군하여, 장패 등에게 청주로 들어가 제(齊), 북해(北海), 동안(東安)을 격파하게 하고 우금을 남겨 황하 가에 주둔시켰다.

9월, 공이 허도로 돌아오면서 군을 나누어 관도(官渡)를 지키게 했다.

겨울 11월, 장수(張繡)가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자 열후에 봉했다.

12월, 공이 관도에 주둔했다.

원술은 진(陳) 에서 패한 이후로 점차 곤궁해지자 원담(袁譚)이 청주(靑州)에서 사람을 보내 그를 맞이했다. 원술이 하비를 통해 북쪽으로 가려 하자 공이 유비(劉備), 주령(朱靈)을 보내 이를 요격하게 했다. 때마침 원술이 병으로 죽었다. 정욱, 곽가가 공(公)이 유비를 보냈다는 말을 듣고 공에게 말했다, “유비를 놓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이에 공이 후회하고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유비는 동쪽으로 가기 전에 은밀히 동승(董承) 등과 함께 모반했었는데 하비에 도착하자 마침내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이고 거병(擧兵)해 패(沛)에 주둔했다. 유대(劉岱), 왕충(王忠)을 보내 이를 공격케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5년(200년) 봄 정월, 동승(董承) 등의 모의가 누설되어 모두 복주(伏誅-형벌을 받아 주살됨)되었다.

공이 장차 친히 동쪽으로 유비를 치려 하자 제장들이 모두 말했다,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원소입니다. 지금 원소가 바야흐로 쳐들어오려 하는데 이를 내버려두고 동쪽으로 가시려 하니, 원소가 이를 틈타 우리 배후를 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공이 말했다, “무릇 유비는 인걸(人傑)이니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필시 후환이 될 것이오.

원소는 비록 뜻은 크지만 사세를 살피는 일에 더디니 필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곽가 또한 공에게 권하자 마침내 동쪽으로 유비를 쳐서 깨뜨리고 유비의 장수 하후박(夏侯博)을 사로잡았다.

유비는 원소에게로 달아났고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유비의 장수 관우는 하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다시 진격하여 공격하니 관우가 투항했다. 창희(昌豨)도 유비 편에 서서 모반했었으므로 또한 이를 공파(攻破)했다. 공이 관도(官渡)로 돌아왔고, 원소는 끝내 출병하지 않았다.
『삼국지』 「무제기」
건안 4년(199년) 봄 3월, 원소(袁紹)가 역경(易京)에서 공손찬(公孫瓚)을 공격해 그를 붙잡았다.

위장군(衞將軍) 동승(董承)이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다.

여름 6월, 원술(袁術)이 죽었다.

건안 5년(200년) 봄 정월, 거기장군(車騎將軍) 동승(董承), 편장군(偏將軍) 왕복(王服), 월기교위(越騎校尉) 충집(种輯)이 조조(曹操)를 주살하라는 밀조(密詔)를 받았으나 일이 누설되었다. 임오일(9일), 조조가 동승(董承) 등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후한서』 「효헌제기」

3.1. 수고 격파

별도로 사환(史渙), 조인(曹仁)과 함께, 사견(射犬-하내군 야왕현 일대)에서 수고(眭固)를 공격해 깨뜨리고 그를 참수했다.
「우금전」
그때 장양은 그의 장수 양추(楊醜)에게 피살되었으며, 장양의 장사(長史) 설홍(薛洪)과 하내태수(河內太守) 무상(繆尙)은 성을 굳게 지키고 원소의 구원을 기다렸다. 태조는 동소로 하여금 홀로 성안으로 들어가게끔 설홍과 유상을 설득하게 하니, 바로 그날에 무리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따라서 태조는 동소를 기주목(冀州牧)으로 삼았다.
「동소전」
장양의 대장 양추(楊醜)가 장양을 살해하고 조조에게 호응했지만, 장양의 장수 수고(眭固)는 양추를 살해해고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북방의 원소와 합류하려고 했다. 조조는 사환(史渙)을 파견하여 맞아 싸웠으며, 견성(犬城)에서 이들을 격파시키고 수고를 참수하였으며, 그의 군대를 모두 거두어들였다.
「장양전」

199년 2월, 장양의 부하인 양추가 장양을 죽이고 조조에 호응하려 했다. 하지만 또다른 장양의 부하인 수고(휴고)가 양추를 죽이고, 원소에게 호응하기 위해 사견에 주둔한다. 이에 조조는 수고를 정벌하고자 했다.

3월, 원소는 마침내 공손찬이 농성 중이던 역경을 무너뜨렸다.

4월, 조조는 진군하여 황하에 도착하고 조인, 사환, 우금 등을 보내 사견을 공략했다. 수고를 죽이는데 성공한 후, 조조는 동소를 보내 설홍 무상을 설득했고, 설홍과 무상은 결국 항복한다.

원소는 공손찬을 무너뜨린 이후임에도 자기에게 우호적인 수고를 구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태조가 처음 원소를 정벌할 때 원소의 병력이 강성했으나 우금은 선봉이 되기를 자원했다. 태조가 이를 장하게 여기고 보졸 2천 명을 주어 이끌게 했다. 우금은 연진(延津-황하 나루터. 진류군 산조현 북쪽)을 지키며 원소와 맞섰고 태조는 군을 이끌고 관도(官渡)로 돌아갔다.
「우금전」

가을, 조조는 우금을 연진에 주둔시키고 관도로 돌아갔다. 한편 청주에서는 장패가 제(齊), 북해(北海), 동안(東安)을 공격하였는데, 이 덕분에 조조는 청주 방면은 전혀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3.2. 유비의 배반

원술이 서주를 지나 북쪽으로 원소에게 가려고 하자, 조공은 선주를 보내 주령(朱靈), 노초(路招)를 이끌고 원술을 요격(要擊)하게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원술이 병으로 죽었다.

(중략)

선주가 하비를 점거하고, 주령 등은 되돌아왔다. 이에 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이고, 관우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왔다.

동해(東海)의 창패(昌霸)가 모반하고 군현들 다수가 조공(曹公)을 배반하고 선주 편에 서니 그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손건(孫乾)을 보내 원소와 연화(連和-연결하여 화친함)했다. 조공이 유대(劉岱), 왕충(王忠)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건안 5년(200년), 조공이 동쪽으로 선주를 정벌하자 선주가 패적(敗績-대패)했다.

「위서」에서 이르길, 이 무렵, 공(公-조조)은 바야흐로 관도(官渡)에 위급한 일이 있어 제장들을 나누어 관도에 주둔시키고, 친히 정병(精兵)을 이끌고 유비를 정벌했다. 당초 유비는 공(公)이 대적(大敵)과 연접해 있으므로 동쪽으로 오지 못하리라 여겼는데, 후기(候騎-척후기병)가 갑자기 와서 조공이 친히 왔다고 말했다. 유비는 크게 놀라면서도 이를 믿지 않았다. 친히 수십 기를 이끌고 나가 공의 군대를 살펴보다가, 휘정(麾旌-대장기)을 보자 이내 군사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조공은 그 군사들을 모두 거두고 선주의 처자를 붙잡고, 아울러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선주는 청주(靑州)로 달아났다. 청주자사 원담(袁譚)은 선주의 옛 무재(茂才)였기에 보기(步騎-보병과 기병)를 이끌고 선주를 맞이했다. 선주는 원담을 따라 평원에 도착했고 원담은 급히 사자를 보내 원소에게 고했다. 원소는 장수를 보내 도로에서 봉영(奉迎-영접)하고 자신은 업(鄴)에서 2백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선주와 서로 만났다.

「위서」에서 이르길, 유비가 원소에 귀부하자 원소 부자(父子)가 마음을 기울여(傾心) 공경하고 중히 대했다.

한 달 남짓 지나자 흩어져 달아났던 사졸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선주전」
유비가 유대 등에게 말했다,

“설령 너희 같은 자 백 명이 온다 한들 나를 어찌 대적하겠느냐. 조공(曹公)이 직접 온다면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제기 주석에서 인용된 『헌제춘추』
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습격해 죽이고, 관우에게 하비성(下邳城)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행하도록 하고(行太守事) 자신은 소패(小沛)로 돌아갔다.

「위서」魏書 - 관우에게 서주(徐州)를 다스리도록 했다

건안 5년(200년), 조공(曹公-조조)이 동쪽을 치자 선주는 원소(袁紹)에게로 달아났다. 조공은 관우를 사로잡고 돌아와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매우 두텁게 예우했다.
「관우전」

한편 원술을 잡기 위해 보낸 유비가 배반하여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서주를 점거했다. 『후한서』에 의하면 원술이 죽은 것은 6월이라 하니 그쯤에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조조는 유대 왕충을 보내 유비를 공격하지만 유비에게 패배했다. 해가 바뀐 200년 정월, 조조는 직접 유비를 정벌한다. 유비는 본인은 소패에 머물면서 관우로 하여금 하비를 지키게 하지만 본인은 패주하여 원담에게 의탁했고 관우는 조조에게 항복했다.
유비가 서주(徐州)를 들어 모반하자 태조가 동정(東征)했다. 원소가 우금을 공격했는데 우금이 견수(堅守)해 함락시킬 수 없었다.
「우금전」

무제기에는 원소가 침공하지 않았다고 하나 우금전에서는 원소가 우금을 공격했다고 한다. 무제기에서 조조의 안목을 칭찬하기 위해 적당히 왜곡했거나, 아니면 전면적인 공격이 아니기 때문에 원소가 공격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조조가 유비를 정벌하는 와중에도 원소는 본격적으로 남하하지 않았다.

다만 우금전의 기록은 시기가 명확하지 않은데, 우금이 이때 연진에 머무르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문추와 조조가 맞붙은 연진 전투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원소전」에는 원소의 자식이 아파서 유비를 구원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휘하 장수가 구원할 수 있는데 유비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은

1. 유비가 너무 빨리 패했다.
2. 별장을 보내 우금을 공격한 것이다.
3. 원소는 유비를 구원할 생각이 없었다.
4. 원소의 우유부단함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6]

넷 중 하나로 보인다.

4. 원소의 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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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우금의 활약

또한 악진 등과 함께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5천을 이끌고 원소의 별영(別營)을 들이치고, 연진 남서쪽으로부터 황하를 따라 급(汲-하내군 급현), 획가(獲嘉-하내군 획가현)의 2현에 이르기까지 보취(保聚) 30여 둔(屯)을 불사르고 적군을 참수하고 사로잡은 것이 각각 수 천에 이르렀고, 원소의 장수 하무(何茂), 왕마(王摩) 등 20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태조는 다시 우금을 보내 별도로 군을 이끌고 원무(原武-하남군 원무현)에 주둔시켰는데, 두씨진(杜氏津)에 있던 원소의 별영(別營)을 격파했다. 비장군(裨將軍)으로 올렸다.
「우금전」

유비를 정벌하고 돌아온 후[7], 조조는 오히려 우금 악진을 보내 황하 서쪽의 급현, 획가현 일대를 공격하여 30여 둔을 불사르고 장수 하무, 왕마 등 20여명의 항복을 받았으며, 우금은 별도로 원무에 주둔하며 두씨진에 있던 원소의 별영을 격파했다. 다만 200년 정월에 유비를 공격했다가 돌아오고 2월부터 원소는 백마를 공격했는데 그 사이 시간이 촉박하다.

우금전의 기록은 우금이 연진에서 원소군을 막은 후 원소군을 공격했다고 하는데, 이때 연진에서 벌어진 전투가 문추가 죽은 전투라고 한다면 이 기록은 4월에서 8월까지 벌어진 일이 된다. 조조는 백마/연진에서 원소군의 예기를 꺾은 후 바로 관도까지 후퇴했는데, 이 시기에 우금과 악진을 보내 하내를 정리한 것이다.

그러면 악진과 우금이 하내를 공략한 시점은 세가지 경우가 있다.

1. 정월과 2월 사이에 한 일이다.[8]

2. 조조가 백마를 구원하는 시점이 4월이므로 2월과 4월 사이에 하내를 정리한 것이다.

3. 연진 전투와 관도 전투 사이에 하내를 정리한 것이다.

유비 정벌과 관도 전투 사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시점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4.2. 백마 전투

2월, 원소는 곽도(郭圖), 순우경(淳于瓊), 안량(顔良)을 보내 백마(白馬)에서 동군태수 유연(劉延)을 공격하고, 원소 자신은 군을 이끌고 여양(黎陽)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려 했다.

여름 4월, 공이 북쪽으로 가서 유연을 구원했다. 순유(荀攸)가 공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군사가 적어 대적할 수 없으므로 적의 세력이 분산되도록 해야 합니다. 공께서 연진(延津)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 원소군의 배후로 향하는 것처럼 하면 원소는 필시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할 것입니다. 그 연후에 경병(輕兵-경무장병)으로 백마(白馬)를 기습하여 엄기불비(掩其不備-적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엄습함)하면 가히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공이 이 말에 따랐다.

원소는 (공의) 군사들이 도하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즉시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하게 했다. 그러자 공은 군을 이끌고 급히 진군하여 백마로 나아갔다. 10여 리 떨어진 곳에 채 이르지 않았을 때 안량이 크게 놀라 (군을 이끌고) 와서 맞서 싸웠다. 장료(張遼), 관우(關羽)를 선봉에 세워 이를 격파하고 안량을 참수했다. 마침내 백마에 대한 포위를 풀고 그 백성들을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옮겼다.
「무제기」

200년 2월, 마침내 원소가 남하를 시작하며, 우선 곽도, 순우경, 안량을 보내 동군태수 유연이 지키고 있는 백마를 공격했다. 원소 본인은 아직 황하를 건너지 않고 여양에 남아있었다.

이 때 저수가 간언한다.
안량의 성품이 급하고 좁아, 비록 용맹하다 하더라도 혼자 맡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9]

한편 이 시점으로 보이는 정욱의 일화가 있다.
원소는 여양(黎陽)에 있으면서 장차 남쪽으로 하수를 건너려 했다. 이 때 정욱은 7백 병사를 가지고 견성(鄄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태조가 이를 듣고 사람을 시켜 정욱에게 병사 2천을 더 보내주려 한다고 알렸다.

정욱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말하길

"원소가 10만 병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가 향해오는 앞에는 어떤 (막고 있는) 것도 없습니다. 지금 제 병력이 적다는 것을 보고서는 가벼이 여기고 공격하러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제게 병력을 더 늘려 늘려준다면 지나면서 어쩔 수 없이 공격할 것이고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니, 도리어 양쪽(태조와 자신)에서 그 세력을 손해보는 셈이니 원컨대 공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라 했다. 태조가 이 말을 따랐다. 원소가 정욱의 병력이 적다는 것을 듣고 과연 거기로 가지 않았다. 태조가 가후(賈詡)에게 일러 말하길

"정욱의 담력(膽力)은 맹분(孟賁)과 하육(夏育)보다 뛰어나오."
「정욱전」

조조는 4월이 되어서야 백마를 구원하는데, 이때 순유가 계책 하나를 내놓는다. 연진에서 도하하여 원소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경무장병으로 안량을 공격하자는 것. 조조는 그 말을 받아들여 군사를 나눠서 연진 쪽으로 돌리고, 원소는 순유의 예상대로 연진 쪽을 보강했다. 조조는 그 사이 빠르게 백마로 진군했다.

10리 정도 거리에 이르렀을 때 안량이 깜짝 놀라 군사를 이끌고 맞서 싸웠으나 장료, 관우가 선봉이 되어 격파했고 마침내 안량을 참수했다. 안량을 죽고 백마의 포위가 풀리자, 조조는 주민들을 서쪽으로 옮기며 물러났다.

관우전의 묘사는 다음과 같다.
원소가 대장(大將) 안량(顔良)을 보내 동군(東郡)태수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은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先鋒)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병거에 달린 대장기 덮개)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刺)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諸將) 중 당해 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이 공을 이유로 조조는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했다.

4.3. 연진 전투

이에 원소는 황하를 건너 공의 군대를 추격하여 연진(延津) 남쪽에 이르렀다. 공은 군을 이끌고 남쪽 둑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시켜 망루에 올라 살펴보게 하니 ‘가히 5-6백기는 된다.’고 보고했다. 얼마 후 다시 ‘기병은 점점 많아지고 보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공이 말하길, “다시 보고하지 마라”고 하고는 기병들에게 영을 내려 말안장을 벗기고 말을 풀어놓게 했다. 이때 백마에서 치중(輜重)이 길을 떠났다. 제장들은 적의 기병이 많으니 돌아가 둔영을 보전하는 게 낫다고 하였다. 순유가 말했다,

“이는 적을 유인하려는 것인데 어찌 되돌아간다는 말이오!”

원소의 기장(騎將) 문추(文醜)는 유비와 함께 5-6천 기를 이끌고 앞뒤로 이르렀다. 제장들이 다시 말하길,

“말에 올라야 합니다.”

고 하자 공은

“아직 아니오.”

라 했다. 얼마 후 기병이 점차 많아지고 혹 나뉘어져 치중으로 향했다. 공이 말했다,

“이제 되었소.”

이에 모두 말에 올라탔다. 이때 기병이 6백을 채우지 못했으나 마침내 군사를 풀어 공격하여 원소군을 대파하고 문추를 참수했다. 안량, 문추는 원소의 명장이었으나 두 번 싸워 모두 죽임을 당하니 원소군이 크게 진동했다.
「무제기」
이에 원소가 하수를 건너니 연진(延津)의 남쪽에 진영을 쌓았다.

원소가 유비(劉備)와 문추(文醜)를 시켜 도전하게 했다. 조조가 이들을 또 격파하고 문추를 참수했으며, 다시 싸워서 원소군의 대장을 사로잡았다. 원소군이 크게 놀랬다.
『후한서』 「원소열전」

조조가 주민들을 이주시킬 때 원소는 황하를 건너 연진 남쪽에 진영을 쌓았다. 도하 거점이 만들어지자, 원소는 유비 문추를 보내 조조를 공격했다.

원소군의 추격 소식을 듣고 여러 장수들은 적의 기병이 많으므로 돌아가서 둔영을 지키자고 했다. 하지만 순유는 오히려 적을 사로잡을 수 있는 계책이라 말하고, 조조 역시 순유의 말을 따랐다.

순유의 예상대로 원소군이 치중 쪽으로 향했다. 조조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군사를 출동시켜 원소군을 대파하니, 문추는 사망했고 원소군의 대장을 사로잡았다.

4.4. 관도 전투

공은 관도(官渡)로 돌아와 주둔하고, 원소는 진군해 양무(陽武-하남군 양무현)를 지켰다. 관우가 달아나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8월, 원소가 둔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해 모래언덕에 의지해 둔영을 세웠는데 동서로 수 십리에 이르렀다. 공 또한 둔영을 나누어 서로 대치하고 합전(合戰-맞붙어 싸움)했으나 불리했다.

원소가 다시 진격해 관도(官渡)에 임하여 토산(土山)을 세우고 땅굴을 팠다. 공 또한 안에서 이를 만들어 서로 대응했다. 원소가 둔영 안으로 활을 쏘니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다닐 때는 모두 방패를 덮어써야 했고 군사들은 크게 두려워했다.

이때 공의 군량이 적어 순욱(荀彧)에게 서신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는 일을 의논했다. 순욱이 말했다,

“원소는 모든 군을 관도에 집결시켜 공과 더불어 승패를 결정하고자 합니다. 공은 지극히 약한 것으로 지극히 약한 것을 감당해야 하는데, 만약 이를 능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필시 저들이 이를 틈탈 것이니 이는 천하를 가름하는 관건입니다. 게다가 원소는 포의지웅(布衣之雄-평범한 사내)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일에는 능하나 그들을 제대로 쓰지는 못합니다. 무릇 공께서는 신무명철(神武明哲)을 지니고 대순(大順)으로 보좌하는데,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공이 이 말에 따랐다.

여남의 항복한 적 유벽(劉辟) 등이 모반하여 원소에 호응하고 허도 주변을 공략했다. 원소가 유비를 도내 유벽을 돕게 하자 공이 조인(曹仁)을 보내 이를 격파했다. 유비는 달아났고 마침내 유벽의 둔영을 깨뜨렸다.

원소의 군량운반 수레 수천 승이 도착하자 공(公) 은 순유(荀攸)의 계책을 써서 서황(徐晃), 사환(史渙)을 보내 이를 요격해 대파하고 수레를 모두 불태웠다.
「무제기」
허유(許攸)가 원소를 설득하며 말했다,

“공께서는 조조와 서로 공격하지 마십시오. 급히 제군(諸軍)을 나누어 대치하게 하고, 곧바로 다른 길을 따라 천자를 영접한다면 대사를 이룰 것입니다.”

원소가 이에 따르지 않으며 말했다,

“나는 응당 먼저 그를 포위한 뒤에 취해야 하오”

이에 허유가 분노했다.
무제기 주석에서 인용된 「한진춘추」
태조가 관도로 돌아왔다. 저수가 또 말하길

“북쪽엔 병사의 수효가 많아서 과단성있고 날랜 것은 남쪽에 미치지 못하고, 남쪽에 양곡이 비고 적어서 재화로는 북쪽에 미치지 못합니다. 남쪽의 이로움은 급히 결전하는데 있고, 북쪽의 이로움은 천천히 취하는 것에 있습니다 마땅히 천천히 지구전을 펼쳐 날로 달로 시간을 소비하십시오”

라 했으나 원소가 따르지 않았다. 연이은 군영이 점차 진전하여 관도에까지 닥쳐왔다가 합전(合戰)하게 되니, 태조군이 불리하였으나, 군영을 회복하였다.

원소가 높은 망루(高櫓)를 만들고 토산(土山)을 일으켜, (조조군의) 진영 속으로 활을 쏘니 진영에서는 모두 방패로 덮고서는 다들 크게 두려워했다. 태조가 이에 발석거(發石車)를 만들어 원소의 누각을 공격하니 모두 격파되고, 원소군에서는 이를 벽력거(霹靂車)라 불렀다.

원소가 땅굴(地道)를 만들어 태조의 진영을 습격하여 했다. 태조가 번번이 안쪽에서 긴 참호를 만들어 막아내고, 또 정예병을 보내 원소군의 운반수레를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거기에 실린 양곡을 다 불살라 버렸다. 태조가 원소와 서로 대치한지 시일이 오래되어, 백성들은 피폐하고 곤핍하니, 많은 이가 반역하여 원소에게 호응하였고 군량도 모자랐다.
「원소전」

백마와 연진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관도로 물러났다. 저수는 원소에게 지구전을 하자고 조언하나 원소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렵에 관우는 조조에게서 달아나 유비한테 돌아간다.

이번엔 허유가 원소에게 군을 나눠 천자를 영접하자고 말하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

8월, 원소는 군영을 연결해 전진하며 마침내 관도까지 이르렀다. 원소군이 토산을 쌓고 높은 망루를 만들어 그 위에서 화살을 쏘아대니 다닐 때는 모두 방패를 뒤집어 써야했고 병사들이 두려워했다. 또 원소군이 땅굴을 파서 습격을 시도하니 조조군은 안쪽에서 참호를 파서 막아냈다. 이런 전투가 수십일 지속되었다.

조조가 군량이 부족해 순욱한테 서신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는 것을 의논하자 순욱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원소는 모든 군을 관도에 집결시켜 공과 더불어 승패를 결정하고자 합니다. 공은 지극히 약한 것으로 지극히 약한 것을 감당해야 하는데, 만약 이를 능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필시 저들이 이를 틈탈 것이니 이는 천하를 가름하는 관건입니다. 게다가 원소는 포의지웅(布衣之雄-평범한 사내)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일에는 능하나 그들을 제대로 쓰지는 못합니다. 무릇 공께서는 신무명철(神武明哲)을 지니고 대순(大順)으로 보좌하는데,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결국 조조는 허도로 돌아가지 않고 원소와의 대치를 이어나갔다.

한편 대치한지 오래되자 후방, 특히 예주의 여남에서 배반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남에서 유벽이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에게 호응하자 원소는 유비를 보내 군을 이끌고 무리를 일으켜 허도 남쪽을 공략하게 했다. 그리고 허도 남쪽에 붙어있는 여남군은 원씨의 고향으로, 원소에 호응하는 세력이 여럿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태조는 원소(袁紹)와 더불어 관도에서 서로 오랫동안 대치했는데, 원소가 유비(劉備)를 보내 은강(濦彊-예주 여남군 은강현) 등 여러 현을 돌며 많은 무리를 일으켜 호응하게 했다. 허현 남쪽에서 관원과 백성들이 안정되지 못하자 태조가 이를 근심했다.

조인이 말했다,

“남방 사람들은 대군(大軍)이 바야흐로 (원소와 대치하느라) 목전이 급박하므로 그 사세상 구원해줄 수 없으리라 여기는 터에 유비가 강병(彊兵)으로 당도하니 그들이 배반한 것은 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유비가 새로 원소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어 그들을 능히 부릴 수 없을 것이니 공격하면 무찌를 수 있습니다.”

태조가 그 말을 옳게 여기고는 (조인에게) 기병을 거느리고 유비를 공격하게 했다. 조인은 이를 패주시키고 모반한 현을 모두 다시 수습하고 돌아왔다.
「조인전」
조홍과 함께 은강적(濦彊賊) 축비(祝臂)를 공격해 깨뜨렸다.
「서황전」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원소가 사자를 보내 이통을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했고 유표가 몰래 또다시 이통을 불렀으나 이통은 모두 거절했다.

이통의 친척과 부하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당신은 고립되어 위험한 상황에서 단독으로 지키고 있는데, 강대한 원조를 잃으면 지키며 기다릴 방법도 없으니, 빨리 원소에게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이통은 칼을 움켜쥐고 그들을 질타하며 말했다.

"조공은 현명하고 이치에 밝아 반드시 천하를 평정할 것이오. 원소는 비록 지금은 강성하지만, 함부로 임용하고 계책도 없으니 결국에는 조공의 포로가 될 것이오. 나는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조공에게 두 마음을 가질 수는 없소."

즉시 원소의 사자를 죽이고, 인수(印綬)를 조조에게 보냈다. 또 군 안에 있는 도적 구공(瞿恭), 강궁(江宮), 심성(沈成) 등을 공격하여 남김 없이 무찌르고 그들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다. 그리고 회하(淮)와 여수(汝) 일대를 평정하였으니 도정후(都亭侯)로 바꿔 봉하고, 여남태수(汝南太守)로 임명했다.
「이통전」
당시 원소는 하삭(河朔) 일대에서 매우 강대하였다. 여남(汝南)은 원소의 본적이 있는 군으로 문생이나 빈객이 각 현에 분포하여 병사를 끼고 저항하고 있었다. 조조는 이 점을 걱정하여 만총을 여남태수로 임명했다. 만총은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 5백 명을 모았으며, 그들을 인솔하여 20여 벽(壁-군루)을 공략시키고, 아직 투항하지 않는 우두머리를 유인하여 앉은 자리에서 10여 명을 죽이자 단번에 모두 평정되었다. 인구 2만호(戶)와 병사 2천명을 얻었는데, 그들에게 밭으로 나가서 경작하도록 명령했다.
「만총전」

이때 언급되는 지명이 바로 은강(濦彊)이라는 지명인데, 이 은강현은 허도 바로 남쪽에 붙어있기에 만약 유비에 호응한 반군이 장악하게 되면 굉장히 골치아파지는 상황이었다. 이 때 조인이 나서서 유비를 토벌하고 오겠다 말하고, 조조는 조인에게 기병을 주어 후방을 정리하게 한다. 호언장담했듯이 조인은 성공적으로 유벽과 유비를 격파한 후, 배반한 현들을 수습하고 돌아왔다.

원소에 호응한 무리로 보이는 은강의 도적 축비 역시 서황 조홍에게 격파당했다.

한편 원소는 유비를 보내는 것 뿐만 아니라 여남의 유력자인 이통을 회유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통은 원소의 사자를 죽여버리면서 단칼에 거절했다. 그리고는 여러 도적들을 모조리 토벌하여 평정했다. 만총 또한 500여 명을 데리고 20여 개의 군루를 공략했으며 우두머리 10여명을 죽여 도적들을 평정했다.
원소가 별장(別將) 한순(韓荀)을 보내 서쪽 길을 노략질하고 끊게 하자 조인이 계락산(雞洛山)에서 한순을 공격해 대파했다. 이로 말미암아 원소는 감히 다시는 군사를 나누어 출군하지 못했다.
「조인전」
원소와 관도(官渡)에서 대치를 하게 되었다. 군량이 떨어지자 순유는 조조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원소의 치중대가 저녁 무렵에 도착할 것입니다. 적장 한순은 날래기는 하지만 적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 때 기습을 한다면 깨뜨릴 수가 있습니다.”

조조가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묻자 순유는 서황(徐晃)을 추천했다. 서황은 사환(史渙)과 함께 원소의 치중대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순유전」
또한 사환과 함께 고시(故市-하남군 고시현)에서 원소의 군량운반 수레를 공격했는데 가장 많은 공을 세워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서황전」
다시 사환(史渙) 등과 함께 원소의 군량운반 수레를 노략질하고 그 양곡을 불태웠다.
「조인전」

대치가 길어지자 양군 모두 보급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원소는 한순을 보내 계락산에서 조조의 보급을 끊게 하지만 조인에게 격파당했고, 원소는 이후 다시는 군을 나눠 출군하지 못했다.

반면 조조의 경우, 순유의 계책으로 서황, 사환, 조인을 보내 고시에서 원소군의 군량을 불태우는데 성공한다.
공이 원소와 서로 대치한 지 여러 달이 되어 비록 전투를 치르고 적장을 베었으나 군사는 적고 군량은 소진되어 사졸들이 피폐해졌다. 공이 군량을 운반하는 자들에게 말했다,

“보름 안에 너희들을 위해 원소를 격파할 것이니 다시는 너희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겠다.”
「무제기」

이러한 조조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원소군의 공세는 계속 이어졌다. 군량을 운반하는 자들에게 보름 안에 원소를 격파하겠다고는 했지만, 원소군의 퇴각을 기다리는 처지였지 조조 본인에게 원소군을 격파할 수가 있는 게 아니었다.

4.5. 오소[10] 습격

겨울 10월, 원소가 수레를 보내 곡식을 운반하며 순우경(淳于瓊) 등 5명에게 군사 만여 명을 이끌고 가 이를 호송하게 하니 원소의 둔영 북쪽 40리 되는 곳에서 숙영했다. 원소의 모신(謀臣)인 허유(許攸)가 재물을 탐내었으나 원소가 이를 능히 충족해주지 못하자, 달아나 공에게로 와서 순우경 등을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좌우에서 이를 의심했으나 순유(荀攸), 가후(賈詡)는 공에게 (이를 따르도록) 권했다. 이에 공은 조홍(曹洪)을 남겨 수비하게 하고는 친히 보기 5천을 이끌고 밤중에 길을 떠나 날이 밝을 무렵 도착했다.

순우경 등은 공의 군사가 적은 것을 멀리서 보고 진문(陳門) 밖으로 출진했다. 공이 급히 들이치니 순우경은 물러나 둔영을 지켰고, 다시 이를 공격했다. 원소는 기병을 보내 순우경을 구원하게 했다. 좌우에서 어떤 이가 말했다,

“적 기병이 점점 접근하니 군사를 나누어 맞서십시오.”

공이 분노하며 말했다,

“적이 등 뒤까지 오거든 그때 말하라!”

사졸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순우경 등을 대파하고 모두 참수했다.

처음 원소가 공이 순우경을 공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장자(長子)인 원담(袁譚)에게 말하길,

“저들이 순우경 등을 공격하니, 나는 저들의 본영을 공격해 함락시켜 돌아갈 곳이 없도록 만들겠다!”

고 하고는, 장합(張郃), 고람(高覽)에게 조홍을 공격하게 했다. 장합 등은 순우경이 격파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투항했다.
「무제기」
조조는 곧 순유와 조홍을 남겨 본부 진영을 지키게 하였다.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순우경 등을 모두 베어버렸다. 원소의 장수 장합과 고람이 망루를 공격하여 태워버리고 투항하자, 원소는 마침내 군대를 버리고 도주했다. 장합이 항복해 오자, 조홍은 의심하며 과감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순유는 조홍에게 말했다.

“장합은 원소가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아 분노하여 온 것인데 당신은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조홍은 곧 그를 거두었다.
「순유전」
돌아와 태조를 수행해 관도(官渡)에서 원소를 쳤는데 힘을 다해 싸워 원소의 장수인 순우경(淳于瓊)을 참斬했다.
「악진전」
장합이 원소를 설득하며 말했다, “조공(曹公-조조)의 군사가 정예하니 필시 순우경 등을 격파할 것입니다. 순우경 등이 격파되면 장군의 대사가 어그러질 것이니, 마땅히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야 됩니다.”

곽도(郭圖)가 말했다, “장합의 계책은 옳지 않으며 조공의 본영을 들이치는 것만 못합니다. (조공은) 사세상 필시 환군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풀린다’(不救而自解)는 것입니다.”

장합이 말했다, “조공의 둔영이 견고하므로 공격해도 함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순우경 등이 사로잡힌다면 우리들 또한 모두 포로가 될 것입니다.”

원소는 다만 경기(輕騎-경무장 기병)로 순우경을 구원하게 하고 중병(重兵-대군)으로 태조의 본영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과연 태조는 순우경 등을 격파하고 원소군은 궤멸되었다.

곽도가 부끄러워하며 또 장합을 참소하며 말했다, “장합이 군이 패한 것을 기뻐하며 불손(不遜)한 말을 했습니다.” 장합이 이를 두려워하여 태조에 귀부했다.
「장합전」
원소가 순우경 등에게 병사 1만 여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군량) 운반수레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저수가 원소를 설득하길

“장기(蔣奇)를 따로 파견해 바깥에서 원호하는 지군(支軍)으로 삼으면, 조공이 노략질하는 것을 끊으실 수 있습니다”

라 했다. 원소가 다시 따르지 않았다. 순우경이 오소(烏巢)에 숙영했는데, 원소군과 거리가 40리 떨어져 있었다. 태조가 이에 조홍(曹洪)을 남겨 수비토록 하고, 자신은 보기(步騎) 5천을 거느리고 야음을 타 몰래 와서 순우경을 공격하였다. 원소가 기병을 보내 구원토록 하였지만, 패주하였다. 순우경 등을 격파하여 모두 다 참수하였다. 태조가 돌아오는데 진영에 이르지 않아서, 원소의 장수 고람(高覽), 장합(張郃) 등이 휘하 군대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원소전」
태조가 원소와 서로 대치한지 1백여 일에 백성들은 피폐하고 곤핍하니, 많은 이가 반역하여 원소에게 호응하였고 군량도 모자랐다. 원소가 순우경 등에게 병사 1만 여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군량) 운반수레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저수가 원소에게 장기(蔣奇)를 따로 파견해 바깥에서 원호하는 지군(支軍)으로 삼아 조조가 노략질하는 것을 끊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원소는 따르지 않았다. 허유(許攸)가 원소에게 진언하였다.

"조조의 군사는 적은데다가 모든 군사가 우리와 대치하고 있으니 허도 부근의 방어는 틀림없이 비었거나 허약할 것입니다. 만약 경무장 병사를 밤새워 행군시켜 엄습한다면 허도를 점령할 수 있고 조조는 포로가 될 것입니다. 설령 궤멸되지 않더라도 머리와 꼬리에서 쫓긴다면 틀림없이 격파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원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허유의 집안에서 범법자가 있어 심배(審配)가 잡아가두었기에 허유는 뜻을 펼 수가 없자 도망쳐 조조를 찾아갔다. 허유는 조조에게 순우경 등을 공격하라고 건의했는데 순우경은 원소의 군영에서 40리 떨어진 오소(烏巢)를 지키고 있었다. 조조는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밤에 오소에 가서 순우경 등을 격파하고 모두 죽여버렸다.

원소가 조조에게 순우경이 공격당한다는 말을 듣고 원담에게 말하길,

"조조가 순우경을 격파하더라도 내가 저들의 본영을 함락시킨다면 조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장합, 고람을 보내어 조조의 본영을 공격하게 했는데, 장합등은 본영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순우경의 패전 소식을 듣자 조조에게 항복해 버렸다. 이 때문에 원소군은 크게 놀라며 진영이 흔들려 무너져 내렸다.
『후한서』 「원소열전」

어느덧 10월이 되었는데, 원소는 서황, 조인 등에게 고시에서 군량이 불태워진 것을 인식해서인지 순우경 등에게 무려 병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군량 운반수레를 맞이하게 했다.

이에 저수가 원소를 설득했다.
장기(蔣奇)를 따로 파견해 바깥에서 원호하는 지군(支軍)으로 삼으면, 조조가 노략질하는 것을 끊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소는 따르지 않았다.

이번엔 허유가 원소에게 진언했다.
조조의 군사는 적은데다가 모든 군사가 우리와 대치하고 있으니 허도 부근의 방어는 틀림없이 비었거나 허약할 것입니다. 만약 경무장 병사를 밤새워 행군시켜 엄습한다면 허도를 점령할 수 있고 조조는 포로가 될 것입니다. 설령 궤멸되지 않더라도 머리와 꼬리에서 쫓긴다면 틀림없이 격파될 것입니다.

이번에도 원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 원소군의 실책이 일어나는데, 심배가 허유 집안의 범법자를 잡아 가둔 것이다. 안그래도 원소 밑에서 본인이 만족할 만한 재물을 얻지 못한 허유는 이내 조조한테 도망쳤다. 허유는 조조를 만나 원소의 군영에서 40리 떨어진 오소(烏巢)를 지키고 있는 순우경 등을 공격하라고 건의했다.

조조의 측근들은 이를 의심했으나 오직 순유 가후만이 조조에게 이를 따르도록 권했다. 이에 조조는 조홍을 남겨 관도를 수비하게 하고, 친히 보기 5천을 이끌고 밤 중에 길을 떠나 날이 밝을 무렵 도착했다. 원소의 본영과 오소 사이의 거리가 40리였으니 조조의 본영과는 더 멀었을 것이다. 보통 보병의 하루 행군 거리가 30리인데, 40리를 넘는 거리를 밤에 출발하여 동틀 무렵에 도착했다는 것을 보아 조조는 급히 행군한 것으로 보인다.

순우경 등은 조조의 군사가 적은 것을 멀리서 보고 진문(陳門) 밖으로 출진했다. 이 틈을 타서 조조가 급히 들이치니 순우경은 물러나 둔영을 지켰다가 다시 나와 조조를 공격했다. 원소는 기병을 보내 순우경을 구원하게 했다.

조조 좌우에서 어떤 이가 말했다.
적 기병이 점점 접근하니 군사를 나누어 맞서십시오.

조조는 분노하며 말했다.
적이 등 뒤까지 오거든 그때 말하라!

사졸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순우경 등을 대파하고 모두 참수했다.

한편 원소가 조조에게 순우경이 공격당한다는 말을 듣고 원담에게 말했다.
조조가 순우경을 격파하더라도 내가 저들의 본영을 함락시킨다면 조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에 장합이 원소를 설득하며 말했다.
조공(曹公-조조)의 군사가 정예하니 필시 순우경 등을 격파할 것입니다. 순우경 등이 격파되면 장군의 대사가 어그러질 것이니, 마땅히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야 됩니다.

곽도가 말했다.
장합의 계책은 옳지 않으며 조공의 본영을 들이치는 것만 못합니다. (조공은) 사세상 필시 환군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풀린다’(不救而自解)는 것입니다.

장합이 말했다.
“조공의 둔영이 견고하므로 공격해도 함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순우경 등이 사로잡힌다면 우리들 또한 모두 포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원소는 경기(輕騎-경무장 기병)로 순우경을 구원하게 하고 중병(重兵-대군)으로 조조의 본영을 공격하였다.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여 오소에서는 참패했고 관도는 여전히 함락하지 못했다.

본인의 주장대로 했다가 전쟁이 망해버린 곽도 장합을 참소하며 말했다.
장합이 군이 패한 것을 기뻐하며 불손(不遜)한 말을 했습니다.

장합이 이를 두려워하여 결국 고람과 함께 조조에게 투항했다.

장합이 항복해 오자, 조홍은 의심하며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순유가 조홍에게 말했다.
장합은 원소가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아 분노하여 온 것인데 당신은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이에 조홍은 장합과 고람을 거두어들였다.

군량이 모두 불탔을 뿐만 아니라 주력군인 장합이 항복하자 원소군은 크게 놀라 진영이 무너져버렸다.

4.6. 원소의 패주

원소군이 크게 무너져 내리니 원소와 원담은 군을 버리고 황하를 건너 달아났다. 이를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했고, 원소군의 치중(輜重)과 도서(圖書), 진보(珍寶-진귀한 보물)들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군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공이 원소의 서신을 거두었는데, 허도와 군중(軍中) 사람들의 서신을 얻자 이를 모두 불태웠다.

기주(冀州)의 여러 군(郡)들 중 성읍(城邑)을 들어 항복한 곳이 많았다.
「무제기」

원소와 원담등은 두건을 쓰고 말을 타고 도망하여 (신분을 숨긴채 패주했다는 말), 800여기를 이끌고 강을 건너, 여양(黎陽) 북쪽 강가에 닿았고, 그곳의 장수인 장의거(蔣義渠)의 진영안으로 들어갔다. 장막 안으로 들어가자, 원소는 장의거를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내가 비록 수령이지만 지금은 당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말했다. 장의거는 원소를 장막 안으로 모셨고, 영을 내려 원소가 건재함을 알렸다.

원소가 살아있다는 소식에 서서히 군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원소와 합류하지 못한 나머지 군사들은 조조에게 항복했는데, 조조는 이들을 모두 파묻어 죽였다. (조조군이) 앞뒤로 죽인 것이 대략 8만에 달했다.
『후한서』 「원소열전」

원소군이 궤멸하자 원소는 신분을 숨긴채 800여기만을 이끌고 간신히 황하를 건넜다. 이후 장의거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사태를 수습한다. 원소에게 돌아가지 못한 병사들은 모두 조조가 파묻어 죽였다. 관도 전역에서 죽은 원소군은 7~8만명이나 되었고 이는 원소군에게 쉽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이었다. 이후 원담 원상은 다시는 이러한 대군을 운용할 수 없었다.


무제기에 배송지가 주를 달면서 인용한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에 의하면 조조는 헌제에게 다음과 같이 상언했다고 한다.
대장군 업후(鄴侯) 원소(袁紹)는 예전에 기주목 한복과 함께 전 대사마 유우(劉虞)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금새(金璽)를 만들고 전 임장(任長-거록군 임현 현장) 필유(畢瑜)를 유우에게 보내 명록(命錄)하기를 수차례 설득했습니다.

또한 원소는 신에게 서신을 보내 이르길, ‘가히 견성(鄄城)에 도읍할 만하니 응당 옹립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제멋대로 금인(金印), 은인(銀印)을 주조하니 효렴(孝廉), 계리(計吏)들이 모두 원소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원소의) 종제인 제음태수 원서(袁敍)는 원소에게 서신을 보내 이르길,

‘지금 해내(海內)가 무너지고 하늘의 뜻이 실로 우리 가문에 있어 신령이 감응하는 징조가 있으니 마땅히 존형(尊兄)에게 달려있는데, 남형(南兄-남쪽에 있는 형, 즉 원술)의 신하들이 즉위하기를 권하자 남형이 말하길, 나이로 보아도 북형(北兄)이 더 많고 지위로 보아도 북형이 더 중하다고 하고 곧 옥새를 (존형에게) 보내려 했으나 때마침 조조가 길을 끊었다’

고 했습니다. 원소의 종족(宗族)은 누대에 걸쳐 나라의 중은(重恩)을 입었으나 흉역 무도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병마를 이끌고 관도에서 어울려 싸웠는데, 성조(聖朝-조정)의 위엄에 힘입어 원소의 대장 순우경 등 8명을 참수하고 마침내 그들을 대파하여 궤멸시켰습니다. 원소와 그 아들 원담은 가벼운 차림으로 함께 달아났고 참수한 것이 모두 7만 여 급이고 (노획한) 치중과 재물은 거억(巨億-거액, 거량)입니다.”

또 조조는 원소의 서신을 얻고 모두 불태운다. 역시 무제기의 주석에 인용된 위씨춘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원소가 강성할 때는 나도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뭇 사람들이겠느냐!

5. 관도대전 이후

6년(201년) 여름 4월, 황하 일대에서 군세를 떨치고, 창정(倉亭)에 있던 원소군을 쳐서 깨뜨렸다. 원소는 돌아가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거두고 반기를 든 여러 군현들을 공격해 평정했다.

9월,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원소가 격파되기 전 유비를 보내 여남을 공략하게 했었는데, 여남의 적(賊) 공도(共都) 등이 이에 호응했다. 채양(蔡揚)을 보내 공도를 공격했으나 불리했고 공도에게 격파 당했다. 공이 남쪽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유비는 공이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유표에게로 달아났고 공도 등은 모두 흩어졌다.
「무제기」
은밀히 원소를 떠나고자 하여, 원소를 설득해 남쪽으로 형주목 유표(劉表)와 연결하도록 했다. 원소는 선주를 보내 본래 있던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여남에 이르도록 하니, 적(賊) 공도(龔都) 등과 합쳐 그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조공이 채양(蔡陽)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선주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공이 원소를 격파한 후 친히 남쪽으로 선주를 공격했다. 선주는 미축(麋竺), 손건(孫乾)을 유표에게 보내 서로 소식을 전하자, 유표는 직접 교외에서 선주를 영접해 상빈(上賓)의 예의로 대우하고, 군사들을 보태어 신야(新野-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전」

201년 4월, 조조는 창정에 있는 원소군을 격파하고, 또 허도로 돌아와 여남의 공도 유비를 공격했다.

유비는 앞서 조인에게 격파된 후에 다시 여남으로 돌아왔는데 조조가 보낸 채양은 죽였으나 뒤이어 조조가 친정하자 유표에게로 달아났다.

창정 전투 마지막으로 원소가 죽을 때까지 조조군과 원소군의 직접적인 충돌은 사라졌다.

원소를 깨뜨리자 별도로 장료를 보내 노국(魯國-예주 노국)의 여러 현들을 평정하게 했다.

하후연과 함께 동해(東海-서주 동해군)에서 창희(昌豨)를 포위했는데, 여러 달이 지나 군량이 소진되자 회군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장료가 하후연에게 말했다,

“며칠 사이 매번 포위된 곳을 순시할 때마다 창희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들이 화살을 쏘는 일이 드물었소. 이는 필시 창희가 마음속으로 망설이는 게 있어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이오. 내가 그와 얘기를 나눠볼까 하는데 어쩌면 그를 달랠 수도 있을 것이오.”

이에 창희에게 사자를 보내

‘공(公-조조)께서 남긴 명이 있어 장료를 통해 전하게 했다’

고 말했다.

그러자 창희는 과연 성 아래로 내려와 장료와 대화를 나누었다. 장료가 창희를 설득하며 말했다,

“태조께서 신무(神武)하시고 바야흐로 그 덕으로 사방을 품으시니 먼저 귀부한 자가 큰 상을 받았소”

이에 창희는 투항을 허락했다.
「장료전」

한편 조조는 장료를 보내 예주 노국을 평정하고, 하후연과 함께 창희를 진압하게 한다. 장료는 창희를 직접 만나 얘기하니 창희가 귀부했다.

(202년 정월)진군하여 관도에 주둔했다.

원소는 군이 격파된 이후로 병을 얻어 피를 토하다 여름 5월에 죽었다.
「무제기」
기주의 성읍이 많이 배반하였으나, 원소가 다시 공격하여 평정시켰다.

군대가 패배한 이후로 병이 나서, 7년(202년)에 걱정하다 죽었다.
「원소전」

관도에서의 패전 이후 기주의 여러 성읍들이 반기를 들었으나, 모두 원소에게 진압당했지만, 원소는 병이 나 202년 5월에 죽고 원씨와 조조의 대결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후의 일은 조조의 하북 평정 문서 참조

6. 평가

삼국지연의의 이전 전통적인 삼국지 매체에서는 적벽대전에 너무 비중을 싣는 나머지 그리 주목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주인공인 유관장 삼형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 전투이기 때문인 듯하다. 연의에서는 그나마 조조를 띄워주는 전투라서 재조명되었으나, 원소가 대놓고 뿌리는 패배 복선들과, 막강한 병력수에 비해 바보같이 약하게 묘사된 원소 때문에 별로 재미가 없는 전투이다. 특히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등의 현대 매체에서는 이 전투를 한 컷 정도로 간략하게 넘기는 경우가 흔하며, 초반의 접전에서 안량/ 문추를 참살하는 관우의 활약을 끝으로 다루지 않는다.

여기에 반발하여 일부 논단에서는 관도대전이야말로 삼국지의 대세를 판가름한 결전이며, 이 시점에서 조조의 제패가 확정되었고 이후의 전투는 전략적 가치에 있어서 관도대전에 비해 큰 의미가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관도대전의 전략적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것도 곤란하다. 원소는 관도대전 당시 이후 자신에게 반항하는 반란세력을 철저히 소탕함으로서 하북의 세력권을 더시 튼튼하게 내실을 다져놓았기에 다시 원상복구 되었다. 원소 세력이 무너지게 된 원인은 원소 사후의 후계자 내전이지, 관도대전이 아니다. 관도대전이 아니었어도 원소가 사망한 후 후계자 다툼이 있었으면 원소는 멸망했을 것이고, 관도대전이 있었더라도 원소가 죽지 않았다면 결코 멸망할 만한 세력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관도 대전 때문에 스트레스의 정점을 찍어서 원소의 죽음을 가져온 셈이고, 관도대전에서 원소가 이겼으면 조조는 그냥 멸망이었지만.[11]

물론 그렇다고 하여 반대로 과소평가하는 것도 좋지 않다. 관도대전에서 이긴 후 조조는 무려 7만 내지 8만[12]에 이르는 원소군 포로를 전사시키거나 생매장 시켰는데, 이릉에서 비슷한 참패[13]를 당한 유비의 경우 2군 별동군을 운용했던 황권이 퇴로를 끊기고 위에 투항하면서 최소 현령급 이상의 간부만 142인을 잃었다. 이것도 유비 본대의 간부진 손실은 제외한 수치인데, 촉은 이 손실로 차세대를 이끌어나갈 그 당시의 하급 군관층이 거의 붕괴되었다.[14] 즉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원소 세력의 결집력과 역량은 크게 감소했다고 볼 수 있다.

명성이 알려진 인재의 손실만 따져도 문추, 안량, 순우경 등의 주요 상장군들이 다수 전사했으며, 장합과 고람, 허유 등이 조조군에 항복했고, 전풍과 저수 등이 숙청되었다. 이렇게 관도대전에서 죽거나 배신한 인재들에 비견될만한 수준의 인물은 원소 군에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심배, 곽도, 봉기, 신평 정도만이 비슷한 명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관도대전을 기점으로 원소군은 고급 인재의 과반수를 상실한 격이라는 의미다. 이후에도 원상, 원담 세력이 조조를 상대로 꽤 승리를 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명성을 새롭게 얻은 인물의 등장은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15]는 점에서 원소군이 관도 대전에서 입은 인적 자원의 손실은 치명적이며 단기간에는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었다고 보는게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무엇보다 적어도 이릉대전은 황권과 마량을 제외하면 이름있는 인재들은 적었다. 그러나 관도대전은 S~A급의 인재들이 모두 박살난데다 병력까지 이릉 그 이상으로 잃었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잃은 병사수보다는 적지만, 조조는 원소가 가진 하북4주에 연주, 예주, 서주, 사예주와 형주의 절반까지 가지고 있었고 이름난 명장들의 전사는 드물었다.

하지만 관도대전 후 원소 측의 인재들의 손실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원소가 차지한 하북 4주의 인적 자원의 잠재력은 이후 촉과 오에 비하면 훨씬 더 유리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이를 순유 등 조조 진영의 참모들도 지적하며 그래서 원상이 세력을 키우기 전에 쳐야 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패배한 원소가 숙청으로 내부 단속을 하는 동안, 조조는 승리했음에도 원소 진영과의 내통 편지를 불태우는 퍼포먼스까지 하면서 친원소 세력의 숙청은 없을 것이라고 유화적인 제스쳐를 보여야 했다. 대중적인 삼국지 매체에서 이것이 조조가 원소보다 그릇이 넓은 인물임을 추켜세워주는 묘사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관도대전 이후에도 조조가 아닌 원소 측이 오히려 숙청을 할 정도로 인재에 여유가 더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관도대전의 직접적인 결과는 순전히 조조가 원소의 침공군을 저지한 것이다. 즉, 관도대전의 의미는 적벽대전에서 유비 / 손권 연합군과 마찬가지로 멸망 위기에 몰렸던 조조의 세력이 운신할 여유를 확보했다라는 것이다.

관도대전 이후의 세력 구도는 원소가 사망하기 이전에는 본인의 세력권과 가신들은 큰 소모없이 유지되었다. 결정적으로 조조는 원소 사후 여양에서 원씨 형제를 격파하고 내침 김에 업까지 공격하려다가 원상에게 패한 후 퇴각한 적이 있다. 이 패배는 진수의 삼국지에는 나오지 않지만 범엽의 후한서에는 나온다.

그렇다고 관도대전이 단순히 원소의 침입을 막아낸 전투는 아니다. 관도대전 이전부터 장수, 선우보, 염유 등이 천자를 끼고 있는 조조 편으로 귀부했고, 천하의 사족(士族)들은 아직 정부의 권위를 따르는 상태였다. 당장 유표 밑에 있던 형주의 호족들도 허도 정권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았다. 또한 원소는 관도대전 당시에도 4주를 완벽히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청주에서는 오히려 조조 편인 장패가 공세를 취하는 입장이었고 백성들도 장광태수 하기의 선정으로 조조가 빨아들이는 상황이었다. 병주의 경우, 원소군이 차지하고 있던 곳은 남쪽의 상당 지역으로, 북쪽의 태원과 기주 상산 일대는 10만의 무리를 거느리던 장연의 흑산적 세력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유주의 경우 애매하지만 만약 선우보와 염유의 세력을 쫓아내지 못했으면 원소군이 가지고 있는 지역은 탁군 인근에 불과하다. 다행히도 기주는 매우 인구가 많은 지역이며 중원에 비해 전란을 덜 겪었기에 원소의 세력이 당시 조조의 세력보다는 강성했다.

하지만 원소 세력의 우위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중원이 많은 전란 때문에 황폐해지긴 했지만 조조는 협천자 이후 둔전 제도를 실시해 유랑민들을 정착시키며 회복되는 상황이었다. 또한 유표 세력권이었다가 조조에게 귀부한 장수와 누규, 원소와 협력 관계였지만 조조 편으로 갈아탄 선우보와 염유 같은 사례들이 얼마나 더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원소는 조조가 더 강해지기 전에 전쟁을 선택했지만 대패하고 만다. 7만 명이 전사한 것은 결코 작은 손실이 아니다. 조조는 관도에서 단순히 원소군을 막아내는 것 뿐만 아니라 대승을 거뒀고, 안 그래도 시간이 자신의 편인 상황에서 자신이 결코 원소한테 밀리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관도대전은 조조의 세력이 원소의 세력을 앞서게 되는 터닝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조는 원담과 원상을 둘 다 상대하며 7개월 가량의 공방전 끝에 여양성을 점령하며 황하 이북에 거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 원상에게 패하여 돌아가길 했지만 여양성은 여전히 조조의 손에 있었다.[16]

자치통감에서 사마광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원소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고상하였으며 재간과 도량이 있었고 기쁨과 성냄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으나,
성질이 거만하고 괴팍하며 스스로 높여서 선행을 하는 데는 모자랐다. 이런 까닭으로 패배하기에 이르렀다.[17]

6.1. 원소는 왜 패배했나

원소는 질래야 질 수 없게 완벽한 판을 짜는 능력까지는 여전히 뛰어났으나, 결국 침공에 실패하여 후세에도 두고두고 비난과 조소를 당한다. 대다수의 삼국지 작품에서는 관도대전 하나로 원소의 캐릭터를 잡고 부당할 정도로 까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때의 중대한 실책들을 원소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나타난 판단력 저하의 일부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젊은 나이부터 완벽에 가까운 정치책략으로 세력을 키웠던 원소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건강을 혹사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21세기에는 원소가 무능력으로 져서 홧병에 걸려 죽었다는 조조 중심의 해석보다는, 원소가 과로사하기 몇 년 전부터 보인 몇 가지 단점들이 결합된 모습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다. 워털루 전투 당시에 환상적인 지휘능력을 선보인 나폴레옹이 결정적인 순간에 병으로 지휘를 놓은 사이 전황이 바뀐 것을 생각하면 아예 일리가 없는 소리는 아니다. 실제 중국사학계의 거두인 장쯔위안 선생도 저서를 통해 이러한 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지도부의 부패에서 일어나는 혼란은 현대의 독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다. 삼국지연의 이래로 지나치게 영웅주의 중심으로 단순화 되어버린 원소의 실책이 현대인들에게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현실적인 정치 체제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에 가깝다. 거기에 원소는 조조, 손권, 입촉 후의 유비 등 다른 거대 군벌들처럼 참모진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유대를 보여준 바가 없다. 원소는 사실 그 누구도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체제의 문제로 돌리기엔 동시대에 원소 이외에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드니 변명으로 삼기엔 빈약하다지만, 엄밀히 따져 참모 간에 내분과 음해로 보면 말년의 손권이라는 원소보다도 더한 인간이 있으니[18] 이걸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결국 유력군벌 가운데 그런 체제를 돌린 게 원소뿐이고 결국 그 체제로 인해 무너졌다라고 하는것이 더 정확하다. 이런 체제의 문제라면 군주의 카리스마가 붕괴가 곧 그 세력이 와해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원소 사후의 원가가 딱 그런 식으로 무너졌다.

원소 이상으로 부하들의 인선과 후계자 문제에서 중대한 실책을 계속 저질렀던 손권은 자기가 죽고 나서 나라가 심각한 내분으로 완전히 망가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사후에 세력이 바로 와해되지는 않았다. 원소가 죽지 않았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원소가 있는 한 어쨌거나 바로 무너지지는 않는 체제였으니까.[19][20][21] 이렇게 보면 원소를 너무 띄워줄 필요도, 그렇다고 너무 폄하할 필요도 없다. 공손찬이라는 막강한 경쟁자를 누르고 하북 4주를 순식간에 아우른 것도 원소고 거기서 더 세력을 확장하지 못한 것도 원소인 만큼 원소라는 인물을 평가하는 건 딱 거기까지만 평가하면 될 일이다.

정리해보면 원소가 형성한 체제의 단점이 막판에 터져나온 결과물이 관도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6.2. 원소는 왜 관도대전을 일으켰나

지구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훗날 삼국정립을 이룬 조조, 유비, 손권 역시 이런저런 문제는 있었고 특히 원소 뺨치는 참모진 분열을 대놓고 조장한 손권도 있긴 하지만, 원소의 경우 지나치게 성급했다는 것 역시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원소는 이 시대 거대군벌 가운데 확장속도가 제일 빨랐다. 기주에서 제대로 세력을 불려 하북 4주를 모조리 제패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7~8년 정도인데, 관도대전 당시는 전풍의 말대로 급속한 확장 이후 그걸 제대로 정비해야 할 때에 가까웠다. 원소가 선택한 체제적 한계를 생각하면 더 그랬는데 원소는 공손찬이라는 거대군벌을 완전히 정리하자마자, 비록 본인보다야 약하다지만 조조라는 거대군벌과 다시 충돌한다는 무리한 결정을 내렸고, 이 과정에서 결국 내부적 모순이 터져나오는 한계에 봉착한 것이 관도대전의 대패라고 할 수 있으니, 원소는 중요한 위기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낸 격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원소가 조조를 먼저 치면 몰라도 조조가 원소를 먼저 친다는 건 세력구도상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원소가 몇 년간 내부를 다지고 후계 구도를 잡아도 괜찮았다는 것이 관도대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도 부합한다는. 이 의견은 조조는 하북 4주라는 땅을 흡수하면서 위나라의 형태를 거의 완성했는데, 그도 잦은 원정을 하긴 했지만 본거지를 하북의 중심지 업으로 두고 하북을 완전히 자신의 세력으로 만드는데 주력했으니 이 점에서는 둘이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하북출신들이 지구전을 주장했다고 원소를 재평가 하는 차원으로 이들이 전쟁을 두려워하거나, 단순히 조조의 협천자 논리에 굴복했다거나, 또는 천하통일보다 하북의 이득을 앞세웠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생기고 있으나 이것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애초부터 이각/곽사 혼란 때 원소에게 누 차례 협천자 옹립을 권했던 전풍, 저수 등이 하북 출신들이었고 조조에 대한 전략 또한 조조가 원술, 장수, 유표, 여포 등과 싸울때 조조의 뒤를 치고 천자를 차지할것을 강력히 원소에게 권했을 정도로 오히려 군웅할거 초반에는 오히려 매파에 가까웠다. 반면 그 시절 땐 오히려 원소를 비롯한 외부출신들이 조조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22] 그러나 전풍과 저수의 예측대로 협천자를 방치한 결과는 헌제를 옹립한 조조가 황하 이남의 군벌들을 차례대로 무너뜨리고 한 황실의 위세를 높히니 (표면적이나마) 비록 힘으로는 원소가 앞서지만 명분으로는 딸리는 형국이었고 관도대전 바로 직전 시기 하북 호족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애초부터 (협천자)를 하랄 때 하지 않고 지금 와서 난리를 피운다'라는 일종의 군주(원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역시 전풍, 저수가 우려한 대로 일찍이 조조를 손봐주지 않음으로 급성장을 한 조조가 청주, 하내에서 협천자의 이점을 살려 원소세력을 흔들고 있었다. 이런 조조의 흔들기에 넘어간 선우보 같은 케이스를 보면 원소가 협천자와 조조를 방치한 판단이 미스였다는 점이 적나라게 드러난 셈이고 원소의 카리스마가 흔들리게 됐다. 조조의 관직 뿌리기가 하북에 생각보다 동요를 일으켰다는 정리가 될 것이다. 실제로 어정쩡한 군벌들은 조조가 하북 입성하자마자 조조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원소세력의 구심점이 다소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한 타개책은 군사적인 성과였고 원소입장에서는 이제는 관도대전을 속히 일으킬 필요가 있었다.

이 말대로 조조는 황제를 끼는 데 성공했고 당시만 해도 조조 세력은 후한의 유일한 합법 정부였다. 조조는 협천자를 통해 중앙정부를 장악한 조정의 영수격이 되었으며, 이에 맞서 후한 조정을 전면 부정하고 독자적인 칭제건원으로 대응하던 원술을 완전히 개박살을 내버렸는데,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원술은 비록 회남에서 재기하며 자리잡은 기반이 아직 안정적인 편은 아니었으나 후한 조정이 조조를 중심으로 개편되기 이전까진 여전히 내전기의 핵심 군벌 중 하나였다. 원술이 조조와 손잡은 여포에게, 그리고 조조에게 연달아 참패하면서 유동적이었던 지지세력들이 대거 이탈하고, 이에 따라 통치력이 확고히 미치진 못했으나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펼치던 세력권이 공중분해되었는데, 비록 조조는 같은 시기에 형주에서 할거하며 대립하고 있던 유표를 제압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이 사건은 조정의 영수로서 각지의 반역자를 토벌하고 나라를 정상 상태로 되돌리겠다는 구호를 내걸던 조조의 위상에 엄청난 상승효과를 가져왔다. 즉, 조조가 받드는 한실이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아직 지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로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당대의 유력자들은 게임에서처럼 제각기 자기 주군이 천하를 통일하길 바란 것이 아니라, 내전기라는 인세에 강림한 지옥같은 현실에서 정상적인 사회질서로의 복귀라는 대안을 훨씬 설득력있고 정당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실제 조조의 협천자와 원술의 몰락 과정을 전후해 한실의 힘이 복구되었다고 여겨지자 예주와 형주 북부에서 독자적인 군벌세력을 갖추고 있던 이들이 조조에게 귀부한다. 조조의 협천자와 이에 대응하던 원술의 몰락을 기점으로 시대적 패러다임이 점차 '내전기의 영웅' 원소가 아닌 정상적인 사회질서로의 복귀를 주도하는 '한나라 조정의 수장' 조조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원소가 대장군 자리를 받는 건 결국 원소가 한실을 거역할 수 없는 신하라는 뜻이 된다. 정통 정부로서 군벌들을 길들이기엔 채찍과 더불어 더할 나위없는 당근이 됐다. 실제로 조조는 원소의 기주와 병주 세력들에게 관직을 남발했고 그게 먹혔다. 결과적으로 황제의 대리자로서 조조는 행정의 정상화, 합법적 군웅 토벌 혹은 포섭 양면 전술에 성공한다. 대표적인 거대군벌 유표 역시 관도 대전 전에 세력이 조각난다. 휘하의 장선이 후한 정부인 조조 세력에 붙겠다고 형남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거기에 한숭 같은 인사를 보면 조조한테 나 보내면 나는 한의 신하지 유표의 신하가 아니라고 하는 판이라 유표가 못 죽이는 상황도 발생한다. 유표 끄나풀 노릇하던 누규, 장수- 가후 라인은 아예 조조 쪽으로 이탈한다. 물론 유표도 마냥 호구는 아니라 이걸 어떻게 수습하긴 하고, 헌제가 황제처럼 구는 유표를 보면서 힘이 없어 그냥 이를 가는 상황도 발생하긴 했지만진짜 힘이 있는 조조는 원소 상대할 걱정에만 머리 싸매고 있었을 테니까 정작 유표도 한실의 권위 앞에서 이런 상황을 겪는 것을 보면 조조가 끼고 상황이 안정된 후한 조정의 후광은 마냥 약하지가 않았으며, 이 시점에서 조조는 아직 역적의 대명사 망탁조의의 멤버가 아니다. 조조는 반동탁연합군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동탁을 공격한 인사 중 하나였기에, 조조가 한실에 충성하는 자라고 순욱이 믿었듯이 한나라 사람들 상당수가 그렇게들 믿고 있었다. 즉, 이때까지 조조는 후한 구해낸 대영웅 코스프레 하는 상태고 그게 또 어떻게 먹히는 상태였다.[23]

이런 점을 종합해서 살펴볼 때 원소가 공손찬을 격파하고 위세가 절정에 달해 교만해지자 일방적으로 공물을 끊고 황제를 꿈꿨다는 진수의 해석은 세력면으로만 따지면 그렇지 오히려 협천자라는 압도적인 명분을 등에 업은 조조의 원소에 대한 기선제압 시도는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으며 원소의 상황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원소는 더이상 이를 좌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힘만 믿고 이미 명분을 쥔 조조를 공략하기에는 전풍과 저수가 지적한대로 상당히 까다로워서 오히려 공손찬을 깨뜨리고 북중국을 통합한 상승세가 무의미로 흘러갈 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관도대전이 일어난 200년, 원소가 그토록 원하고 절실히 필요했던, 조조의 협천자 논리를 그대로 뒤집어 엎는 사태가 발생한다. 헌제가 조조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암살지시를 내린 반 조조 친위쿠데타 의대조 사건이 실패하고 그 사건 주도자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유비가 서주를 거쳐 하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반 조조의 명분덩어리 유비를 몇백 리까지 나가 친히 맞이해 기회를 잡은 원소가 휘하 세력이 더 이탈하기 전에 빨리 일을 벌여버린 것이다.[24] 원소가 유비를 받아들이고 돌린 격주군문만 봐도 자기가 핍박받는 헌제 구하는 충의지사 코스프레 하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조조는 헌제를 핍박하는 역적 동탁 Mk2고. 격주군문에는 절반이 조조 개인사를 까는거고 절반이 조조가 황실을 능멸한다고 까고 있다. 원소는 유우 추대 실패 이후 가짜 황제라고 까던 헌제에 충성하는 충신행세를 하는 정치철새인 인간이니 이런 뻔뻔함도 보였을 것이다.[25]

후일 조조의 협천자 논리를 유비와 손권이 극복했던 이유가 반 조조 세력의 거두 유비가 나서서 일개 지방 토후에 불과했던 손권과 함께 적벽대전에서 조조에게 결정적으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각각 한중 공방전/ 조비의 남정에서 승리하여 자신들의 독립성, 적어도 촉과 장강 이남에서는 독립세력으로 자신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재차 입증해냈기에 촉한 손오라는 독립국가가 세워질 수 있었다. 이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뚜렷한 명분이 없었던 원소에게는 유비가 바친 명분으로 인해 비로소 조조의 협천자 논리를 완전히 깨부수기 위해 군사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결정적인 승리를 위한 조조와 원소의 대결이 바로 관도대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구전으로 가면 원소만 내정 회복하는 게 아니라 조조의 경우도 시간을 주면 파괴된 서주, 예주, 연주의 빈 농지에 사람들 데려가서 농사시키고. 농사시켜서 사람들 먹이면서 내정을 회복시킬 수 있다. 당연히 초기에는 투자대비 아웃풋이 높지만 농지에 사람들이 어느정도 차게되면 투자된 자원대비 효율은 낮아지다가, 회복이 절정에 이르면 더이상 자원이 투자되더라도 추가이득은 0이 되는 시점이 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빈 땅도 결국 관리하기 편하고 농사짓기 좋은 비옥한 땅부터 사람들 채워넣을 텐데 조조의 파괴된 땅들인 서주, 연주, 예주의 경우엔 이런 식으로 남아도는 비옥한 땅에 사람들을 정착시켜 회복이 빠를 수 있지만 원소 세력의 핵심지 기주의 경우, 전란의 데미지 적게 받았다는 가정 안에서는 이미 그런 땅들은 어느 정도 차서 관리되는 상태일 테니까, 기주는 그런 극적인 효과까지는 못 볼 가능성이 높았다. 즉 오히려 조조의 회복 속도가 더 빠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아직 군사적인 우위를 확실히 점하고 또한 의대조 사건으로 어느정도 명분을 회복한 원소에게는 혹시라도 있을 조조의 세력 회복의 여지를 주지 않고 박살내겠다는 전략은 마냥 틀렸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원소는 이각/곽사의 내분 기회를 놓치고, 조조가 장수/유표에게 고전했을 때 전풍, 저수 등 기주 인사들의 조조의 뒤를 치고 천자를 확보하라는 진언을 무시함으로써 원래 자신과 비교해 세력이 미약했던 조조가 협천자를 통해 본인과 견줄 정도까지 성장하는 것을 방치했고, 그런 이유로 사실 원소는 조조를 물리칠 가장 이상적인 타이밍을 이미 놓쳤다. 그 실책을 만회하고자 1인 독재체제를 확고히 건설하려는 과정에서 하북인사-외부인사의 분쟁을 부추기고 후계싸움을 스스로 유도한 결과, 관도대전 당시 내부적으로 원소의 지휘부는 이미 분열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원소는 본인의 유일한 강점인 세력 우위를 100 퍼센트 활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6.3. 전풍과 저수를 무시해 진 전투인가?

관도대전은 저수와 전풍의 발언이 인상이 강해서 '원소가 충신들 조언 안 받아서 망했다'는 인상이 강하고 초전부터 원소군의 명장인 안량, 문추 죽은거 보면 실제로도 그런 인상을 받기가 쉽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는 조조가 전 전선에서 죄다 밀리는 흐름이고 조조를 결과적으로 압도하고 있었다.[26] 게다가 여남에서는 원소에 호응하는 세력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관측 가능한 전쟁 진행사항으로만 보면 원소 측이 이기는 판이다. 안량과 문추가 전사했으나 원소군은 무리없이 조조군을 밀어내 허도의 코앞인 관도까지 진격한 상황에 조조의 후방인 여남이 불안해 조조는 최고의 장수 중 하나인 조인을 후방으로 돌려야 했기 때문. 그리고 막판에는 조조군 군량미가 고갈난 상태에서 쫄쫄 굶은 조조군을 관도에 가두어 놔두고 잠시 지구전으로 상황을 유지하기만 해도 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오소 전투에서 원소의 판단 미스와 정치질이 터져나오지 않았다면, 본진 공략과 오소 구원을 동시에 실현하자는 곽도의 의견을 물리치고 장합의 의견을 따라 오소에 경기병 외 지원군 더 보내자는 장합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설령 오소에서 이겼더라도 조조는 소수의 별동대 가지고 간신히 혈전 끝에 순우경을 이겨놓고 원소 세력 한 가운데서 곧장 압도적인 원소 본군과 마주해서 그냥 인생 종치는 거였다. 그리고 오소 전투에서 패하긴 했어도 아직 원소군이 와해된 것도 아닌데 원소의 정치질로 과도한 총애를 받는 곽도가 오소 패전에서 자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거짓말로 장합을 모함해 생명의 위협을 느낀 장합이 군영에 불지르고 배신해서 군대가 혼란에 빠지고 이 와중에 원소가 10만 명 놔두고 튀는 일 없었으면 오소가 불탔다고 조조 진영의 식량난이 당장 해소되는 게 아니니 어쨌건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원소가 이길 판이었고,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원래 역사처럼 대패할 판은 아니었던 것이다.

또 관도대전이 전풍/저수의 조언 때문에 지구전과 대비되는 '속공' 취급을 받는데 오히려 관도대전은 지구전에 가까웠다. 관도대전은 절대로 그렇게 짧은 전투가 아니다. 관도대전은 도하거점 하나씩 먹으면서 천천히 진군하고, 현지 반란 엄호하고 조조군 후방거점으로 병력도 보내서(혹은 일어난 반란에 관직 줘서 이쪽으로 끌어들이면서) 보급 막아가면서, 병력으로 조조군을 압도하여 공격해 부상자를 속출시키고 관도에 고립되게 만드는 등 할건 다 하면서 간 싸움으로 실제로 조조군의 보급이 막혔던 건 이런 적극적인 후방 사보타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 조조군의 군량이 부족해진 게 1차적으로는 유비 유벽이 허도 주변을 공략하고 많은 군현의 호응을 받아 다수의 무리를 모아 허도를 노리며 돌아다니고 거기다 예주 전역이 거의 다 조조에게 돌아서서이고, 2차적으로는 각지의 도적[27]들이 보급을 노리고 관도에 갇혀있는 상황상 본영에 군량이 제대로 도달하지 못해서인데 막상 관도에서 원소군이 붕괴하고 조조가 이겨서 추격하는 시점에선 원소군 잔당 소탕까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지속적인 작전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후방에서 하후연이 군량 보급을 무난하게 해주어 작전에 무리가 없었다. 창정전투를 거친 뒤에는 조조가 하북 원정 중에 보급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을 보면 결국 세력 내 물자가 제대로 분배될 수 없던 상황인 거지 물자가 없었던 건 아니라고 봐야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서의 표현과 달리 관도대전은 원소가 전풍과 저수의 조언을 아예 무시하고 원소가 독단적으로 치른 전투가 아니었다. 삼국지 원소전 주석 헌제전에서 전풍과 저수가 했던 발언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지금은 피폐하니 농사에 힘쓰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자, 이게 안 통하면 조조에게 우리의 왕로(王路)와 멀어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런 연후에 진격해 여양(黎陽)에 주둔하여 차츰 하남(河南)에 군영을 짓고, 선박을 더 제작하며 군수물자를 수리하고 나서, 정예기병을 나눠 파견해 허도 주변을 초략하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 2, 3년 안에 평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저 조언과 관도대전의 실제 상황을 곰곰이 곱씹어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양에 주둔하면서 차츰 하남에 군영을 짓는다? 정예기병을 나눠 파견해 허도 주변 지역을 다 공략한다? 그것을 실제로 벌인 게 관도대전이다. 그러니까 전풍/저수안은 가만히 잘 살펴보면, 적어도 관도대전 내부 경과에 한정해선, (원소가 말을 안 들어서 망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말을 들은 것이다.

삼국지 원소전 주석 헌제전에 실린 이들의 지구전안에서는 농사짓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과 하남 진출과 동시에 후방 사보타주를 진행하는 안이 별도다. 이 안건과 실제 관도대전의 차이라고 하면 이들은 허도 주변을 공략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초략하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황건적 유벽이 조조에게 반란해 원소에 호응했고 파견된 유비와 현지의 유벽이 같이 돌아다니면서 허도 주변을 공략하고 유비가 여남을 중심으로 예주 은강현 등 허도 남쪽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많은 무리를 호응하게 해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들에게 군현 다수가 호응했다는 차이가 있으며, 이런 유비와 유벽의 활약과 더불어 예주가 거의 다 원소에게 호응했다는 실제 상황이 오히려 전풍/저수안보다 더 성공적이고 원소 쪽으로 민심을 확실히 사로잡는 사보타주였다는 차이점이 있고, 예주 공략 당시 기병을 썼냐 안 썼냐는 확인이 안 되는 부분 정도다. 또 어차피 하남에 도하해서 군영 짓는 순간에 그게 대규모 도하작전이 되는 건 피할 수가 없다. 실제 관도대전이랑 비교해보면 원소 본대의 조조 압박이 명시되었냐 안 되었냐 정도 차이지 나머지는 다 했다. 한마디로 전풍/저수의 제안과 실제 관도대전이 진행된 대략적인 전개방식과 차이가 없다.

실제로 여기서 분명히 실제 역사와 전풍/저수의 안건이 결정적 차이가 난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관도 압박'의 존재유무 뿐이고 그나마도 이들이 그거 하지 말라고 명시해서 아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전풍과 저수가 직접 발언을 안 했다는 것에 불과한데 어차피 하남에 군영 차리고 군사활동 하는 건 똑같으니 다를 게 없던 것이다.

그리고 전풍과 저수의 의견 중에선 굳이 원소가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도 존재했기에 원소가 겉으로 거절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존재한다. 일단 이들은 조조의 군사가 더 강하다고 하긴 했지만 이건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조조를 띄워준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당장 조조는 안량, 문추 등 원소의 상장들을 격파하는 데는 성공한 이후, 허유가 배신하면서 오소가 함락되기 전까지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딱히 조조군이 더 강하다고 평가할 만한 근거가 없다.

또, 실제로 원소는 저수와 전풍의 방안을 채택하면서도 그들의 의견대로 자신의 정치적 본거지인 허도 일대 예주를 약탈하기보단 유비, 유벽을 이용해서 오히려 현지 호응을 얻고 민심을 얻는 방향을 사용했다. 즉, 원소는 적당히 필요한 부분은 듣고 쓸모없는 부분을 버리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원소가 전풍과 저수의 말을 아예 듣지 않았다는 기록은 뭘까? 그것은 우선 원소 특유의 정치스타일에서 기인한다. 참모의 단물만 빼먹은 다음 은근히 견제하고 무시하고 내분 조장하는 그 스타일 말이다. 한마디로 원소가 두 사람 계획안의 알맹이만 쏙 빼먹고 전풍이랑 저수를 엿먹인 뒤 견제질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말은 다 들을 거면서 정치질 하느라 면전서는 개무시하고 면박준 꼴이고 거기다 더해져 조조는 이기고 나서 그걸 뭐 어마무시한 사실인 마냥 언플해서 원소를 멍청한 군주로 만든 것이고 사서에 이게 그대로 적히면서 실존하지 않았던 '완벽한 조언과 이를 완벽히 무시한 원소' 흐름이 된 것이다.

다만 조언에선 일단 농사짓고 백성을 안정시키다가 이게 안 통하면 전략을 시행하자는 것이고 기한이 2년, 3년 정도로 잡혀있기 때문에 관도직접 대치를 지지하는지 아닌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이들이 지구전을 아예 주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 볼 수 있다. 또 안량 혼자 보내지 말라는 저수의 조언같은 경우는 원소전에서는 저수의 진언을 거절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혼자 안 보낸 게 무제기에 너무 명확하게 적혀있기 때문에 '무시하는 척하면서 안건 다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실제로는 의견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원소가 안량과 같이 보낸 인물들이 곽도, 순우경이라는 거물급 인사들이었으니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원소의 독단적인 정치질과 함께, 조조 측의 원소에 대한 프로파간다는 일정 이상 실존했기에 사서에 이런 내용이 나온 것이다. 바로 앞에 말했듯 맞상대한 조조가 실제 관도대전과 이 제안의 유사함을 모를 수가 없는데 원소랑 나눠서 원소 깔아뭉개고 전풍 저수 극찬을 하고 있으니까. 한 마디로 원소가 여기서 한 게 속 보이는 정치질이고 왜 기주 출신 박대하는지 모를 일이라 욕먹을 건 맞는데, '원소는 적절한 조언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 쓴 멍청이'라는 조조가 욕한 거/사서에서 욕하는 거와 실제는 다르다는 것이다.

문제는 원소가 전풍과 저수 등 참모의 단물만 쪽쪽 빼먹은 '지구전'스타일 압박이 매우 효과적이었고 전황 또한 잘 나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전풍/저수의 '지구전' 전략과 상반되게 곽도의 조언을 들어 순우경이 군량을 지키는 오소 구원보단 조조의 본진을 격파하는 '속공' 전략으로 바꿨는데, 바로 이것이 치명타가 됐고 결국에는 전풍과 저수의 전략을 끝까지 관철시키지 못해서 대패했다고 볼 수 있다. 저수가 애초에 순우경에게만 병량을 맡기는 것은 위험하니, 장기에게 별동대를 인솔하게 하여 수비에 치중하라는 진언을 했으나 원소가 이를 무시했고, 또한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는 모험적인 공세보다는 이미 우위를 점한 전세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순우경에게 구원병을 보내 수비에 치중해야 된다는 진언 또한 흘러 들으니 결정적인 판단 미스를 한 셈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조조와의 대결 시기를 냉정하게 보면 역시 전풍과 저수의 이각/곽사 내분 때 조조 대신 천자를 옹립하라는 진언을 무시하여 가장 이상적인 타이밍을 놓치게 됐고 이것은 명백히 원소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넓게 보면 전풍과 저수의 말을 안 들어 망했다는 평이 얼추 성립하기는 한다.[28]

6.4. 오로지 허유의 배신 때문에 진 것인가?

일단 분명한 것은 허유가 원소군의 군량 수송대가 주둔하던 오소의 정보를 조조에게 제공하며 급습하게 해 조조의 역전승에 공헌한 것은 맞다.

그러나 장합의 주장대로 주력군을 오소로 지원을 보냈다면 조조의 주력군을 전투에서 격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장합 말 들었으면 조조군이 마냥 졌을 것이라는 말은 아닌 것이, 조조군은 일단 오소 수비군+경기병 지원군을 모두 격파를 했고, 무제기의 묘사를 보면 경기병 지원군은 전투가 한창일 때 도착한 것으로 보이는데, 만약 주력 부대가 지원군으로 왔다면 당연히 경기병 부대가 도착한 시간보다 늦은 시간에 도착할 것이고 이럴 경우 본대가 도착했을 때 이미 조조군이 군량을 불태우고 떠났을 가능성이 있다.

군량 보급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조조가 백마현과 연현의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청야 전술을 펼치면서 원소군은 군량을 대부분 자기 세력에서 운반해와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조군에 의해 고시에서 군량 수천대가 불탔는데, 이 군량의 양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만약 오소에 있는 군량이 정상적으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원소군은 당장 먹을 식량조차 없는 상황이 곧 들이닥칠 예정이었다. 조조군이 오소를 습격하여 군량이 손실된 이상, 원소는 더이상 관도에서 전선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결국 조조 본대를 잡는다 하더라도 조조만 살아서 도망간다면 조조는 다시 관도를 수비하면 되고, 군량 문제가 생긴 원소는 곧 퇴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곽도의 참언으로 인해 장합이 배신하여 피해가 확대된 것은 맞으나, 고시와 오소에서 2연타로 군량을 잃은 시점에서 원소의 캠페인은 성공으로 끝나기 어려워진 것이다.

결국 오로지 허유의 배신 때문에 진것은 아니고 여러가지 스탭이 꼬이고 원소군의 내부 문제까지 더해져서 일이 꼬이게 된것.

6.5. 천하의 대세가 완전히 판가름 났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관도대전은 원소와의 전투에서 조조에게 상당한 이점을 가져다 준 것은 맞다. 그러나 천하의 대세가 이걸로 결정났다고 주장하는 건 매우 성급한 주장이다. 결정적으로 조조는 원소 사후 원소 세력을 정벌하여 여양(黎陽)을 점령하고 내친 김에 업(鄴)까지 공격하려다가 원상의 역격에 패배한 후 군을 돌려 허도로 돌아간 일이 존재한다.[29][30] 이로 볼때 관도대전 직후 뿐만 아니라 원소 사후에도 조조의 세력이 원씨의 세력을 압도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조가 원소의 세력을 멸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관도대전이 아니라 원소의 자식인 원담과 원상이 후계 자리를 두고 다투면서, 원담이 조조에게 구원을 요청한 사건이다.

관도대전이 근래 재평가를 받다보니 결정적으로 삼국의 형세가 정립된 적벽대전이 폄하받는 경우도 많은데, 단순 스펙상 최강자였던 원소를 무너뜨리고 조조를 최강자의 위치에 올려놓은 계기가 관도대전이듯이, 천하통일을 목전에 앞두었던 조조의 야망이 붕괴되고 그 위세 또한 무력화된 계기가 바로 적벽의 싸움이었다.

보통 우리가 역사를 판단할 때 '이 사건이 어떻게 된 건 필연이었다' 라고 자주 말하는데 그건 후세에서 볼 때에나 그렇고 당시에는 필연이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 중에, 여러 변수가 얽히고 섥혀 하나의 가능성이 그저 우연으로 일어났을 뿐. 최소 산업화가 되지 않은 근대까지의 전쟁은 한 차례 대형 회전에서 얼마나 잘 싸우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도 있고 전쟁에서조차 수많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 복잡한 세력의 흥망성쇠야 시작하기 전에 한쪽이 이겼다는 말은 옳지 않다. 관도대전도 적벽대전도 가능성의 변화라고 보는 게 옳다. 그냥 몇몇 사람들이 고대시대 이야기인 삼국지에 현대적인 상황을 강제로 적용시킨 게 문제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현대적인 관념을 삼국지가 있던 고대시대의 관념에다가 억지로 적용시켜서 자꾸 이런 말이 나오는 모양이다.

요약하면 원소와 조조 간의 관도대전으로 모든 게 종결됐다고 무조건 주장하는 것은 후일 발생한 여러 변수를 무시한 결과론에 불과하다.

6.6. 원소는 책임이 없는가?

당연히 원소는 군의 총통솔자이자, 전체 판도를 짠 장본인으로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인물이다.

물론 관도대전 자체가 원소군을 완전히 몰락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원소가 대국을 주도하던 상황을 완전히 놓친 것도 사실이다. 이후 원소군(원소 사후까지도)은 이전과는 달리 더 이상 전방위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수세로 몰리게 되는데, 이것만 보아도 관도대전의 영향력이 그리 작지 않은 것임이 명확해진다. 또한 원소 본인의 사망으로 관도대전의 황망한 패전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을지도 고려해야 한다.

앞서 원소가 전풍과 저수의 조언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결국 전략이 그들의 진언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지적이 있으나, 장기전을 미리 준비해서 수행하는 것과 빨리 끝내려 했는데 끝내지 못해서 피치못하게 전쟁이 길어지는 것은 상당히 다른 일이다. 청주를 다스리던 원담까지 불러왔단 점에서 원소는 최대한 많은 병력을 모아 빨리 끝내려 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처럼 빨리 끝내지 못했고, 관도까지 진격한 바람에 보급선이 길어져 조조군에게 지속적으로 타격당했고, 원소가 군을 나눠서 보낸 한순, 유비 등이 모두 조조군에게 격파당하면서 전쟁은 원소의 기대에서 벗어나게 된다.

애초에 전풍과 저수의 지구전은 1년 내내 조금씩 괴롭히자는 작전이지 모든 전력을 끌어다가 장기 대치하자는 전략이 아니다. 관도의 싸움은 결과적으로 전쟁이 늘어진 것이지 원소가 지구전을 행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전략 면에서 양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또한 내분이 일어나지 않게 조율하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란 점에서 사후 내분에 대한 원소의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7. 삼국지연의에서

굉장히 스펙타클했던 원래 정사와 달리 초반부만 빼면 더럽게 재미없는 대목이다. '정사'와 '연의'의 위치가 바뀐 게 아니다

일단 관도대전이 시작하기 전에, 그 유명한 관우의 안량과 문추 참살이 프롤로그로 나오고, 관우가 오관육참장을 거치며 유비에게 돌아가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유비의 배신에 분노한 원소가 손책과 손잡으려고 했고, 당시 곽가의 "손책은 필부의 손에 죽을 것이다." 운운을 듣고 격분해 있던 손책이 호응하여 성사될 뻔했으나, 손책이 사망하고 뒤를 이은 손권이 사실상 조조에게 회유되면서 전부 물 건너간다. 분노를 견디지 못한 원소는 기주, 청주, 유주, 병주 등에서 70만 군사를 일으켜 몸소 허도를 향해 진격하면서 관도대전이 시작된다.

원소가 전풍과 저수의 조언을 무시하고 진격하여, 심배의 지휘 아래 70만 대군의 위용이 펼쳐진다. 원소도 황금빛 투구 및 갑옷과 비단 전포와 옥띠를 두른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장합, 고람, 한맹, 순우경이 뒤를 따르며, 이에 질세라 조조도 허저, 장료, 서황, 이전을 대동하고 앞으로 나온다. 조조는 원소를 대장군에 봉한 은혜를 모르고 모반했다고 욕하고, 원소는 조조를 두고 승상을 자처하는 한나라의 도적이며 죄가 왕망이나 동탁보다 더 심하다고 욕한다.[31] 반동탁연합 이후 조조와 원소가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장면이다.

양 진영의 선봉으로 장료와 장합이 나서 4, 50합을 겨루며 조조가 감탄할 정도의 맞승부를 벌이고, 뒤이어 허저와 고람이 나와 싸우며 네 장수의 혼전이 벌어진다. 조조가 하후돈 이전에게 각각 3천을 데리고 공격하게 하지만 심배가 준비해 둔 포와 쇠뇌와 궁수들에게 쫓겨나고 초전은 조조의 패배로 끝난다.

이후로는 한동안 정사대로 진행된다. 심배가 토산과 땅굴 작전으로 관도를 공격해 보지만 유엽의 계책으로 발석거를 이용해 토산을 파괴하고 땅굴은 참호로 막아낸다. 그리고 군량이 떨어져가서 조조가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지만 순욱이 보낸 만류 편지를 읽고 관도 사수를 결심한다. 그리고 한맹의 보급대를 서황과 사환이 격파한다. 거의 다 정사에 있던 내용이고 발석거를 벽력거라고 불렀다는 내용이나 순욱의 편지 등은 정사를 그대로 인용까지 했다.

그러나 오소 전투부터 정사와 달라지기 시작하며 재미도 급격히 떨어진다. 정사에 없던 내용으로 허유가 붙잡은 전령을 통해 조조가 식량이 떨어진 것을 알아내고 이 기회에 허도와 조조 본진 양쪽을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진언하지만 원소가 조조의 속임수라고 단정하며 무시한다. 이때 정사대로 심배가 허유의 횡령을 알아내고 허유의 아들과 조카를 가두었다는 것을 보고하자, 원소가 벌컥 화를 내며 허유를 쫓아내는 탓에 허유가 배신하여 조조에게 오소를 치라고 제안한다. 웃기는 건, 분명히 앞에서 허유가 횡령을 저질렀다고 나왔는데 그건 얼렁뚱땅 넘어가고 어리석은 원소가 허유를 박대하였다는 식으로 서술되며, 허유가 분을 못 참아 자결하려다가 주위의 만류를 듣고 마음을 바꾸는 내용까지 넣으며 띄워준다.

그리고 정사에서 관도대전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던 오소 전투는 굉장히 싱겁게 진행된다. 조조 군이 원소군으로 위장하니 다들 깃발만 보고 의심을 안 하고 보내주며, 오소에 도착해 불을 지르고 공격하니 원소군은 아주 싱겁게 전멸해 버린다. 심지어 순우경은 술에 취해 자고 있었고 불길을 보고 튀어 나오자마자 포로로 붙잡혀 버린다. 이 와중에 원소는 천문을 보고 오소 방비를 주장하는 저수의 진언을 또 씹으며 찌질함을 보여준다. 정사의 명언으로 꼽히는, 조조가 "적군이 등 뒤에 이르거든 말하라!"라고 한 말도 나오기는 하는데, 조조가 일방적으로 이기고 있었기에 정사의 극적인 느낌이 없다. 장합이 관도를 공격한 것도, 장합 본인은 오소를 구원할 것을 주장했는데 곽도가 관도를 공격하자고 우겨서 원소가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해놨다. 오소에는 장기를 보냈는데, 장기 역시 조조군이 오소의 패잔병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믿고 지나치다가 장료와 허저에게 순살당하고, 조조가 장기의 이름으로 '오소에서 조조군을 물리쳤다.'라고 거짓 보고를 보내니 원소는 그걸 또 믿는다. 대체 원소군은 피아식별 체계도 없는 것인지 안 물을 수가 없다. 그리고 장합과 고람은 길목을 지키던 하후돈, 조홍, 조인과 뒤에서 귀환한 조조군에 박살이 나서 도망친다.

순우경은 조조에게 코와 귀와 손가락을 다 잘린채 말 위에 묶여서 원소의 진영으로 보내진다. 순우경이 취해서 졌다는 것을 안 원소는 순우경을 당장 참한다. 그리고 책임을 물 것이 두려웠던 곽도는 장합과 고람이 애초에 투항할 생각이었기에 사력을 다해 싸우지 않았다고 간하니까 원소는 그게 사실이라면 둘을 죽이겠다고 노발대발하고, 곽도는 여기에 장합과 고람에게 원소가 그들을 죽이려한다고 몰래 전해서 불안감을 부추긴다. 그 결과 귀환 명령을 전하는 원소의 사자를 고람이 베어죽이고 장합에게 투항을 주장했고, 장합도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내 흔쾌히 받아들여 조조군에 합류한다.

조조의 환영을 받으며 합류한 장합과 고람은 다음 전투에서 선봉을 자처해 원소군의 태반을 궤멸시킨다. 오소에서 전멸한 건 보급대 뿐이니까 원소 군은 아직도 수십 만이 그대로 남아있을 텐데, 그걸 태반을 전멸시켰다는 묘사는 한두 줄로 매우 짤막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순유의 계책으로 원소의 본진인 업과 퇴각로인 여양을 동시에 공격한다고 헛소문을 내고, 원소가 여기에 넘어가서 군사를 둘로 쪼개자 조조는 이를 각개격파하여 승리를 거둔다. 이렇게 원소는 갑옷도 못 입고 원상과 함께 도망치고, 이에 장료, 허저, 서황, 우금이 쫓아오자 문서와 의장과 금은보화도 다 내팽개치고 정사대로 800기만 데리고 달아난다.

관도대전 이후로도 조조가 원소를 계속 공격하고, 원소 사후 원담과 원상하고도 삼파전을 벌이며 결국 원소 세력을 전멸시킨다. 이 대목도 특기할 것이라고는 별 거 없고 조조의 계책에 원소와 원담과 원상이 멍청하게 당하면서 군사를 날려먹는 패턴의 반복일 뿐이다.

결국 초반부만 스펙타클했지, 정작 하이라이트인 오소 전투를 허무하게 끝내버리고, 정사에도 없는 원소의 추태와 패전을 추가하며 완벽하게 조조의 일방적인 승리로 만드는 바람에 긴장감이 없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 조조는 압도적인 능력을 겸비한 악역으로 자리잡은 상황이고, 원소는 반대로 세력만 컸지[32] 늘상 허당스러운 모습과 실책을 연이어 범하는 덜 떨어진 인물로 그려져 왔기 때문에 누가봐도 당연히 조조가 이기겠거니 생각하기 마련이라 긴장감이 전혀 살지 않는 것. 연의의 관도대전은 쉽게 말해 잘난 악당이 숫자만 많은 멍청이들을 때려잡는 내용이다. 이기는 쪽도 지는 쪽도 독자들은 응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다.

이런 이유로 연의에서 관도대전과, 그에 뒤이은 조조의 하북 평정은 인기가 없는 파트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연의 기반 창작물에서 관도대전을 잘 다루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8. 기타 창작물


관도대전은 삼국지 창작물 중에서도 유독 잔혹한 묘사가 주류인 전쟁이다.
물론 어떤 전쟁이 안 그러겠냐마는 관도대전은 특히 더 잔인해서, 각 미디어마다 관도대전을 묘사할때는 유혈이 낭자한 장면이 더욱 더 많이 나온다.

대표적으로 84부작 삼국지에서는 조조군이 원소군의 토산을 뚫기 위해 투석기를 쓰는데, 돌에 맞은 원소군의 머리가 터져나가거나, 돌덩이에 깔려 죽거나, 돌무더기 속 시체가 파묻히는 묘사와 오소 군량고를 불태울때 일방적으로 몰아넣고 학살극을 벌인다.

창천항로역시도 전권을 통틀어 무지막지하게 잔인한 장면이 수두룩하니 주의할 것. 예를 들자면 관도에서 역공하는 조조군의 피범벅이 된 모습이나, 순우경이 진군하는 조조군에 맞서 칼을 빼들고 싸우다가 입이 찢어지고 목이 잘려 내던져지고, 수만의 원소군이 인간을 포함해 가축까지 모조리 참수되어 불길과 함께 우마차에 실려진다. 국내판은 수정이 되어있는데도 섬뜩하다.

최훈의 삼국전투기역시도 그림체와 개그컷으로 넘어가지만, 어물쩡거리는 묘사의 서주 대학살과 다르게, 오소 습격이후 죽은 시체의 코와 머리를 잘라서 수레에 담아 원소에게 보낸다거나, 모탈 컴뱃을 패러디해서 페이탈리티로 원소 몸통을 두동강내 죽인걸로 표현했다.

8.1.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 역경전투와 함께 가볍게 뛰어넘어버린 전투로 설명과 원소군이 패해 강에 빠지는 장면 하나만 나온다.

중국 대륙의 세력 판도에 변화가 있어 조조가 차례로 적들을 제거하고 그 지위를 굳혀 나갔다면서 원소를 쳐부순 뒤부터 그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데, 원소가 군비, 병력이 조조보다 훨씬 능가했지만 관도의 싸움에서 조조의 기력에 넘어가 궤멸당했고 그 여세를 몰아 조조가 몇 년에 걸쳐 북방의 원씨를 쳐부쉈다는 식으로 짧게 언급된다.

요코하마 미츠테루 삼국지는 연재 형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편집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삼국지의 인기 주인공인 유비나 제갈공명과 무관한 장면들은 짤린 경우가 많다. 80년대 대한민국에서 제작된 인형극 삼국지의 경우도 관도대전을 비롯한 앞부분 내용은 설명조차 없이 바로 건너뛰고 삼고초려로 넘어간 전력이 있다.[33]

애니판에서는 젊은 날의 공명이 3자의 시점으로 보는 것으로 해서 꽤 자세하게 관도대전을 다뤘다.

8.2. 창천항로

창천항로의 경우 관도대전 도입부가 그려지던 시기에 스토리 작가였던 이학인 씨가 투병생활 끝에 사망한 탓에 관도대전 초반과 중, 후반의 인물묘사, 사건전개 등이 큰 차이를 보이며[34], 끝맺음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은 비판을 받았다.

전체적으론 왕이 될 자로서 포용심,기개,사랑,자애 등으로 가득 찬 원소와 그에 감화된 원소군 Vs 궁지에 몰린 채 투지와 악으로 가득 찬 조조군의 대결로 그려진다.

역시 조조 찬양으로 가득 찬 작품답게 관도대전 시작부터 조조의 신묘한 군략으로 안량과 문추를 처리하나, 원소는 이에 개의치 않는 왕이 될 자로서 기개[35]와 압도적인 물량으로 밀어붙인다. 워낙 조조군과 원소군 간의 전력에서부터 차이가 나다보니 조조가 장수들은 병졸로, 참모진들은 서기관으로 강등 시킨다.[36]

조조군을 물량공세로 밀어붙이던 원소군이었지만 삼남 원상부터 아버지 원소에 영향 받아 끝없는 긍정으로 기강이 해이 해졌으며, 큰 비로 인해 땅굴이 무너지고 강이 범람해 수송중이던 군량을 크게 잃으며 흔들리게 된다. 거기에 다시 조조군이 강등했던 장군과 군사들을 다시 복직 시키고 반격에 나서자 원소군은 그나마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장남 원담과 아버지 따라 황제병 걸린 삼남 원상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고시의 식량고가 불타자 원소군의 불안이 커졌고 이를 타개하고자 허유가 거짓으로 조조에게 투항해 오소로 유인하려 한다. 그러나 조조가 직접 3천 군사와 허유, 가후를 이끌고 오소를 야습해, 역시나 조조의 신묘한 계책과 이를 이해한 가후의 지략으로 3천 군사로 아무 피해 없이 순우경을 죽이고 오소를 접수한다. 이에 살아남은 오소의 원소군들이 조조에게 항복하지만 조조는 청주병들을 동원해 항복을 받지 않고 원소군을 모두 학살한다.

다음날 오소의 함락 소식이 원소군에게 알려졌으며 이에 삼남 원상은 업으로 퇴각을, 장남 원담은 역으로 총 공세를 건의하나 원소는 전쟁도 왕도도 승리도 사라진 하늘의 마음이라며 그냥 싱긋 웃고 말아버린다. 이에 원담과 원상 모두 할말을 잃어버렸다. 이때 순우경부터 오소에 있던 병사들과 소와 말의 머리까지 실어진 수레가 원소군 진영에 도착하며 동시에 사방에서 청주병들이 나타나 원소군을 포위하자 원소군 전체가 모두 멘붕해 버린다.

결국 이 싸움으로 원소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고 원담은 원소를 데리고 토굴을 통해 본영 아래까지 당도하나 토굴이 무너지고 그 위로 보이는 건 조조의 얼굴이었다. 이후 조조가 원소에게 국화로 보이는 꽃 한송이를 던져주고 원소가 그것을 받으려 하지만 꽃잎이 원소의 손안에서 흩어지고 이후 초토화된 원소의 본영에 말을 타고 있는 조조의 모습이 보여지면서 관도대전이 막을 내린다.[37]

그리고 창천항로 전권을 통틀어 무지막지하게 잔인한 장면이 수두룩하니 주의할 것. 예를 들자면 관도에서 역공하는 조조군의 피범벅이 된 모습이나, 순우경이 진군하는 조조군에 맞서 칼을 빼들고 싸우다가 입이 찢어지고 목이 잘려 내던져지고, 수만의 원소군이 인간을 포함해 가축까지 모조리 참수되어 불길과 함께 우마차에 실려진다. 국내판은 수정이 되어있는데도 섬뜩하다.

이후 원소군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나오지 않으며 잠시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한 유비의 이야기와 삼고초려로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한 이야기 후에 조조가 원소가 죽은 뒤[38] 건안 9년부터 11년까지 원소 북방의 4주를 정복했다고만 짧게 표현된다.

관도대전 이후에도 강성했던 원소 세력과 원소 세력을 조조가 흡수하기까지 걸린 오랜 세월과 과정 대한 묘사가 일절 없이 한 컷에 짧은 설명만으로 북방4주 정복을 묘사하여 마치 원소가 관도대전 직후 멸망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작품 내에서 삼국지 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는 부분 중 하나다. 하지만 이후 유비의 도피와 천하삼분지계의 이야기가 매우 비중 있고 임팩트 있게 묘사되는 걸 보면, 작가 입장에서는 관도대전 이후 유비의 성장과 조조-유비-손권의 3강 체제 성립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원소의 패망을 통째로 날려버린 듯 하다.[39]

애니메이션 판도 관도대전 중간에 끝나버린다. 조조가 문추를 낚아 죽인 것까지만 나오고, 이후 관우를 죽이려고 벼르던 장비와[40] 조조의 밑에서 심적 갈등을 겪으며 미쳐 날뛰던 관우가 서로 달려들고 유비가 말리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나레이션으로 때워버리고 만다.

8.3. 화봉요원

화봉요원의 경우 수경팔기의 맏이인 원방이 조조 휘하의 사제 곽가, 가후, 순욱과 맞서는 상황이기에 상당히 오랫동안 연재가 진행되었다. 여기서는 조조군이 백마와 연진에서 선전했지만 이후 벌어진 야전에서 원방의 풍후팔진도 앞에 패배, 결국 관도에 틀어박혀 우주방어에 들어간다. 순욱이 부상 당하고 가후가 여남에 발이 묶인 상황에서, 기존의 모든 공성법을 총동원하는 원방을 상대로 곽가와 순유가 겨우 버티고 있는 판국. 조조군은 원방의 계략으로 인해 내부 곳곳에서 내통자가 드러나고 있고, 우위를 유지하고 있는 원방 또한 원가의 다른 후계자들의 견제를 받고 있어 양쪽 다 위태로운 상황이다.

한편 사마의는 자신의 동문인 허원을 통해,원방의 심복인 허유와 접선, 그의 전향을 유도하고 원방은 이를 역이용한 함정을 파는데…… 원방과 허유의 대사에 따르면, 오소에 군량이 있다는 건 화계를 위한 함정이고 진짜 군량고는 고시에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관도대전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고시 쪽이 함정이었다. 결국 원방은 허유를 버리는 말로 써서 함정을 파 조조를 유인한 것. 오소도 함정은 함정인데, 원소와 그 세 아들을 위해 준비한 함정. 공 때문에 티격태격 하던 원담과 원상이 고시에서 철수해 오소로 몰려오고 때마침 원소가 시찰중이었는데, 뒤늦게 도착한 원희가 고시 쪽이 진짜 함정인 줄 모르고 오소에 모여있는 원소군이 자군으로 변장한 조조군이라 착각,자기 형제들과 아버지가 있는 오소에 화공을 가했다. 즉 원방은 고시와 오소 양쪽에 함정을 파서, 숙적 조조와 경쟁자인 형제들, 그리고 애비까지 날려버리려고 한 것이다. 원소가 원방더러 원가를 잡아먹고 커지라고 운을 뗀 적이 있긴 하지만, 원소 자신도 이 정도로 거대한 스케일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그리고 고시를 급습한 조조는 장료가 변장한 것이었다. 결국 원방이 예기치 못한 급습으로 죽고 관도대전은 원소측의 패배로 끝난다.

8.4. 신삼국



신삼국에서는 조조가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원소를 불러 회담하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끈다. 조조는 원소에게 "형님"을 연발하며 비굴할 정도로 원소에게 저자세로 나오고 화친을 청하면서 황제 헌제를 화친의 예물로서 전장에 데려오기까지 했다. 이외에도 데려온 궁녀들로 원소군 병사들과 장수들에게 술까지 대접하게 하기도 했지만, 이는 모두 조조의 계책. 원소는 신나서 황제로는 부족하다며 허도까지 내 놓으면 화친에 응해주겠다 한다. 원소가 낚이자 신난 조조는 더 비굴한 자세로 장단을 맞춰주고 한다.

그 사이에 해는 중천에서 내려오고, 조조는 저자세에서 갑자기 거만하게 걸터 앉아서 '내가 니라면 화친대신 관짝이나 하나 짜겠다! 왜냐면 내가 살아있는 한 내가 반드시 이기니까!'라고 원소를 비웃으며 진영으로 돌아간다. 이때 해맑은 표정으로 목을 돌리며 원소를 조롱한 후 뒤뚱 뒤뚱 돌아가는 개그씬은 덤. 햇빛이 원소군의 시야를 정면으로 맞게 되자, 원소군은 정면을 주시하기가 어려운 지경. 조조는 그동안 철기가 원소군의 배후로 돌아가 치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해서 1차전을 승리로 이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조조의 목 돌리기가 등장. 중간에 궁녀들이 투입돼서 원소군 선두 기병들에게 술을 따라주는 장면들이 있는데 한국 더빙판(KBS)에서는 웬일인지 이 장면을 잘라 버렸다. 대신 1차전에서 패배한 원소가 이때의 조조의 계책을 말하는 장면에서 거론되긴 한다. 그러나 8화로 압축한 극장판에선 이 장면이 나온다.

이때 유비는 원소의 은혜를 갚고자 3천 군사를 끌고와 조조군의 추격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준다. 덕분에 원소는 패잔병들을 규합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차전에서 패했지만, 원소는 패잔병을 모아 40만 대군을 회복했고, 다시 조조와 일대 회전을 벌이려고 한다. 조조군은 군량이 다했고 더이상 싸움을 계속하기 어려울 지경. 그러나 배신해서 조조 진영으로 온 허유는 오소 군량 저장처를 알려주고, 조조는 이것이 진실임을 꿰뚫어보고 야습을 실시한다. 오소에 조조군이 기습해왔다는 소식을 들은 원소는 묘안을 낸답시고 오소를 구원하는 대신 비어있는 조조 진채를 기습하지만 조조는 이것도 미리 예상하여 함정과 복병을 남겨두었고, 원소군은 이들에 의해 대패한다.

원소는 다시 도주하지만 허유가 숨겨놓은 복병에 걸려 다시 많은 군사를 잃었다. 후에 황하에 이르렀을 때 남겨진 병사는 100여 명이 안 된다는 것을 알자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이후의 원소의 죽음과 아들들의 내분 등의 긴 스토리는 모두 생략하고 원소가 죽은 후, 조조가 원소일가를 멸하고 4개 주를 평정했다고 나온다.

8.5. 영걸전 시리즈

8.5.1. 삼국지 영걸전

유비군이 직접 가세하지 않아서 관도대전에 참전할 일은 없지만, 관우가 안량과 문추를 잡으면서 유비가 원소에게 소환되는 이벤트가 구현되었다. 여기서 대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유비가 사망하는 배드엔딩이 될 수도 있지만, 삼국지를 본 사람이라면 수월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 물론 삼국지를 보지 않았거나 너무 오래 전에 봐서 기억이 안 나더라도 대사를 확확 스킵하는 타입이 아닌 이상은 살아남는다. 유비의 참모격인 손건이 원소를 독대하면 이렇게 답하라고 미리 언질을 주기 때문.

이후 유비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곽도가 쫓아오는데, 여기서 조운과 재회하면서 가까스로 도망에 성공한다.

원소군과 조조군의 대결은 겁에 질린 원소와 조조군에게 학살당하는 원소군이 나오는 CG 및 나레이션으로 언급된다.

8.5.2. 삼국지 조조전

거대 결전답게 적벽대전이나 최종전에서도 쓰이는 웅장한 느낌의 bgm이 흘러나오는 첫 전투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 허유[41]가 조조군에 투항하려 들고, 여기서 선택지에 따라 전투를 다양하게 진행할 수 있다.

역사대로 허유의 진언을 받아들여(1) 군량고를 털고 순우경을 잡아죽이면 모든 적부대의 방어력이 감소하게 되어 쉽게 승리할 수 있고, 허유의 의견을 무시하고(2) 정공법으로 상대할 수도 있고, 허유를 처단한다(3)를 선택하면 허유가 원소군 진영으로 되돌아가 조조군이 군량고를 노릴거라고 원소에게 보고하여 원소가 군량고에 적군 상당수를 보내게되어 원소의 본진이 허술해질때 빈집을 털어버릴 수도 있다. 허유의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허유의 의견을 무시하고 정공법을 택할 경우 조조가 허유를 주군을 배신한 자라며 감옥에 가둔다. 또한 여기서는 고람이 사망하는 설정으로 나온다.[42] 오소의 적을 공격하는 타이밍에 조조와 고람을 인접시켜 두면, 고람이 당황할 때 조조가 어딜 한눈 팔고 있냐며 칼을 휘둘러 고람을 죽인다. 일기토 없이 필드에서 바로 벌어지는 이벤트. 허저는 장합에게 일기토를 걸어 퇴각시킬 수 있다.

8.5.3.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조조 뿐만 아니라 원소의 시점에서도 묘사되는데, 원작을 재현한 조조전에서는 변경된 점으로는 패배 조건으로 아군의 본진이 점거당하는 것이 추가되었고, 조조와 고람이 접근하면 고람이 퇴각한다.

원소전에서는 조조, 하후돈, 하후연, 장료가 군량고가 있는 오소를 공격하면서 혼란에 빠지며, 군사를 조조군의 본진으로 보낼지, 오소를 구원하러 갈지 선택지가 등장한다. 승리 조건으로 조조를 격파하는 것 이외에 조조의 본진을 점령하거나 전투 도중에 퇴각해 피신하는 것 등이 있다.

조조를 격파하면 군량 부족으로 원소가 조조를 물리쳤지만 군량 부족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조조군의 공격을 받아 원소군이 격파되었다고 설명되며, 원소가 피신하면 패배로 인해 힘들어하는 것으로 나온다.

8.6.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중요한 전투답게, 삼국지 6부터 이벤트로 구현되거나 파워업키트의 전투 캠페인으로 나오거나 하는 식으로 꾸준히 등장한다.

시나리오의 경우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이벤트빨을 안 받아도 조조가 더 유리한 경우가 흔하다. 안량과 문추가 이미 관우에게 죽었고 전풍이 옥에 갇혀 안 나온다면 상황은 더 절망적이다. 인재풀 외에도 주변 인프라 역시 원소에게 웃어주지 못하는데, 조조의 경우 억지로 원소가 세력 구도의 유리함을 잡아주기 위해 주변의 대도시들을 공백지로 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플레이어가 잡으면 점령해놓고 최소한의 인원으로 효율을 뽑아내 전선을 최소화하고 자원을 끌어다쓰기 때문에 역시 조조에게 유리한 부분. 반면 원소는 이미 하북을 죄다 점령했다는 묘사 때문인지 손쉽게 세력을 확대할 공백지가 없으며, 그나마 요동/양평의 공손도가 있으나 중소도시로 나오므로 굳이 공손도를 먹자고 원정을 가는 건 비효율의 극치다. 원소 진영으로 플레이할 시에는 마등, 유표, 손책과의 외교를 잘 풀어내거나, 전풍과 저수의 의견따윈 무시하고[43] 초반 압도적으로 벌어져있는 자원차를 바탕으로 조조가 점령한 대도시인 허창과 낙양을 점령해 조조의 역량을 반토막내는게 속편하다. AI 원소 VS AI 조조간의 대결에서는 역사 이벤트만 꺼 놓으면 조조가 4컬러 러쉬를 받고 망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조조의 우월한 인재풀을 코에이 삼국지 특유의 저급한 인공지능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

유비 세력은 관도대전 시나리오에선 아예 세력으로 안 나올수도 있고, 여남 하나만 차지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역사 이벤트를 거쳐서 여남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다. 예외로 삼국지 5, 6에서는 장비가 여남에서 군주로 나온다.

삼국지 10에서는 이벤트로 중원지방에서 전역을 치르게 된다.[44] 전역 특성상 한쪽지방을 모두 점령할 때까지 하게 되는데, 원소군 입장에선 공격군이고 중원 지방의 영토라곤 이벤트 개시직후 공백지에서 원소군으로 편입되는 하내를 제외하면 영토상 손해는 없는데, 전역에서 이기면 조조의 영토는 장안 꼴랑 하나만 남게 된다. (연주의 복양, 진류, 서주의 소패, 하비, 예주의 허창, 사예의 낙양 총 6개.) 기본 전력차도 크지 않은 상황이라 승리하면 천자도 옹립하고 전역에서 이기면 해당 도시 장수들은 모두 포획되기때문에 천하는 원소꺼. 조조군 입장으론 불리한 상황이지만 조조와 허유(재수없으면 허유가 전역에 출진하지 않는데, 이러면 난이도가 올라간다)를 인접시킨다음 관도(거점)에 가면 오소의 군량고를 태워버리고 장합, 고람의 항복으로 승리. 이후 계속 원소를 격파하고 원소 병사-원담과 원상이 대립하는 이벤트로 이어진다.

삼국지 11에는 관도대전 시나리오와 파워업키트의 결전제패 모드에 관도대전 본편이 구현되어있으며, 콘솔판의 스테이지 시나리오에 전초전인 백마 전투가 나온다. 관도대전 시나리오의 경우 유비가 배반으로 막 떨어져나가고 장수가 항복하기 전이라 이전 시리즈에 비해 조조가 상당히 불리한 구도이긴 하나, 대도시인 장안-낙양-허창 라인을 모두 쥐고있는데다 진류와 복양도 중도시라 내정 시설물 수는 원소와 거의 엇비슷[45]하며 오히려 내정을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 장수가 많이 필요한 삼국지 11의 특성 상 오히려 조조가 고점에 도달하는 시간이 더 빨라진다. 다만 초기 병력 수는 거의 2:1에 가깝게 원소가 많으므로, 이 병력을 활용해 원소가 초반에 몰아쳐야 되는데, 이전 시리즈와는 다르게 허창이 최전선과 멀어서 안전한데다 낙양은 항구로 이어져있긴 하나 거리가 꽤 멀어서 초반러쉬가 상당히 힘들다. 반면 조조를 플레이하면 전선관리가 어려워보이나 장수만 빠르게 병탄하고 인접한 공백지들을 빠르게 선점하면 대도시인 허창과 낙양은 내정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이후 세력확장에 큰 지장이 없으며, 오히려 손책과 인접해있지 않으므로 손책과 동맹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외교전에서도 전혀 불리하지 않다. 결전제패와 콘솔판의 스테이지 시나리오에서 둘 다 담당 세력은 조조군, 관도대전은 일단 시작하면 병력이나 기력 모두 열세라서 전법이나 계략으로 적의 진군을 늦출 필요가 있는데, 적 수송대를 턴 다음 허유가 투항해 오소 군량고 (여기서는 복양 서쪽 끄트머리 땅에서 요새로 등장한다) 의 정보를 불어 파괴하는 데 성공하면 원소군 전원이 혼란에 빠진다. 이때 원소를 집중공략해 퇴각시키면 캠페인 클리어. 오소 기습용 별동대로는 사정 특기에 정란부대로 출전한 이전 부대가 적합하고, 오소 군량고 등장과 동시에 유비와 유벽과 조운이 복양을 노리고 북상하므로 수비부대로 남은 조인과 하후연의 배치에도 신경써야 한다. 백마 전투는 조조에게 잠시 의탁한 관우가 활약해 안량과 문추를 쳐부수는 내용인데, 창병이 전법을 쓸 수 없는 모래땅에 들어가지 않게끔 보조하며 그 둘만 깨뜨리면 클리어 할 수 있다.

삼국지 12에서는 관도대전 시나리오가 있으나… 안량, 문추가 시나리오 오프닝에서 전사하며 관우가 조조 진영에 있다.

삼국지 13은 게임특성상 전체적으로 조조가 더 유리하다. 장수의 질은 물론이거니와 초기 병력면에서도 조조가 앞선다. 게다가 주변에 빈땅이 많아서 이후 병력 동원에서도 유리해진다. 특이사항으로는 관우가 조조 진영에 있고 유비는 원소진영에 있다. 하지만 유비의 충성도가 낮아서 그런지 이벤트를 보지 않게 하면 순식간에 조조진영으로 스카웃된 유비를 볼 수 있고 또 장비와 조운이 조조 땅에 있기때문에 자동적으로 등용되어서 최강 장수진영을 구축하는 조조군을 볼수 있다. 이벤트를 진행하면 유비 휘하 장수들은 여남으로 독립한다.

8.7. 진삼국무쌍 시리즈

보통 시나리오 초 ~ 중반에 끼어 있는 전투라 난이도는 별로 높지 않다. 조조를 한없이 띄어 주는 한편 원소를 반비례하게 가문의 영광에 집착하는 꼴통으로 까내리는게 특징이다.

진삼국무쌍 2에서는 조조군 시나리오면 목표가 되는 원소군의 식량고 4개중 하나만이 진짜고 할때마다 랜덤이라는 특이한 요소가 있다. 또한 원소군 시나리오에서 서황 소속 클론 무장 사환의 모델링이 장군급도 아닌 일반 병졸이라는 괴현상이 있다. 잡졸들 잡다 그 잡졸들 사이에 섞인 사환이 이미 죽어있어서 "적장을 해치웠다!" 가 떠버렸다는 황당한 사태를 겪어본 유저가 적지 않았으리라. 맹장전에서는 제대로 장군 모델링을 줬지만.

진삼국무쌍 3의 경우 연의 재현도가 매우 높은 것이 특징. (조조군 시나리오 기준.) 안량에 의해 백마 고전 → 관우가 안량 격파 → 문추에 의해 연진 고전 → 관우가 문추 격파 → 관우가 유비를 확인하고 전선 이탈 → 원소군의 총공격으로 조조군 후퇴 → 오소 격파로 역전의 완벽한 라인. 처음에 오소가 있는 북서쪽 위치는 텅 비어 있다가, 만총이 지키는 연진, 혹은 우금이 지키는 백마 중 한 곳이 함락된 후 조조군이 관도성으로 철수하여 수비하고 있다 보면 원소군의 충차대가 관도성 파괴를 위해 등장하고 오소 자리에 순우경 부대가 나타난다. 안량, 문추를 잡고 백마와 연진을 수비해 낸 후 진군하거나, 만약 백마나 연진이 함락된다면 관도성으로 오는 원소군의 충차를 막아낸 뒤에 오소를 공략하면 승리로 연결할 수 있다. 단 조조군 1회차의 경우 반드시 충차 출현 이후 오소 공략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장합이 조조군으로 투항하는 이벤트가 발생하기 때문. (안 해도 적벽전투 클리어 이후 합류하긴 한다.) 오소 공략시 본진에 있던 조조가 직접 나가는데, 조조가 오소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면 일반적으로 관도성이 붕괴된다. 플레이어가 빨리 순우경 및 원군으로 오는 여위광을 잡아줘야 한다. 프리 모드에서는 해당이 안 되지만 무쌍 모드일 경우 하비 전투를 클리어하지 않고 관도 전투를 선택하면 여포가 난입해 조조에게 뒷치기를 가한다. 이는 3편 무쌍 모드 특징인 특정 전투를 클리어하지 않았거나 다른 전투를 먼저 클리어했느냐에 따른 변화 요소 때문이다.

원소군 시나리오에서는 오소의 순우경 부대가 처음부터 등장하고, 관우가 안량과 문추의 목을 받고 나서도 다른 장수들까지 잡으러 다닌다. 보통 문추 근처에 있는 원상까지는 그냥 잡혀버린다. 관우가 안량과 문추를 직접 격파하는 조조군 시나리오와 달리 이쪽은 이벤트 취급이라 조우 후 시간 조금 지나면 그 무장이 자동으로 죽는다. 이를 멈추는 방법은 유비와 접근시키는 것. 그게 아니면 직접 격파해야하는데 이때의 관우는 호로관 메뚜기급으로 강회된 상태인지라 충분히 키워놓은 캐릭터가 아니면 좀 버겁다. 물론 3의 관우는 통상타+무쌍난무만 좋은 캐릭터라 메뚜기보단 훨씬 쉽지만… 웬만하면 그냥 놔두자. 관우와 아예 만나지 않으면 99%로 원상까지만 잡고 빠진다. 이후에는 연진과 백마를 함락시킨 후 밀어붙이면 승리는 어렵지 않다. 중간에 오소 기습대가 등장하는데 이 역시 어렵지 않게 격퇴가 가능. 한가지 재밌는 건, 프리모드에서 원소군으로 플레이할 때 오소 함락 이벤트가 뜨면 장합이 배신한다는 점이다.

진삼국무쌍 4에서는 맵 좌우 양쪽에 백마와 연진이 거점으로 준비되어 있고 중앙에는 원소군의 병량고 오소가 있다. 나름 맵도 큰 편이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할 필요가 있는 전투이다. 안량과 문추가 원소군에 있지만 둘 다 관우에게 당한다. 3편에서는 일반 전투이지만 이번에는 이벤트로 처리되어 그야말로 광속 끔살된다. 관우는 두 명을 베고 조조의 은혜를 갚았다고 말하고 나서 후방으로 빠진다. 유비와 관우가 만나면 각자 후방으로 빠진다. 한쪽이 격파당하면 다른 한쪽은 전장을 이탈한다.

원소군 시점에서는 일단 재빨리 관우를 잡아내야 한다. 백마성 쪽에서부터 안량을 향하여 진격하는 관우를 안량이 다치기 전에 잡아내고 곧바로 유연을 격파하여 백마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하후돈 부대 앞의 방어거점인 연진을 떨어뜨리면 그 뒤는 파죽지세이다. 관도성 앞에 출현하는 아군 정란을 지키면서 기다리다가 성문이 열리면 진격하여 역적 조조에게 명문 원가의 힘을 똑똑히 보여주자. 참고로 이게 원소유니크 무기얻는 조건이다. 정확히 안량과 문추가 견제할때 관도성을 함락시키는 조건이다. 근데 정작 조조군은 유니크 무기얻는 무장이 없다.

조조군 시점에서는 왠지 관우가 안량만 잡고 유비와 만나 물러난다. 어찌 보면 정사를 따른 것일수도 있겠는데 원소군 시나리오에서는 관우가 안량을 격파하면 문추가 관우에게 돌격했다가 끔살당한다… 총대장 조조가 시작부터 백마 쪽에 나가 있는데, 관우가 안량을 격파한 뒤부터 백마쪽은 크게 신경써줄 필요 없다. 가만 놔두면 조조가 50명 격파했다는 메시지가 곧잘 들려온다. 다만 중앙의 연진이나 관도성 서문쪽은 적군의 부대 수가 많고 사기도 전반적으로 높아서 한쪽을 막고 있다 보면 다른 한쪽이 뚫려 약간 힘들 수도. 연진이나 백마가 적군에게 떨어지고 원소군이 관도성 쪽으로 진입하면 관도성 앞에 원소군의 정란이 나타난다. 공세를 막아내며 오소가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공략하여 기세를 반전시키자. 순우경을 격파하여 오소를 함락시키면 장합 부대가 아군으로 투항해 온다. (대사가 가관이다. "원소님의 멋없음은 참을 수 없어요"…) 오소가 열리기 전에 백마와 연진 양쪽이 모두 함락되면 원소군 전군이 진군해 오므로 원소 부대를 노려 격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기에서 밀리기 때문에 신속히 움직이지 않으면 아군이 차례차례 격파당하여 패배하고 만다.

진삼국무쌍 5에서는 오리지널 기준 조조군과 여포군 시나리오만 있었다가 진삼국무쌍 5 Special에서 장합 무쌍 모드가 추가되면서 원소군 시나리오가 추가됐다.

조조측으로 시작하면 백마와 연진이 북쪽에 나란히 거점으로 준비되어 있다. 원소는 엄청난 물량빨로 백마와 연진 양쪽 동시에 무장들을 보내기 때문에 거점 두 곳 모두 지키기가 빡세다. 양측 선봉장 2인 이후로는 전부 강화상태로 전진해오는 데다 안량과 문추는 극강화 버프를 걸고 나오기 때문에 데미지가 상당히 아프고, 순차적으로 줄줄히 따라오는 무장에 백마와 연진의 거리도 짧지 않아 여러모로 골치 아프다. 한쪽을 지키다가 다른 한쪽이 점거 되기 일수다.[46]

백마나 연진 둘 중 하나를 뺏기거나 관도성의 성문 2군데가 모두 공격받기 시작하면 조조군은 일단 퇴각하고 공방전이 시작된다. 그와 함께 원소군은 원래 본진에서 나와 앞쪽에 있는 거점으로 본진을 옮겨 오소의 방비가 떨어지게된다. 공방전에서 관도를 노리는 적을 모두 처리하고 원래 본진에 나 있는 뒷길로 잠입해 남은 소수의 병력을 기습하면 본진 식량고에 불이 붙고 원소군은 사기가 떨어져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게 된다. 견희가 뒷길에서 오는 플레이어를 기다리고 있지만[47] 혼자라 별 문제가 없는데다가 그냥 상대하지 않고 쌩까고 지나가버리면 그만이다. 식량고가 불타면서 클론 무장인 허유와 고람과 함께 장합이 조조군으로 배신해온다. 원소가 식량고가 불타버린 정도로는 원가의 장병들은 지지않는다고 허세를 부리는것과는 다르게 이 이후로는 큰 문제가 없어 여유롭게 클리어 가능하다.

만약 안량과 문추를 털어버리고 백마와 연진을 지켜내도 빙 둘러온 원소군이 관도를 노리기 때문에 돌아와서 공방전을 하게 되는데, 적을 처리하면 그 뒤론 일사천리. 마찬가지로 원소가 오소에서 나와 이동함으로 뒷길로 화공이벤트를 발생시킬수 있지만 백마와 연진을 지켜내고 공바전까지 완수했다면 원소군의 장수들이 거의 전멸에 가까움으로 화공이벤트를 보지 않고 그대로 원소에게 돌격해서 털어버려도 된다. 물론 화공이벤트를 진행시키면 냅둬도 원소가 알아서 털릴 정도로 더 쉬워진다. 이 쯤되면 고람과 장합 배반이벤트를 보기도 어려운데 아군의 사기가 너무 높아서 수라 난이도에서도 플레이어가 손을 쓰지 않아도 화공이벤트 전에 둘이 먼저 털려버린다. (허유는 뒷쪽에 있기 때문에 종종 그때까지 살아남는다.) 다만 주의할 점은 공방전 시작 전후에 원소가 백마와 연진으로 직접 행차하는데 너무 꾸물대다간 기껏 지켜놓은 백마나 연진이 원소에게 점거당해 전공 목표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조조군 관우로 플레이 할 때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전투가 끝나고나서야 유비를 찾아 떠나지만 관우가 CPU일 때는 성 앞에서 방어에만 열중하다가 공방전이 끝나고 조조군이 반격할때 같이 돌격하여 이벤트로 안량, 문추를 끔살한 후 전장에서 이탈. 따라서 그전에 둘 중 하나를 플레이어가 처치 하지 못하면 전공목표 한개를 놓치게 된다. 공방전이 끝날때까지 안량과 문추가 살아있다면 백마와 연진은 이미 함락되어 목표를 하나 놓친 후겠지만…

그런데 전공목표를 싸그리 무시하면 의외로 간단해서 이전 전투에서 잘 키워 놓았으면 시작하자마자 그냥 좌측으로 빠져서 거기 있는 장수 몇명만 없애버리고 가면 몇 분 안돼서 원소군 본진 도착하고 거기서 순식간에 원소 없애고 클리어 가능하다. 단 몇 분 만에. (단 잘 키워놨어도 본진에 장수들이 워낙 많아서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제갈량 같이 화계 전서를 가지고 있는 장수로 한다면 냅다 직접 불을 질러 쉽게 털어줄수 있다. 다만 아쉽게도 이렇게 직접 불을 지르는 것은 화공 이벤트 발동으로는 취급되지 않는다.

여포군 시나리오는 조조와 원소가 싸우는 전장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썰고 다닌다는 아스트랄한 내용이 들어있다. 이 쪽 스테이지는 그냥 모든 적군을 썰어버리면 되는 단순한 시나리오. 처음에는 여포의 난입에 당황하던 조조와 원소가 일시적으로 휴전하고 동맹을 맺어 여포에 대적하지만 결국 둘 다 박살난다. 15분 내로 백마와 연진을 점거하는 것만 빼면 시간 압박 없이 쾌적한 학살(?)을 벌일 수 있다.

진삼국무쌍 6에서는 위 시나리오와 촉 시나리오에 등장. 촉 시나리오때는 관우가 안량, 문추를 죽이고 난뒤 유비가 원소의 의심을 받아 원소군과 조조군 모두 다 적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를 호위해 관도를 빠져나가는 것이 목표. 딴 짓 생각하지 말고 유비 곁만 지키자. 제일 쉬운 천국 난이도조차 무공 좀 벌어보겠다고 무장 2~3명 치다보면 유비는 끔살 당해 미션 실패가 된다.

진삼국무쌍 7에서도 위와 촉 시나리오에 등장. 위 시나리오는 조조가 원소를 무너트린 후 천하로 나아가는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는 묘사를 하며, 촉은 서주 방위전에서 특정 조건을 실패하면 '관도 요란전'이라는 외전 시나리오를 진행. 6편처럼 삼형제는 물론 조운까지 만나 같이 행보를 하게 되는 전개다.

진삼국무쌍 8에서도 당연히 등장. 원소 스토리 모드에서는 서주에서 조조에게 패해 원소에게 망명하는 유비를 자객들로부터 지켜내는 전투, 어릴 적 조조와 친했던 것을 언급하면서 옛정을 버리고 조조와의 결전을 준비하는 대화 이벤트 후 관도대전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백마 연진 전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대부분의 캐릭터가 최전성기 시점 혹은 죽기 직전에서 어중간한 열린 결말로 끝을 내리는 본작인지라 백마 연진 전투에서 기선을 잡고 관도대전을 준비한다는 걸로 끝나 원소군 입장에서 관도대전을 플레이하는 건 이번에도 없다.

8.8. 삼국전투기

파일:관도 대전 삼국전투기.png

조조 유비를 토벌한 직후 원소의 진영에서 지구전을 주장하는 전풍 저수 그리고 전면전을 주장하는 곽도와 신평, 신비 형제가 대립한 끝에 원소가 얀량을 선봉으로 백마에 진격시키면서 백마전투가 발발한다.

조조는 곽가, 순유, 유엽을 통해 백마에 편성할 수 있는 병력을 확인하고 백마를 향해 이동한다. 이동 중 순유의 제안에 따라 하후돈을 연진으로 보내 안량의 군 비율을 줄이지만 안량이 송헌, 위속을 베고 서황을 패퇴시키면서 고민하게 된다. 이에 관우가 자청하여 나서길 원하자 안량을 이길 수 있을지 기대와 걱정을 하는데, 장료가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조조는 이를 수락한다.

장료가 안량에게 돌진해 들어오자 안량은 이를 가볍게 막아내는데, 장료가 덤빈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나타나 안량의 목을 벤다.

안량의 죽음으로 순우경의 지휘 아래 원소군은 백마에서 후퇴하지만, 유엽의 간언에 따라 조조는 백마의 백성을 이주시킨다. 안량의 죽음으로 분노한 원소에게 유비가 죽을 뻔하지만 일단 위기를 넘기고 문추와 함께 연진으로 진군한다. 허나 문추는 순유의 치중대를 선두에 놓는 계략에 걸리고 하후돈의 부대에게 큰 위기를 맞게 되고 서황에 의해 죽게 된다.

유비는 살아돌아온 뒤 관우가 조조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원소에게 관우를 데려오겠다고 제안한다.

본격적인 대전에서 원소가 70만 대군을 이끌고 첫 서전에 선두에 나서자 조조는 허저의 중장보병과 장료의 기병으로 원소의 목을 따올 것을 계획하고 허저와 장료를 출격시킨다. 허나 장료는 장합, 허저는 고람에게 저지된 뒤 포위되어 부대가 전멸할 위기에 처한다. 이 때, 하후돈이 청주병을 이끌고 장료와 허저를 구출한 뒤 그대로 원소를 향해 돌격. 견초와 한맹이 막아서지만 이를 돌파하고, 뒤 따라온 장합을 장료가 저지해주면서 하후돈은 원소 바로 앞에 접근하여 창을 던져 원소에게 부상을 입힌다. 하후돈은 간신히 살아돌아온다.

심배의 공성에 위기를 맞지만 유엽의 대책 덕분에 위기를 넘긴다. 우금 악진이 최전방에서 분투하고 서황과 사환이 한맹을 죽이고, 보급을 치지만 원소가 흔들리지 않자 조조는 허도로 후퇴를 고려하지만 순욱의 진언에 따라 항전을 결의한다. 그리고 허유가 투항한 뒤 오소의 위치를 가르쳐주자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출격. 장기로 변장한 뒤 오소의 경비병들의 의심을 풀고 들어가 오소의 군량을 모두 불태운다.[48] 거기다 오소가 불탄 책임을 곽도가 장합이 태업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탓에 장합과 고람은 조홍에게 투항한다. 이 여파로 원소는 조조에게 관도대전에서 대패한다.

정사를 많이 반영한 덕분에 굉장히 스펙타클한 진행을 보여준다. 역대 창작물 중에서 가장 화려한 관도대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삼국전투기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대목이다.[49]

8.9. 삼국지톡

시즌 6의 부제부터가 관도대전이나 정작 조조와 원소가 싸우는 내용은 92화부터고 관도대전은 119~127화까지 약 8화 분량에 불과하다. 연의에 나온 장료와 장합의 일기토 같은 것은 다 빼 버렸고 바로 조조가 관도에서 원소에게 포위당해 토성의 공세로 몰리고 결정적으로 식량이 없어서 조조가 순욱에게 퇴각 결심을 알리는 부분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순욱이 적도 식량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며 여기서 물러나면 뒤가 없다고 단호히 제지하여 조조도 결심을 굳히고 아들들을 장수에게 보내 항복을 받아내어 간신히 숨통을 돌린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적의 보급고 위치를 몰라 전전긍긍하던 와중에 허유의 접촉을 받게 되고, 허유가 친구를 넘어 따까리처럼 대하는 건방진 태도로 대하는 것도 참으며 살살 달랜 끝에 결국 오소에 보급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함정일 거라는 반대가 나왔으나 순유와 가후의 지지로 결국 오소 공격을 감행한다. 원소군으로 위장해 초기에 잠입에 성공했으나 순우경의 급보를 받은 원소가 대규모 구원군을 보내 궁지에 몰리지만, 퇴각하자는 하후돈과 하후연의 의견을 씹고 조조는 오소에 불 지르는 것에 집중하며 적이 바로 뒤에 오기 전까지는 말하지 마라고 윽박지른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결국 허저에게서 순우경을 붙잡았다는 연락이 오고, 그와 동시에 매복시켜둔 원군으로 원소의 추격대를 전멸시킨다.

조조는 원소에게 순우경과 부하들의 코를 잘라 보내고, 장합과 고람도 곽도에게 모함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이미 조조 군으로 투항한 상황이었다. 실질적으로 관도대전이 원소의 패배로 확정나자 순식간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들어오며 원소는 결국 후퇴하게 된다. 원소는 관도의 패배는 그저 실수일 뿐이라고 했으며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고 조조도 이것을 반격의 계기 정도로 생각했지 원소를 쓰러트리려면 멀었다고 생각했으나, 건강이 이미 악화되어 있던 원소가 관도대전의 패배로 충격을 받아 후계자도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며 원소 진영은 무너지기 시작하게 된다.

8.10. 토탈 워: 삼국

트레일러
'갈라진 운명' 챕터팩 DLC로 2021년 3월 11일 추가되었으며 주인공이 원소와 조조인 만큼 유니크 무장, 고유 병종, 신규 시스템이 추가되었고 이 두 팩션만 사용할 수 있는 북방군이 추가되었다.


[1] 중도 이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유벽, 공도 등과 함께 조조군의 후방을 괴롭혔으나 원소군이 패해 연결이 끊어지게 되면서 당시 원소와 동맹이었던 유표가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2] 다른 장수들이 조조의 정규 부하인 것과는 달리 관우만 객장 신분이며 그래서 중도 이탈했다. [3] 후방에서 식량을 조달했다. [4] 아직 후한을 신봉하는 유학자들이 많았고, 조조는 황제를 옆에 끼고 다님으로써 이런 유학자들 즉, 지방호족들을 상대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쳐나갈 수 있었다. [5] 원소군의 군량을 말아먹은 순우경 부대의 규모가 작고, 그 사건으로 원소가 몰린 걸 생각하면 그런 대로 일리가 있다. 조조 본인이 황제에게 올리는 공문서에 원소군을 죽인 게 7만이라고 언급하고 각종 사서에서도 원소군 손실을 일관되게 7, 8만 명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말이다. [6] 조조를 띄워주기 위해 병력차를 과장한 것과 같은 맥락 [7] 악진전에 조조를 수행해 유비를 정벌한 이후에 우금과 함께 획가와 급을 공격했다고 나온다. [8] 시간이 촉박하고 조조와 원소가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이라 가능성은 낮다. [9] 원소전 [10] 지금의 하남성 연진현 [11] 관도대전 이후에도 원소는 2년을 더 살았기 때문에 꼭 끼워맞출 수 있는 사항인지는 애매하다. 다만, 원소는 관도대전 때부터 이미 오랫동안 이어진 독재 체제의 1인자에게 집중되는 스트레스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보는 의견이 많은 편이다. [12] 조조 본인의 기록을 인용한 자치통감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7만이다. [13] 최소 수만 명 ~ 최대 8만 명 손실, 이릉대전은 관도 대전과 달리 확실한 피해 상황이 기록마다 달라서 아주 정확하진 않다. [14] 덕분에 제갈량은 수족으로 부릴 군의 간부들이 부족하여 마속을 지휘관으로 쓸 정도로 고생했다. 다만 이릉대전 당시 전방을 지휘할 자가 없어져 원래 후방 담당인 제갈량이 전방에서 뛰었다는 말은 반만 맞는데, 이릉과는 관계없이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이라는 군대를 이끌 기둥들이 통째로 사라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 중 하나라도 있었다면 이릉에서의 대패도 없었겠지만. 그나마 내세울 수 있었던 조운(이릉대전 반대로 후방 잔류), 마초(북방 방어, 이릉대전 도중 사망), 위연(한중 방어)도 전부 빠졌고. [15] 조조측이 패전의 기록을 고의로 누락시키면서 이런 인재들에 대한 기록도 누락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고의로 누락" 했음을 구체적으로 입증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는 소리다. 더군다나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조조가 승리하는 과정에서 포섭하거나 제거했다는 기록 정도는 있어야 한다. [16] 허도로 돌아가며 음안현을 점령했다는 점을 미루어보면 원상이 조조를 상대로 거둔 승전이야말로 조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17] 두 문단이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전형적으로 모순된 독재자 스타일 지도자의 성격을 보여준다. [18] 손권은 이궁의 변의 발단을 제공했고, 이 과정이 지나치게 과열되는 걸 방치하는 바람에 뒷수습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19] 이 관점은 일본 센고쿠 시대의 ' 다케다 신겐이 죽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과도 매우 비슷하다. 뭐 신겐은 막판에 거하게 말아먹은 원소와 달리 죽기 전까지 오다- 도쿠가와를 몰아붙였다는 차이점이 있고, 세력 면에선 원소가 압도적이었다는 차이점도 있으니 세세하게 살피면 다른 점도 많긴 한데 급격한 세력 확장과 개인의 카리스마로 움직이던 체제, 그리고 사후 붕괴 과정까지 유사점도 상당히 있다. [20] 다케다 신겐은 원래 온갖 세력과 동맹을 맺어 그 맹주로서 오다- 도쿠가와 연합을 공격한 거지 국력만 놓고 보면 다케다는 오다의 상대가 아니었다.(오다의 국력이 다케다의 약 2배 정도.) 다케다가 맞선 진영은 도쿠가와였는데 이는 오다를 아자이 아사쿠라 같은 동맹들이 맡아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반대로 도쿠가와는 전투력은 높았지만 오다의 지원을 받지 못해 다케다의 공격에 취약했다. [21] 만약 아자이 아사쿠라 등이 기습으로 이득을 봤고 이후로는 장기전으로 오다를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는데, 이 때 다케다 신겐이 도쿠가와를 쳐서 물리쳤다면 오다-도쿠가와 연합은 정말로 무너질 수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신겐이 사망함으로써 다케다는 물러갔고 아자이와 아사쿠라는 자신들보다 훨씬 덩치가 큰 오다의 맹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22] 원래 조조는 원소 계열 군벌이었으므로 조조의 세력이 커질수록 원소에게도 유리할 거라고 보았을 것이다. 오히려 원소 입장에서는 원술, 장수, 유표, 여포같은 귀찮은 군벌들을 알아서 정리해 준다고 아전인수격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고. [23] 후한 말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여겨지는 왕윤의 경우에도 만약 동탁 제거 이후 그의 복안이 성공했다면 어느정도까지는 조조와 비슷한 행적-황제와 조정의 권위를 등에 업고, 한나라 조정의 영향력에서 이탈하려는 지방세력(군웅)들을 군사력으로 복속시키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점을 생각해 보자. 또한, 그 왕윤과 같은 인물조차 한동안 동탁 정권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결국 당시 한나라 조정은 여전히 막대한 권위와 상징성을 가지고 있던 것과는 별개로 실질적인 권력(영향력)을 행사할 기반은 거의 상실한 상태였기에 강력한 군사력과 행정력을 가지고 이를 대행해 줄 협력자(권신)의 필요성이 제기될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는 것. 대략 십상시 성대한 자폭으로 하진을 함께 날려버린 사태 이후 후한의 조정은 자체적인 권력 행사 기반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후 등장한 동탁은 폭정과 전횡, 실정을 일삼고 자신의 배경으로 삼아야 할 조정과 황제의 권위를 스스로 파괴하는 장대한 삽질로 금방 "니가 제일 역적"이라 낙인찍혔고, 이 동탁을 날려버린 왕윤은 지나친 결벽성이 원인이 되어 정권 장악에 실패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원소가 간보는 사이 황제를 잽싸게 잡아챈) 조조인데, 물론 조조가 후한 황실 및 조정의 보호자이자 대행자로써 흠결이 없는 인물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꼬장꼬장한 왕윤조차 그 개차반인 동탁에게 한동안 협조적으로 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던 후한 조정의 입장에서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위기의식 역시 팽배했던 것. 따라서 본격적인 찬탈욕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당시까지의 조조가 '후한을 구해내고 지탱중인 충신' 행세를 하는 것이 통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최소한 '통탁에 비하면 조조정도면 양반이다' 라는 인식의 도움은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24] 여담으로 유표는 관도 이후에 하북에서 조조가 놀 때 반조조 세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비를 조조와 맞서기 위한 세력 결집용 카드+조조를 적대하는 입장상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대 조조용 결전병기(?)로 데리고 있어야 했는데 막상 유비를 데리고 있음에도 원소와 달리 유비가 세력을 키울까봐 유비를 이용해 조조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후계자 유종은 무기력하게 유표 사후 항복하고 남은 세력 일부는 조조에게, 다른 나머지는 유비에게 흡수된다. 이렇게 유표는 협천자에 대항할 명분을 쥐고서도 활용하지 못했다. [25] 물론 이런다고 바로 각지의 군벌들이 원소에게 우르르 호응하진 않았다. 다른 군벌 입장선 원소가 어차피 압도중이기에 지금 붙나 나중에 이긴 쪽에 붙나 큰 차이가 없다. 자기가 할 일이 별로 없고 굳이 위험 무릅쓰고 먼서 나서야 할 이유가 없다. 조조가 잘 싸우고 잔인한 놈이기도 하고, 어차피 나중에 황제 되찾으신 대장군 원소한테 숙여도 늦는 거 아니니까. [26] 다른 관점에서 보면 조조가 관도까지 후퇴하고 버팀으로서 전쟁이 장기화 되었고, 밀고 들어간 거리만큼 보급선이 길어졌으며, 이로 인해 원소군의 보급이 계속하여 조조군에게 타격받게 되었다. [27] 임준전에서는 임준이 담당한 보급로를 습격한 이들을 두고 '賊'이라고 쓰고 있는데 혹은 보급선을 끊기 위한 원소군을 뜻한다고도 보여진다. [28] 협천자를 방치한 것은 이후 조조가 중원에서 여포나 원술과의 대립에서 명확하게 우위를 잡았고 장수의 항복을 받는 동안, 원소는 조조 세력의 성장 및 내분에 적극적인 견제를 하지 못함으로써 조조가 원소와 맞설 수 있는 기반을 내준 실책이 되었기 때문. [29] 여양 전투의 승리 이후 업으로 진군하지만 원상에게 패배하여 결국 철군한다. 삼국지를 보면 조조가 업을 공격하다가 돌아가며 지금까지는 패배해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패전의 책임을 묻겠다고 한 기록이 남아 있다. 패배 없이 그냥 후퇴하는 거였다면 하필 그 시점에 그런 령을 내릴 이유가 없다. 그리고 당시 원담이 지금 퇴각하는 조조군을 치면 궤멸시킬수 있으니 내게 병력을 달라 제안했으나 원상이 원담의 진의를 걱정해 허가하지 않은 점, 제갈량의 후출사표에도 아들 조앙이 죽고 본인도 죽을 뻔한 남양, 조조 본인이 앞장서서 싸워야 했던 오소, 허저 덕에 구사일생한 동관 등과 나란히 나오는 것을 보면 조조 입장에서 나름 위험했던 상황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이 퇴각한 건 아닌게, 후한서 원문에서 奔, 退, 走 등이 아닌 還이란 한자를 썼다. 이 한자는 적벽이나 남양처럼 패하여 도망갈 때 쓰는 한자가 아니다. 또한 『삼국지』 「곽가전」도 조조가 본인의 선택으로 돌아갔다는 증거가 된다. 삼국지에서 패전을 생략하긴 했지만, 곽가의 조언이 패배 이전이든 이후이든 있었고, 조조가 그 조언을 듣고 물러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30] 다만 원담은 황하를 도하할 때 습격하면 궤멸시킬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도하의 위험성을 생각했을 때 당연한 얘기다. 즉, 이것으로는 조조가 큰 피해를 입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조조는 장료와 악진에게 음안(陰安)을 공격하게 하여 그곳의 백성을 황하 이남으로 옮기면서 후퇴했다. 큰 패배를 당해 도주하는 것이었다면 하기 힘든 일이다. 또한 조조가 패한 곳은 여양이 아니다. 조조가 여양성을 점령하고 업으로 추격하다가 도중에 패배했단 점에서 후출사표에 나오는 여양에서 핍박당했다가 원상에게 패배한 것을 말하는 것인지,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계속된 여양 전투를 말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한 것이다. [31] 실제로 조조는 이 두 명에다가 이후의 사마의까지 더해 망탁조의라 불리며 역적의 대명사로 통하게 된다. [32] 이것도 원소가 조조보다 세력이 크다는 사실은 지나가듯이 언급만 되는데다, 원래 원소의 부하 같은 위치나 다름없던 정사에서의 조조의 위치가 연의에서는 대등한 위치로 격상되었기 때문에 딱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연의에서 초반부의 활약상은 대부분 조조가 보여주는데다 천자까지 끼고 있고, 원소는 북방에서 공손찬과 투닥거린다는 언급 외에는 활약상이 전무하다보니 당연히 조조가 더 강하겠거니 했던 독자들은 원소가 70만이나 동원할 동안 조조는 왜 7만밖에 병력이 없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더구나 연의의 묘사 상 맹장이 전투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는데 안량과 문추가 관우에게 썰린 뒤로는 장합과 고람 외에는 이렇다 할 맹장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 조조 휘하에는 훨씬 많은 장수들이 있다 묘사되는 바, 병력이 적더라도 질 것이라는 긴장감이 전혀 들지 않는다. [33]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경우는 등장인물의 대사 정도는 해주었지만 이 경우는 그런거 없다. [34] 원소의 경우 이학인씨가 사망하자마자 황제병에 걸려 돼지 같은 체형이 되며, 서황이 도망치기 바쁠 정도로 강력했던 원소군의 묘사도 오합지졸로 묘사되는 등. [35] 안량과 문추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풍악과 노래를 부르며 전진하는 원소군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36]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 시키고, 장수들로 하여금 병졸들의 입장과 생존 의지를 느끼게 하기 위한 조치로 표현된다. 장수진들 중 불평불만에 가득 찼던 이들에 비해 하후돈은 병사들에 녹아들면서 일반병의 시점에서 본 전선의 공포를 체감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으로 기병 돌격을 맞은 병사들의 시점으로 본 적 기병이 저리도 컸었나 놀라는 모습이 있다. [37] 이때 조조가 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원소여! 난세에 핀 거대한 꽃이여! 단 한송이 꽃으로 하늘에 오르도록 하라. 지상에 있는 자는 그 꽃의 향기로움을 맡을 수도 그 화려함을 아낄 수도 없다. 잘가거라 원소." 원소가 절대적인 힘이 아닌 자신의 피로써 천자에 도달하려 한다는 것과 "위정자가 바뀌어도 천하는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로 비추어 볼 때 원소가 이룩한 천하에는 백성들을 포함한 지상에 사는 모든 자들은 그 천하의 향기로움을 맡을 수 없다 라는 뜻이다. [38] 이때 원소가 병사(病死)했다고 하는 걸 보면 관도대전 끝의 토굴에서 사망하는 게 아닌 듯하다. [39] 관도대전 중간에 이학인이 별세하여 이런 마무리는 어찌보면 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학인이 죽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생전에 남긴 이야기의 틀만 가지고 마무리를 지은 작가가 대단하다고도 볼 수 있다. 아니면 의외로 본래 구성도 별 차이가 없을 수 있는데, 창천항로가 조조 찬양 일대기 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작품 내 유비에 대한 비중도 조조 만큼이나 많기 때문이다. [40] 당시 관우는 조조의 밑에서 괴물탈을 쓰곤 안량을 참했는데, 장비는 바로 뒤에서 관우를 보고 그를 알아챘다. 이때는 달려들던 중 유비가 말려 싸우지 않았지만, 그가 배신했다 여겼다. [41] 출전 전에 정욱이 원소군에 조조와 동향인 허유라는 사람이 있는데 알고 있냐고 묻지만 조조는 그런 사람 모른다고 대답한다. 어릴적 친군데? 조조전이 조조가 주인공인 영웅담이 주제다 보니 조조가 허유의 배신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그리기 껄끄러웠던 모양. [42] 엄밀히는 조조전에서 기존의 영걸전과 비슷한 인재 수를 유지해야 하는데, 실제 역사상에서도 조조 휘하의 장수가 썩어넘치는 바람에 밸런스를 유지하기 힘들어서 실제로 조조에게 투항한 장수 몇몇까지 싸그리 사망처리 시켜버렸다. 장패가 하나의 예시이며, 고람도 그에 속한다. 다만 예외가 있는데 장수는 조조에게 항복했음에도 완성을 다스리는 일을 계속한다는 설정 때문인지 사망처리 되지 않았다. 물론 이 경우 장수를 사망처리 시키면 가후가 아군의 합류하는 스토리도 비틀어야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43] 사실 외교전을 한다고 해도 코에이 삼국지 특성 상 손책과 유표는 서로 투닥이느라 조조 견제가 거의 안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고, 마등은 시리즈에 따라 너무 변방세력이라 겨우 장안 정도에 영향력을 투사하는게 전부거나, 장안까지 기껏 점령해놓고 장로-유장이 있는 서촉을 정벌하는 경우가 많다. 즉, 장기전을 가면 조조의 초반 자원이 적은 반면 중원의 대도시들을 거의 다 끼고 있는 조조의 고점이 원소보다 높아서 1:1로는 도저히 감당히 안되는 사태까지 온다. [44] 플레이어가 원소일 시 본인이 할지, 안 할지 정할 수 있다. 그 외라면 당연히 역사대로 발동한다. 이때 웬만하면 여남의 유비는 원소의 편에 들어 조조를 적대한다. 인공지능끼리의 이벤트가 되면 매우 높은 확률로 조조가 이겼다는 전역 결과가 뜬다. [45] 원소는 7도시 총합 98, 조조는 5도시 총합 90 [46] 백마와 연진을 뺏기도록 내버려두는 쪽이 전개가 더 쉽지만 두 거점을 뺏기면 안된다는 전공목표가 있기에 전공목표 완수를 노린다면 특히 힘들게 된다. 이때는 일단 오른쪽의 백마로 가서 적을 성채 밖으로 끌어낸 후 원담까지 날리고 바로 왼쪽 연진으로 가서 다 죽이고 함락 직전의 위기에 있는 백마를 속전속결로 다시 구하러 와야 한다. 왼쪽의 연진부터 가도 되긴 하지만 백마 쪽에 무쌍게이지와 연무게이지를 풀로 채워주는 화타고가 있기때문에 흔히 백마로 먼저 간다. 안그래도 빨랑빨랑 적을 처리해야되니까 화타고는 꼭 먹고 시작하는게 좋다. [47] 꼭 뒷길이 아니라도 오소 본진 가까이에 가면 등장한다. [48] 이 과정에서 서황은 조예, 우금은 여위황, 장료는 한거자, 허저는 목원진, 악진이 순우경을 참하고, 뒤늦게 온 장기의 지원군을 하후돈이 청주병과 함게 전멸시킨다. [49] 단행본 관도대전편에 작가가 써둔 글을 보면 조조가 제대로 비상하게 된 계기가 관도대전인데 이걸 연의에서 '원소가 조조를 공격했는데 조조가 원소의 군량을 태워서 이겼다 끝!' 식으로 허무하리만큼 극한으로 압축한게 제일 맘에 안든다고 적어두었다.